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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뭔가 이상하다

[광장] 뭔가 이상하다

나는 아파트에 살면서 식물과는 인연이 없었다. 식물이 우리 집에만 오면 살지 못했다.아파트는 층수가 높고 실내 공기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핑계를 댔지만, 내가 식물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8년 전 한옥으로 병원을 짓고, 마당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다. 처음 2년간은 나무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소문으로 좋다는 것에 욕심을 내고 심었다가 관리가 되지 않아서 수시로 파고 뒤집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자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아파트 생활에서는 몰랐던 계절의 변화를 나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꽃은 각자가 원하는 시간 간격을 두고 피었다. 아직 추위가 남아 있는 이른 봄에 매화가 피면 뒤이어 수선화, 벚꽃, 라일락, 수국이 뒤를 이었다. 그렇게 몇 달간 꽃을 즐기면 더운 여름이 왔다. 이런 간단한 즐거움만을 가지고 꽃에 관심을 가지니 나무가 죽는 일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언제, 어떤 꽃이 피는지 알게 되고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런 순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봄이 되면 꽃은 한꺼번에 폈다가 같이 사라졌다. 뭔가 자연의 질서가 무너진 느낌이다.올해 의사 된 지 40년이다. 의사로서 경험이 쌓이면 환자 보기가 쉬워야 하는데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서 금연하고, 운동하고, 붉은 고기 적게 먹고, 채소 많이 먹으라고 하지만, 폐암의 30%가 비흡연자이고, 수유를 하고 채소만 먹어도 유방암, 대장암에 걸리는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 과거 젊은이들이 암을 걱정하면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노인이 암 검진을 계속 받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암이 생길 수도 있지만 성장이 느리니까 이상을 느끼면 방문하고, 그 돈으로 고기나 사 드시라고 돌려보냈었다. 그런데 요즘 20대 젊은이들 암이 늘어나고, 80대 암도 예측 불가능하게 자라는 속도가 달라졌다.뭔가 이상하다. 식물들은 지구상에서 긴 시간 동안 각자 자라기에 맞는 장소를 찾고, 언제 꽃을 피워야 자기 종에 유리한지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런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은 주위 환경이 식물에 혼동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아주 뛰어난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로 병이 생기는 것을 막는다. 인간이 암에 걸리는 것은 유전자의 돌연변이 때문이다. 그런데 암이 증가한다는 것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외부 환경이 우리 몸의 해결 능력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변화의 원인은 단순히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다. 원인을 쉽게 찾아서 명쾌하게 해결을 못 하는 이유다.몇 년 전부터 나는 이런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찾다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호르몬이라고 부르는 화학물질과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불건강한 먹거리로 인해 인류에 무언가 큰 위협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재앙이었다. 그런데 몇 달간 찬찬히 점검해 보니 그게 전혀 다른 현상이 아니었다. 모습만 달리한 재앙이었다.연결 고리는 흙을 만지면서 알았다. 나무를 키우면서 흙을 만지니 뿌리와 그 주위의 벌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로 도우면서 각자 살아가는 이치가 재미있다. 흙과 벌레들의 변화를 관찰하며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 복잡하게 얽힌 이상한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직감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다.

2020-07-10 14:00:30

[광장] 뜻하지 않게 의뢰받은 정원 이름 '모네 연못정원'

[광장] 뜻하지 않게 의뢰받은 정원 이름 '모네 연못정원'

10여 년 전 학교 기숙사의 조그마한 연못정원 설계를 맡은 적이 있다. 참으로 난감하게도 그 일을 의뢰한 총장은 모네정원을 만들어주기를 요청했다. 의뢰인은 가보지도 않은 채, 모네의 유명한 그림만 보고는 막연히 그런 정원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매사 열심히 사시는 분의 말씀이라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일을 맡은 나로서는 고민이었다. 몇 달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모네정원이 아닌 바이올린정원이라면서 의뢰인에게 설계안을 보였다. 그랬더니 의뢰인은 못내 아쉬워하면서 이름이라도 모네연못이라고 명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연못의 정식 명칭은 모네연못이다. 모네의 정원을 보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엉뚱한 정원이 나와서 당황하신 분도 있을 것이다.나의 의뢰인은 모네의, 연못 중심의 아름다운 정원을 상상한 것 같다. 모네는 왜 그런 연못정원을 만들었을까? 모네의 연못정원은 프랑스 지베르니의 집에 실제로 있는 곳으로 그곳은 그가 그림을 그리고 산책을 한 그의 삶의 터전이었다. 30여 년 전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내 기억도 상당히 퇴색해 있다. 당시 나는 '모네의 정원'을 비롯한 멋진 그림을 기대하며 지베르니의 모네 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 집의 반은 요리 기구로 채워져 있었고, 반은 일본 채색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모네의 그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꽃으로 장식된 정원과 정원 깊숙이 감춰져 있는 연못을 보면서 그림과는 다른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모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녹색의 아치형 일본식 나무다리와 다리 아래로 늘어진 수많은 바빌론 능수버들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수련과 한쪽에 멈춰진 녹색 나무배가 내 눈앞에 현실로 펼쳐져 있었다. 모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이 현장을 화폭에 담으려고 수없이 찾았을 것이다. 모네의 연못정원은 화가로서뿐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모네의 삶이 녹아있는 곳, 순전히 그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단지 우리는 그 연못정원을 보면서 모네라는 한 화가의 삶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그렇다. 정원은 주체자의 삶의 일부이다. 헤르만 헤세는 정원 가꾸는 일이 귀찮다면서도 매일 나가서 정원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한다면 대학 기숙사의 연못정원 역시 학생들의 삶의 공간이다. 나는 오랜 고심 끝에 모네의 정원 모방을 포기하고, 학생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서의 연못정원을 설계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연못정원의 주제를 음악으로 정했다. 연못의 형태는 바이올린을 연상하게 그렸다. 또 무대도 필요했다. 무대에 앉으니 초화류(草花類)의 청중도 장식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무대의 장막으로 능수버들을 심었다.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모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베르니의 모네정원을 방문한다. 학교 기숙사의 모네의 연못정원은 학생들이 이용하고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공간이다. 두 정원은 이름은 같으나 주체자가 다른 공간이다. 주체자가 다르니 장소도 만든 사람도 당연히 다르다. 지금도 나는 모네의 정원이 학생들에게 힐링의 공간으로 느껴지기를 바란다. 내가 만든 모네의 정원을 오가면서 그들이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위로받고, 힘을 얻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어느 날, 그들 중 누군가가 프랑스 지베르니의 모네정원에 서서 바이올린의 선율이 흐르던 기숙사 옆 바이올린정원을 떠올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행복한 감상이 그들 삶을 더욱더 풍요롭고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020-07-03 15:50:04

