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컬럼

 
가야명상연구원장·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전영평의 귀촌한담] 행복한 숭산보건 진료소

지독한 감기에 걸린 할머니가 어렵사리 부탁해서 들른 곳은 가야면 숭산보건진료소였다. 시골 오지에는 주민 편의를 위해 설치된 보건진료소라는 것이 있다. 면 단위에는 보건지소가 있지만 보건진료소는 그보다 더 열악한 이(里) 단위에 설치된 주민친화적 일차 건강진료소이다. 귀촌해서 살다 보니 보건진료소야말로 오지 주민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의료기관이라는 것을 실감케 되었다.공기 좋은 시골에는 아픈 사람들이 더 많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피할 수 없는 농사 노동과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이다. 아파도 병원에 가자고 자식에게 선뜻 연락할 용기도 없으니 그냥 참는다. 진료소는 그런 주민들이 손쉽게 찾게 만든 특별병원인 셈이다. 문제는 진료소의 문턱이 높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진료소장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지는 국면이다. 65세 이상은 자부담이 없고 그 이하는 900원만 부담하기 때문에 주민들로서는 자주 진찰을 받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진료소가 북적거리는 이유다. 소장 혼자서 많은 주민을 상대해야 하니 근무 강도가 강할 수밖에 없다. 주민들은 민감한 눈으로 진료소장의 눈치를 보고, 진료소장은 적당한 선에서 주민 접촉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봉사 정신과 나이팅게일 정신이 요청된다.한편으론 주민들의 의료 과소비가 지양돼야 할 국면이기도 하다. 친절한 진료소장 소문은 금세 동네에 자자해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숭산진료소에는 나이팅게일 정신이 넘치는 진료소장님 덕분에 환자가 넘쳐난다. 먼 이웃 마을에서 차량으로 소복하게 오는 경우도 있다. 문턱이 낮다 보니 나도 신세를 진다. 벌, 지네, 깔따구에 쏘이거나 몸이 불편하신 분과 같이 갈 때도 있다. 들른 김에 혈압, 당뇨 체크도 해본다. 진료 도중에 주민의 인정 가득한 봉지도 보게 되지만, 들어서자마자 주사 한 대부터 놔달라고 강짜부리는 사람도 여럿 봤다.시골에 살다 보니 농사는 각종 사고에 취약한 생계 활동임을 알게 되었다. 농민 중에서도 위험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할머니들이다. 오랜 밭농사로 인하여 손목, 허리, 무릎, 근육 등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이고 신경질환, 우울증, 소화 불량, 감기에 시달린다.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이유는 교통 불편 때문이다. 숭산진료소장님은 마을 방문 출장 진료도 해주신다. 그 마음이 진정 행복해 보이기에 주민들마저 행복해진다.

2019-11-27 18:00:00

권미강 작가

[권미강의 생각의 숲] 어미는 몸으로 자식을 기억한다

'부혜생아 모혜국아'(父兮生我 母兮鞠我·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명심보감 효행 편에 나온다. "어떻게 남자가 아이를 낳나요?" 이런 질문을 자주 불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기 씨를 준 근원(根源)이라는 걸 알고서야 무릎을 쳤던 대목. 아버지건 어머니건 부모가 핏줄인 자식을 제 몸처럼 살피고 아끼는 건 당연하다고 이해했던 구절이다.어미는 몸 속에서 열 달 동안 자식을 키워낸다. 아비가 준 작은 씨앗을 자신의 몸 안에 들여 뼈를 만들고 핏줄을 이어가고 살집을 키워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리와 손으로 자식은 어미의 배를 차고 만지고 간질이기도 한다. 눈을 말똥거리고 냄새도 맡고 입술을 오물거린다. 자식은 어미의 생각도 새겨 넣는다. 어미가 울면 몸을 움츠리고 웃으면 따라 웃는다. 열 달 동안 제 몸 속에 어미를 새겨 넣는 존재가 자식이다. 그렇게 한 몸이었던 어미와 자식은 탯줄을 끊고 나서야 둘이 된다.태어나면 부모가 함께 자식을 보살피지만 태어나기 전 열 달은 온전히 어미와 자식 둘만의 시간이다. 세상에 나와 배우는 첫 말도 '엄마'이니 그 끈끈한 관계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어미는 몸으로 자식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식을 잃었을 때, 어미들은 자신의 몸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 고통에 대해 크다 작다 할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이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면 말이다. '해인이법' '하준이법' '민식이법' '태호-유찬이법' 등 어린이 생명안전법 뒤에는 한 몸이었던 자식을 잃은 어미들이 있다. 자신들과 같은 슬픔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다른 아이들이 똑같은 사고에 노출되지 않게 해달라며 어미들이 국회의원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발 법안을 처리해 달라고. 자식을 기억하는 몸들이 읍소하는 모습을 보며 순간 몸의 기억들이 울컥 몸 밖으로 품어져 나왔다. 국민을 대변한다는 그들에게는 그 기억이 없는 것일까? 분노와 궁금증도 함께 품어져 나왔다.

2019-11-27 18:00:00

[기고] 대구시 겨울스포츠 진흥대책은?

2011년 야반도주하다시피 대구를 떠난 프로농구 오리온스가 한때 야속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즈니스가 목적인 프로스포츠를 향해 스포츠 정신을 논하고 의리를 요구하는 건 그들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이다.시(市) 차원의 지원이 미미하고, 연습 상대도 없으며, 관중 동원 또한 중앙에 비해 쉽지 않으니 좋은 조건을 내건 스카우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한 결과 대구시는 광역시라는 자존감에 앞서 야구와 축구 시즌이 마무리된 겨울철만 되면 스포츠 볼거리가 전무한 상태가 되고 만다. 실내에서 농구로 체력을 다지고 이를 관람하면서 여가를 즐기던 청소년들도 스마트폰과 컴퓨터 게임으로 기나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실정이다.흔히 스포츠가 성립되는 조건으로 선수, 관중, 그리고 시설을 꼽곤 한다. 프로스포츠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최근 프로농구단을 다시 유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수놓아 보았다. 우선 선수는 팀에 소속되어 있으니 팀 스카우트만 성사되면 별문제가 없을 것 같고, 관중도 과거의 예를 보아 타 시도에 비해 충성도가 뒤지지 않으니, 문제는 시설, 즉 체육관이었다.대구시는 현재 대규모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이 둘밖에 없다. 하나는 여태껏 사용해 오던 좌석이 3천867석(수용인원 5천 명)인 대구체육관이 있다. 시대적 추세로 보아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그나마 그것도 노후로 인해 곧 철거 예정인 시설이다.서부지역에 새로운 체육관의 건립이 예정되어 있다고는 하나 2025년쯤에나 완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 한 체육관으로 884석(2천 명) 규모의 소규모 대구시민체육관이 있다. 거대 광역시의 체육관 시설 규모가 기껏 4천751석(7천 명)이라니 부끄럽기 그지없는 수준이다.반면에 타 대도시의 경우(2017년 기준)를 보면, 34개 체육관이 있는 서울특별시는 차치하고라도, 부산시만 해도 4개 체육관에 좌석수 2만7천483석(3만1천500명)이며, 인천시는 4개 체육관에 1만4천986석(1만4천986명), 광주시는 3개 체육관에 1만8천297석(2만1천797명), 울산시는 6개 체육관에 1만1천6석(1만1천435명)을 보유하고 있다. 경상북도는 각 시군 소속의 대규모 체육관을 26개나 소유하고 있으며, 인근의 경산체육관도 규모가 5천36석(5천36명)이다.대구시는 내년 완공 예정으로 현재 건설 중인 다목적 체육센터가 건립되더라도 광역시 규모로는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다. 대규모 체육관이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농구팀을 다시 유치하겠다는 의욕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대구시는 재차 이와 관련하여 다각도의 중지를 모아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를 체육인들만의 소망으로 보는 편협성은 문제 해결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250만 명 규모의 대도시가 이러한 수준의 체육관을 소지하고 있는 곳은 없지 않은가? 대구시민의 복지를 생각한다면 서서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2019-11-27 11:12:50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매일춘추] 영화 '쇼생크의 탈출'과 희망

'쇼생크의 탈출'은 1994년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을 기반으로 프랭크 다라본트가 각본을 쓰고 감독한 영화로 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이 주연을 맡았다. 영화를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복역 중이던 주인공이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20년간 조금씩 땅굴을 파 들어가 마침내 탈옥에 성공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두려움은 너를 죄수로 가두고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영화 포스터에 적혀있는 카피라이터만 봐도 희망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주인공이 탈옥을 꿈꾸는데 비해 다른 장기수들은 오랜 감방생활에 적응을 하고 길들여져서 오히려 바깥세상이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가석방 심사 때도 부적격 판정이 나도록 일부러 거짓 연기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가석방 되었던 늙은 장기수는 바깥 사회에 적응을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교도소 담장이 바깥세상을 동경하는 사람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지만, 순치된 장기수들에겐 오히려 보호벽 역할을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 만큼 무서운 일이다.영화에는 교도소에서의 첫날밤을 견디지 못해 울고불고 난리치다가 맞아죽는 죄수도 나온다. 사방이 절망의 벽으로 쌓인 감옥, 폐쇄의 공포가 엄습하는 첫날은 특히나 두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생활이 있는 곳이니 차츰차츰 순응해 가면서 체념도 배워 가야만 한다. 이미 닥친 일이라면 슬기롭게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치고 말 것이다. 적자생존이란 말도 적응하는 자만 살아남는다는 뜻 아니던가.불편하고 지긋지긋한 가난을 습관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그렇게 살고 싶어 사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만, 질병 등의 이유로 그럴 수밖에 없는 분들은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벗어날 수도 있는 이들이 빈곤층이 되어 우리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것은 문제이다. 아무리 익숙하고 길들여졌다고 해도 가난은 가까이 할게 못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벗어나야만 한다. 푸시킨의 시 중에 '마음은 미래에 살고...'라는 구절이 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마저 가난해 지면 안 된다. 그건 희망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쇼생크의 탈출의 주인공처럼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다.영화는 반전의 묘미 아니겠는가. 후반부에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감정을 이입시킨다.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희망의 끈만 놓지 않으면 우리네 삶도 얼마든지 영화의 주인공처럼 반전을 이룰 수가 있다. 마음이 가면 몸은 따라온다고 했다. 계획을 세우고 줄기차게, 끈질기게 밀어붙이면 희망의 빛은 보이게 되어 있다. 물론 고비는 있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8부 능선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거기만 넘으면 희열의 세계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탈옥 후 환희의 빛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장면은 얼마나 멋지던가.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수필가

2019-11-27 11:00:52

전헌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종교칼럼]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오늘날 우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과학문명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 땅에서 약 800만 년 전에 시작된 인간의 생존 이래로 이런 일은 처음이다. 불과 10년 후 과학문명이 어떻게 발전해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이전에는 과학문명의 발전을 기대하고 기뻐하기만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우려도 함께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우려의 강도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이러한 것은 자연과학과 응용과학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도 해당되는 것으로서 인류가 그동안 축적해온 지식의 양은 대단히 많다. 필자가 속한 대학교는 도서관에 약 100만 권 정도의 각종 책들과 다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 도서관은 약 1천만 권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지구촌에서 출판되는 책의 양은 대단하여 우리나라에서만 해마다 약 5만∼6만 권의 신간 서적들이 출판되고 있다. 각종 신문, 잡지, 논문, 수필 등으로 기록되는 지식들도 대단히 많다.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되어 인류가 쌓아 올릴 지식의 양이 얼마나 될지 짐작하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이러한 일들은 인류가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알 수 없는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넓다.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공간, 시간, 인과율이라는 틀 안에 들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인식의 틀 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인식하는 데에는 제약들이 많다. 대표적 예로 인류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가시광선으로 탐구할 수 있는 물질은 존재 세계의 4∼5%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역의 물질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아서 호기심 많은 인류가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알아내는 기쁨을 누릴 것이고 그것을 응용한 과학기술의 편리함도 누릴 것이다.알 수 없는 영역은 알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어서 대단할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무엇을 알아낼 때 사용하는 감각, 감성, 이성을 초월한 영역이기에 지금까지 무엇을 알기 위해 동원했던 것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없다. 그래서 이 영역에 대해서는 차라리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고 쉬울 것이다.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조차 궁금하기 그지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호기심이 강해서 그럴까. 에너지 절약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참으로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이 영역에 대해 이렇게도 지속적인 관심이 가는 것은 내가 알려고 해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이러한 현상은 인간 인식의 틀을 넘어선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영성의 틀로 가야 하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꾸만 관심을 보이고 당신에 대해 알아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토록 이 영역에 대한 강한 관심을 지니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히 없는 영역에 대한 헛된 관심만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또한 나의 호기심이나 힘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닌 것도 분명한 것 같다.이 영역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면 보이는 세계의 적지 않은 것들을 희생하거나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관심과 열망으로 이 세계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보이는 현상세계와 죽음을 넘어선 어떤 것을 열어주는 구원의 세계이기에 이러는 것 같다.

