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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역사와의 대화] 240년 전 여름, 박지원 열하를 가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40년 전 여름 박지원은 한양을 떠나 북경으로 향했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에 참석하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간 것이다.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떠났고, 6월 24일 압록강을 넘었다. 8월 1일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열하로 향했던 것은 건륭제가 여름의 더위를 피해 열하에 있는 피서 산장에서 휴가 중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원 일행은 북경을 거쳐 8월 9일 열하에 도착하였고, 이후 다시 북경을 경유한 후 한양으로 돌아왔다. 박지원은 이때 견문 내용을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정리했는데, 1783년에 완성한 「열하일기」가 바로 그것이다. 열하까지 간 여정은 대략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약 2천300여 리, 북경에서 열하까지 700리로 육로 3천 리의 긴 여행이었다. 먼 거리와 끊임없이 다가오는 산과 강, 변화무쌍한 날씨가 일행을 힘들게 했지만, 박지원은 가는 곳마다 세심하게 여행 스케치를 했고, 이를 명품 기록으로 남겼다.

「열하일기」는 총 26권 12책으로 구성되었다. 각 책 표지의 우측 상단에는 '도강록'(渡江錄)과 같은 소제목을 써서 열람하기 편하게 하였다. 「관내정사」는 산해관에서 연경까지의 일정을 기록한 것으로, 이 부분에는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소설 「호질」이 실려 있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머물렀던 6일간의 기록으로, 중국의 학자들과 두 나라의 문물 제도에 대해 논평한 것을 기록하였다. 홍대용의 지전설(地轉說) 등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지구의 자전 등에 관심을 보인 내용이 나타난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북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교량, 도로, 배의 제도 등 도로와 교통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다. 「피서록」은 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과 시문을 주고받은 내용을, 「옥갑야화」는 옥갑에서 비장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옥갑야화」에는 양반들도 생산에 종사해야 함을 강조한 '허생전'이 수록되어 있다.

「열하일기」 곳곳에서 박지원은 관찰한 사물 하나하나와 견문한 내용의 느낌을 비롯하여 구체적인 여정과 거리, 만난 사람들의 행태까지를 폭넓게 담았다.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기도 하였고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기록하였으며,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체 문체를 사용하는 등 판에 박힌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을 썼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한 점도 「열하일기」의 또 다른 미덕이었다. 박지원이 무엇보다 관심을 쏟은 것은 청나라의 발전상이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의 문물을 살펴보았고, 선진 문물 중에서 조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일신수필」에 실린 '수레를 만드는 법식'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성을 강조한 박지원의 생각이 집약되어 있다.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것이다. 나라의 큰 쓰임에 수레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바위가 많아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니, 어찌 거리가 비좁고 고개가 험준함을 근심하겠는가?'라는 부분에서는 수레를 만들 것과 수레 이용을 위한 도로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박지원을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의 중심인물로 꼽는 것은 국부(國富)나 민생에 필요하다면 청나라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선진 학문 수용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했기 때문이다. 240년 전의 저술이지만 「열하일기」의 기록이 지니는 의미가 여전한 울림을 주는 것은, 주변국에 대한 정확한 정세 파악과 합리적인 대응이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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