[광장] 달성(達城)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광장] 달성(達城)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에 관한 우리 지역 얘기를 끝으로 필자의 칼럼도 마치고자 한다. 1808년 프랑스 정치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로 해석된다. 로마 공화정이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2년)을 치르는 동안 최고위직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1440년 헨리 6세에 의해 설립된 세계적 사학 명문 영국 '이튼 칼리지'(Eton College)가 있다. 교내 운동장 건물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전장에서 죽어간 1천900여 명에 달하는 이튼 칼리지 출신의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두고 있다. 미국도 1950년 한국전쟁에 142명의 장군 아들이 참전하여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은 어떤가? 물론 훌륭한 지도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논문 표절, 신분적 갑질, 탈세, 횡령, 성추행,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불법 증여, 이중 국적 등 종류도 많고 다양하여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쉽지 않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스럽다. 오히려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병들고 부패한 귀족이라는 의미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반대말이다. 그렇지만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는 미담(美談)이 들려온다. 오늘은 우리 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대구읍지』와 『달성 서씨 학유공파보 권상(卷上)』의 기록 중,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종께서 구계(龜溪) 서침(徐沈) 선생이 살고 있는 달성의 지형이 말(斗)처럼 우묵하고 천혜의 환경을 갖춘 성(城)이므로 국가에 바치고 대신 남산 옛 역터에 더하여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또는 蓮信新池)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침 선생은 나라 땅이 모두 국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는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다른 청을 하라고 했다. 이때 서침 선생은 개인의 사사로운 보상보다는 대구 지역민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한다면서 대구 지역민들에게 상환곡 이자를 한 섬당 5되 감해주기를 청했다.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서침의 인간됨을 높이 사고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다.이로부터 대구 지역민들은 상환곡 이자를 탕감받게 돼 그 보답으로 서침 선생의 공덕을 찬양하여 1665년(현종 6년),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連龜山·현 제일중학교 교정) 북편에 숭현사(崇賢祠)를 짓고, 1675년(숙종 1년) 서침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서침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대구의 진산 연귀산에 있었던 숭현사는 1718년(숙종 44년) 중구 동산동 지금의 신명고등학교 옆으로 이건하여 '구암(龜巖)서원'이 된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세웠다. 1995년 지금의 자리인 북구 산격동 연암산 연암공원 내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지역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경주 최씨 가문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한 일, 1778년(정조 2년) 대구 판관 이서가 그의 사재(私財)와 지역민 후원으로 신천에 제방(상동교-수성교)을 쌓아 신천 범람으로부터 대구 사람들의 인명과 재산을 지켜준 일은 참으로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체를 통해 코로나19로 피폐해진 지역민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0-06-26 16:12:26

[광장] 분홍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광장] 분홍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국민들이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실을 부정할수록 듣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BBC 앵커 출신인 빌 맥파런은 부정적인 언어를 분홍 코끼리로 비유했다. 덩치 큰 코끼리가 만약 분홍색이기까지 하다면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있겠는가. 부정적인 표현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격성과 차별을 내포한 히틀러의 언어가 전쟁을 초래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언어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갈등의 악순환을 유발한다.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새로운 것을 표현할 때 기존 언어의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한계'라고 했고, 사피어와 워프(Sapir&Whorf)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고 했다. 독일인들은 물 위에 놓인 다리를 보고 아름답다, 우아하다는 형용사를 떠올리지만, 스페인어 사용자들은 강하다, 길다와 같은 남성적인 단어로 수식한다. 다리가 독일어에서는 여성명사지만 스페인어에서는 남성명사이기 때문이다. 언어마다 주목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 언어의 사용자들도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달라진다. 우리는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고 있지만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인들은 다섯 가지 색으로 나타낸다. 색깔을 구분하는 단어의 유무에 따라서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르게 인지하는 것이다.생각은 말을 만들고 말은 사람을 만든다. 언어는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동안 man으로 끝나는 남성형 단어들이 여성까지 포괄해 왔지만, 타임지는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이 남성 중심적 표현이라는 이유로 Person of the Year로 바꿔 부르고 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적 사고의 차이가 언어로 드러나기도 한다. 영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바이링구얼(bilingual)에게 자신과 가족 중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라고 했을 때 영어로 질문했을 때는 '자신'을, 일본어로 질문했을 때는 '가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말에서는 동사가 문장의 맨 끝에 오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끝까지 들어야 한다. 이러한 돌려 말하기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큰 의미를 두는 동양권 문화의 반영이기도 하다.서유럽의 정치적·종교적 통일을 이뤄낸 카롤루스 대제는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두 개의 영혼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언어는 내적인 사고와 불가분의 관계다. 일본 제국주의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를 금지했고, 조지 오웰의 1984에서 그린 감시 사회에서도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하기 위해 어휘의 개수를 축소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어의 제한은 디스토피아의 클리셰다. 앞서 빌 맥파런이 제안했듯이 언어에서 몰아내야 할 것이 있다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언어들이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와 언어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넓게 보는 안목을 가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잘될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을 하다 보면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처럼.

2020-06-19 14:20:19

[광장] 전쟁과 평화

[광장] 전쟁과 평화

전쟁의 상흔은 생각보다 치유되기 힘들다. 부서진 건물과 도로가 복구된다고 전쟁의 상흔이 끝난 것은 아니다. 1차 세계대전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7년간의 전쟁이었지만, 상흔은 7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세계대전 당시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국경이 나누어진 아프리카 대륙은 아직도 종족 갈등과 내전이 진행 중이다. 영국에 할양되었던 홍콩은 반환 이후 현재까지 민주화 투쟁이 진행 중이다.미얀마도 그러하다. 미얀마 접경 지역 로힝야족 난민촌은 말 그대로 인종 청소가 진행 중이다. 아웅산 수치는 이 비극을 외면하고 있다. 그녀의 노벨평화상을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 정도로 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버마(지금의 미얀마)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로힝야족을 용병으로 활용한다. 로힝야와 일부 소수민족은 버마 독립군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탄압한다. 수치의 아버지이자 버마 독립군의 대장이 아웅산 장군이다. 아웅산 수치는 평화의 상징이었지만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은 묵인하고 있다. 민족과 역사적 트라우마 앞에 인권이 멈춰 섰다.한국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일제의 식민지 처지에서 의도치 않게 태평양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독립을 맞이했지만 사회는 세계사적 흐름에 따라 사상이 나뉘어지고, 사회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제대로 꾸려지기도 전에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상황에 처했다. 남북 분단이라는 결과 아래 안보는 제1의 가치가 된다. 혼란한 사회를 규합하고,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집권하게 되고 군사 문화는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게 된다.대한민국 스포츠는 폭력과 얼차려의 문화가 전 세계 어느 곳보다 강하다. 전체주의 독일이나 이탈리아보다 더 엄격한 학교 문화가 한국의 학교 문화이다. 군대 제복 같은 교복과 짧은 단발, 학교에서 실시된 전쟁 대비 수업이 있었다. 회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1970, 80년대 제조업 현장은 군대식 기숙사와 아침 조회, 단체 체조 같은 것이 존재했다. 이제는 추억의 한 페이지처럼 남아 있는 기록이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군사문화가 스며 있었다.안보라는 가치를 바탕에 두고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전쟁을 대비해 오고 있었다. 아직 종전도 아니고 휴전 상태인 분단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지만, 군사문화라는 것이 제한하는 인간의 권리 상황은 생각보다 넓었다. 아이들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추고, 운동선수의 인권은 합숙소 앞에서 멈춘다고 했다. 이 전쟁의 상흔이 아직 우리 사회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아직도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면, 누군가는 "전쟁을 안 겪어봐서 철없는 소리를 해댄다"며, 당장 전쟁을 일으켜야 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증오와 낙인찍기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서북청년단을 단체 이름으로 내세워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전쟁의 상흔은 이렇게도 진행 중이다. 치유하지는 못할망정 다시 분열과 대립으로 상처를 파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인간의 존엄이 철저하게 말살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것은 인류의 과제였다. 전쟁의 종료가 곧 평화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대전 이후 인권의 최대한 보장을 위한 '세계인권선언'이 유엔에 의해 채택되고 각국 헌법에 반영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6월이다. 아픈 전쟁의 기억을 되새겨야만 하는 이유는 대립과 복수가 아니라 평화와 공존을 위함이 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는 전쟁의 종료가 아니라 전쟁의 상흔이 모두 치유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이다.