2019-11-27 10:24:00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매일춘추] 11월의 書

주차된 루프에 낙엽들이 소복합니다. 11월의 고백 같고 표정 같기도 합니다. 매년 보내도 처음 보내는 가을처럼, 모든 사랑이 첫사랑인 것처럼, 낙엽은 가을이고 추억이고 그리움입니다. 뒤척이고 뒤척이는 모습은 당신에게서 시작되어 당신에게로 돌아가려는 몸짓일까요? 아무 말 걸지 않으며 슬쩍슬쩍 지나는 행인들 이내 시선을 돌립니다. '이별'의 아름다움은 이 '별'에서 원래의 '별'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해 둘게요.떠나가는 11월은 이상한 솔직함에서 나오는 전염병 같고, 우수수 내 몰린 상처를 펴서 말리는 것도 같습니다. 혈압이 올라 퓨즈가 나간 것 같고, 미친 척하고 한번 웃어보는 것도 같습니다.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며 프로판가스가 자꾸 새어나고. 우리 몸의 잎과 귀가 얇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고 서정춘 시인은 말합니다. 당신에게서 와 아직 당신에게로 돌아가지 못한 말씀들이 11월의 끝을 붙잡고 있습니다.10월은 열매가 무르익고 5월은 꽃이 만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10월과 5월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두 달에 대한 시나 노래도 많지만, 이 두 달에는 결혼식도 많습니다. 또한 12월은 연말의 정취나 송년회 스케줄로 바쁩니다. 그러나 10월과 12월 사이에 낀 11월은 별로 조명 받지 못하며 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첫딸과 막내딸 사인 태어난 것처럼, 특별하게 기억되는 날이나 노래도 없습니다.기온이 뚝 떨어져 건조한 몸이 가렵습니다. 속수무책 떨어지는 잎들로 생이 가려운 11월, 가려운 생을 털어내느라 나무들도 괴롭습니다. 당신에게 가 닿으려고 몸에서 무게를 덜어내는 11월, 당신에게 주려고 뭔가를 뒤적뒤적 자꾸만 주억거리는 11월, 어쩔 줄 몰라 감정의 문을 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색의 단풍도 좋지만 마지막 잎만 남은 앙상한 가지도 좋습니다. 황금물결 넘실대는 들판도 좋지만 가을걷이 끝난 휑한 빈들도 좋습니다.길 가다가 소복한 낙엽이 발에 걸리면 아무생각 없이 걷어차게 됩니다. 지나는 강아지 꽁무니에 시선이 따라가기도 합니다. 낙엽이 머문 자리에서 또 걷어차고, 멀뚱멀뚱한 강아지에게 왈왈, 추파를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또 차 달라고 떼를 쓰며 달라붙는 낙엽들을 봅니다. 맞고도 랄랄랄 춤을 춥니다. 이처럼 11월은 아무 생각 없이 시작되고 아무 생각 없이 끝납니다. 생각 없는 치다꺼리들이 어이없이 기쁘게 느껴집니다.그러므로 11월은 일종의 사계절적 푸가(fuga)인 셈입니다. 詩詩(시시)콜콜한 시름이나 부름이 우리가 잘 모르는 기교로 교차하고 있습니다. 타국에서 느끼는 근본적인 쓸쓸함이나 시름 같은, 11월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10월과 12월을 벌려 주기 위해 11월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욱 의미 있어 보입니다.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2019-11-26 11:19:03

개짖음으로 인한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는 개가 짖는 원인을 이해하여야 한다. (사진이미지:Sutterstock)

[박순석의 동물병원 24시] 아파트 개 짖음 문제, 해결책은?

아파트를 비롯해 공공주택에서 개 짖음으로 인한 소음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메리(3·치와와)가 병원을 찾았다. 낯선 병원에서도 금새 친화력을 보이던 메리의 보호자는 성대 수술을 상담하러 왔다고 했다. 늘상 함께였던 언니가 유학가는 바람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메리가 최근 들어 아이들 소리, 오토바이 소리에 지나치게 짖어 이웃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심지어 야간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데 창밖을 보며 하울링한다며 보호자는 개가 귀신을 보냐고 묻기도 했다.개가 짖는 것은 당연하다. 주변의 상황들을 보고, 듣고, 냄새로 인지하며 소리로 반응한다. 특히 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청 영역이 사람보다 훨씬 넓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초음파 영역도 개는 들을 수 있다.개가 실내에서 외부를 향해 짖는 것은 주변의 개들과 소통하거나, 자기 영역을 표현하고, 때로는 두려움과 불쾌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짖음이 너무 심해 이웃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다.비글, 슈나우저, 요크셔테리어, 치와와, 발발이가 짖는 경향이 강하며 톤이 높다. 건강하고 호기심 많으며 활동적인 개체들이 잘 짖고, 암컷보다는 수컷이 짖는 경향이 강하다.개가 짖는 것을 자제시키려면 짖는 원인을 알고 그에 합당한 교정법을 적용하여야 한다.개가 짖을 때 가족들 중 일부라도 대응하게 되면 개는 주인이 자기의 짖음 때문에 반응하였다고 판단하여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더 집요하게 짖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개가 관심을 끌려거나 간식을 요구하려고 집요하게 짖는다면 가족들은 짖지 말라고 소리치거나 달래지 말고 오히려 돌아서서 짖지 않을 때 까지 무시할 필요가 있다. 개가 짖음을 멈추었을 때 칭찬해주고 반드시 개가 멈추었거나 앉아있는 상태에서 간식을 보상한다.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짖음을 멈추고 기다리는 시간을 늘려나간다. 5초, 7초, 10초 기다림을 지켜본 후 간식을 보상한다. 개가 짖을 필요없이 주인 곁에서 조용히 기다리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약속을 이해시키도록 한다. 가족 모두가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여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개가 분리 불안이나 두려움 때문에 짖는 경우가 있다. "오지마" "저리가" "싫어" 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혼자 남겨진 개가 심리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소리나 냄새로 외부의 낯선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 침범받을까 두려워 짖기도 한다.이렇듯 불안감 때문에 짖는 개는 오랜 시간 혼자 지내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가족들이 교대로 귀가하여 산책이나 기분좋은 놀이를 통해 불안감을 덜어주어야 한다. 산책이나 놀이운동을 통해 활동량을 늘리면 혼자 지내는 시간 동안 안정적인 수면을 취할 수 있다. 개가 주변의 소리에 덜 민감해지도록 평상시 개와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영상을 켜두거나 오디오를 베란다 쪽에 설치하여 음악을 틀어주면 외부의 불안한 소리를 상쇄시키는 효과가 있다.개가 차량이나 오토바이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며 짖기도 한다. 생명이 아닌 사물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전적인 위협 대상으로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다. 엔진의 낮은 주파수의 음역대가 불쾌감과 적대감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가족들은 이러한 경향이 굳어지기 전에 원인을 인지하고 대처하여야 한다. 개가 외부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베란다로 향한다면 커튼으로 가려 시각적인 흥분 요소를 줄이고, 개를 다른 방으로 이동시켜 즐거운 놀이 과정을 함께하며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도록 유도한다. 진공청소기의 백색소음을 이용하거나 비트가 강하게 울리는 음악을 이용하여 외부의 소리를 상쇄시키며 개의 관심을 변화시켜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개가 늑대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낸다면 하울링이라 볼 수 있다. 멀리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원거리 소통 방법이다. 야생의 습성에서 비롯되지만 습관화되면 야간에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 첼로 음악, 애견전용 음악치료 오디오를 틀어주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마당에 묶여있는 개는 낯선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 심하게 짖을 수 밖에 없다. 외부인의 무단 출입을 차단시키는 효과는 있겠지만 개가 항상 경계심이 고조되어 있기 때문에 물림안전사고가 다발하기도 한다. 실외에서 기르는 개에게는 야생동물이나 외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내실이 마련된 울타리를 마련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보호자가 개 짖음 자체를 통제하려다 보면 개는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오히려 주인이 없을 때 짖는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짖기를 멈추게 하는 "조용해"라는 명령어는 부드럽게 말해야 한다. 감정이 실려 강하게 내뱉다보면 개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짖는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명령어의 강도보다는 일관성이 중요하다. 가족 전체가 일관성 있게 대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어릴 때 짖기 훈련을 통해 과도하게 짖는 행동을 예방할 수도 있다. 부드럽게 "짖어" 하고 2, 3번 짖고 멈추면 간식 보상을 한다. 이러한 훈련이 익숙해지면 개가 짖고 있을 때 부드럽게 "조용해"란 명령어를 이해하도록 칭찬과 보상을 반복한다. 아이들에게 언어표현을 가르치듯이 개가 자연스럽게 주인과 소통하는 요령을 익혀주는 것이다.최근에는 개의 불안감이나 경계심을 감소시켜 짖는 행동 문제를 교정하는 음악치료 오디오가 보급되고 있다. 다양한 반려동물 IT상품들이 반려동물 문화와 어울려 개발되고 있다. 반려동물에게 도움되는 제품은 반려인에게는 행복이기 때문이다.박순석 탑스동물메디컬센터 진료원장SBS TV동물농장 수의사로 잘 알려진 박순석 원장은 개와 고양이, 야생동물을 구조하고 치료한 30년간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올바른 동물 의학 정보를 제공하고 바람직한 반려동물 문화를 제시하고자 '동물병원 24시'를 연재한다.

