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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벌초 단상

성석제의 소설 '처삼촌 묘 벌초하기'는 처가 문중 땅에 의지해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을 속담과 관련된 일화를 바탕으로 재미있게 형상화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문중 어른들과 선산을 둘러보겠다는 처남의 전화를 받고 처가 직계 자손인 처삼촌 묘를 구슬땀을 흘려가며 벌초를 했다. 하지만 선산 방문을 뒤로 미룬다는 처남의 전화에 허탈감에 빠진 채 몸살로 드러눕는다.'처삼촌 묘 벌초하듯'이란 속담이 있다. '일에 정성을 들이지 않고 마지못해 건성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처가는커녕 자기 집안 조상들의 산소 벌초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었다. 처삼촌 묘 벌초하듯이 마뜩잖아서가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우선 우거진 산림을 헤치고 산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농사일에 문외한인 젊은 세대들은 풀베기조차 낯설다. 예초기가 보급되었지만 조작이 서툴고 사고 위험성도 높다. 벌에 쏘이기 쉽고, 뱀에 물릴 수도 있다. 이래저래 다치거나 풀숲에서 얻은 감염성 질환으로 고생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매번 대행업체에 벌초를 맡기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절기상 처서가 지나 풀의 성장이 멈추는 추석 전 보름간은 벌초의 적기이다. 추석 성묘를 위해서도 벌초는 필요하다. 하지만 조상의 묘를 살피고 돌보는 이 국민적 풍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산야가 변했고, 장례문화가 변했고, 후손들의 인식도 변하고 있다. 세상만사 주변 환경과 시절 인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짙은 산림에서 풍수지리를 논하기도 곤란하고, 도로변 전답을 죄다 무덤으로 만들 수도 없다. 조상들도 귀한 후손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낫질도 못하는 신세대에게 산중 벌초를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벌초는 물론 제사와 전래의 풍습에도 그다지 호감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종교적인 이유도 없지 않다. 이제는 매장보다 화장이 대세이다. 인생의 육체적인 결말은 한 줌의 흙이다. 모든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상의 묘소 또한 예외가 아닐 듯하다.

2019-09-07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가을 태풍

지구 곳곳의 열대저기압은 발생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 매년 수차례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타이푼(태풍)은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저기압이다. 인도양과 벵골만에서 발생하는 것을 사이클론, 카리브해에서 발생해 미국 동부지역에 큰 피해를 내는 열대저기압을 허리케인이라고 부른다.태풍은 북서태평양 서쪽 북위 5~25도, 동경 120~160도의 열대 해상에서 주로 발생한다. 1981년 이후 지난 30년간 연평균 25.6개가 발생해 동남·동북아시아에 큰 피해를 내고 있다. 발생 빈도로 보면 8월(평균 5.9개)이 가장 높고 9월과 10월, 7월, 6월 순이다.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태풍은 연평균 3.1개다. 태풍은 필리핀과 대만 또는 남중국해로 곧장 진행하거나 도중에 북쪽 또는 북동쪽으로 진로를 바꾸는데 이럴 때는 우리나라가 그 영향권에 든다. 6~7월에 발생하는 태풍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올해의 경우 5호 태풍 '다나스'가 7월 20일 전남 진도 서쪽 해상에 접근했고, 8호 태풍 '프란시스코'가 8월 6일 부산을 통과해 2개의 여름 태풍이 닥쳐 크고 작은 피해를 냈다.올해 발생한 태풍은 6일 현재 모두 14개다. 14호 태풍 '가지키'는 3일 베트남 다낭 부근 육상에서 열대저압부로 약화돼 이미 소멸했다. 하지만 제13호 태풍 '링링'은 세력을 계속 키우며 우리나라로 접근 중이다. 7일 오전 목포 서쪽 해상에 접근해 서해안을 따라 수도권으로 북상할 것이라고 기상청은 예보했다. 2010년 9월 곤파스의 경로와 비슷해 기상청은 강풍 피해에 대한 주의와 함께 "기록적인 태풍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그동안 한반도를 강타한 여러 태풍 가운데 초가을에 닥친 '가을 태풍'은 매섭다 못해 공포심을 주었다. 1959년 9월 17일 849명의 사망·실종자를 낸 사라를 비롯 2002년 루사, 2003년 매미가 대표적이다. 9월 필리핀·대만 인근 해수 온도가 27℃ 이상으로 태풍 발달에 최적의 조건인 데다 북태평양 기단의 힘이 약해지면서 태풍 이동 경로에 한반도가 놓여 큰 피해를 낸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철저한 대비와 주의가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두말할 필요가 없다.