2020-06-05 16:30:00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 <하>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마지막 부분에서 살내 유래를 설명했다. 즉,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동화천을 사이에 두고 양 진영에서 쏜 화살로 하천이 화살로 가득했다 하여 유래된 살내(전탄)에서 왕건 군대는 승기를 잡고 견훤 군대를 추격하게 된다. 전황(戰況)이 반전된 것이다. 추격을 하면서 왕건은 병사들로 하여금 주변 지역 경계에 태만함이 없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유래된 지명이 '무태'(無怠)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 의병장이었던 태암 이주(李輈)의 충절을 기릴 목적으로 인천 이씨 후손들이 세운 환성정의 '환성정기'(喚惺亭記)에 무태 지명 유래와 관련한 문구가 있어 흥미롭다. '동즉려조지토견훤시경군왈무태자야'(洞卽麗祖之討甄萱時警軍曰無怠者也)가 바로 그것이다.무태를 지나 연경동을 통과할 때, 경전을 읽는 선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 이곳 지명이 '연경'(硏經)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경동은 대구 최초의 사립학교인 연경서원이 1563년 건립된 곳으로 교육도시 대구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후 왕건 군사와 견훤 군사는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파군(破軍)재로 유인한 견훤 군사에 의해 왕건과 그의 군사는 괴멸된다. 그래서 파군재 지명이 유래하게 된다. 파군재 전투에서 위기감을 느낀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은 왕건을 살려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여기서 생겨난 지명들이 왕산(王山)과 지묘(智妙)동이다.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의 기묘한 지략으로 왕건을 살린 곳이라는 의미다.이제 왕건으로서는 사지를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 왕건은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하기 시작한다. 홀로 앉아 퇴로를 궁리했던 바위로 동화사 부속 암자 염불암 뒤편에 위치한 일인석(一人席), 홀로 앉아 쉬어 갔다는 봉무동의 독좌암(獨坐岩), 전쟁 통에 노인과 부녀자는 숨어 버려 노인을 볼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유래된 불로(不老)동을 거쳐, 평광동에 이른다. 여기서 나무꾼으로부터 얻어먹은 주먹밥의 힘으로 간신히 초례봉(醮禮峯)을 넘는다. 나중에 나무꾼이 그때 자신이 준 주먹밥을 얻어먹은 사람이 왕건임을 알고 이곳에서 왕을 잃어 버렸다고 하여 실왕리(失王里)가 되었고, 지금의 평광동 시랑이다. 물론 견훤 군사 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왕건을 놓쳤으니 그 또한 실왕리가 된다고 하겠다. 초례봉은 왕건이 천지신명님께 기도를 드린 곳이라는 기록이 고문헌에 남아 있다. '초례'는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다.초례봉을 넘어 견훤 군사의 추격으로부터 멀어지자 마음이 안정되어 길을 걸었던 곳이 지금의 안심(安心)이다. 마음이 진정된 상태에서 비로소 하늘을 바라보니 반달이 떠 있어 반야월(半夜月) 지명이 유래된다. 율하천을 따라 내려오던 왕건은 금호강 팔현습지에서 강을 건너 앞산으로 숨어들었다. 앞산 큰골의 은적굴(은적사)은 왕건이 앞산에서 처음으로 몸을 숨긴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그 후 안지랑골로 이동하여 안일암에서 잠시 쉬게 된다. 그때 견훤은 왕건을 찾아 이곳 안지랑골까지 오게 되니, 왕건은 다시 안일암 위쪽으로 피신하여 왕굴에 숨는다. 그때 거미들이 떼를 지어 와 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 견훤 군사가 굴 내부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못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왕굴 역시 왕건이 잠시 피했던 곳에서 유래된다. 잠시 후 산을 넘어 앞산 달비골에 위치한 사찰에서 며칠을 피신하여 편안히 지내니 그 절 이름이 임휴사다. 이처럼 지역에는 공산전투와 관련한 많은 흥미로운 지명들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그때의 처절했던 얘기를 전해준다.

2020-05-29 17:30:00

[광장] 나는 인정받을 때 더 잘한다

[광장] 나는 인정받을 때 더 잘한다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칭찬이 없으면 불안하고, 주변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며,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포장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내게 의미 있는 사람일수록 인정 욕구는 간절해진다. 조직관리 전문가인 피터 브레그먼(Peter Bregman)은 미국 IT회사의 유능한 직원인 래리의 사례를 소개한다. 래리는 1억원이라는 통 큰 보너스를 받고도 돌연 사표를 냈다. 그의 팀장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책상 위에 수표를 놓고 갔다는 것이 이유였다. 래리의 지갑은 채워졌지만 심리적 보상은 충족되지 못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보상은 당신이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물론 물질적 보상은 인정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다. 두 달에 한 번씩 보너스를 주는 회사가 왜 존재하겠는가. 물질적 보상이 지나치게 적으면 근로 의욕의 저하나 높은 이직률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물질적 보상이 2배 늘어났다고 해서 근로 의욕이 2배 또는 그 이상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연봉 인상이나 승진 등 외적 보상은 휘발성 높은 알코올이나 복용량이 늘어나는 진통제와 같다. 직원이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방법일 뿐, 오로지 돈 때문에 하는 일로 변질되거나 금세 그 이상의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변화가 빠른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외부의 반응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인정이라는 중독에 취약하다. 회사에만 가면 답답하고 무기력하다는 직장인들의 호소가 그 방증이다. 인정 욕구의 결여는 절망과 분노를 야기하고, 오히려 다른 물질적 보상을 통해 그 허기를 채우려 하게 된다.우리 사회는 여전히 칭찬에 인색하기만 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성실하고 진실하게 일한다고 해서 모든 이가 항상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가급적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바쁘다거나 질투, 경쟁심과 같이 칭찬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의해 정신적인 인정은 결여되고 물질적인 보상에만 그치게 된다. 리더라면 직원들의 노력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감사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칭찬을 받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복내측 전전두피질은 금전적 보상을 받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와 일치한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보너스를 준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칭찬은 가성비 최고의 방법이지 않은가.물질적 보상과 정신적 보상은 인정 욕구를 구성하는 2개의 축이다. 전자는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후자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 개인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어느 쪽에 더 방점을 찍느냐는 문제는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인간은 삶의 전 차원에 걸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인정할 때다. 인정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며 열정 엔진이 돌아가게 하는 연료다. 인정 욕구는 사람마다 요구 사항이 다르기 때문에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칭찬해 줄 필요가 있다. 타인을 인정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자신감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2020-05-22 17:30:00

[광장] 신돌석, 못다 이룬 꿈

[광장] 신돌석, 못다 이룬 꿈

작년 5월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있는 신돌석 장군의 생가와 사당 및 기념관을 찾았다. 영덕군청의 김신규님으로부터 '호국의 씨앗, 영덕에서 발아하다'와 '소설 신돌석, 평민 출신 의병장'(백상태)을 얻게 되었다. 이 책들과 '신돌석, 백년 만의 귀향'(김희곤)을 자료로 오는 6월 1일 '의병의 날'을 앞두고 그의 삶을 조명해 본다.장군의 본명은 태호이고 아명이 돌석이었지만 후일 영릉의진(寧陵義陳)을 일으킬 때 돌석을 장군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평민 출신이었지만 부친의 노력으로 이중립 선생의 육이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천자문', '명심보감'을 거쳐 '소학'을 끝내기 전에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이때 장군은 15세였다. 훗날 '손자'와 '오자' 같은 병서를 스스로 읽을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19세인 1896년에는 김하락의진을 따라 영덕 남천변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후 추적을 피해 남으론 청도, 경주, 울산까지, 북으론 강릉을 거쳐 함흥까지 나아가 일본의 만행을 목격했고, 만나는 사람들과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다.1904년 평해 월송정에 올라 "누각 오른 나그네 갈 길 잊고서/ 무너진 단군 옛터 안타까워하네!/ 남아 27세에 무슨 일 이루었나?/ 잠시 갈바람에 기대니 감개만 돋아나네!"라는 칠언절구 한시를 읊었다. 김희곤 교수는 장군께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했다.1906년 4월 6일, 장군은 200~300명 규모의 영릉의진을 일으켰다. 대부분은 농민, 어부, 도부꾼이었지만 대의에 동참하는 소수의 양반들도 있었다. 풍전등화 같았던 대한제국의 운명 앞에 용력, 지력 및 경험까지 갖췄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장군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진대장에 추대되었다. 이는 인력동원뿐만 아니라 무기와 장비, 의복 및 식량을 동원할 능력을 갖췄음을 뜻한다.이후 2년 8개월간 영릉의진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태백준령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을 넘나들며 신출귀몰한 무용을 펼쳤다. 1907년 후반까지는 300명으로 추산되는 큰 규모로 움직였으나 일본군 토벌대의 집중 공격이 시작된 1908년부터는 소규모로 나뉘어 일월산과 백암산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장호동의 일본인 기지 공격, 울진의 일본인 공격, 일본군 토벌대와의 수차례 전투 등 무수히 많은 전투를 벌여 일본군과 진위대에겐 공포의 대상이었고 민중에겐 든든한 '태백산 호랑이'였다.통감부는 의병의 활동을 막기 위해 1907년 말부터 귀순자에게 면죄부를 주며 귀순을 종용하였다. 이런 조치와 토벌대의 집요한 추격으로 1908년 가을엔 귀순자가 많이 생겼고 그해 말엔 의병의 수가 20명 선으로 줄었다. 이때 장군은 의진을 해산하고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할 계획을 세웠다.이런 와중에 장군은 영덕군 북면 눌곡에 있는 김도윤(상근으로 개명)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김도윤은 한때 장군의 부하였고 외외가 쪽 친척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군에게 붙은 현상금을 탐낸 김도윤과 그의 형 김도룡(상열)에 의해 집 근처 계곡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1908년 12월 12일 새벽,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난 나라'를 만드는 미완의 꿈을 안은 채 서른한 살의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했다.세월은 흘러 112년이 지났지만 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고, 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장군의 못다 이룬 꿈은 이제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꿈이 되었다.