2019-11-26 10:06:18

송필용 작 무제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본 것과 믿는 것 사이에서

1990년 8월 23일 어느 시간, 만 31살이 조금 넘은 나는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국제선이어서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국제선은 국내선을 충분히 타 본 후에 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내게 홍콩행 비행기는 홍콩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위도 상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얼빈이었다. 하얼빈에서도 흑룡강 대학이 최종 목적지였다. 당시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교류가 되지 않을 때라 비행기도 바로 가는 것이 없었다.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하얼빈 공항에 내리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었었다. 어둠이 많이 내려앉았고, 대륙 북방의 서늘한 기운이 벌써 깊은 가을처럼 느껴졌다. 공항은 한국의 지방 소도시 버스 터미널 같았다. 지방 소도시 버스터미널처럼 보이는 공항을 보고 중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나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공항을 떠나 흑룡강 대학까지 오는 풍경은 아직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이것이 중국의 첫 인상이다. 사람들은 어깨에 별 이득도 없는 무거운 짐 하나를 진 채 그저 걷기만 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처럼 맥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공항이 남루한 것은 공항 자체의 탓도 있지만, 공항을 채운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가 그렇게 보이도록 한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삶의 생기가 돋아나지 못할 어떤 덫에 갇힌 것 같았다.정비되지 않은 길 양 옆으로는 군인인지 민간 경비원인지가 애매한 사람들이 긴 총을 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성거렸다. 감시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자세다. 공항을 훨씬 떠나 시내에 가까워 오면서도 공항에서 발견했던 무기력과 가난과 감시와 통제라는 음산한 기운은 내 인식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첫인상은 상당히 오래갔다. 강렬해서 오래 가기도 했지만, 하얼빈에서 사는 내내 그런 것들이 매일매일 경험되었기 때문이다.하얼빈이라는 낯선 곳으로 오기 전에 학교생활만 줄곧 했던 나는 '비판적인 지식인'의 형상으로 채워진 분위기 안에 잠겨 있었다. 그 분위기는 내가 거기에 얼마나 친화적이었었는지 상관없이 마치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보편적이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에게 피격되어 사망했다. 군대 가기 전 2년간의 대학 생활동안 기말고사를 봐 본 적이 없다.기말고사 기간까지 수업이 진행되기 어려울 정도로 학생들은 반독재 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경찰들이 교정에까지 들어와 머물렀다. 매 학기 중간도 못 가 휴교를 반복했다. 박정희를 거칠게 욕하는 일이 지식인에게는 매우 당연시 되었다. 대부분의 젊은 학생들은 학습이 깊어지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운동권'도 아닌데다가, 경찰에게 잡히거나 경찰서에 불려가 본 적도 없이 그저 데모 행렬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당시 풍조에서 볼 때는 외양만 겨우 지식인 꼴을 한 나 같은 사람도 박정희 비난과 자본주의 비판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정도로 발을 담근 운동권이냐는 상관없이 대학생이라면 반정부와 반자본주의 구호는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지 않았다.오히려 그것이 주류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일성과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거기서 무슨 탈출구를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시도가 강하게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도 사회주의나 김일성은 우리의 모순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창이거나 대안으로 보이곤 했다.하얼빈에는 북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북한 유학생들과 면식을 트고 지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가능해지니, 호기심이 더 생겼다. 괜히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동포애를 어떻게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이기도 했던 것 같다.중국은 나에게 한국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제시되곤 했던 사회주의를 직접 보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세력들이 대학가를 지배하던 때라 김일성의 후예들을 직접 상대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어느 날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북한 학생 한 명이 어떤 낯선 사람과 함께 얘기하면서 다가왔다.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하는데, 그 북한 학생은 나를 애써 외면하였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모른 체 해야만 하는 어떤 곤혹스러움을 읽었다.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하자, 나보다 먼저 북한 학생들을 만나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북한 학생들은 아무리 친해도 제3자인 다른 낯선 북한 사람과 동행할 때에는 남한 사람들을 모른 체 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취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라면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지상낙원일 수 없다.나는 하얼빈에 온지 약 100일 만에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이유도 없이 아팠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혹시 사회주의와 북한을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비판적인 대안으로 간주하던 인식을 부정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자기 인식의 틀이나 믿음을 자각하여 부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이 불가능한 일을 하느라 심하게 앓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사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이었다. 등소평도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과 사회주의는 이미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북한 학생들의 생활 모습이나 외모나 태도 등을 통해서 북한은 또 얼마나 가난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하얼빈에 체류할 때는 등소평이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개혁개방을 천명한지 벌써 12년이나 흐른 뒤이다.개혁이란 대내적으로 적용되는 관념으로서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개방이란 대외적 관념으로서 중국이 국제 시장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뜻인데,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 들인지 12년이나 흐른 후인데도 가난은 너무 분명했다. 내가 사회주의와 북한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얻은 결론은 다음의 몇 가지 단어들로 남았다. '가난', '감시', '통제', '불안', '공포', '독재', '억압'. '타율'. 막연한 상상이나 이론으로만 접할 때하고, 직접 눈으로 보며 경험하며 접할 때가 너무 많이 달랐다.여기서 나는 엄청난 당황스러움에 빠져 괴로워했다. 앓고 나서는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수정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사회주의보다는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심하게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의 독재보다는 낫다.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가 아무리 비판을 받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나는 지성을 성장 시키는 분위기가 아니라 지성을 마비시키는 분위기에 압도되었었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지성이었다면, 자본주의 비판하다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비판하다가 중국이나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얼빈에서 크게 앓으면서 현실 속에서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가지고 나를 교정할 수 있었다.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하고,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을 보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보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큼 성큼 발전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집하다가 몰락한 베네수엘라를 보고도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로 채워진 믿음을 계속 믿으려 고집을 피우다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외면하는 우를 범했을 것이다.한동안 북한에 대한 인식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론이 상당한 환영을 받으며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을 그들이 설명하는 가치와 이념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론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은 객관성과 보편성이다.주관적인 감각을 벗어나야 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매우 넓은 범위 어디에나 치우침이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을 대할 때만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우리 자신, 즉 대한민국을 대할 때는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인류 보편의 가치 기준을 적용하였다. 북한을 이해할 때는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하고, 우리를 이해하려 할 때에는 '인권', '민주' 등의 보편적인 잣대를 가지고 했던 것이다.편파적이나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이론이 아닌 것을 이론처럼 사용하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고, 그것을 변경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간들도 있다. 이론을 이론으로 다루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는 지식인들도 이 '내재적 접근법'을 편파적으로 사용하고, 정작 자신의 '내재적 상황'에는 한없이 자학적이었으면서도 매우 냉철한 지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으로 포장하던 시절이었다.내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나오는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우리가 진리라고 하면, 구체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어떤 무엇인가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진리는 어쩐지 변화무쌍한 구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형상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조작된 것입니다. 가공물이고 인공물이지요.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구체적인 실재의 세계뿐이지요. " 진리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에 있다." 그래서 등소평도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진리는 실재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실재의 세계에서 구현될 뿐이다. 남이 정해준 어떤 '주의'(主義)에 대한 믿음 대신에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더 신뢰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정도의 용기와 지적 계몽이 필요하기도 하다.뮤지컬 '시카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키티가 자신의 남편이 다른 두 여자를 끼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총을 겨누자, 남편이 말한다. "당신이 본 것을 믿을래? 아니면 내 말을 믿을래?" 말이 끝나자 키티는 자신이 본 것을 믿고 남편에게 총을 발사한다. 남편이 설득하려고 하는 말은 결국 남이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거의 모든 '주의'(主義)는 남들이 정한 것들이다. '남의 말'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믿고 파고드는 자는 총을 발사하는 위치에 서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자고 하는 자는 총을 맞는 위치에 선다.

2019-11-25 18:00:00

경기대 미디어학부 특임교수

[김구철의 부의 비밀수학] 수학 방정식과 한국 정치

수학을 배우면 초기 단계에서 방정식이란 것을 배우게 된다. 미지수에 특정한 값을 주어야 성립하는 등식인데, 이 미지수를 찾는 과정이 방정식의 풀이다. 방정식 풀이는 동서고금의 재사들이 재능을 겨루는 좋은 게임이었다. 2차 방정식 즉 χ²이 포함된 방정식을 푸는 공식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꽤 일찍 알려졌다.9세기 사라센 제국의 수학자 알-콰리즈미의 「복원과 대비의 계산」에 나온다. 당시 사라센 수도 바그다드에는 '지혜의집'(Bayt-al-Hikma)이라는, 통치자 칼리프가 후원하는 왕립연구소 겸 도서관이 있었다. '지혜의집'에서는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힌두, 시리아, 중국, 동로마 등 동서고금의 지혜를 집대성했는데, 알-콰리즈미는 그리스 수학과 과학책 번역 담당이었다.3차, 4차 방정식 즉 χ³, χ⁴이 포함된 방정식의 해법은 훨씬 난해해서, 알-콰리즈미 이후 700년 동안 해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르네상스 후기의 천재들은 상대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3차, 4차 방정식을 자주 들이댔다. 마침내 르네상스도 저물어가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카르다노가 「아르스 마그나」(위대한 기술)를 펴냄으로써 3차, 4차 방정식도 정복됐다. 다음 과제는 당연히 5차 방정식, 300년 동안 여러 천재들이 5차 방정식 근의 공식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마침내 1820년, 노르웨이의 천재 아벨이 6쪽짜리 간결하고 명쾌한 논문을 썼다. '5차 이상 방정식은 근의 공식이 없다.'대한민국이 무척 어렵다. 북한 핵 문제는 답보 상태인데, 한미, 한일, 한중 관계 모두 불편하다. 경제성장률은 하향 수정을 반복하고, 일자리, 교육, 미세먼지 모두 쉽지 않다. 이럴 때 뭔가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오히려 스스로가 또 하나의 미지수로 등장한다. 정당도 정치인도 모두. 따져보면 한국 정치는 단순한 1차 방정식, 미지수는 단 하나 '당리당략'뿐인데 왜 해법이 없을까? 한국 정치에도 아벨 같은 천재가 탄생해야만 하는가?

2019-11-25 18:00:00

고려대 사학과 초빙교수

[김준의 시사로 읽는 한자] 習俗移性(습속이성)-귤이 탱자가 된 이유

안자(晏子)는 중국 춘추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환경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중시했는데, 풍토나 습속(習俗)이 인간의 습성도 바꾼다(移性)는 습속이성(習俗移性)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잡(內篇雜) 상편(上篇)에서 유래했다.안자가 초(楚)나라에 출사했을 때의 일이다. 초나라 왕은 언변에 능한 안자를 놀려주고 싶었다. 어느 날 초왕은 술자리를 마련해서 그를 대접했다. 술상이 한창 달아오를 때 간수가 죄수 한 명을 묶어 데리고 나왔다. 초왕이 "그놈은 어디 사람이고,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물었다. "제나라 사람인데 도둑질을 했소이다"라고 하는 간수의 말을 듣고, 초왕은 안자를 흘겨보며 "제나라 사람들은 원래 다 도둑질을 잘 하오"라고 물었다. 안자는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회수(淮水) 이남의 귤이 회수의 북쪽에서 자라면 탱자가 됩니다. 같은 나무에서 자랐지만 전혀 다릅니다. 왜일까요. 수토(水土)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나라에서 도둑질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한다면, 초나라의 수토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안자의 말을 들은 초왕은 웃으면서 "현자와 함부로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구려. 오히려 내가 망신을 당했소이다"라고 하며 사과했다.달고 큰 귤이 열리는 나무를 다른 지역에 옮겨 심었더니 쓰고 작은 탱자가 달렸다는 이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에서는 외국인 범죄의 원인을 외국인이기 때문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본국에서도 범죄자였다면 아예 입국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지 않은지 따져볼 일이다. 홍콩의 시위를 한국의 촛불운동과 같은 잣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데에도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 귤이 탱자가 되는 데에는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2019-11-25 18:00:00

㈜빅아이디어연구소 소장.'광고인의 생각 훔치기' 저자

[김종섭의 광고 이야기] '이부망천'이 아닌 '인재의 천국'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말이 지닌 에너지는 무섭다. KBS 한 프로그램에서 행한 말에 관한 실험 사례가 있다. 양파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긍정적인 음악을, 다른 쪽에는 욕설을 들려주는 실험이었다. 온도, 습도, 빛과 같은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설정해 다른 변수들을 통제하였다. 긍정적인 음악 속에 둔 양파는 거침없이 싹이 자랐다. 반면 욕설을 듣는 환경의 양파는 싹이 자라지 않거나 조금 자란 것이 전부였다. 양파에도 말의 에너지는 강력하게 전달된 것이다.대구에서는 너무 먼 인천시교육청에서 연락이 왔다. 앞으로 쓰이게 될 교육청 슬로건이 필요하단 작업 문의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문의로 생각했다. 서울에도 광고 회사가 많은데 이토록 먼 대구의 광고 회사에 일을 맡겨 줄지 몰랐다. 대구까지 내려오겠다는 장학사님들을 만류하고 필자가 서울에 올라가 미팅을 진행했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만난 그들은 말의 에너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한 줄을 필자에게 원했다. 운 좋게 계약까지 진행되었다.작업을 시작하며 찾아본 인천의 이미지는 매우 좋지 않았다. 2018년 6월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이라는 단어가 매스컴을 타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어졌다. 게다가 부정적인 이미지의 전파 속도는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훨씬 빠르고 넓다. 슬로건 작업을 하면서 도무지 '이부망천'이라는 강력한 단어를 이길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필자의 회사는 아주 난감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광고가 마약과 같이 중독성이 있는 건 언제든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나에게 유리한 관점으로 상황을 재설정하면 그 판을 뒤집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광고의 묘미이다. 이번 작업 역시 어떻게 우리 쪽에 유리하게 관점을 바꿀까 생각하다 '이부망천'처럼 앞글자 줄임말에 주목했다. 줄임말로 상처를 받았다면 줄임말로 상처를 치료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말이 '인재의 천국'이었다. 이미지를 만들 때 '인' 자와 '천' 자에만 의도적으로 색상을 넣어 '인천'이 두드러지도록 디자인했다. 멀리서 보면 '인천'이라는 단어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인재의 천국'이라는 전체 문장이 보였다. 이 슬로건을 쓰고 광고주가 거절할 수 없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디어 발표일, 전날 인천에 올라가 하루 묵고 오전에 발표를 진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준비해 간 몇 가지 시안 중 광고주는 이 문장에서 박수를 쳤다. 행복, 자랑스러움, 함께, 도약이라는 구구절절하고 싫증이 나버린 단어보다 간결함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이 슬로건은 공감에 있어서 낮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인천이 인재의 천국이라고?' 광고의 기술에서 '공감'이 가장 중요하지만, 필자는 이번 작업에서 공감은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공감보단 씨앗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서두에 '말이 씨가 된다'고 쓴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왕이라 부르면 그 사람의 행동이 왕이 되는 것처럼 인천이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인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망천'이라는 씨앗을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재의 천국'이란 씨앗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자신들이 그 증거가 되어 주면 좋겠다. 오늘부터 인천은 망천이 아니라 '인재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2019-11-25 18:00:00

