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反일본이 아니라 反아베다

이상준 사회부 차장
이상준 사회부 차장

여기 한 장의 흑백사진이 있다. 때는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잔뜩 흐린 하늘에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애도를 표하다가 갑자기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과거 나치 독일에 상처받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날 사진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됐고, 서독 총리의 진심 어린 참회와 사죄에 전 세계가 환호했다. 독일의 진정성이 유럽연합 창립으로 이어지는 등 유럽의 평화와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역사 인식은 어떠한가. 1945년 패전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진심 어린 참회와 사죄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오히려 2012년 재취임 이후 장기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른바 '극우 포퓰리즘'을 통해 식민 지배의 정당성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2013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이어 2014년 위안부 피해자의 강제 동원을 부인했다. 2015년 패전 70주년 담화에선 "미래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라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급기야 아베 정부는 지난해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 한국과의 역사 갈등이 이슈로 떠오르자 수출규제와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제외라는 '경제 보복'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기저에 깔고 외부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화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이 같은 아베 정권의 극우 포퓰리즘에 대한 한국 정서가 '반(反)아베'가 아니라 '반(反)일본'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봉주 전 의원이 공개한 '일본 가면 코피 나' 티셔츠 사진이다. 정 전 의원은 SNS에 "2020년 올림픽도 참가하면 방사능 세슘 오염 때문에 코피 나고 암 걸린다는 것을 널리 알리겠다"고도 적었다.

응원글 못지 않게 비판글이 달렸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가벼움이 무기가 되는 국면이 아닌데도 상황 파악도 못하고 눈치도 없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SNS에는 대구도시철도 승강장이나 열차에서 방송하는 일본인 대상 안내 방송을 중지해 달라는 주장도 나와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일 대구도시철도공사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는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듯 대구 지하철도 일본어 안내 멘트를 확 빼내자"는 글이 올랐다.

해당 게시물을 공유한 페이스북 페이지 '실시간 대구'의 댓글창에서 "공용어도 아닌 일본어 방송은 필요없다"는 주장과 "한국에 넘어와서 열심히 살고 있는 좋은 (일본) 분들도 있다. 잘못에 대해 곱절로 보복하는 게 맞지만, 같은 국적이라고 무작정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맞서고 있다.

극단으로 치닫는 반일 감정은 '여권'이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 여론도 들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일본의 경제 보복에 맞서는 것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규정한 데 이어 '일본 전역 여행 금지 구역 설정 검토' '내년 도쿄올림픽 보이콧 고려' 등 자극적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친일(자유한국당)·반일(민주당) 구도를 내년 총선에 유리하게 이용하자는 민주당 내부 보고서까지 나왔다.

아베 정권과 일본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개념적인 반일과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정치권 행태는 우리 국론만 분열시킬 뿐 국익과 한·일 관계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못된 역사 인식과 경제 보복의 당사자가 '아베 정부'이지 선량한 '일본 국민'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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