2020-05-15 18:19:38

[광장] 젊음이 그만 라면 같아라

[광장] 젊음이 그만 라면 같아라

1986년. 외사촌 언니들이 직장을, 학업을 이유로 대구로 나와 우리 집 근처에 셋방을 얻었다. 언니들이 근처에 있어 가장 좋은 이유는 그 셋방에 놀러 가면 늘 곤로에 끓여낸 라면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라면을 앞에 놓고 길쭉한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채널을 맞춘 9시 뉴스는 온통 아시안게임 이야기였다. 그중에 단연 화제는 임춘애였다. 육상에서 우리에게 금메달을 안겨준 그녀는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어 라면만 먹고 뛰었다고 했다. 내 앞에 차려진 이 맛있는 라면과 임춘애의 고단함이나, 퇴근한 언니들의 피곤함을 연결해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30년이 지난 2016년. 서울 구의역에서 홀로 지하철 전동문을 수리하던 김 군이라는 청년이 죽었다. 김 군의 가방에서는 엄마가 밥이라도 같이 먹으라며 챙겨준 숟가락과 컵라면이 나왔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노동하다 사망한 김용균 씨의 마지막 유품도 컵라면이었다. 제시간에 따뜻한 김이 나는 밥 한 그릇 먹을 시간도 없이 고단한 그들의, 노동의 마지막 음식이 컵라면이었다. 그들의 라면은 삼십 년 전 가난하고 힘들어 뛰었다는 임춘애의 라면과 분명히 노동으로 고단했을 외사촌 언니들이 끓여낸 라면과 겹쳐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천에서, 구미에서 아니 대한민국 곳곳에서 청년들은 노동 현장에서 떨어지고 깔리고 불에 타서 혹은 스스로 죽어갔다. 죽음의 순간에도 비정규직, 일용직, 임시직, 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청년들의 목숨이 오 분이면 혹은 삼 분이면 뚝딱 완성되어 젓가락질 몇 번이면 끼니가 해결되는 라면 같았다.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지만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젊음이 살아남기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게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수저'라는 신종 계급론에 따르면 금수저를 가지지 못했기에 죽음을 목전에 둔 노동 현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노동은 의무이기 이전에 권리다. 인간이 누려야 하는 존엄한 가치로서의 권리가 된다. 세계인권선언 23조와 24조는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유리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며 실업에 대한 보호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하여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정기적인 유급휴가와 휴식과 여가를 누릴 권리도 가질 수 있다고 되어 있다.공동체 유지를 위해 건강한 노동을 지속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노동은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젊은 노동이 안전하도록, 차별받지 않도록 건강한 노동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는 국가가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노동이 계급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제도와 경제 구조를 개선해야 할 의무도 젊은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에 있을 것이다.그 시절 외사촌 언니들의 젊음도 쌀밥에 반찬을 차려내 먹고 다니기에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가벼운 라면이 주식이 되었을 것이다. 임춘애 역시 라면 발언은 오해로 밝혀지긴 했지만 30년 전 청년들의 가난함과 고단함을 상징하는 것이 라면이었기에 그런 오해도 당연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아름답고 고귀한 젊음의 노동의 대가가 오백원에서 천원 하는 라면으로 메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젊음들의 허기진 노동 역시 라면 한 그릇으로 충족되는 가치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노동에 예속되는 삶을 사는 젊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 삶을 위해 존재하는 노동이었으면 좋겠다.

2020-05-08 17:30:00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광장] 927년 공산전투와 대구 지명(상)

통일신라 말기, 신라의 국력이 쇠퇴해짐에 따라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후삼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격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 가운데 우리 지역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동수)전투는 견훤과 왕건이 목숨을 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견훤에게 크게 패해 쫓기던 왕건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 후삼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은 한편의 역사 드라마이다.TV 연속사극 '태조 왕건'은 2000년 4월〜2002년 2월 총 200회에 걸쳐 방영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인기 드라마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대구의 공산전투가 소개돼 대구 지역 브랜드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가졌으나,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당시 팔공산 곳곳에서 벌어졌던 크고 작은 여러 전투를 비롯해 파군재(동구 지묘동)에서 왕건 군사가 궤멸되어 왕건 홀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들은 치열했던 전투 상황과 왕건의 심정을 잘 나타내준다. 필자는 927년 팔공산에서 일어났던 공산전투에 관해 역사적 자료와 구전을 토대로 2차례에 걸쳐 지명 유래를 추적해본다.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탈하기 위해 쳐들어오는 견훤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처음에 태조 왕건은 공훤 장군으로 하여금 1만 명의 군사를 데리고 신라를 도우러 가게 한다. 그러나 상황이 다급하여 왕건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직접 거느리고 출정하게 된다. 때는 고려 태조 9년(927년)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개성에서 출발하여 빠르게 행군한 왕건 군대는 마침내 팔공산 기슭 칠곡 부근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팔공산 자락에서 숙영을 하게 되었고, 그곳이 지금의 팔공산순환도로변에 위치한 대왕골이다. 이곳 지명은 대왕골, 대왕암, 대왕재(동구 덕곡동과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경계)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왕은 바로 왕건을 의미한다. 당시 기병 5천 명이 대왕골(현재 대구선명학교와 송광매기념관 등이 위치한 곳)에서 숙영하는 동안 왕건은 수행 장군들과 대왕암에 앉아 전략을 숙의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때 왕건이 앉았던 바위가 대왕암이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은 대왕골에서 송광매기념관을 운영하는 권병탁 전 영남대 교수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나이 드신 지역 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즉, 공산전투와 관련한 최초의 장소는 대왕재가 되는 것이다.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후, 왕건 군대는 곧바로 지금의 동화사 방면으로 진군하여 일단의 견훤 측 소규모 병사들과 교전하여 승전하고 주력부대를 치기 위해 다시 진군하게 된다. 이때 견훤의 주력부대는 영천 은해사 옛터 부근(태조지)에 매복하여 왕건 군사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러한 계략을 모른 채 이곳까지 오게 된 왕건 군대는 매복하고 있던 견훤 군대로부터 불시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의 군사를 잃어버린다. 퇴각하던 왕건 군대가 먼 길을 온 탓에 체력이 떨어지고 사기도 저하된 상태에서 지묘동 작은 고개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사기가 오른 견훤 군사들이 진군나팔을 불었고, 그 나팔 소리를 들었던 지묘동의 작은 고개가 바로 나팔고개다. 동화천변을 따라 퇴각하던 왕건 군대는 동화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화천 건너편에 주둔하던 견훤 군대와 다시 전투를 벌여 여기서는 왕건 군대가 승기를 잡게 된다. 동화천을 두고 양 군사들이 쏜 화살은 동화천 바닥을 가득 메우게 되었고, '화살로 가득한 내(川)'라는 의미의 살내 또는 전탄(箭灘)이 유래되었다.

