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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 현타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쌍규 영화기획자·작가
이쌍규 영화기획자·작가

요즘 대세 키워드는 '먹방'과 '트로트'이다. 어느 TV채널을 돌려도 두 가지의 키워드가 함축된 방송프로그램뿐이다. 먹방은 음식 관련 생활정보를 재미있게 전달하고, 맛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큰돈을 들이지 않고 음식점을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송가인에서 유산슬, 임영웅까지, 이제 트로트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촌스러운 탄식과 눈물의 음악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의 노래가 되었다. 왜 우리는 먹방과 트로트에 이토록 광분하고 있는가? 요즘 청년세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현타'라는 신조어가 있다. '현실 자각 타임'을 줄여 이르는 말이다. 나는 음식도, 음악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사회현상 속에서 숨어 있는 불편한 현타의 진실은 조금 말할 수는 있다.

먹방과 트로트의 신드롬. 어쩌면 이 현상은 현재 우리가 사고 있는 한국사회가 어둡고 솔직하지 않다는 역설의 증거이기도 하다. 양극화와 불평등 지표인 팔마비율은 1.44로 OECD 회원국 중에서 30번째로 나쁘다. 한마디로 진보와 보수는 없고, 위아래 불평등만 있는 '저녁이 없는 삶'의 신(新)계급사회다. 하류계급에게는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다. 의식주 중에 생존의 주거공간(住)을 마련할 희망도 없다. 평생 일해서 집 한 채 사기도 힘들다. 아마 좌절의 심리적 대체제가 '먹방'일지도 모른다. 절망의 박탈감이 조금이라도 망각되는 '식(食)의 문제'로 의도적으로 도피한 것이다. 음식은 가격이 아니라, 맛이다. 다소 자본의 가치 경쟁이 약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치권이 불평등을 미화하고 조장할 때, 민심은 솔직함의 저항으로 대응한다. 그 시작이 노래다. 직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트로트 가사가 현재의 답답한 사회에 대한 저항과 분노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대구 계산성당 역사관에는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8가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된 바보가 된다." 이 말을 다시 복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맨 뒤쪽의 설국열차 꼬리칸에서 TV를 보면, 나이 걱정도 되고,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도 하고, 내 이웃과 비교하기도 하고, 자격지심도 생기고, 나만 생각하고, 쉽게 포기하고, 불안의 강박증이 생기고, 막연한 기대감만 생각한다." 춥고 배고픈 우리 시민들이여! 자책하지 마라.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다. 국가와 개인의 책임을 혼동하지 마라.

국가는 시민의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클수록 계급적 편견과 혐오로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 국가는 경제성장률이 아닌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타의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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