백옥경 구미과학관 관장

[과학둘레] 나이 들지 않게 나이 든다는 것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와 극적으로 어긋나는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이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두근두근 내 인생'이 그들이다. 두 작품 모두 노인의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겪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다룬다. 차이점이라면 '벤자민 버튼'이 노인에서 아이로 노화가 역행하는 가상의 내용인데 반해 '두근두근'은 아이에서 노인으로 노화가 가속화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노화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누구나 겪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노화 역시 작품만큼은 아니어도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와 평행을 달리는 건 아닌 듯하다. 주변만 봐도 겉으로 보이는 나이가 제 나이보다 훨씬 많거나 적게 보여 우리의 허를 찌르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노화의 속도가 개인마다 차이 나는 이유는 무얼까. 노화의 원인에서 그 이유를 밝히려는 연구가 세포와 분자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모든 생명체의 세포에는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가 있다. DNA는 세포가 분열할 때 기다란 실처럼 생긴 형태가 돌돌 감겨 짧은 막대 모양의 염색체로 된다. 하나의 세포가 나뉘는 세포분열은 모든 염색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새로운 세포에 똑같이 전달되는 과정이다. 이때 각 염색체는 자신의 DNA를 보호하고 인접한 염색체들과 엉겨 붙지 않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텔로미어'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에 있으며 이곳에는 DNA를 구성하는 A, T, G, C라는 4종류의 염기가 특정 서열(TTAGGG)로 수천 번 반복해 있다. 이 부위는 세포 분열 시 DNA를 보호하는 골무 같은 기능을 한다.텔로미어는 나이가 듦에 따라 길이가 짧아진다. 이는 세포가 분열할 때 DNA 복제가 말단까지 이루어질 수 없어 매번 200개 정도의 염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텔로미어 염기 수는 태어날 때 1만 개 정도지만, 35세에는 7천500개, 65세가 되면 4천800개 정도로 줄어든다고 한다. 텔로미어가 너무 짧아지면 세포는 분열을 멈추고 노화되고 질병에 취약해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줄어드는 텔로미어 길이를 멈추거나 연장할 방법이 있을까. '텔로머라제'라는 효소는 DNA 복제 시 텔로미어의 염기를 복제해 그것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막아준다. 일반 세포에는 거의 없고 줄기세포와 생식세포에만 있다. 그러나 텔로머라제는 양날의 검이다. 분열을 멈추지 않는 암세포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2009년 텔로미어와 텔로머라제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블랙번은 최근 '늙지 않는 비밀'이라는 저서에서 나이가 듦에 따라 짧아지는 텔로미어 길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외적 요인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중 관심을 끄는 것이 스트레스다.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된 만성질환 자녀를 간병해 온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그들의 텔로미어 길이와 텔로머라제 양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더 짧고 적었다. 이는 다년간 지속되는 심각한 스트레스는 텔로미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스스로의 사고 습관을 인지하고 스트레스 탄력성을 높이는 명상 같은 행위를 통해 텔로미어가 더 안정되고 길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운동, 수면, 식습관 등이 텔로미어 길이에 부정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연구 사례들을 알려주며 나이 듦을 촉발하거나 지연시키는 요인이 우리 생활습관과 관련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소설 속 아이가 앓는 '소아 조로증'은 세포 내 핵막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유전자 변이로 정상적인 세포 분열이 저해되어 생기는 질환이다. 일반적인 노화 속도의 개인차도 결국은 새로운 세포를 얼마나 오래 잘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듯하다. 다행인 것은 그것이 우리의 선택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균형은 결코 어긋나서는 안 될, 질적인 삶을 위한 첫 번째 요건이다. 활력이나 탄력, 비상이나 도전 같은 단어를 한 번도 가슴에 품어볼 수 없는 삶을 산 소설 속 아이처럼 육체적 고통이 정신을 지배하는 삶이나 정신적 질병이 육체를 무너뜨리는 삶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너무 빨리 나이 들지 않게 나이 들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2019-11-25 18:00:00

이성환 계명대 교수

[세계의 창] "자민당을 쳐부수자"

日 자민당 혁신 통해 살린 고이즈미 정치 변화 원하는 국민 열망에 부응불출마로 좀비당 해체 촉구 김세연"새로운 보수 탄생" 한국당도 응답을1993년 철옹성 같던 일본 자민당이 38년 만에 정권을 빼앗겼다. 3년 후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여당으로 복귀했으나, 잃어버린 10년의 경제처럼 자민당은 활력을 찾지 못했다. 시대와 공감하지 못하고 민심과 동떨어진 좌충우돌이 계속되면서 내각 지지율은 1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리멸렬했다.2001년 4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비주류로 독불장군 취급을 받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중의원 의원이 "자민당을 쳐부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민당의 해체를 주장했다. 자신이 총재가 되어 무기력한 자민당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계파 간 역학관계가 강하게 작용하는 자민당에서 그가 총재가 되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총재 선거를 위한 그의 가두연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환호했다. 당원・당우(黨友·당원이 아닌 당의 지지자)의 지지를 받은 그는 승리했고, 총재가 됐다.총재로서 총리가 된 후에도 그의 질주는 끝나지 않았다. 자민당의 오랜 관행이었던 파벌 배분형의 각료 임명 방식을 폐기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를 기준으로 장관을 임명했다. 지지부진하던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금기시되던 이라크 파병을 단행하고,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하고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사적 기득권에 매달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소속 의원들에게는 공천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철저히 응징했으며, 각종 선거에서 승리했다.내각 출범 시 그의 지지율은 85%로 사상 최고치였으며, 지지하지 않는다가 5%였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5%는 그가 자민당 총재이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이유를 들었다.일본 국민들이 그를 지지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민당을 철저히 쇄신해 정치를 바꾸고 일본을 변화시킬 것을 기대한 것이다. 물론 그는 자민당을 부수지도 않았으며, 일본도 바뀌지 않았다. 임기 중에 단행한 연금법 개정으로 국민 부담이 늘고, 파견업법 개정으로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소득격차의 확대로 젊은이들의 희망을 빼앗았으며, 일본 사회를 극우화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 일시적으로나마 자민당 쇄신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담아냈다.김세연 국회의원이 자유한국당 해체론을 선언했다. 한국당은 수명을 다한 좀비 정당으로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당은 쇄신을 시도했으나, 새로운 가치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구태의연한 정쟁, 무조건 반대, 여당의 실정에 의한 반사이익만을 좇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김세연 의원의 의도는 분명하다. 좀비 같은 한국당을 해체하면 새로운 보수 세력이 만들어진다는 논리이다. 많은 국민들과 보수 언론이 공감하고 있으나, 한국당은 시큰둥하다. 식탐만 가득한 좀비로라도 버텨보자는 심산일까.김세연과 고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정당의 해체를 주장한 공통점이 있으나, 차이도 크다. 김세연은 불출마를 통해 한국당의 해체와 보수 재건의 물꼬가 트이기를 바랐고, 고이즈미는 자민당을 부수기 위해 총재가 되려고 했다. 직접 행동론과 간접 추동론쯤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두 사람의 권력 의지 차이일지 모르나 전자가 파괴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이즈미는 직접 해체론을 통해 자민당을 살렸다. 김세연의 주장에 답하듯, 한국당 지도부는 내년 총선에서 50% 물갈이를 제시했다.보다 중요한 것은 당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정해야 거기에 맞는 사람을 충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우연인 듯 필연, 그로 인해 결정적으로 바뀌는 삶을 경험한다. 김세연의 선언이 돌출적 우연이 아니라 한국당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필연으로 받아들여질 때 한국당은 살아날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 새 보수가 탄생하기를 바란다.

2019-11-25 11:19:22

구현자 대구시교육청 민원담당사무관

[기고] 쇼팽과 함께 이 겨울을

굶주림과 공포에 질린 한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장교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독일군 장교가 피아노에 한 손을 올리고 서서 그 남자를 지켜봅니다. 남자는 잠시 두 손을 마주 잡고 망설이다가 연주를 시작합니다. 두려움에 주저하듯 연주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결국 절정을 향해서 폭발합니다.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는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1930년대 바르샤바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던 스필만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에게 전 가족을 잃고 맙니다. 간신히 홀로 살아남아 굶주림과 추위, 공포에 떨며 바르샤바의 빈집과 폐허를 옮겨 다니며 지내던 그는 은신처에서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와 마주칩니다. 그는 스필만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스필만이 피아니스트였다고 말하자 독일군 장교는 피아노 연주를 명령합니다.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바르샤바의 거리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흐릅니다. 연주가 끝난 뒤 호젠펠트는 유대인인 그를 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식과 옷까지 챙겨줍니다. 호젠펠트는 연주회에 꼭 가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영화에서 스필만이 선택한 연주곡은 프레데리크 쇼팽의 발라드 1번입니다. 쇼팽은 그가 좋아하던 폴란드 애국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서사시 콘라트 발렌로드에서 영감을 받아서 발라드 1번을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쇼팽이 태어난 폴란드는 18세기 말 세 번에 걸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은 이런 상황 아래에서도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폴란드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려 노력하였습니다.쇼팽은 저항과 독립의 갈망이 팽배하던 바르샤바의 공기를 호흡하며 성장했습니다. 1830년, 제정 러시아의 학정에 대항하여 바르샤바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쇼팽은 11월 혁명이라 불리는 이 항거가 일어났을 때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쇼팽은 직접 항쟁에 참여하지는 못합니다. 대신 음악으로서 조국 폴란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그 후 쇼팽은 다시는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는 지금도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의 심장만은 코냑에 담긴 채 폴란드로 옮겨져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발라드 1번 작품 23은 강대국들에 국토를 빼앗긴 폴란드인의 깊은 슬픔을 표현하듯 장중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크지 않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는 격정을 토해냅니다.격랑 후에는 다시 아름다운 멜로디가 이어집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피아노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슬픔과 애잔함과 망설임, 그리고 환희의 감정을 차례로 만나는 것 같습니다.대구시교육청에는 하루에도 많은 분들이 교육과 관련된 의견과 민원을 가지고 방문하고 있습니다.민원실에서는 방문객들을 위해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잠시지만 쇼팽의 발라드 1번이 흐르는 가운데 의견을 나눈다면 좀 더 아름다운 대화가 오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입니다. 혹여 민원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나는 길에 민원실에 들러 따뜻한 녹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쇼팽의 녹턴 20을 감상하신다면 이 겨울이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2019-11-25 11:12:37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매일춘추] 선택할 수 있다면