2020-05-01 18:30:00

[광장] 신뢰사회

[광장] 신뢰사회

타인을 믿는 것은 위험하다. 수상한 친절에는 의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꿈을 짓밟는 것을 좋아해'라는 That's Life의 가사처럼 분란으로부터 존재 가치를 찾는 이들도 있다. 믿어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의심부터 하라고 가르쳐야 할 마당이다. OECD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약 27%만이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답했다. 불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직과 신뢰라는 가르침은 이제 교과서적이고 이상적인 표어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타인을 믿는 것은 위험하지만 믿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 미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의 차이이며, 저(低)신뢰 국가는 사회적 비용이 급격하게 커져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불신사회에서는 짝퉁이 아닌지 매번 확인해야 하고 누가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없다. 그 결과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신뢰가 상실된 조직은 실수의 원인을 찾아내 개선하기보다는 실수한 사람을 색출하는 데 관심이 많다. 책임질까 두렵고 정보를 숨길수록 권력이 커지기 때문에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신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기에 이를 구축하고 파괴하는 주체 또한 사람이다. 그 믿음은 상대방의 능력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믿음일 수도 있다. 믿음은 사회적 자본이기 때문에 사용한다고 해서 마모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아도 마음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나 호감이 없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고 성공적인 협력을 위해 필요한 신뢰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자존감을 키울 필요가 있다. 철학자 오노라 오닐은 "신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신뢰받을 만한 자격을 높이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고 했다. 신뢰받을 자격도 없으면서 신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신뢰라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영화 '크래쉬'(Crash)에서 흑인 여성 크리스틴은 백인 경찰의 불심검문에서 과한 몸수색을 당하고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그 후 그녀는 자동차 전복사고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하지만 그 경찰에게 구조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 에피소드는 인종차별이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신뢰를 얻기도 힘들지만 한 번 잃으면 다시 되찾기는 더 힘들다는 방증일 것이다.공자의 제자 자하는 "관리자가 신뢰를 얻지 못하면 아랫사람을 괴롭힌다고 의심받고, 아랫사람이 신뢰를 얻지 못한 채 바른 소리를 하면 윗사람은 자기를 비판하는 줄 의심한다"고 했다. 사사건건 통제하고 의심하는 행동은 부하 직원으로 하여금 감시를 피하는 요령만 터득하게 한다. 상사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믿음을 저버릴 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윗사람이 믿어주면 인정 욕구와 책임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리더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샘 워커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진실성과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위기의 국면에서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힘이라고 분석했다. 믿을 수 없는 리더의 곁에 머무를 국민은 없다. 당신이 믿을 만한 행동을 하면 신뢰하겠다는 조건부 신뢰가 아니라 먼저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2020-04-24 14:30:00

[광장] 조율(調律)

[광장] 조율(調律)

기타와 같은 현악기나 피아노와 같은 건반악기는 수시로 조율(調律)이 필요하다. 현악기의 현(絃)이나 건반악기의 건반에 연결된 줄이 온도와 습도에 따라 길이가 변할 수 있으므로, 정확한 음을 내기 위해서는 그 길이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악기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과 몸도 조율이 필요하다. '정신 줄을 놓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듯이 우리말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줄에 비유했다. 마음의 줄을 놓으면 무엇을 깜박 잊거나 실수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영남 방언에 '주책없고 사리 분별력이 없다'는 뜻으로 '오줄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오'에 '줄'을 합성한 이 말의 어원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를 '총명할 오'(晤)나, '다섯 오'(五)로 보는 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총명할 晤'로 보면 '총명 줄이 없다'라는 뜻이, '다섯 五'로 보면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가닥의 줄이 다 갖춰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마음의 줄을 모두 챙겨 잘 조율해야 함은 말 속에도 담겨 있다.위에서 조율은 마음의 조율을 나타냈지만 마음은 몸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마음과 몸의 조율'을 뜻하게 된다. 마음은 몸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으므로 그릇이 온전하지 못하면 마음 또한 아프기 마련이고,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면 몸이라는 그릇이 제 기능을 다할 수도 없다. 결국 심신일체(心身一體)이므로 심신을 잘 조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코로나19로 국민들이 두 달 이상 일상을 잃어버린 와중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겹친 '가장 잔인한' 4월이 지속되고 있다. 다행히 많은 나라들로부터 찬사를 자아낼 만큼 국민들은 침착하고 질서 있게 질병에 대응하였고, 의료진들은 살신성인 정신으로 임하여 긴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 총선도 지난 수요일 무사히 치러졌다. 조만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종료하고 '생활 방역 체계'로 전환할 것이다. 그간은 발등의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일상생활로 돌아갈 때인 지금은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를 때다.지친 몸과 마음엔 절대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절대 휴식은 하루나 이틀이면 족하다. 지나치면 오히려 권태롭고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자신에게 맞는 절대 휴식을 취한 후엔, 마음의 평안을 통해 몸의 평안에 이르는 길인 독서, 몸의 평안을 통해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방법인 운동을 할 것을 제안한다. 독서와 운동엔 여러 종류가 있고 난이도(難易度)도 각기 다르지만 본인에게 맞는 쉬운 것을 택할 것을 권한다.심신이 잘 조율됐다는 느낌이 오면 가만히 눈을 감아보라. 몸이 우주에서 사라진 것같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몸은 정상이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어디든 아프면 소식이 오기 마련인데 기별이 없다면 안녕한 것이고, 정상이다. 이제 조용히 눈을 떠보라.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온전함을 목격할 것이다. 마음은 평온하고, 일에는 자신감이 충만하며, 일터로 달려가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면 마음도 정상이다.조율이 잘된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조율이 잘된 사람은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으로 심신을 조율하여 본인과 가족과 나라를 구하시길 빈다. 아울러 여야(與野) 간에도 조율이 필요하다. 총선도 끝났으니 여야 간 이견을 서로 잘 조율하여 더 이상 '국민이 정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도록' 지금까지의 정치 후진성을 탈피해 주길 바란다.

2020-04-17 19:04:49

[광장] 달구벌국(達句伐國)은 존재했을까?

[광장] 달구벌국(達句伐國)은 존재했을까?

