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른 아침에] 대통령이 환생 정조?

정조, 문재인. 매일신문DB, 연합뉴스 정조, 문재인. 매일신문DB, 연합뉴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신 뒤로 김대중, 노무현을 빼면 수구 보수 세력이 210년을 집권했다. 그 결과로 우리 경제나 사회가 굉장히 불균형 성장을 했다. 분단 구조, 계층·지역 간 균형 발전 문제, 부동산 문제, 검찰 개혁 문제 등이 그렇다." 이해찬 전 대표가 어느 시사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이 기사를 읽고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현재의 정치 상황을 설명하려고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쾌한 스케일. 그 황당함에 비하면 차라리 "이게 다 친일 청산이 안 돼서 그렇다"는 헛소리가 외려 합리적으로 들릴 정도다. 이런 허황한 역사 판타지로 당을 움직여 왔으니, 민주당이 이상해진 것은 당연한 일.

문제의 인터뷰에서 이해찬 전 대표는 작년에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 후보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2, 3차례에 걸쳐 대통령과의 독대를 요청했다고 폭로(?)했다. 윤 총장이 사전에 조국 후보에게서 심각한 결격사유를 발견해 이를 대통령에게 직보하려 했으나 인의 장막에 가로막혀 하지 못했다는 풍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공직 후보자에게 심각한 결함이 발견됐다면 내가 검찰총장이라도 임명권자에게 알리려 했을 것이다. 공직자라면 마땅히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이 전 대표는 인식이 다른 모양이다. 그는 검찰총장의 직보 요청을 '검찰의 저항'으로, 조국의 지명을 '검찰 개혁 의지의 바로미터'로 파악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임명한 총장이고, 그는 내내 검찰 개혁에 협조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런 그에게 정조 대왕이 돌아가신 뒤로 210년을 집권해 온 '수구 보수 세력'의 낙인을 찍고는, 그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장관 후보자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선(先)판단을 내려놓고 총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길마저 차단해 버린 것이다.

이는 애초에 그들이 그 후보를 장관이라는 '임명직'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선출직' 후보로 여겼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일단 임명부터 해놓고 그에 따르는 문제는 정치적으로 돌파하려 했던 게다. 그래서 '사실'에 따라 공직자의 윤리적 자격을 판단하는 대신에 문제를 '판타지'와 '음모론'으로 처리했던 것이리라.

어느새 조롱의 밈(meme)으로 전락한 '검찰 개혁'만이 아니다. '계층·지역 간 균형 발전 문제, 부동산 문제'와 같은 정책 사안마저 이 전 대표는 철저히 이념의 틀로 해석한다. 한국 사회의 '불균형 성장'이 '수구 세력이 210년을 집권'한 결과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창작한 환상에 빠져 현실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한국 사회의 불균형 발전은 보수 정권하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다. 소득 격차·도농 격차·부동산 격차는 그가 예외로 제쳐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물론이고 현재의 문재인 정권하에서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여러 지표는 외려 노무현·문재인 정권하에서 불균형 성장이 그 어느 정권에서보다 더 심화됐다고 말해준다.

그런데도 그는 이 정책적 실패를 엉뚱하게 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일제·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의 탓으로 돌린다. 순결한 것은 오직 김대중·노무현·문재인뿐. 애초에 이런 황당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으니, 문제를 판타지로 진단하고 처방은 음모론으로 내리는 버릇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니 자기들이 하는 일은 모두 숭고한 개혁이요, 거기에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수구 세력의 저항으로 보일 수밖에.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은 전 정권의 적폐 탓이요, 야당의 비협조 탓이요, 언론의 가짜 뉴스 탓이요, 검찰의 무리한 수사 탓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해찬 전 대표의 맹랑한 환상 속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210년 만에 환생한 개혁 군주 정조 대왕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야무진 착각이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굳이 문 대통령에 가까운 인물을 찾자면, 정조가 아니라 차라리 선조일 게다. 이분이야말로 자신의 무능을 '남 탓'으로 돌리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시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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