중요한 약속이 있어 바쁘게 발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멀리 어수룩한 차림을 한 할머니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차비를 빌리시던 어떤 할머니에게 차비로 쓰이지 않을 걸 알면서 지갑을 열었던 경우가 꽤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차비를 달라시면 어쩌나' 하고 불안함이 몰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끝내 내 앞에서 말을 걸었다. "집 좀 찾아주세요." 추위가 잔뜩 묻은 입술을 하고서 목에 걸려있는 동그란 목걸이를 내미신다. 목걸이 앞면에는 아들 내외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 두 개와 뒷면에는 주소가 새겨져 있었다. 손자뻘쯤 되는 나에게 자신의 허물을 보이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보니 오해했던 내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할머니를 꼭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 전화해드릴게요" 라고 말하며 전화기를 꺼내는데 할머니가 내 손에 있던 목걸이를 '탁' 움켜쥐시며 전화는 하지 말고 어디로 가는지 길만 알려달라고 하신다.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되고 싶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채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얼른 스마트폰에서 주소 검색을 했다. 거리는 약 300미터 정도, 그리 어려운길은 아니었다. "할머니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여기서 많이 안 멀어요." 몇 차례 사양하시더니 이내 나와 함께 발을 옮기셨다.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들어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설픈 위로도 어색함을 달래는 물음표 없는 질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골목 끝에 모퉁이를 돌자 할머니가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다고 하신다. 불안했던 나는 그래도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하자 버럭 화를 내셨다. '아, 길을 잃었다는 것을 자식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신 거로구나' 하고 번뜩 생각이 들어 얼른 나머지 길을 알려드렸다.자식과 부모는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덜컹 맺어진 인연으로 서로 남보다 못하게 싸우기도 하고 남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나 한 번쯤 '나는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원망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경험이 아니길…) 좀 더 돈 많은 부모, 좀 더 다정한 부모, 좀 더 지적인 부모…. 하지만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선택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생긴다.매번 다녔던 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두려움보다 자식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부모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된다면 부모가 길을 잃을까봐 목걸이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새겨 부모의 목에 걸어준 자식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부모 자식 간에 자격이 필요하다면 세상에 누가 부모와 자식을 할 수 있을까?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2019-11-25 11:09:21

노동일 경희대 교수

[이른 아침에] 지소미아 사태, 복기와 반성이 필요하다

국민과 국가의 안위 걸린 지소미아조건부 종료 유예 결정 다행이지만처음부터 양국 정부 대화 나섰다면엄청난 사회적 비용 들지 않았을 것일단 다행이다. 22일 자정 종료를 몇 시간 앞두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연장이 결정되었다. 조건부 종료 유예지만 사실상 연장이다. 시중에는 지소미아 종료 시 후폭풍에 대한 별의별 시나리오가 돌아다니던 참이다. 그걸 감안할 때 다행스럽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미국의 금융 제재 등 현실화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상당수 국민들이 불안감 속에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정치의 요체 중 하나가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번 지소미아 소동은 명백한 정치 실패의 사례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미국의 전방위적 압력, 경제적 파장 등을 생각했을 때 사실 지소미아 종료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표면적인 강경 자세와 달리 정부 관계자들도 오래 물밑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대처했다면 전혀 필요 없었던 비용이다.새삼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정부·여당을 비난하거나 특정인의 책임을 추궁하자는 게 아니다.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단추들을 잘못 끼웠는지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바둑처럼 복기를 해보자는 제안이다. "괴롭지만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인 조훈현 국수가 한 말이다. 바둑 팬은 다 아는 얘기지만 그만큼 바둑에서는 복기가 중요하다. 이번 지소미아 사태도 우리 역사상 주요 사건으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국민과 국가의 안위가 걸린 걸 생각하면 바둑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중한 문제이다.시작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한 게 아니어서 일본 기업이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의무가 있다는 내용이었다.당시 이미 "일본 정부와 언론은 강한 반발을 예고하는 등 한일 관계에 미칠 파장이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일본의 반발에 대한 철저한 대책 마련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일본 정부는 2019년 1월 9일 정부 간 협의를 요청해 왔다. 우리 정부가 답이 없자 일본은 5월 20일 제3국 위원을 포함한 중재위원회 개최를 다시 요청해 왔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분쟁 해결 절차였다. 우리 정부는 일본 측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일반 외교 채널을 통한 협의를 지속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사법부 판결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항 조치 발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요구에 우리 정부는 무대응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어진 사태 전개는 다 아는 대로다.사실상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다. 이런 분석에는 "일본 편을 든다"는 비난이 따른다. 결과는 어떤가. 지소미아 종료 유예는 한일 양국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협상 노력을 기울인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한일 '정부 간 협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결과이다. '1+1+알파' 등 판결에 대한 그 나름의 해결책도 논의되고 있다. 처음부터 양국 정부 간 대화에 나섰다면 기업들의 어려움은 물론 첨예한 국론 분열, 국민 편 가르기 등 엄청난 사회적 갈등은 겪지 않았어도 되는 일이었다. 사태가 마무리된 것도 아니다. 680여 개 시민사회단체 연대체는 "새로운 한일 관계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면서 "지소미아 연장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는 회견을 가졌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해법 마련도 쉽지 않다.한일 양국이 일단 사태를 봉합한 데는 미국이 두 나라 모두를 강하게 압박한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는 것은 '글로벌 호구'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지소미아 종료 시한이 다가오자 우리 정부는 공개적으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중재를 요청했다.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 등과 관련, 완전한 '갱신'(renewal)을 거론하는 미국 앞에서 글로벌 호구가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다시 한 번 조 국수의 말을 인용한다. "괴롭지만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다." 지소미아 소동에 대한 복기는 그만큼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2019-11-24 16:03:51

김기태 대구 동부소방서장

[기고] 우리 가정의 파수꾼, 주택용 소방시설

망양보뢰(亡羊補牢).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뜻의 이 고사성어는 화마로 인한 피해를 입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되뇌어봤을 법한 말이다. 아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말이다.건물이 무너지는 재난 같은 불가항력의 사건이 아니라 게으름과 안일함으로 인해 일어난 화재, 즉 부주의로 인한 화재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더욱 안타까움이 남는 것이다.주택 화재의 발생 원인은 1위가 부주의로, 아주 작은 실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로 인한 인명 피해 발생률은 전체 화재의 50% 가까이 되니 작은 실수로 인한 대가치고는 가혹하다. 특히 지금처럼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에는 화재 위험 3대 겨울용품인 전기히터·장판, 전기열선, 화목보일러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부주의로 인한 화재 가능성도 높아진다. 주택 거주자들이 각별히 안전사고 예방에 주의해야 할 시기다.그럼에도 화재 초기라면 여전히 우리에게 기회는 있다. 주택용 소방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화재경보기(단독경보형 감지기)는 화재를 감지하면 경보음을 울려 빠르게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소화기는 사람이 수동으로 소화 약제를 방사하는 기구로, 초기 소화에 유용하며 손쉽게 구입할 수 있고 사용 방법도 간편하다. 둘 다 작은 실수에서 시작된 화재를 막을 수 있는 최적의 소방시설이다.그래서 소방 당국은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 2012년부터 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주택에 의무적으로 이런 주택용 소방시설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소화기는 가구별, 층별로 1개 이상 설치하면 되고, 감지기는 구획된 실마다 설치하면 된다.그렇다면 이 주택용 소방시설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우리나라는 설치율이 아직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외국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일찍 주택용 화재경보기 설치 의무화를 시행하고 있다.소방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가까운 일본은 2008년 36%에 불과했던 설치율을 2014년 80%까지 끌어올렸고, 6년간 12.4% 화재 사망자 저감 효과가 있었다. 미국은 32년간 56%, 영국은 22년간 54% 화재 사망자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명 피해 예방에 확실한 효과가 입증된 것이다.대구 동부소방서 관할 구역에서도 매년 주택용 소방시설로 인한 화재 피해 저감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지난 여름철에만 에어컨 실외기에서 발생한 화재 중 신암동, 율하동에서 2건 정도가 소화기로 자체 진압됨에 따라 화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 살펴본다면 그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준 주택 화재 사건 현장에는 어김없이 주택용 소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우리 가정의 안전을 책임져주는 주택용 소방시설은 소방서와 같은 유관기관의 노력만으로는 설치율 향상을 이뤄낼 수 없다.국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 우리 가정의 안전은 곧 이웃과 우리 지역의 안전으로 연결되는 만큼 주택용 소방시설의 설치를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으로 인식하고 우리 모두 동참해야 할 때다.

2019-11-24 15:38:41

채명 무용평론가

[매일춘추] 공연장 특화의 미션

대구에서 공연을 보러 다녀보면, 공연장 마다 각기 다른 특색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예술 장르마다 선호되는 극장이 있고, 예술가들마다 애호하는 공연장이 다르다. 극장의 시설, 규모, 교통, 관계자들의 전문성, 분위기 등 여러 요인이 그 선택의 변수가 될 것이다. 요즘 교통편의 편리함도 기획자들의 선택기준에 매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대구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공연장이 있을까?대구를 대표하는 큰 공연장을 살펴보자.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콘서트하우스, 대구오페라하우스, 대구학생문화센터 등은 천 석이 넘는다.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 등 대학 공연장은 2천석에 가까운 대형이다. 그 보다 큰 규모의 엑스코오디토리움과 같은 초대형극장은 인기 있는 대중가수 공연이나 유명인사 강연회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그리고 각 구 단위마다 대형 회관을 가지고 있다. 아양아트센터, 웃는얼굴아트센터, 대덕문화센터, 어울아트센터, 봉산문화회관, 수성아트피아 등은 중대형의 훌륭한 공연장이다. 이 밖에도 중극장 정도의 공연장도 적지 않고, 종교단체의 극장들, 대형극장의 부대시설인 소극장과 요즘 유행하는 하우스콘서트를 지향하는 아담한 소극장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공연장은 어림잡아 봐도 백 개는 족히 넘어 보인다.이렇게 공연장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 수요가 그 만큼 증가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억지로 술 권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송년회도 공연을 즐기고, 공연 관람 후일담을 나누거나 간단히 차를 한 잔하기도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문화 풍속의 변화도 일조를 하는 듯하다.각양각색의 공연장들은 그 특색에 따라 공연되어지는 장르가 있다. 대구콘서트하우스는 음악전용극장으로 애초 음향시설에 특히 신경을 썼고, 대구오페라하우스도 오페라와 음악 공연 위주로 이용되는 극장이다. 또 대명동 소극장거리와 동성로에 위치한 소극장들은 연극전용극장이고, 뮤지컬은 대부분 대형작품이라 대극장 사용이 보편적이다.그러면 공연예술 중 무용공연은 주로 어디서 이뤄질까? 전용극장은 없고, 무용가 각자 선호도에 따라, 또 작품의 크기에 따라 여러 극장을 이용하고 있다. 젊은 안무가들이나 전통무용과 같이 작은 무대가 필요할 때도 작은 극장의 선호도가 없다. 얼핏 보면 선택 폭이 넓어 보여도, 무용 장르를 특별히 배려하는 극장이 없다는 뜻도 된다.극장이 어느 한 예술장르에만 집중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한 장르를 특별히 배려하는 특화가 이뤄지길 소망해 본다. 일반 공연장이었던 대구시민회관이 음악전문 공연장 대구콘서트하우스로 특화한 방식을 모든 공연장에 적용하도록 미션을 가지자는 것이다. 꿈꾸기 시작하면 미래에는 반드시 이뤄진다. 채명 무용평론가

2019-11-24 06:30:00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종문의 한시산책] 삼봉을 그리워 함(억삼봉, 憶三峰) - 이숭인