대구의 옛 지명 중 하나인 달구벌은 과거 삼한시대 당시 '달구벌국'으로 불렸다고 아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원삼국시대 즉, 삼한(三韓)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인 기원 전·후∼3세기 간에는 영남 일대의 진한(辰韓) 영역에 12개의 소국이 있었다는 내용이 '삼국지'와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의 '한조'(韓條)에 기록돼 있다. '삼국지'는 3세기 후반 중국 진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다. '위서 동이전'에 실려 있는 삼한과 관련한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사방 4천 리에 달한다. 한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 세 종족이 있고, 진한은 옛날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반면, 진한과 변한은 2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한시대 진한(변한 일부 포함) 영토의 소국들은 감문(甘文)국, 거칠산(居漆山)국, 골벌(骨伐)국, 다벌(多伐)국, 비지(比只)국, 사벌(沙伐)국, 실직(悉直)국, 압독(押督)국, 우시산(于尸山)국, 음즙벌(音汁伐)국, 이서(伊西)국, 조문(召文)국, 초팔(草八)국 등으로 신라의 모체인 사로(斯盧)국과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 소국들의 이름은 '삼국지'에 기록된 진한의 소국들과는 이름이 달라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삼국지'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진한 소국 명칭들이 왜 서로 다른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삼국지'에는 진한과 변한의 소국 규모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소국 규모는 작은 경우가 600~700호이며, 규모가 큰 경우는 4천~5천 호에 달해 총가구수는 4만∼5만 호로 추정하고 있다.이제 대구의 모체인 달구벌에 대해 알아보자. '삼국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두루 살펴봐도 달구벌국에 대한 국명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원로 사학자 한 분이 '삼국사기'에서 "신라 파사 이사금 29년(108년)에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이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기록을 참고하여 이름이 유사한 다벌(多伐)국을 달구벌(達句伐)국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 달구벌국의 유래를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과연 다벌국과 달구벌국을 동일 국가로 볼 수 있느냐이다. 필자 생각에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신라시대에는 지금의 두산동, 파동, 대명동, 가창면 일대에 해당하는 위화군(喟火郡, 수창군) 아래 4개의 영현을 두고 있었다. 4개의 영현은 달성을 중심으로 하는 달구화현(達句火縣, 대구현), 팔달동과 칠곡 일대의 팔리현(八里縣), 다사읍·하빈면 일대의 다사지현(多斯只縣, 하빈현), 화원읍 설화동·명곡동 일대의 설화현(舌火縣, 화원현) 등이다. 즉, 위화군보다 규모가 작았던 달구화현이 국가로서의 위상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만약 우리 지역에 소국이 있었다면 위화군과의 관련성에서 찾아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로국이 진한 12소국을 차례로 병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볼 때 이러한 추정은 훨씬 설득력이 있다. 신라가 병합한 소국을 행정조직에 편입시키는 경우, 군(郡) 이상의 행정 규모로 편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사벌국이 사벌주, 압독국이 압독주, 조문국이 문소군, 감문국이 청주(나중에 감문군), 실질국이 실직주, 거칠산국이 거칠산군(나중에 동래군)으로 편제된 사례가 그렇다. 아무튼 삼한시대 진한의 12소국 중 하나가 우리 지역에 존재했다면, 그 명칭이 달구벌국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달구벌국 명칭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2020-04-03 14:30:00

[광장]왜냐하면…

[광장]왜냐하면…

이유를 설명하라. 우리는 무엇(What)에 집중하느라 왜(Why)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부탁 뒤에 숨은 이유를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짐작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로맨틱 코미디 '이별후애'(The Break-Up)에서 집들이를 준비하던 제니퍼 애니스톤은 남자 친구에게 레몬 12개를 사달라고 하지만 그는 레몬 3개만 사온다. 제니퍼는 "식탁을 장식하는 데 레몬 12개가 꼭 필요하다"며 화를 내고 결국 큰 싸움으로 번진다. 레몬이 필요한 이유를 미리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신도 알게 된다면 더 많은 이해와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다.상사와 부하가 있다. 이들 사이에는 정보 격차가 있다. 내밀한 정보에 접근 가능한 상사는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 반면 부하 직원은 어떤 맥락에서 일하는지, 어떤 일이 예정돼 있는지 모르는 깜깜이 속에서 일한다. 상사는 시간에 쫓겨 또는 귀찮음을 이유로 '언제까지 무엇을 하라'는 통보에 가까운 지시를 하기 일쑤다. 외부용인지 내부용인지, 신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함인지 단순한 현황 파악인지, 목적과 대상에 따라 상이한 결과물이 요구됨에도 말이다. 상사는 부하 직원이 예상과 다른 보고서를 가져온 것에 화가 난다. 부하는 자신이 가진 정보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의 잘못이 되어 기분이 상한다. 맥락을 모르면 일의 방향성이나 일관성을 갖기 어렵다. 커뮤니케이션은 나의 생각과 정보를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다. 어느 세월에 친절하게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지라도, 불필요하게 일을 번복하는 것보다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인간은 꽤나 합리적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디팍 말호트라(Deepak Malhotra)와 맥스 베이저만(Max Bazerman)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다른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려는 속성이 있다. 같은 대학의 엘렌 랭어(Ellen Langer) 교수는 실험을 통해 이 사실을 증명했다. 복사기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섯 장만 먼저 복사해도 될까요?"라고 부탁하자 60%가 양보해 주었다. 하지만 같은 문장 뒤에 "왜냐하면 제가 지금 굉장히 바쁜 일이 있어서요"라는 이유를 덧붙였더니 무려 94%가 양보했다. 왜냐하면 첫째, 타당하거나 그럴듯한 이유의 제시는 주장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둘째, 일방적인 요청이 아니라 양해를 구하는 배려 있는 행위로 거부감을 줄인다. 상대방이 자발적인 의지로 행동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효과가 있다. 셋째, '왜냐하면'에는 발화자의 가치나 방향성, 일의 의도가 내포돼 있다. 그 이유를 상기시킴으로써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한다.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 상황인 만큼 시민들의 협조와 자발적인 참여가 절실한 때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발생하는 경우, 대체적으로 법률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회의 모든 상황을 포괄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이해받고 싶다면 당연한 이유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한 번쯤 생각해 볼 것이고, 아무 이유가 없는 것보다 낫다고 여길 것이다. 따라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기회가 많아진다. '왜냐하면'은 상대방을 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설득 전략이다.

2020-03-27 14:30:00

[광장] 기생(寄生)

[광장] 기생(寄生)

'기생'(寄生)이란 어떤 생물이 다른 종류의 생물체, 즉 숙주(宿主)의 속이나 표면에 살면서 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아 그 생물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동식물의 몸에 붙어서 병을 일으키게 하는 세균이나 균류, 몸에 붙어서 피를 빨아 먹는 이나 벼룩, 사람 몸속에 살면서 해를 끼치는 회충 등이 그것들이다.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전염병의 세계사'(김우영 옮김)에서 미시기생(微視寄生)과 거시기생(巨視寄生)으로 기생의 개념을 확장하였다. 미시기생은 미생물을 포함한 기생체와 인간의 관계를, 거시기생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기생체와 숙주와의 관계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인간과 자연으로까지 확대한 맥닐의 통찰력이 놀랍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생산력에, 인간은 자연에 기생하면서 살아온 것이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은 거시기생의 한 단면을 극화하여 대성공을 이룬 쾌거였다. 힘이 센 자와 약한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이다. 2월 9일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라 세계적인 흥행에 돌입할 무렵, 2월 20일 제작 및 출연진이 청와대로 초치되어 짜파구리 파티를 열 무렵, 코로나19라는 또 다른 기생충의 출현으로 잔칫상과 흥행에 재를 뿌린 격이 되고 말았다. 영화 '기생충'과 살아 있는 기생충의 전쟁이라고 불러야 할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우리네 인생사의 본래 모습인가?그즈음부터 지금까지 한 달여 동안 사회는 '영악한' 기생충인 코로나19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가히 전 세계적으로 이것과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이것은 그 나름대로 매우 영리해서 늦봄까지 또는 초여름까지 기승을 부릴 태세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어떻게 영악한가?첫째, 이것은 꾀가 많아 숙주를 잘 죽이지 않는다. 숙주가 죽게 되면 자신들도 죽게 되므로 숙주를 적당히 괴롭히면서 넓게 퍼져 자신의 세(勢)를 키우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을 넘어, 이제는 유럽 전역과 북미를 휩쓰는 '세계적 유행'(pandemic)에 이르렀으니 코로나19로서는 성공한 셈이다.둘째, 이것은 감염 속도가 매우 빠르며, 위장술까지 동원한다. 보통의 질병은 환자에게 증상이 발현된 후에 전염이 되지만 이것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부터 감염을 시킨다. 증상이 나타나면 격리 및 예방 조치를 할 수 있지만 잠복기부터 감염시키니 속수무책이다. 스텔스 기능을 갖춘 전투기가 은밀하게 적에게 접근하듯이 이것 또한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은밀하게 다른 숙주에 침투하는 것이다.끝으로, 이것은 재빨리 변신해서 자신의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체가 분명해야 빨리 치료할 수 있는데, 유전자 변이를 통해 모습을 자꾸 바꾸므로 의학자들은 고정된 과녁이 아닌 이동하는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이것 때문에 대구경북은 국내에서 가장 심한 인적·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 같았던 지난 한 달여 동안 대구경북인은 놀라운 이타심과 침착성, 질서 의식과 준법정신을 보여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다. 위기 속에서 대구경북인의 품위(品位)를 세계만방에 자랑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코로나19를 먼저 경험한 우리가 이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백신과 치료제까지 개발하여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는 꿈을 꿔본다.

