[김중기의 필름통] 홍콩영화에 대한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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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망유희' 속 이소룡.
영화 '사망유희' 속 이소룡.

전설의 외팔이 검객 왕우가 지난 5일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아시아 최고의 스타배우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 소위 트로이카 배우가 인기를 끌던 시기. 홍콩 쇼브라더스사가 제작한 1967년 '독비도'(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서도 큰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외팔이 검객 시리즈는 왕우를 톱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옛 만경관에서 본 '독행도'(1971)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두 검객이 바닷가 갯벌에서 처절하게 싸우던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우의 죽음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홍콩영화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이번 주에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1994)까지 재개봉해 그 애련함을 더해주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아시아 최고의 스타배우였던 왕우.
1960년대 후반 아시아 최고의 스타배우였던 왕우.

홍콩영화는 1970년부터 약 30년 간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홍콩영화라는 장르도 소멸했다. 이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된 것이다. 옛 앨범을 넘기듯 홍콩영화에 대한 향수를 독자들과 나눠본다.

왕우가 대만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시절 작은 거인이 홍콩영화에 등장했으니 바로 이소룡(1940~1973)이다. 대신동 시민극장에서 본 '정무문'(1972)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일본의 총구 앞에 선 그가 마지막 발차기를 내지르면서 영화가 끝난다.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미가 이소룡이 내지르던 묘한 괴조음(이소룡 특유의 기합소리)과 함께 오랫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이소룡은 미국인이다. 경극배우인 아버지가 미국 공연 중 낳았다. 이후 홍콩으로 건너왔지만 어린 시절 골목에서 싸움꾼으로 컸다. 엽문의 제자로 들어간 것도 이때다. 그가 큰 꿈을 안고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TV와 영화계를 전전했지만 별 소득이 없어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찍은 첫 영화가 '당산대형'(1971)이었다. '정무문'보다 한 해 앞서 제작된 영화지만, 한국에서는 '정무문'의 성공에 힘입어 뒤늦게 개봉했다.

친구인 척 노리스와 '맹룡과강'(1972)을 찍은 후 드디어 이소룡의 상업성을 본 할리우드가 '용쟁호투'(1973)를 제작한다. 엄밀히 따지만 '용쟁호투'는 미국영화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공을 들인 이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했다. 개봉 6일전인 1973년 7월 20일 33살의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망에 대한 루머는 아직도 분분하지만, 아들 브랜든 리 마저 1993년 영화 촬영 중 총기사고로 사망하면서 2대에 걸친 비극은 세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978년에는 '사망유희'가 개봉했는데, 이 영화는 이소룡이 찍은 필름에 3명의 대역을 써서 짜깁기한 영화였다. 홍콩 골든하베스트사가 돈을 벌 요량으로 만든 영화라 완성도라 할 것도 없지만, 한국 법주사 팔상전에서 펼쳐지는 실제 이소룡의 결투는 가히 명장면이라 할 만 했다. 이소룡의 노랑 트레이닝복 이미지도 이때 생긴 것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 재연되기도 했다.

영화 '소권괴초' 속 성룡.
영화 '소권괴초' 속 성룡.

그의 뒤를 이은 것이 성룡이다. 1978년 제작된 '취권', '사형도수'는 무술의 비장함 대신 코믹한 설정으로 미친 흥행몰이를 했다. 저예산 B급 영화인 '취권'이 이소룡의 빈자리와 왕우의 검객 영화가 주는 식상함의 끝을 절묘하게 파고든 결과였다. 이후 성룡은 '오복성'(1983), '프로젝트A'(1984), '쾌찬차'(1985), '폴리스 스토리'(1988) 등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크로바틱 격투로 1980년대 한국의 극장가를 휘어잡았다.

이후 홍콩 누아르 붐이 일었는데 바로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1987)이 시작이었다. 전통적인 맨손 격투와 검술에서 벗어나 화려한 쌍권총의 시대가 온 것이다. 형제애와 우정 등 동양적 정서에 남자들의 비극미가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채색돼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웅본색2'(1988), '첩혈쌍웅'(1989) 등과 함께 아류작들도 쏟아졌다. 새롭게 등장한 스타들이 장국영, 주윤발, 양조위 등이었다. 또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1987)은 왕조현이라는 무협지 속 미녀를 건져 올려 많은 남성 관객들의 마음을 빼앗기도 했다. '첨밀밀'(1996)의 장만옥 또한 어떻고.

영화 '천녀유혼' 속 왕조현.
영화 '천녀유혼' 속 왕조현.

홍콩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정서를 왕가위 감독이 특유의 영상미로 그려내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번 주 개봉한 '중경삼림' 또한 1994년 홍콩에 살고 있는 외롭고 고독한 네 명의 인물을 잘 그려내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 속 마마스 앤 파파스의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그들이 꿈꾸고 싶은 미래의 홍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콩에 따스한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들지 못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인들은 뿔뿔이 흩여졌고, 홍콩영화라는 이름은 이제 우리 기억의 하드 디스크에 저장돼 있을 뿐이다. 더구나 지난 1일은 장국영의 기일이기도 해 이래저래 홍콩영화를 추억하게 되는 4월이다.

영화평론가

영화 '영웅본색' 속 장국영.
영화 '영웅본색' 속 장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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