2019-09-06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부울경, 그리 초조한가

'정이 많다. 급하고 다혈질, 직설적이다. 속정이 있다.'부산 토박이의 성격 특성을 다룬 부산 옛 자료에 나오는 일부 내용이다. 앞은 서울 토박이에 대한 부산 토박이의 특징이고, 가운데와 뒤는 각각 경북 토박이와 호남 토박이와 비교된 부산 토박이의 특징을 나타냈다.부산 토박이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가 아닌 만큼, 부산 시민 모두에 미뤄 일반화하기 어렵겠지만 부산 사람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참조 자료는 될 만하다. 특히 부산의 정치인이나 지도자의 행태를 짐작하는 나름 잣대도 될 터이다.최근 언론에 보도된 김해신공항 재검증 작업을 둘러싼 부산·울산·경남(부울경)의 총리실 압박 행태는 한마디로 할 말을 잊게 하고도 남는다. 이들은 이미 총리실이 거듭 밝힌 재검증 기준 외 '경제'와 '정책' 측면의 판단도 잣대로 제시했다.이미 부울경은 지난 정부의 결정을 뒤집고 김해신공항 재검증 요구안을 꺼내 담당 부처인 국토교통부마저 무시했다. 억지로 총리실에 이를 떠안기더니 '정무적 판단'을 배제하고 '기술적 쟁점'만 맡을 것을 천명한 총리실을 또 흔드는 꼴이다.가덕도 신공항 건설 추진을 위해 움직였던 부울경의 지난날을 새기면 이들은 '급하다' 못해 아예 속도계를 떼고 달리는, 제동장치 없는 차와 같다. 그러나 부산 주축의 김해신공항 재검증 옹호 세력의 거침 없는 행보에는 초조함이 엿보인다.이런 돌발의 비정상적 행태는 대통령의 지지도 변화, 심상찮은 민심의 흐름 등을 따진 초조함의 결과를 방증하는 역설이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바라는 결론을 내려 결국 가덕도 신공항 추진에 나서고 싶을 것이다. 총리실 압박 공세는 그런 배경을 감안하면 이해되지만 불공정하고 오만한 발상이다.이들 지도자의 행보는 같은 부울경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은 과거 노무현 정부가 바랐던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이나 지금 문재인 정부가 외치는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 그리고 '정의로운 결과'의 사회와 동떨어지고 어울리지 않는다.부울경의 총리실 압박은 그들이 기댄 문 정부에 되레 짐일 뿐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 논란으로 힘겨운 문재인 대통령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금 부울경은 비록 초조하겠지만 자중에 급할 때다.

2019-09-05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구역질 난' 조국 간담회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씨를 둘러싼 논란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지 싶다. 숱한 의혹들과 야권 반발, 검찰 수사는 물론 임명을 반대하는 국민 여론과 상관없이 조 씨를 장관으로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애초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우롱한 조 씨의 허무맹랑한 기자간담회를 보면서 이 같은 확신은 더 굳어졌다.형식과 장소, 내용과 시기 등 문제투성이 기자간담회는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판은 문 대통령이 깔았다. 조 씨와 가족 관련 의혹이 쏟아졌고 검찰 수사가 시작됐는데도 문 대통령은 한마디도 않다가 뜬금없이 대입제도·청문회를 걸고넘어졌다. '조국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고 물타기를 했다. 이에 발맞춰 조 씨는 기자간담회에 나섰고 더불어민주당은 나팔수 역할을 했다. 장관 임명 과정에서 국민 반발을 조금이나마 줄이려 조 씨와 문 대통령·여당이 꼼수를 부린 것이다.의혹들에 대해 조 씨는 부인하고 일방적 주장을 폈다. 대답의 9할이 '모른다' '관여한 적 없다'였고 교수답게 박학다식을 자랑했다. 딸과 관련해 울컥한 것을 두고 '악어의 눈물'이란 비아냥까지 나왔다. "국민은 역겨움을 느낀다"는 한 야당의 평가에 공감이 갔다. 조 씨가 책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한 문구에 빗댄다면 '구역질 난' 기자간담회였다.문 대통령과 청와대·여당 등 집권 세력이 총동원돼 '조국 구하기'에 나선 까닭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조 씨를 지키면 중도세력 지지율 5~10%를 잃지만 조 씨를 버리면 결집층 20~25%가 공중분해된다는 셈법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여권에서 흘러나온다. '조국이 곧 문재인'이고, 내년 4월 총선 승리를 위해 반일(反日) 주역인 조 씨가 꼭 필요하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고비를 넘기면 조 씨가 단숨에 전국구 인사로 무게감을 키워 대권주자가 될 것이란 계산도 깔렸다.국민 반대에도 문 대통령은 조 씨의 장관 임명을 강행할 전망이다. "조국 하나 지키자고 노무현의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팽개치고, 고작 조국 하나 지키자고 촛불 국민을 버릴 셈이냐"는 야당의 고언(苦言)은 땅바닥에 처박힐 것이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했는데 문 대통령과 집권 세력 사전(辭典)엔 '국민'이 없는 모양이다.