2020-03-20 14:30:00

[광장]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것들

[광장]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것들

코로나19는 '전파력은 강하고 치사율은 낮다'는 바이러스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다. 박쥐가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중국 우한이 어딘지 모르고 살다 죽어도 되는 정보들과 사회적 거리, 비말 감염, 자가 격리, 검체 검사, 정례 브리핑, KF94와 KF80, 팬데믹, 코호트 같은 전문 용어까지 두루 알게 되었다. 문제는 혐오와 차별, 개인정보와 사생활 보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 여러 가지 인권 문제들도 같이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확진자 동선과 관련해서도 과도한 개인정보 누출이 논란이 되었다. 시간대별로 기재된 특정인의 동선은 좁은 지역사회에서 누구인지 금방 특정될 수 있었다. 가짜 뉴스도 신나게 퍼져나갔다. 특정 확진자의 얼굴이라며 공개된 사진은 모두 다른 인물이었다. 또 어느 확진자의 동선이라며 공개된 내용은 숙박업소, 노래방, 안마방 같은 곳이었으며 특정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남성이라고 했지만 그 번호의 확진자는 초등학교 여학생으로 밝혀졌다. 외신조차 대한민국의 과도한 확진자 정보가 오히려 신상 털기와 가짜 뉴스 생산을 초래하고 있다며 적절한 검토가 필요하다고까지 지적하고 있었다. 사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제도 없이 완치를 기다려야 하는 고통보다 나의 동선과 개인정보 혹여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난이 걱정됐다. 넘쳐나는 가짜 뉴스와 신상 털기의 대상이 되기는 싫었다.신체의 자유나 혐오 차별과 관련해서도 문제는 발생했다. 대구 지역이 여행 제한, 금지 지역으로 지정이 되고 대구발 항공기는 연달아 취소되었다. 즉, 제도적 금지를 넘어 사람들의 시선이 대구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다. 대구 지역이라는 이유로 혐오적인 시선과 차별까지 받아내어야 했다. 대구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병원 진료를 거부당하고 숙박 투숙을 거절당했다는 사례가 무수히 올라온다. 상세한 개인정보 공개와 엄격한 자가 격리, 통제가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우리가 중국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대구 사람들이 받는 혐오와 차별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개인의 권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고 특히 감염병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만, 최대한 각자 인간의 권리가 최소한으로 침해되는 방법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전 세계의 이동이 용이하지 않던 100년 전 스페인 독감도 2천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제는 감염병을 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과 물류는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전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확산 역시 문을 걸어 잠그는 것만이 대답은 아닐 것이다. 꾸준한 백신 개발과 감염병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위생보건 정책 수립이 대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나면 역사가 되고, 교훈으로 남는다고 한다. 부족했던 제도를 보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감염병이 이제 피할 수 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같은 존엄함을 가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대를 먼저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우한 교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던 날 천안과 진천 주민들은 "꽃길만 걷기 바랍니다"며 손을 흔들었다. 캄보디아 총리는 "코로나19보다 차별이 더 나쁜 것"이라며 크루즈 선박을 받아들였다. 광주는 가장 먼저 마스크를 지원해 주고 의료지원단을 대구에 파견해 주었으며 병상을 지원했다. 이렇게, 코로나는 바이러스와 함께 여러 인권 문제도 가지고 왔지만 사람들의 연대와 존중의 소중함도 우리는 곳곳에서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2020-03-13 19:09:11

[광장] 달구벌에서 대구로

[광장] 달구벌에서 대구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예로부터 대구는 달벌(達伐),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달불성(達弗城), 대구(大丘)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언어학자들은 '불'과 '벌'은 평야나 취락을 뜻하며, '달'은 넓은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을 큰 언덕, 넓은 평야, 넓은 촌락으로 해석할 수 있어 현재의 대구 지명과 같은 의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달구'가 '닭'이 연음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대구를 닭과 연관 지워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경주의 계림(鷄林·닭 수풀), 월성(月城)을 달구벌(대구)의 닭(달구)과 달성(達城)에 연계하여 경주와 대구의 연관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신라의 모든 행정 지명이 당나라 지명체계 방식을 본받아 바뀌게 돼, 달구벌도 현재의 지명인 대구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지금의 한자어인 대구(大邱)와는 다른 한자어인 대구(大丘)였다.결국 달구벌에서 '벌'을 버리고 대구로 개칭했지만, 지명 속에 녹아 있는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큰 언덕(산)과 들판, 즉, 팔공산과 비슬산으로 둘러싸인 대구 분지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대구의 지형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구(大丘)의 한자어가 지금의 한자어인 대구(大邱)로 바뀌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대구(大邱)라는 한자어가 등장한 시기는 정조 3년(1779년) 5월부터이다. 현재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구(大邱) 지명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알면 다소 기분이 씁쓰레하다. 대구 한자 지명의 변경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어 '조선왕조실록'(영조: 26년 12월 02일: 신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대구(大丘)의 유학(幼學) 이양채(李亮采)가 글을 올렸다. "저희들은 영남의 대구부(大丘府)에 살고 있습니다. 국초부터 대구부 향교에서 공자님께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춘추의 석전제(釋奠祭)에는 지방관이 초헌(初獻)을 올리며, 축문식(祝文式)에 별 생각 없이 '대구 판관'(大丘判官)이라 씁니다. 그런데 '대구'(大丘)의 '구'(丘)는 공자의 이름자인데, 신령 앞에서 축문을 읽을 때, 공자의 이름자를 범해 민심이 불안합니다." 그때, 상소문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영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상소문 내용을 들으니 대구 유생이 고을 이름과 관련하여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근래 유생(儒生)들은 왜 이렇게 생각이 깊지 못한가? 300여 년 동안 대구부에 많은 선비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이양채 한 사람만 못해 말 없이 살아왔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조선에는 상구(商丘)와 봉구(封丘)란 지명들이 아직도 있지 않느냐? 어찌 옛 선현(先賢)들이 이를 깨닫지 못해 그러한 지명들을 그대로 두었겠는가?" 하면서 그 상소문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당시 영조 임금의 자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유생들의 다소 사대주의적인 사고로 인해 정조 임금 당시에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가 혼용되다가 철종 이후부터는 대구(大邱)로 고착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필자가 생각하기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구(大邱) 지명을 신라 경덕왕 때 달구벌에서 개칭된 한자 지명인 대구(大丘)로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대구 지명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대구 지명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있어서도 필요하다. 또한, 한글이 같아 큰 혼란이나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옛 한자 지명으로 복원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2020-03-06 20:06:48

