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문학이 영상을 능가한 시간… '듣기 시간'

듣기 시간 / 김숨 지음 / 문학실험실 펴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세워져 있던,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 연합뉴스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세워져 있던,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 연합뉴스
듣기 시간 / 김숨 지음 / 문학실험실 펴냄
듣기 시간 / 김숨 지음 / 문학실험실 펴냄

인터뷰의 기본은 듣는 것이다. 인터뷰를 더러 하는 기자들은 늘상 들을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말할 것이 넘치는 이들을 상대하자면 인터뷰만큼 피곤한 작업도 없다. 그런데 인터뷰 대상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맹의 할머니라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발화되지 못한 침묵'을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 작가 김숨이 만들어낸 이야기, '듣기 시간'이다. 분명 픽션이다. 그러나 인간 심리의 기저까지 다녀온 핍진성에, 논픽션이라 해도 고개 끄덕일 작품이다.

본문만으로는 157쪽(책 전체는 173쪽) 분량의 중편소설이다. 단, 꼭꼭 씹어 읽어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증언을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피해자의 증언이 짧다. 피해자의 증언은 소설의 중심이 아니다. 증언 과정과 분위기가 압권이다. 중편소설임에도 읽는 데 장편소설 못지않은 시간이 걸린 까닭이다.

작가는 앞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써왔다. 'L의 운동화', '한 명', '흐르는 편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 '떠도는 땅' 등이 같은 소재의 전작들이다.

작가마다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규정이나 낙인이 돼선 곤란하겠지만 김숨 작가는 독자에게 긴 호흡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 '국수'를 예로 들자.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작중 인물의 심리 변화나 분위기 등을 충분한 장면 묘사로 구현해냈다. 그의 소설을 보고 레시피인양 그대로 끓여 먹으면 곤란한 이유다. 엄마와 딸의 힐링 레시피다. (작품과 맛있는 레시피가 일치하는 건 가수 윤종신의 '팥빙수'다.)

'듣기 시간'의 화자(話者)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 증언을 텍스트로 만들어 책으로 엮는 연구팀의 연구자다. 구술 증언을 하는 이는 '황수남'으로 추정되는 1924년생 여성. 본명을 밝히기 거부하는 건 물론 증언에도 소극적이다. 몇 단어로 조합된 단문만 녹음될 뿐이다. 그마저도 이해 불가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에서 '발화되지 못한 말'까지 문학의 영역으로 남긴다.

녹취록에 테이프가 돌아가는 '스윽스윽'이나 매미가 우는 '맴맴맴매' 쯤으로 기록된 침묵이다. 고통에 으스러지는 발악도 아니다. 입을 열 듯 열지 않는, 열더라도 의미를 조합하기 힘든 언어다. 피해자에게 증언을 요구하는 건 고문인지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는 게 살아남는 방법이었기에. 그 지난한 과정을 겨우 끝냈는데 다시 말하라 한다면.

대구 중구 경상감영길에 있는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매일신문 DB
대구 중구 경상감영길에 있는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매일신문 DB

아마도 이 작품의 화자와 인터뷰 당사자의 상황이 신문 보도용으로 게재됐다면 이런 수순이었을 것이다. 취재기자인 화자는 "할머니가 도통 말씀을 안 하세요. 하는 이야기도 고작 뜬구름같은 이야기고…"라고 데스크에 보고할 것이다. 그럼 데스크는 할머니의 주변 환경을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온 개별적 이야기와 위안부 피해자들의 보편적 이야기를 잘 버무려서 써보자고 제안할 것이다. 예상컨대 이런 기사가 나올 것이다.

'1997년 8월 9일 오후 경남 진주의 한 주택에서 만난 황수남(가명·73) 할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황 할머니는 5년 전이던 1992년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라고 우리 정부에 신고하면서 일본군의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낸 바 있었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은 17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피해자들의 증언을 끌어냈다… (중략) 인터뷰 시작 20분이 지나서야 할머니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몰려있네"라는 말이 그의 첫 마디였다. 할머니는 1982년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오랜 기간 억눌러온 기억을 다시 재생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할머니 같은 위안부 피해자의 OO%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김숨의 '듣기 시간'을 당연히도, 자신있게 '문학'이라, '소설'이라 말한다. 역사와 증언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한 작품이라는 문단의 의견에 이견을 달기 힘들다.

2000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평양 순안공항에서 만난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첫 대면이었다. 방송 카메라에 찍혀 전국으로 송출된 평양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의 진가를 보였다. '신문은 끝'이라 했다. 사진 몇 장과 글 몇 줄로 어떻게 저걸 능가해 표현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이튿날 평양 주변을 스토리로 엮어 써낸 언론은 있었다. '백견이 불여일필'인, 영상을 뛰어넘는 문학 작품이 지난달 26일부터 서점에 진열되기 시작했다. 173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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