그대를 못 본지가 이미 오랜데 / 不見鄭生久(불견정생구)가을바람 또다시 쏴- 하고 부네 / 秋風又颯然(추풍우삽연)새로 지은 그대의 시 젤 빼어났고 / 新篇最堪誦(신편최감송)내 미친 짓 자네 말고 누가 봐줄까 / 狂態更誰憐(광태갱수련)천지가 허락했군, 우리 무리가 / 天地容吾輩(천지용오배)강호에서 몇 년 동안 누워지냄을 / 江湖臥數年(강호와수년)아득한 그대 생각 한이 있으랴 / 相思渺何限(상사묘하한)기러기 사라진 곳, 끝까지 보네 / 極目斷鴻邊(극목단홍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막상막하의 시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스승 격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평을 할 때마다 도은을 삼봉의 앞에다 놓았다.하루는 그 스승이 도은의 시 '오호도'(嗚呼島)를 보고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해댔다. 허파가 왈칵 뒤집힌 삼봉도 며칠 뒤에 '오호도'란 시를 지어 스승에게 보이면서, 시치미를 딱 떼고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의 시에 이런 시가 있던데, 이 작품은 어떤지요?" "참으로 빼어난 작품일세. 하지만 이 정도의 작품은 그대들도 얼마든지 지을 수가 있네. 지난 번 도은의 작품 같은 것은 절대 아무나 지을 수가 없는 거고." 훗날 삼봉이 정권을 장악하자 목은은 겨우 죽음을 면했고, 도은은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오호도' 시가 빌미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삼봉과 도은이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절친한 친구 같이 지낸 사이였다. 유배살이를 하고 있던 도은이, 역시 유배 중이었던 삼봉을 그리워하며 지은 위의 시에서도 그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느린 말 홀로 타니 나귀를 탄 것 같아/ 채찍을 드리운 채 꾸벅꾸벅 졸았다네/ 말이 멈추기에 잠에서 깨어나니/ 무너진 담·사립문이 바로 그대(=도은) 집이었네" 삼봉이 지은 이 시를 통해서도 그들 간의 교제의 밀도를 짐작할 만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조교체기에 아쉽게도 서로 등을 돌렸다. 정치적 신념의 차이에 따른 것이므로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일 터. 하지만 정권을 손에 쥔 삼봉이 귀양살이 하고 있던 도은에게 심복을 보내어 곤장을 쳐서 죽였던 것은 짜장 우리를 아연케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정말 '오호도' 시가 빌미가 되기라도 했던 걸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져서 날아가는 기러기의 날개를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가을이다, 아아!

2019-11-23 04:30:00

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광장]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다. 크로노스는 일정하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다. 가령 1년, 하루, 한 시간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 즉 '객관적'인 시간이다.크로노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막을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 크로노스 앞에서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역동 우탁 선생은 고려 말에 지은 '탄로가'에서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탄식했는데, 역동 선생이 한탄한 시간이 바로 크로노스이다. 가수 서유석이 '가는 세월'에서 잡을 수 없다고 한 '세월'도 크로노스이다.반면에 카이로스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시간이 길다거나 짧다는 것은 물리적, 객관적 길이에 따른 판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한 시간처럼, 또는 한 시간을 1년처럼 느낄 수도 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은 시간이 빠르게,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말은 더디게 감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때의 시간이 카이로스이다.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인 카이로스에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가 개입될 수 있다. 마음과 의지가 담긴 특별한 시간이며 우리가 능동적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때'나 '기회'이다.크로노스는 흘러가고 만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잠든 순간에도 크로노스는 흐른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마음속에 기억과 경험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들뢰즈(Deleuze)는 '들뢰즈, 유동의 철학'(2008)에서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는 점(點)과 같은 것"이 아니라 "현재란 언제나 현재와 과거의 복합체이고 결정체(結晶體)"라고 했다. 그가 여기서 '현재' 또는 '과거'라고 한 말은 카이로스적 현재 또는 과거를 말한 것이다.그렇다면 흘러가버리는 크로노스는 무의미한가? 그렇지는 않다. 그 누구도 하루 24시간을 카이로스만으로 채울 수는 없다. 적당한 휴식과 수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 멍 때림조차도 삶을 더 활력 있게 해주는 중요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지혜롭게 조합시킬 필요가 있다.작가 김선영은 '시간을 파는 상점'(2012)에서 "삶은 시간의 내용"이라 했다. 다시 말해 삶은 자신이 사는 동안에, 카이로스적으로 살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이다. 마지막 순간, 보람과 추억으로 가득 찬 생을 회고하고 싶다면 적어도 깨어서 활동하는 동안은 카이로스로 채우려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때와 기회를 기다린다면 더더욱 그러하다.카이로스를 위해서는 시간을 '자기 주도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 시간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어 매사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에는 독서, 취미, 운동, 사교, 종교, 봉사 등 그 무엇이든지 간에 진실로 하고 싶은 활동을 찾아 자발적,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직업상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차피 해야 하고, 보내야 할 시간이라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즐기면서 참여하자. 시간의 주인으로서, 때로는 왔다가 사라지고, 때로는 마음과 몸에 기억과 경험으로 쌓이는 시간을 정중하게 맞이한다면,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2019-11-22 21:10:55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춘추칼럼] 주한미군 주둔은 특혜가 아니다

미국의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 세계 패권 전략 수행 비용과 연계한국 방어에 한정된 범위 벗어나 한반도'동북아 평화에 도움 안돼20일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3차 협상이 결렬됐다. 협상은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으면서 입장 차이를 좁혀 가는 과정이다. 국가 간 협상은 이해관계의 정도와 협상 의지에 따라 합의되기도 하고 결렬되기도 한다. 동맹은 상호 존중의 자세와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일반 국가 관계와 다르다. 미국은 다음 협상 날짜도 잡지 않고 협상장을 나가버렸다. 냉전시대 남북 협상에서 북한의 행동에서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은 이미 한국민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기에 스스로 동맹의 가치를 손상시켰다.방위비분담금의 개념은 주한미군 주둔 경비 일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말한다. 법적 근거는 주둔군 지위협정(SOFA) 5조에 대한 특별조치협정 및 이행약정에 있다. 5조에는 '미국은 주한미군 유지에 따른 모든 경비를 부담하고, 한국은 주한미군 주둔에 필요한 시설·구역(토지)·통행권을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한국이 부담해야 할 항목은 인건비·군사건설비·군수지원비 등이 핵심이다. 인건비는 주한미군사령부가 고용한 한국인 근로자에 대한 비용이다. 100% 현금 지원이다. 군사건설비는 막사·훈련장·환경시설 등 비군사시설에 사용되는 비용이다. 88%의 현물과 12%의 현금 지원이다. 한국이 계약권을 가진다. 군수지원비는 탄약 저장·정비·수송·장비 물자·시설 유지 등에 사용되는 비용이다. 100% 현물이다. 미국이 계약권을 보유하고 한국은 승인권을 가진다.방위비분담금 지원은 1991년부터 시작됐다. 이전에는 미국이 대부분 부담했다. 1991년 이후부터는 한국의 경제력 신장으로 지원 규모가 점점 증가되어 왔다. 1991년 1천73억원을 시작으로 2019년에는 1조389억원을 지원했다. 29년 동안 지원 규모가 10배 증가했다. 지원 비용 결정은 전년도 총액에 매년 소비자물가지수를 반영하고 인상률 상한선은 4%를 적용했다.2020년도 미국이 요구하는 방위비분담금은 50억달러이다. 미국이 스스로 책정한 2020년도 주한미군 주둔 경비는 44억6천만달러이다. 44억6천만달러 속에는 주한미군 인건비 21억달러, 운영유지비 22억달러, 가족 숙소 관련 비용 1억4천만달러, 기타 군사건설비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2020년도 분담금 요구액이 주둔 경비 책정액을 능가한다. 주한미군에 대한 모든 비용을 한국이 책임지라는 것이다.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에는 주한미군 인건비를 제외한 주둔 경비 일부를 지원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미국의 요구는 부당할 뿐만 아니라 한미 간 특별협정을 스스로 위배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인건비까지 한국이 부담한다면 주한미군이 한국의 용병이 되어야 한다.미국의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는 인도·태평양 전략 등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 수행 비용과 연계되어 있다. 한미 연합연습에 참가하는 해외 미군, 항모전단 등 전략자산의 전개, 호르무즈 해협과 남중국해 작전 등의 비용 요구에 잘 나타난다. 주한미군 순환 배치 비용, 주한미군 작전준비태세 비용 등의 작전지원 신설 항목 요구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 실행 비용 요구는 한국 방어에 한정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범위를 넘어선다. 한국을 패권 전략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것은 동맹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 안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한국은 충분한 수준의 안보 분담을 해 왔다. 미국의 주요 동맹·우방국들 가운데 국내총생산 대비 가장 높은 수준의 국방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카투사 지원·세금 감면·공공요금 감면 등 상당한 수준의 직·간접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평택·오산 등 주한미군 재배치를 위한 사업비 108억달러를 충당하였다. 주한미군은 세계 최대 규모와 최적의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전·이라크전·아프간전 등 미국 주도의 다국적 군사 활동에 모두 동참해 왔고 최근까지 12개국에서 파병 활동을 하고 있다. 방위비분담금은 주한미군의 한반도 방위 기여도, 한국의 재정 부담 능력, 한반도 안보 상황,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 여건 보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공평성에 토대한 합리적인 수준에서 책정되어야 한다. 무임승차론이나 주한미군 철수론 같은 낡은 주장은 미국 스스로 논리의 한계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주한미군 주둔은 더 이상 한국에 대한 특혜가 아님을 미국만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2019-11-21 13:00:12

최영조 경산시장

[기고] 청년 일자리와 문화 콘텐츠

경산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지역의 전통산업을 고도화하고 신산업을 육성하는데 주력함은 물론, 청년 일자리 창출과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에도 많은 힘을 쏟고 있다.청년일자리의 핵심은 창업 생태계 조성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제공에 있다.먼저 대학교 주변 두 곳을 청년문화와 창업・커뮤니티 거점으로 육성하는 사업에 4년간 73억원을 투입한다. 경산지식산업지구에 생활소비재 융복합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사업이 산학융합지구와 산업단지 캠퍼스 조성 공모사업 선정으로 추진력을 더하고 있다.창업 교육 프로그램으로 공유주방에서 외식업 창업의 모든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청년들의 부엌', 유망 스타트업 아이템을 발굴 육성하는 '경산 청년희망 창업 오디션사업'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창업가들이 시제품을 바로 만들 수 있는 청년공동작업장과 청년벤처를 위한 공유사무실은 내년 상반기까지 조성한다. 또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사업이 도시 청년 시골 파견제 등 9개 사업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4차 산업혁명은 연결과 융합이 핵심이며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이 있다. 인공지능은 다방면에 활용되면서 산업의 지형을 자본과 노동 중심에서 지식정보 중심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출판, 만화, 방송, 영화, 음악, 광고, 게임 등의 저작물들을 생산・유통하는 문화콘텐츠산업은 인공지능 등의 신기술에 힘입어 급성장이 예고된다.문화콘텐츠산업의 최적지는 역사·문화 뿐만 아니라 생활 속 다양성이 풍부한 곳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산은 문화콘텐츠산업에 더할나위 없는 최적지이다. 압독국과 삼성현 등 역사문화의 도시이자 2022년 1천만 ㎡의 산업단지를 바라보는 첨단산업도시이며, 10개 대학 11만 대학생이 있는 청년도시이다. 다양한 문화인물과 경북글로벌게임센터, 한국만화인협동조합 등을 보유한 원천 콘텐츠의 보고이기도 하다.새로운 직업군으로 각광받는 유튜버를 육성하는 '청년 소셜창업 크리에이터 아카데미'가 활발히 진행되고,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들의 창작공간도 운영되고 있다.경산시 옥산동에 자리잡은 한국만화인협동조합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만화가 60여 명이 모여 터전을 일구며 경산을 차세대 만화산업의 메카로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경북글로벌게임센터를 중심으로 게임산업 인프라를 구축하였고, 게임 품질보증 회사인 IGS㈜ 경북지사가 지난해 경산에 설립되면서 지역 대학 졸업생이 다수 정규직으로 채용됐다.그러나 콘텐츠산업은 일자리 창출 기여도가 높은 반면 퇴사율도 매우 높은 산업이라고 한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낮은 임금, 후진적인 복지 수준이 원인으로 꼽히며, 노동환경 개선과 새로운 영역 개척 등에 대한 지원과 생태계 조성이 절실하다.이런 점에서 콘텐츠산업은 산・학・연・관 협력이 중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은 교육과 취‧창업지원 시스템을 제공하고 기업은 우수인재 양성에 적극 참여하며, 지방자치단체는 제도적 지원을 통해 상생의 선순환 구조를 정립하여야 한다.문화콘텐츠 산업의 혁신적 발전을 위해서는 장기 비전을 갖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아이디어가 넘치는 청년들을 유입할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한류문화가 상품 수출에 긍정적으로 기여함에서 보듯이 문화콘텐츠산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최영조 경산시장