[광장] '2·28,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

[광장] '2·28,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

2·28민주운동(이하 2·28)은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 8개 고교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서 궐기했던 운동이다. 28일, 갑일(甲日)을 맞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2·28의 세계화를 위해 영문판 '2·28,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을 출간한다.책의 1장은 2·28의 배경, 2장은 2·28의 전개, 3장은 4·19혁명으로의 계승, 4장은 2·28의 의의를 다루고 있다. 필자는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의 뜻을 통해 2·28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해 보고 번역 과정과 의의를 설명하고자 한다.2·28은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 '민주'운동이다. 그리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쓴 이후 일제가 아닌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일어난 '최초'의 운동이다. 그렇다면 2·28을 왜 봉기나 의거가 아닌 '운동'(Movement)으로 보는가?단체 행동을 운동으로 명명하기 위해서는 집회 참여자들이 집회의 동기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집회 주도 세력들이 결속되어 있어야 하며,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 계속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2·28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운동'이다.첫째, 2·28의 직접적 계기는 야당인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에 학생들의 참여를 막으려고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등교 지시의 이면에 숨어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직시했고 민주라는 가치와 학원의 자유 및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했다. 그들이 외친 "민주주의를 살리고 학원에 미치는 정치권력을 배제하라"와 "학생의 인권을 옹호하자"라는 구호를 보면 그들이 운동의 동기를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둘째, 2·28의 주도 세력은 학생·시민·언론의 연대였다. 도시인구의 급증에 따른 생활 여건의 악화와 높은 실업률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근대교육의 확대는 시민의식을 고취했고 언론 보급의 확대는 정치·경제적 모순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선 것은 피 끓는 고등학생들이었으며, 그들의 운동을 시민은 지지했고, 언론은 보도했다.끝으로 2·28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주, 대전, 수원·충주, 부산·청주에서의 시위로 이어졌으며 3·15마산의거로 귀결되었다. 4월 19일엔 서울·인천·광주에서 시위가 이어졌으며 4월 26일엔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4·19혁명'이란 4월 19일 당일의 항거뿐만 아니라 2월 28일에서 4월 26일까지 일어난 일련의 투쟁을 뜻한다. 그러므로 2·28은 세상이 어둠에 떨고 있을 때, 선봉에서 길을 연 횃불이었다.결론적으로 2·28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인데 이 사실을 국내외에 더 알리기 위해 영문판이 마련되었다. 필자와 경북대 박사 과정의 로버트 존스(Robert Jones)가 책임을 맡아 작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작업하였다. 그 후 2·28기념사업회 우동기 회장의 주선으로 원어민 교수 세 분이 정밀하게 교정을 보았으며, 또다시 필자와 존스가 원문과 수정본을 대조·분석·취합하여 완성하였다.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전달과 가독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영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눈 덮인 들판을 처음 걷는' 심정으로 세상에 내놓는 이 책이 2·28의 국제화에 초석이 되길 빈다.

2020-02-21 14:30:00

[광장]'앞산'이라는 지명

[광장]'앞산'이라는 지명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에 의해 훼손된 우리 고유 지명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다. 우리 지역에도 그러한 지명들이 더러 있어 기회가 되면 바로잡는 것이 주권국으로서, 문명국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원래 우리 고유 지명인데 일본식 지명으로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다. 바로 '앞산'이 그러한 지명이다.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 '산천'(山川) 편에는 앞산의 원래 지명은 성불산(成佛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불산은 부의 남쪽 10리에 위치하며, 관기안산(官基案山)이다. 비슬산에서 뻗어 내려온다." 관기안산은 풍수적 용어로 관청 터 앞(남쪽)에 위치하는 산을 말한다. 문헌 기록상으로 성불산이 가장 일찍 나오는 고문헌은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그 후로 『여지도서』 『대구읍지』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교남지』 등에도 나타난다.불교적 용어인 성불산은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영향으로 대덕산(大德山)이라는 새로운 유교적 지명이 생겨나면서 공존하게 된다. 성불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지만, 대덕산은 『대구읍지』에 처음 등장한다. 그것도 자연경관을 주제로 하는 '산천' 편이 아닌 일반 문장에서 나오고 있어 그때까지도 대덕산보다는 성불산이 앞산을 대표했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山水) 편 '산형'(山形) 조에는 "대구비파산내유용천지석"(大丘琵琶山內有湧泉之石), 즉 "대구 비파산에는 물이 솟아나는 바위가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파산(琵琶山)은 비슬산(琵瑟山)의 오기다. 비파(琵琶)산과 비슬(琵瑟)산은 혼돈하기 쉽다. 실제로 앞산 달비골 북사면에는 『택리지』에서 언급된 석정(石井)이 존재한다. 앞산이 비슬산에서 뻗어 내려오므로 옛 사람들은 앞산을 비슬산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정리하면, 앞산의 옛 지명인 성불산은 시대적 이념 또는 오기로 인해 대덕산, 비파산 등으로 불리거나 기록되어 전해왔다. 그러던 중 대구의 진산(鎭山)인 연귀산(連龜山, 제일중학교 교정) 남쪽에 있는 성불산이 자연스레 '앞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주산(진산)의 남쪽을 앞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지형도에서는 앞산을 전산(前山·アプサン)으로 표기하고 있다. 전산은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앞산'을 단순히 한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산(前山) 지명 옆에 일본인들이 '가타가나'로 'アプサン'(앞산)을 병기하고 있다. 즉 가타가나는 외국어(외래어 포함) 표기에 사용되기 때문에 당시 우리 선조들이 앞산으로 부르던 지명을 일본인들이 한자 지명인 전산(前山)을 차용하면서 한자 옆에 한글 지명인 '앞산'을 가타가나로 병기한 것이다.앞서 얘기했듯이 성불산은 시대적 이념, 오기, 지역민들의 편의 등으로 인해 대덕산, 비파산, 앞산 등으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의 산에 여러 가지 지명이 공존하다 보니 최정상부인 앞산 외에 대덕산, 비파산 지명 등을 다른 봉우리에 갖다 붙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지명이라는 것은 현재 어떻게 불리는가도 중요하므로 지금의 대덕산, 비파산의 지명도 앞산과 더불어 각기 다른 봉우리에 공존해도 무방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앞산은 우리 고유의 지명으로서 현 시점에서 가장 합리적 근거를 가지는 지명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앞으로도 '앞산'이라는 지명을 자랑스럽게 사용하면 된다.

2020-02-07 14:30:00

[광장] 통합된 조직 정체성이 없다

[광장] 통합된 조직 정체성이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나무와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나무의 몸통이 먼저냐, 가지가 먼저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몸통을 정점으로 가지치기를 해야지, 가지에서 자라난 나무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의 다양화로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IMC, Integrated Marketing Communication)은 일종의 유행이 됐다. 하지만 매체별 통합을 강조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진정한 의미는 메시지의 통합임을 주지해야 한다.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을 통합해야 하는가. 이를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시민 또는 고객들은 슬로건을 통해 행정기관이나 기업을 인식한다. 조직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예를 들면 A지방자치단체는 '아늑하고 편리한 서비스', B지방자치단체는 '맞춤형 친절 행정 서비스', C지방자치단체는 '친절은 내부 직원의 행복에서 비롯된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모두 친절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지만, 친절에 대해 미세하게 다른 관점이 스며들어 있고 실천 방향까지 담겨 있다. 또 해당 기관의 존재 목적과 타깃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화자와 청자 간의 약속이다. 슬로건에서 말하는 목표에 따른 실천이 병행되어야 조직의 신뢰성이 담보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헷갈리지 않는다. 또한 장기간 누적된 결과이기 때문에 그 효과가 한순간에 나타나지도 않지만 한순간에 사라지지도 않는다.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성공하려면 일관성 있는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로 승부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제품의 장점이 많으면 그에 대한 평가도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용가능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연구에 따르면 10개의 장점을 떠올리게 하는 것보다 1개의 장점을 답하도록 한 집단의 평가가 더 긍정적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각만 하려는 '인지적 구두쇠'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많은 메시지를 던져봐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기관의 입장에서는 여러 개의 핵심 가치를 내세우고 싶겠지만, 장점을 나열하는 방식으로는 고객을 설득하기 어렵다. 우선순위에 따른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브랜드들은 오랫동안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해 왔음을 알 수 있다.대외 커뮤니케이션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대내 커뮤니케이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무자들이 핵심 가치를 내재화하고 공유할수록 조직은 한 방향을 향해 추진력 있게 나아갈 수 있다. 개코원숭이의 부하 원숭이들은 20~30초마다 두목 원숭이를 쳐다본다고 한다. 그만큼 리더는 직원들의 관심 대상이다. 리더가 보여주는 핵심 가치에 대한 말과 행동, 그에 따른 일관성은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자신의 지위만큼 보는 눈이 생긴다. 직원들은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목표지만 리더는 전체를 봐야 한다. 고급스러운 명품과 저렴한 가격처럼 개별 부서의 목표는 때때로 상충된다. 담당자들이 자기 부서만을 고려한 결과물을 가져왔을 때, 조직의 핵심 가치에 맞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도 리더의 몫이다.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은 리더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 한 그루를 보기보다 전체 숲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에도 '컨트롤타워'가 필요한 이유다.

2020-01-31 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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