2019-09-04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야마모토 다로

그제 우리 국회의원 6명이 독도를 방문한 것을 두고 일본의 한 국회의원이 "전쟁을 해서 독도를 찾아야 한다"고 막말을 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제의 망언 주인공은 마루야마 호타카로 군소 정당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소속의 중의원이다.앞뒤도 모른 채 마구 내뱉는 그의 망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5월 러시아 쿠릴열도 4개 섬과의 교류 차 쿠나시르 섬을 찾았다가 술에 취해 "전쟁을 해서라도 북방 영토를 탈환해야 한다"고 실언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 망언으로 그는 일본유신회에서 제명돼 소속 정당을 옮겼다. 아무리 경험없고 미숙한 30대 청년임을 감안해도 아소 전 총리처럼 막말로 버티는 것은 스스로 '얼간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드물지만 일본 정치판에도 성숙한 의식을 가진 정치인도 있다. 야마모토 다로(山本太郎)가 대표적이다. 올해 만 44세의 배우 출신 정치인이다. 한국 영화에도 여러 편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한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청년 자살을 조장하는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일본을 개조해야 한다" 등 개념 발언으로 '일본의 노무현'으로도 불린다.유튜브에는 야마모토 의원의 거리 유세와 논리정연한 국회 대정부 질문 영상도 많다. 극우 세력을 등에 업고 일본을 망치는 정치인이 아니라 진정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신파 이미지가 강하게 전달된다. 그는 '국민이 정치를 바꿔야 일본이 되살아난다'고 강조하는 정치인이다. 올해 4월 레이와 신센구미(令和 新選組)라는 정당을 창당했고, 7월 참의원 선거에서 2명의 중증 장애인을 비례대표로 당선시키고 자신은 최다 득표 낙선자가 됐는데 제1야당 입헌민주당보다 더 주목을 받았다.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아베 총리는 한국인에게 거의 '동네 개'나 다름없다. '아베야 고맙다'에서부터 '영화 도쿄재판, 아베도 봐라'는 일간지 칼럼 제목까지,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다. 그런 아베 총리에게 야마모토 의원은 늘 "초등학교 수준의 정치외교를 하고 있다"며 비판한다. 국회 연단에서 염주를 손에 들고 합장하며 아베에게 추모의 예를 올리기도 했다. 조상의 후광을 업은 3류 세습 정치가보다 야마모토가 훨씬 유익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일본 국민은 알까.

2019-09-03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다시 본 대통령 취임사

지난달 29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광복회 대구시지부 주최로 열린 경술국치일 추념 행사에 참석했다. 지난해 국치일을 맞아 글을 쓰면서 스스로 다짐한 '조기(弔旗) 달기'와 '추념식 참석' 그리고 '찬 죽 먹기'를 올해만큼은 온전히 지켜보자는 마음에서다.광복회는 2011년 이후 국치일 행사를 갖고, 조기 달고, 찬 죽을 먹지만 늘 제대로 따르지 못했는데, 올해도 실패였다. 조기 달기와 행사 참석은 했지만 찬 죽만큼은 '운'(運)이 돕지 않았다. 마침 이날 참석자가 넘친 탓인지 준비한 죽이 모자랐다.이날 자신과의 약속조차 잘 지키기 힘듦을 절감하며, 2017년 5월 10일 국회의사당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읽은 취임사를 찾아봤다.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며 대통령이 국민과 한 약속은 그때도 그랬지만, 2년 지난 지금 읽어도 새길 만하다.'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의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약속은 더 와 닿았다. 그래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 대통령의 '따뜻한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으로 남겠다'고 한 다짐도 이루길 바랐다.2년 전, 국민 마음은 한결 그랬다. 그러나 지금, 나라는 그 약속과 다짐을 담았던 대국민 말씀과 다른 꼴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선지 대통령에게 되레 실망하는 사람도 적잖다. 물론 그렇지 않은 진영도 상당한 탓에 갈수록 편이 갈리는 모양새다.그러나 '찬 죽 먹는 일'조차 '운'이 따르지 않으면 힘든 게 삶인데, 하물며 나라 걱정을 도맡은 대통령은 오죽할까. 문 대통령은 취임사의 숱한 약속과 다짐을 지키고 싶었겠지만 그를 둘러싼 '사람'과 '운'까지 돕지 않으니 어쩌랴. 여당을 보면 그렇다.요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존재하는가. 여당은 정부가 제대로 구르도록 도움과 힘을 주는(與) 무리(黨)가 아닌가. 정부가 잘 굴러가지 않으면 매와 채찍도 아끼지 말고 적절히 줘야 되는 무리가 아닌가. 그런데 과연 지금의 민주당은 그런가.문 정부와 청와대가 그릇된 일을 저질러도 그냥 그들과 같은 길을 걸으며 결속할 뿐이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여당의 편들기는 점입가경이다. 이러다가 정부, 여당이 공멸을 자초하는 수렁에 빠지는 것은 알 바 아니지만 자칫 나라만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2019-09-02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총신(寵臣) 조국'