2019-11-21 12:05:20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매일춘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동화'를 좋아한다. 다른 문학 장르를 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지칠 때면 이런 장르의 책을 찾게 된다. 마음에 구멍이 나서 힘이 빠져버린 것 같을 때 동화를 읽게 되면 구멍 난 곳은 책 속의 단어와 문장으로 조금씩 메워진다.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도 얻게 된다.왜 동화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이런 장르가 가진 어법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동화에서는 그 어법이 매우 조심스럽다.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돌려 말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할 때가 많다. 두 번 째로, 순수한 감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에도 이러한 책을 읽는 것은 마음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좋지 않은 기분은 잊어버리게 되고 어느새 책이 주는 감동에 촉촉하게 젖어든다.필자가 근래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필자 역시 좋아하는 '어린 왕자'라는 책이다. 내년에 뮤지컬 작품으로 제작할 계획이 있어 오랜만에 다시 책을 꺼내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읽을 때 마다 새로움을 주기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이번에 다시 꺼내 읽어보며 그 이야기에 공감하게 되었다. 전에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느껴졌다.예전에는 책을 읽으며 현실에서 벗어나려 했다면 지금은 책을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현실에선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상자 속에 꽁꽁 감춰 두었던 내면의 감정들이 물 밀 듯 밀려와서 마음이 울렁거린다."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나'라는 인물이 '어린 왕자'에게 한 말이다. 어린 왕자에게 장미꽃이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왕자가 장미꽃을 위해 정성을 쏟고 시간을 사용했기 때문에 장미가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필자는 정성과 시간을 들여 길들인 것에는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마음은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곳'이란 단어가 쓰인다는 것은, 마음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모두들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이 필시 어딘가에는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감춰두었던 그 마음이 생각이 난 것이다.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현실 속에선 눈에 보이는 당장 중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 현실로부터 멀어져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나의 마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내가 진짜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2019-11-21 11:22:06

민경석 한국 물기술인증원 원장

[새론새평] 한국물기술인증원

물기술 관련 국내외 표준개발 보급 R&D 확대'우수 제품 사업화 앞장기업들 해외 선진시장 진출 교두보 물산업 5대 강국 도약으로 뒷받침지난해 물 관련 3법인 정부조직법, 물관리기본법, 물관리 기술 발전 및 물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물산업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정부조직법에 의해 국토교통부의 수자원정책국을 환경부로 이관하여 수량과 수질을 통합 관리할 수 있도록 물관리를 일원화함으로써, 중복 투자를 막고 효율적인 통합물관리로 4대강의 물 환경을 건강하게 개선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물관리기본법은 수도법, 하수도법, 하천법 등과 같이 각각의 영역만 다루는 것과 달리 포괄적인 지배구조에 대한 법이다. 주요 내용은 국가 및 유역 물관리위원회 설치와 물관리 기본계획 수립 등인데, 핵심은 유역별 통합물관리이다. 또한 국토부의 하천 기능과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업용수를 포함한 유역별 통합물관리의 계획 및 사업 수행을 위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이다.물산업진흥법은 물관리 기술의 체계적인 발전 기반을 조성하여 물산업의 진흥에 기여함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 향상 및 지속 가능한 물순환 체계 구축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순환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기업의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대구 달성군에 위치한 국가물산업클러스터의 활성화를 위한 지원 기능을 갖고 있다.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물산업의 글로벌시장 진출을 위한 전 과정인 연구개발, 인·검증, 실적 확보, 국내 사업화, 해외 진출을 원스톱 지원하는 물산업 진흥시설과 기업집적단지를 갖추고 있는데, 환경부와 대구광역시가 힘을 모아 조성한 국가기반시설이다. 주요 시설은 물산업 진흥시설로 물융합연구센터, 워터캠퍼스, 글로벌비즈니스센터가 있으며, 실증화시설로 수처리 실증플랜트와 관망 시험구역이 있다. 인·검증 부분은 빠져 있었는데, 이를 보완하고 기능적 완결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물기술인증원을 설립하였으며, 이로 인해 클러스터는 물산업 발전을 위한 기능적 하드웨어 퍼즐을 모두 완성하였다.물산업진흥법에 따라 설립한 한국물기술인증원은 물관리 기술과 제품의 위생 안전, 품질 및 성능 등을 확보하기 위한 인'검증 및 그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한다. 환경부는 인증원 설립 과정의 객관성과 공정성 확보를 위해 법률, 행정, 물산업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인증원 설립위원회'를 금년 3월부터 운영해 왔는데, 금년 11월에 최종적으로 타 지자체와 경합하여 국가물산업클러스터 내에 인증원을 설립하였다. 인증원은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운영하는데, 초기에는 인증원의 업무 규정에 맞추어 원활한 업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조직을 정비하고, 단계별로 업무의 양과 특성에 따라 기능과 조직을 확대하여야 한다.금년도는 29명의 전문 인력으로 시작하는데, 한국상하수도협회에서 수행해 온 기존 인증제도를 이관받아 운영하며, 내년부터 정수기 품질검사 및 수처리제 위생 안전 인증 등 인증 업무를 확대할 계획이며, 환경부로부터 '물산업 표준화 전문기관'으로 지정받아, 물산업과 관련한 제품 및 기술의 국내외 표준개발 및 보급에 힘쓰며, 입주 기업의 해외 진출에 가장 중요한 핵심인 R&D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여 기업의 연구 개발 성과가 세계 탑 기술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미국위생재단(NSF international) 및 싱가포르 수자원공사 격인 PUB와 상호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하고 공동 연구, 공동 표준개발 및 상호 인증을 위한 다양한 사업 추진을 통해 국제적인 수준의 인증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내 물기업의 해외 선진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이러한 인증원의 핵심 수행 업무는 최근 환경부에서 수립한 '물관리 기술 발전 및 물산업 진흥기본계획(2019~2023)'상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이다. '글로벌 물산업 5대 강국으로 도약'을 비전으로 하는 기본계획의 4대 전략 중 가장 우선하여야 할 전략은 '물기술 혁신 역량 강화'이다. 이 전략의 3대 사업은 R&D 확대 및 성과 제고, 혁신기술 성능 확인 및 실적 확보 지원, 우수 제품 사업화 및 이용·보급 촉진인데, 인증원은 가장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이를 통해, 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입주 기업을 포함한 국내 물기업의 연구, 제품 개발부터 인·검증, 실증 플랜트 적용 등을 통한 국내 시장 확대 및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원스톱 지원 체계를 완성하였다. 이제 하드웨어 구축을 완성하였는데, 여기에 인증원이 소프트웨어를 입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2019-11-20 19:14:58

경북대 의대교수

[이재태의 세상속의 종소리] 늑대와 두루미

그리스의 이솝 우화에 늑대와 두루미 이야기가 있다. 욕심 많은 늑대가 게걸스럽게 먹다가 목구멍에 뼛조각이 걸렸다. 뱉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통증만 심해질 뿐이었다. 늑대는 두루미를 찾아간다. '너는 긴 목을 나의 목구멍에 넣을 수 있으니 뼛조각을 꺼내다오. 그 은혜는 크게 보상하겠다.' 두루미는 음흉한 늑대의 목구멍 속에 머리를 넣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다. 두루미가 뼈를 꺼내주자, 늑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가버린다. 두루미는 약속을 지키라고 한다. 늑대는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너는 이미 큰 보상을 받았어. 내가 꽉 물지 않아서 너는 안전하게 머리를 꺼낼 수 있었던 거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더니, 떠내려간 망건 값을 물어내라 한다는 우리 속담의 뜻과 같다. 1872년 제작된 영국의 은제 티벨에는 늑대와 두루미 우화가 조각되어 있다. 나른한 오후에 달콤한 차 한잔을 하며 우화가 주는 교훈을 생각하라는 뜻일 것이다. 늑대와 두루미 종을 보며 쿠르드를 생각한다.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시리아 동북부 주둔 미군 철수를 강행하였다. 이곳 쿠르드족은 극단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에 미군을 도우며 큰 희생을 치렀다. 미군의 보호가 사라지자 터키와 시리아 등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쿠르드족 연합국가 건국을 우려한 터키가 즉각 군대를 보내 이들을 학살하고 있다. 트럼프의 '배신'에 세계가 분노하고 있다. 쿠르드 속담에 "친구가 아니라 산을 벗하라"고 했다. 세상에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뜻이다.

2019-11-20 18:00:00

대구 영남중 교사

[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광복군 행진곡 작곡가 이두산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이두산(본명 이현수·1896~미상)은 '광복군 행진곡' '선봉대가'라는 군가의 작사자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계성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서기에 임명되었고,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약 6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20년 8월 친일 관리·부호들에게 보낼 경고문과 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문서 등을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이를 배포하였다. 또한 그는 워싱턴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자 외국인 선교사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자유」를 발간하여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등에 배부하였으며,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금산 지역의 자산가들을 겁박하기도 하였다.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이두산은 경북경찰부에 자수하여 복역하던 도중에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1928년 1월 즈음 중국 하문으로 옮겨가 인삼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1930년 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 성격인 한국독립당의 광동지부에 들어가서 「한성」(韓聲)이라는 기관지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킬 논설들을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그러나 이두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경쟁 관계에 놓였던, 의열단 계열의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고,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이후에 「동방전우」와 「조선의용대통신」을 발행하며 항일의식을 드높였다.1942년 5월 조선의용대 본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면서, 이두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부 차장, 내무부 차장, 정훈처장을 차례로 맡다가 해방이 되어 귀국하였다. 이두산은 해방 정국에서 조선대중당을 결성하였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다가 6.25전쟁 중에 종적을 감추었다.현재 이두산의 생가 터(달성군 화원읍 명곡로22길 18)에는 그의 삶을 조명한 표지판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문필가로서 일본에 항거했던 이두산의 업적과 정신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서는 그의 생가 터 주변에 그를 추모할 기념비를 제막하는 것이 시급할 것이다.대구 영남중 교사

