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영성학 교수

새 신을 갈아 신은 신축년 새해가 따뜻한 발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올해도 우리는 건강한 가정, 아름다운 사회를 기대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사회를 소망하며 달려왔는가. 1945년에 나온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두 권의 책은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는 닫힌 사회가 아니라 열린 사회라고 했다. 그가 말한 닫힌 사회는 '배타적 원리주의', '닫힌 민족주의', '집단 열광주의' 등이 활개 치는 곳이다. 그러면서 그는 열린 사회야말로 우리 인간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사회라고 했다.

열린 사회란 비판을 수용하는 사회, 잘못을 인정하고 실수를 받아들이는 사회, 다른 사람과 집단을 배제하지 않고 내가 틀릴 수도 당신이 옳을 수도 있음이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사회다. 칼 포퍼는 단지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자신의 고향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런 열린 사회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성이 다르고 인종이 달라도 차별받지 않고 배제당하지 않는 사회가 모두가 꿈꾸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배제와 차별은 좋은 가정, 열린 사회의 적이다. 우리가 사회의 제반 활동에 참여할 수 없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수도권에 살든, 중소도시에 살든, 높은 위치에 있든, 낮은 위치에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그 위치에서 차별받는다면 삶이 싫을 정도로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가난은 참을 수 있고 차이는 견딜 수 있지만, 차별만은 참을 수 없다. 정부의 코로나 방역을 지지하지 않을 국민이 없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방역에도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그런데 방역이 강화되자 스키장에 이어 헬스장과 카페 사업자의 불만이 분노로 바뀌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코로나 방역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방역에 차별받는다는 생각이 그들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차별이 존재한다. 심지어 일본의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인간이 타자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본능'이라고까지 한다. 더 절망적인 것은 '교육 수준이 높고,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더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끊임없이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다. 사회 복지에서 사용하는 노멀라이제이션(Normalization) 이론의 기여는 놀랍다. 노멀라이제이션은 우리말로 일상화, 보편화, 정상화가 아닌가? 이 이념의 본질은 장애인이 격리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정상화이다.

그러나 돌이켜보자. 차별의 벽을 쳤던 사람들이 과연 정상적인 사람들인가. 우리가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우리를 정상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가족이나 공동체의 구성원 가운데 장애인이 있는 가족이나 공동체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배려심이 많고, 따뜻하다. 사실 우리가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우리를 정상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며 어린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18:16)고 하셨다. 어린 아이야말로 변변찮은 존재고, 약자가 아니었던가? 예수님은 연약한 어린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셨다. 올해는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따뜻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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