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45년간의 변주(變奏)…『이태수 시선집 먼 불빛』

이태수 시선집 먼 불빛/ 이태수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시력(詩歷) 45년, 이상 세계 꿈꾸기와 그 변주(變奏)를 추구해온 이태수 시인이 새 시집 '먼 불빛'을 펴냈다. 1974년 등단 때부터 2018년 봄까지 14권 시집의 900여 편 가운데 100편을 엄선해 실었다.

시인은 권두언에서 '매듭 하나를 짓고 나니 적잖이 허탈하다'며 '길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걸음으로 가는 데까지 가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적고 있다.

황동규 시인은 그를 '자연과 신(神) 사이 인간의 불편한 진실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래해온 시인'이라고 평했고, 김주연 문화평론가는 '그의 언어는 성스러운 기도이자, 인간의 언어이면서 끊임없이 신성을 환기시킨다'고 평가했다.

◆남루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선친의 오랜 병고와 생활고는 소년 이태수를 내면으로 침잠시켰고, 샤르트르, 카뮈,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는 청년 시인을 끊임없는 '삶에의 회의'로 몰아넣었다. 비루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역설적 대응을 모색하던 시절, 이태수는 자신의 초기작 사조를 이렇게 정의한다.

"1970년대의 시는 표류하는 현실적 자아와 그림자에 이끌려 어두운 방황을 거듭하는 내면의 그늘을 교차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 '낮술'에서처럼 진정한 자아 찾기 아픔을 서정적 언어로 그려나갔죠."

무서워요. 눈 뜨면 요즈음은/ 칼날이 달려와요. 낮과 밤/ 꿈속에서도 매일 목 졸리어요./ 누군가 자꾸/ 자꾸 술만 권해요.// 거울을 깨뜨려요./ 구석으로 움츠리며 낮술에 젖어/ 얼굴 버리고 걸어가요. 요즈음은/ 아예 얼굴 지우고, 깨어서도/ 잠자며 걸어가요.// 걸어가요. 한반도의 그늘 속을/ 낮술에 끌리어 낮달처럼/ 희멀겋게 희멀겋게 다섯 잔/ 여섯 잔, 열두 잔-'낮술'

1980년대 들어와 이태수의 시는 말(言)을 비참하게 하는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완강한 몸짓을 보인다. '우울한 비상의 꿈' '물속의 푸른 방'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이 무렵 저의 시는 비현실적 상황 설정으로 새로운 길 찾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정서적인 꿈에 무게가 실린 건 현실을 도피하려는 게 아닌 극복을 위한 역설적 접근이었던 것이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시인은 너와 나의 문제를 축으로 인간관계에 눈을 돌리는 한편 신과 인간의 중간지점에 자리 잡으며 초월에 다다른 존재로서의 '그'를 찾아 나선다.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서 시작된 이런 초월자에 대한 경외는 '꿈속의 사닥다리'에서 본격화된다.

◆삶의 비애를 쓸쓸한 언어로 묘사=낮에는 실용문, 밤에는 시 작업. 매일신문에서 문화부 기자로, 데스크로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이태수는 항상 이 딜레마에 갇혀 있었다고 말한다. 낮에는 기자로서 팩트(기사)를 써야 했고, 저녁엔 다시 오감에 몰입하는 시인의 숙명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이태수는 둥글고, 맑은 이데아로서의 '그'를 찾아 나서고,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이 그런 둥근 세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원과 초월에의 의지를 집중적으로 노래한다.

그의 집은 둥글다. 하늘과 땅 사이/ 그의 집, 모든 방들은 둥글다./ 모가 난 나의 집, 사각의 방에서/ 그를 향한 목마름으로 눈감으면/ 지금의 나와 언젠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검고 깊게 흐르는 강./ 모가 난 마음으로는/ 언제까지나 건널 수 없는 강./ 신과 인간의 중간 지점에서 그는 그윽하게,/ 먼지 풀풀 나는 여기 이 쳇바퀴에서 나는/ 침침하게, 눈을 뜬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의 집은 둥글다. 하늘과 땅 사이/ 그의 집, 모든 방들은 둥글다.-'그의 집은 둥글다'

이 시기 이태수는 삶의 비애와 마주치는 아픔을 신성하고 처연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오생근은 "이태수에게는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덧없는 삶에 갇혀 있지 않으려는 의식이 어떤 그리움이나 기다림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며 "그것이 바로 시를 쓰는 마음의 원동력이 된다"고 분석했다.

그가 북부본부장으로 근무할 때 펴냈던 '안동 시편'엔 이방인으로서 안동을 다니며 깊게 흐르는 선비정신을 숭앙했고, '내 마음의 풍란'에서는 IMF 사태 등 세기말의 어둠이 우리 사회를 엄습했던 시절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내고 있다.

◆현실 초월을 화두로 이상적 경지 꿈꿔=2007년 신문사를 퇴임하면서 이태수는 시인으로만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2008년 '회화나무 그늘'은 은퇴 후 일상에 내던져진 시인이 생활리듬이 깨지면서 방황하는 흔적들이 잘 나타나 있다.

2010년에 들어서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나자 말에 대한 외경심이 커졌다. "이 시기에는 침묵과 비우기와 내려놓기가 제 작업의 화두였습니다. '침묵의 푸른 이랑' '침묵의 결'이 이 시기의 흔적입니다. 평소 귀감으로 삼아오던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라는 말의 뿌리까지 한번 내려가 보고 싶었죠."

'침묵에 들기'에 집중하던 시인은 '따뜻한 적막'을 펴내며 칩거에서 빠져 나온다. 2016년 무렵 이태수는 대상을 포용하며 '적막'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시인의 마음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그동안 그는 1천 편에 가까운 시를 썼다. 꿈과 현실 사이를 떠돌며 여기까지 왔지만 여전히 꿈은 현실 저 너머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15권 시집 속엔 현실 초월을 화두로 삶의 이상적 경지를 꿈꾸며 내면 탐색을 거듭해온 시인의 실존적 방황이 감지된다.

신성한 세계 꿈꾸기를 통해 절대자에게 귀의하고 자기 성찰, 수신(修身)을 통해 인간으로서 복무에도 충실하지만 그의 모든 시적(詩的) 여정은 '먼 불빛'에서 오히려 뚜렷해진다. 232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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