2019-11-20 18:00:00

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

[시대산책] 북한발 미세먼지

이제 계절이 초겨울에 접어들었다. 겨울이 찾아왔을 때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미세먼지다. 미세먼지 유발요인 중 중국 요인이 더 큰가 국내 요인이 더 큰가를 놓고 매년 논쟁이 벌이지곤 하는데 사실 북한 요인도 결코 적지 않은데 이는 종종 무시되곤 한다.아주대 연구팀은 작년 수도권 초미세먼지 농도에서 북한의 영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수도권의 초미세먼지 가운데 14.7%는 북한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정했다. 북서풍이 많이 부는 1월엔 20%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은 올 3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고농도 기간 북한에서도 미세먼지가 많이 내려왔다고 보고 있다. 평균으로는 13% 정도"라고 말했다. 아주대 연구팀과 수치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모든 산업이 낙후해 있고 에너지 사용량이 아주 적은 북한이 왜 이렇게 많은 미세먼지를 배출하는지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재 전 세계에서 공기오염이 가장 심한 도시 10개 중 8, 9개를 1인당 GDP가 2천달러밖에 되지 않는 인도 도시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산업화나 에너지 사용량이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북한의 에너지 사용량은 남한의 25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미세먼지(PM10)와 초미세먼지(PM2.5) 배출량은 각각 2.6배, 2.3배에 달한다고 한다. 북한은 청정에너지인 원자력발전은 아예 없고 수력발전은 수풍발전소를 제외하면 별로 비중이 크지 않으며 풍력발전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초소형 풍력발전기이고 효율도 극히 떨어진다.주로 화력발전에 의존하는데 거의 석탄을 이용한다. 가정용 난방은 대부분 석탄과 장작을 이용한다. 기업들도 오랫동안 좀비기업이었다가 최근에 적극 가동되고 있는 기업들이 많은데 오염 저감 문제를 신경 쓸 만한 여유는 아직 없다.대북 제재가 지속되었을 때 북한이 취할 수 있는 경제전략 중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제재 대상이 아닌 관광산업 진흥전략이다. 현재 금강산-원산 지구, 백두산 지구에 대한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석탄의존형 개발전략이다. 북한의 최대 생산품이자 최대 수출품이 석탄이었는데 제재 때문에 석탄의 수출길이 막혀 있다. 그 석탄의 소비를 국내로 돌려 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전략이다. 석탄을 이용한 화력발전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추측되며 가정용 난방으로 석탄 사용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등장 이후 산림녹화를 강조하며 산림 도벌에 대한 처벌도 강화하고 있다.이런 분위기에서 가정용 석탄 사용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석탄화학산업이나 기타 석탄을 활용한 산업을 강조할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볼 때 당분간 오염 저감에 신경쓸 만한 처지는 아니다. 당분간 북한산 미세먼지가 증가할 요인만 있고 줄어들 요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중국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미세먼지를 줄이는 데 국가적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다. 북한도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경제발전 단계에 올라선다면 미세먼지에 관심을 기울이겠지만 현 시점에서 북한에 미세먼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봐야 '뭔 쓸데없는 한가한 소리냐'며 핀잔만 줄 것이 분명하다.중국은 바다 너머에라도 있지만 북한은 바로 붙어 있다. 특히 겨울에는 바람이 북에서 남으로 불어온다. 북한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1인당 GDP 5천달러 정도 수준까지는 미세먼지가 늘어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 문제는 북한을 윽박지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애걸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미세먼지 저감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용도를 못 박은 경제원조를 하게 되면 약간 개선되겠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낮은 조건에서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이래저래 우린 앞으로 상당 기간 북한산 미세먼지를 마시며 살아야 할 신세로 보인다. 중국발 미세먼지가 개선되면 될수록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느껴질 것이다.

2019-11-20 18:00:00

안영수 작 '야경'

[내가 읽은 책]'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 이정환 시조선집, 고요아침, 2019

노을 품에 그윽하던 해가 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어둠의 손아귀에 놓인다. 천지를 지배한 어둠의 옷자락을 뚫고 빛들이 피어난다. 어두울수록 싱싱하게 살아나는 빛은 업고 안고 뒹굴어도 가벼워서 좋다. 오타로 빛이 빚이 되어도 마음 무겁다. 가로등 아래 엎드려 은행잎들 땅을 깊고 있다. 정처 잃은 잎들은 처량하지만 뼈대가 다 드러나도 은행나무는 부채를 해결한 듯 평온하다. 뿌리의 힘으로 나무들이 몸시(詩)를 쓰는 만추(晩秋)다.'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는 이정환 시조선집이다. 이 책은 이정환 시인의 40여 년 시조 일대기를 함축해 보여준다. 발표순으로 100편의 시조가 5부로 나뉘어 실렸다. 책의 제목은 한 줄 시조로 시인의 자서 전문이다. 짧지만 기나긴 문장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많은 시조집과 동시조집, 시조비평집을 집필했고, 다수의 시조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의 '삶'이 곧 '시조'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이력이다.아껴 먹는 음식처럼 음미하며 거듭해서 읽고, 더러는 생각나는 시만 찾아 읽기도 했다. 첫 번째 시 '어느 날 저녁의 시'에서부터 마지막 쪽 '톱클래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주제가 주는 감동과 즐거움이 있었다. '자신의 미친 언어와 승부'하는 시인의 성정(性情)도 느낄 수 있다. '삶이 둥글어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 때로는 뚫려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 세상을 / 줄줄이 꿰어 / 흔들어 보겠느냐' -70쪽 '상평통보' 전문-'에워쌌으니 아아 그대 나를 에워쌌으니 향기로워라 온 세상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온 누리 향기로워라 나 그대 에워쌌으니 –46쪽 '에워쌌으니' 전문 뜨거운 사랑이 흐른다. 오로지 시조만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보니 시인과 눈을 맞추는 것들 기어코 시에 미친(及)다. 미치지 않고서야 천(千) 수가 넘는 시조를 어떻게 쓸 수 있었으랴. 시인에게 시는 '마지막까지 남을 버팀목'인 듯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헌사' 중에서- 유모차/ 천천히 밀며/ 길을 가는/ 할머니// 기울어진 몸이 점점 땅에 가까워져서// 종내는/ 저 언덕에 기대어/ 흙이 되어/ 갈 것이다// -91쪽 '예각에 대하여' 전문-요즘은 유모차가 지팡이도 되고, 발도 되고, 몸 불편한 사람 균형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유모차 끌고 다니는 어르신들이 많다. 굽은 허리로 유모차 끌고 가지만 한 번 굽은 허리는 펴지지 않고 끝내는 자신들이 들어가 누울 땅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이다.부끄럽게도 남루한 삶에 붙들려 미칠 수 없는 필자는 빚쟁이다. 갚지 못한 책(冊) 빚이 너무 많다. 이 책도 그렇다. 시인을 아는 친구 덕에 덥석 받아놓고는 웅크린 마음이 빚이라는 동굴에 갇혀서 감사 인사도 못했다. 빚으로 얻은 책은 볼 때마다 묵직한 채무를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시들은 깊은 눈빛으로 마음을 쓰다듬었다. 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을 시인은 한 송이씩 붉게 꽃피워 놓았다. 빚을 빛으로 꿈꾸게 한다.'올곧게 사는 것만 사는 일 아니다 // 반기와 / 반항과 / 반란과 / 반역을 // 꿈꾸지 않는 이에게 어둠은 몰려든다 –128쪽 '생의 반역' 1연-강여울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2019-11-20 16:36:21

정성희 대구스포츠영화제추진위원장

[기고] 대구스포츠영화제에 거는 기대

스포츠는 환희와 감동이다. 환희와 감동은 자신을 극복하고 다스린 인간 승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지난 금요일부터 사흘간 스포츠 도시 대구에서 스포츠와 영화의 첫 만남이 있었다. 의기투합한 영화인들과 스포츠인들이 함께 모여 이곳 대구에서 스포츠영화제를 개최한 것이다.대구라는 도시의 이미지는 역동적이거나 젊다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대구에서 살다 보면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외부에서는 대구를 '젊음' '활력' 이런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소간 오래되고 정적인 도시로 인식된다.건강한 도시, 역동적인 도시, 젊은 도시, 소통과 화합의 도시로 거듭나고자 대구에서 스포츠영화제를 기획했다. 서울의 의식 있는 영화인들과 교류하면서 대구에 '제대로 된'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영화제를 한번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작용했다.스포츠에는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소통, 화합, 용서, 배려, 인내, 사랑이 녹아 있다. 그리고 희망, 감동, 용기, 우정, 극기가 담겨 있다. 이것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을 갖고 시민들을 찾는다면 공감을 얻지 않을까.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번 대구스포츠영화제를 통해서 답을 찾았다. 확고한 방향성을 갖고서 함께할 사람들이 모이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정 부분 대구를 변화시킬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었다.어느 종목,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스포츠 영화에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치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정직한 땀을 흘리는 숭고한 경쟁, 공동체의 소통과 화합, 영화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서 그 낯선 세계에 몰입하게 하여 깨달음을 갖고 현실로 복귀시킨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보는 재미다.국내 최초 대구스포츠영화제. 육상, 축구, 야구, 테니스, 펜싱, 양궁, 싱크로나이즈드와 같은 다양한 스포츠 종목을 소재로 하는 총 9편의 국내 및 해외 작품을 영화제 상영작으로 선정하였다.영화 후 이어지는 영화인과의 '시네마 토크', 스포츠인과의 '스포츠 토크'를 통한 작품 이면의 이야기는 관객을 위해 준비한 영화제의 수작업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선물들은 많은 분들의 가슴에 전해졌다. 개막작을 보고 나서 식지 않은 감동으로 영화제 기간 내내 영화관을 찾아주신 분들, 영화제 기간인 주말을 영화로 힐링하셨다는 분들, 관심 있는 스포츠 종목 영화를 보며 공감을 느끼신 분들, 이형택 테니스 감독과의 감격적인 만남, 상업영화에 묻혀 미처 관객을 만나지 못한 소중한 영화들은 영화제에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특권이었다.스포츠영화제의 취지에 공감하여 영화제작자, 영화감독, 영화배우, 스포츠인들이 먼 길 마다 않고 기꺼이 대구스포츠영화제의 건승을 기원하며 함께해 주셨다. 또한 대구의 많은 기관과 단체들이 영화제의 취지에 동참하여 벅찬 첫발을 함께 내디뎠다.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수반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사랑하기에, 수고로움을 힘겨워하지 않고 많은 분들과 함께 대구스포츠영화제를 시작한 것이다. 그 출발이 대구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대구에서 시작된 소통과 화합의 대구스포츠영화제가 전국으로, 세계로 한 걸음씩 나아가길 기대한다.

2019-11-20 11:21:10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매일춘추] 봉란이

마늘, 고추 농사가 대부분이었던 고향마을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농한기가 참으로 길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마늘만 심어 놓으면 다음 해 봄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어른들은 땔감이나 준비해놓고 나머지 시간은 '먹기 내기' 등 여가를 즐겼다. 그 여가 선용에 술이 빠질 리가 없었다. 집집마다 노란 주전자 하나씩은 다 있었고, 신작로 막걸리 됫술집으로의 심부름은 우리 아이들 몫이었다. 그 시절, 술을 받아 오면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보지 않은 이 별로 없었으리라.봉란이네는 막걸리 됫술도 함께 파는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농사일이 바쁜 일철에는 봉란이 부모님은 예닐곱 살밖에 안 된 봉란이에게 점방을 맡기고 들에 가곤 했는데, 이 아이는 나이도 어린 것이 아주 맹랑하고 똘똘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름보다는 똘똘이로 불렀다. 그 만큼 가게 물건도 잘 팔고 계산도 정확했다. 그렇지만 완벽하기만 했던 똘똘이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음주였다. 혼자 가게를 보면서 호기심에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다가 나중에는 몽롱하게 취하는 맛까지 알아버린 것이다.해가 빠질 무렵, 부모님이 들에서 돌아오면 봉란이는 신작로를 걸어 마실을 나오는데 이때부터 자기와의 눈물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툭툭 털며 일어나는 등 홍수환의 4전5기나 벽에 걸어두던 7전8기(七顚八起)는 저리 가라다. 어떨 땐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면서 무슨 일로 동생까지 업고 나와 마구 뛰다가 엎어지기도 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봉란이가 술을 마셨다는 것을 몰랐다. 영양실조인 줄 알고 원기소나 좀 사주라고 했으니 말이다. 술이란 과하다 보면 실수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는 애, 어른을 따로 구분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술의 폐해를 온몸으로 보여주던 꼬마 술꾼 봉란이는 좀처럼 술을 끊지 못하다가 아이를 걱정하던 부모님의 용단으로 막걸리를 들여놓지 않으면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된다.그 후로는 봉란이를 보지 못했다. 우리집이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인, 군대 첫 휴가 때 우연히 조우를 하게 된다. 귀대를 앞두고 고향마을을 들렀다가 봉란이를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는 활짝 피어 있었다. 그녀가 정말 예쁜 것이었는지, 여자에 대한 눈높이가 형편없을 수밖에 없는 군인의 특수 신분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예뻤다. 귀대 시간만 촉박하지 않았어도 그 전설적인 술꾼과 대작하는 영광을 누릴 기회가 있었을 텐데.내 여동생과는 동갑내기이기도 한 봉란이는 이젠 나이가 쉰도 훨씬 넘은 중년 부인이 되었겠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는 아직도 얼굴 빠알간 단발머리 소녀로 남아 있다. 유년시절의 재미있는 추억 한자락을 안겨준 봉란이는 지금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도 술을 마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술로 인한 좋지 않은 버릇은 없었으면 좋겠다. 주력(酒歷)으로만 본다면야 이미 주선(酒仙)의 경지에 올랐겠지만.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수필가

2019-11-20 11:18:36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

[매일TV] 협찬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