'역사는 반복된다'는 논거를 잘 보여주는 본보기가 하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거나 치명상을 입힌 사람은 권력자가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대통령이 가장 아끼고 애지중지한 이들이 정권을 쓰러뜨리거나 기울게 했다. '정권의 적(敵)은 대통령 지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 간 것은 최순실 씨였다. 이명박·노무현 대통령은 형이 문제였다. 이상득 의원과 노건평 씨가 아우인 대통령에게 짐이 됐다. 경쟁자이자 동지인 김대중·김영삼 대통령은 나란히 아들 때문에 정권이 기울었다. '홍삼 트리오'와 김현철 씨가 아버지에게 그림자를 안겨줬다. 박정희 대통령은 심복인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력 다툼 와중에 총탄을 맞아 서거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2인자인 이기붕 의장으로 인해 하야(下野)하고 말았다.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을 꼽는다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첫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2년 넘게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긴 데 이어 곧바로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인사 검증 실패 등 숱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조 후보자에 대한 문 대통령의 총애는 굳건했다. 문 대통령이 조 후보자를 차기 대선주자로 키우려 한다는 진단마저 나왔다.인사청문회·검찰 수사로 조 후보자가 갈림길에 선 것처럼 문 대통령은 조 후보자로 말미암아 갈림길에 섰다. 의혹들과 검찰 수사에도 문 대통령이 청문회 후 조 후보자를 장관에 임명하느냐, 지명 철회 또는 자진 사퇴를 통해 조 후보자 카드를 접느냐에 따라 문 대통령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문 대통령과 정권엔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이 정권에 치명상을 입힌 사례가 하나 더 추가될 것 같다.사족(蛇足)을 달면 총애의 총(寵) 자와 농단의 농(壟) 자가 매우 닮았다. 용이 갓을 쓰면 총 자가 되고 용이 땅을 딛고 서면 농 자가 된다. 총애하는 사람이 국정을 농단한다는 사실을 선인(先人)들은 일찍이 간파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019-08-31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조국을 꺾어야 한다는 욕망'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에는 눈을 감고 자본주의의 문제는 무섭게 비판한 위선자였다. 그는 불소친선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1954년 초청을 받아 소련을 방문한 뒤 '리베라시옹' 신문과 인터뷰에서 소련의 현실을 정반대로 전했다. 그는 "소련 시민은 우리보다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그들의 정부를 비판한다"며 "소련에는 완전한 비판의 자유가 있다"고 했다.이를 두고 영국 역사가 폴 존슨은 1930년대 초 조지 버나드 쇼의 '소련 찬양' 이후 서구 주요 지식인의 입에서 나온 소련에 대한 가장 굴욕적인 설명이라고 비판했다.훗날 자기 말이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나자 사르트르는 1976년 출간된 저서 '상황Ⅹ'에서 이렇게 자신을 비호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내가 믿지 않은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사실들을 몇 가지 말했다…그렇게 한 이유는 고국에 돌아오기 무섭게 나를 초청해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소련과 내 사상 사이의 관계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이런 말장난은 그의 전매특허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왜 소련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전형이다. 그는 "자신의 실천 원칙은 '지금 여기'(now and here)이고, 자신의 삶의 현장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하지 않아도 소련에 대한 비판은 넘쳐나는데다가 자신까지 소련을 비판할 경우 그것이 '현재의 자본주의가 그래도 나은 것'이란 식으로 현실을 정당화하고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데 악용될 것"이라고도 했다.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의혹에 침묵하다 29일 입을 연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막상막하다. 그는 조 후보자 의혹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조국을 꺾어야 한다는 욕망이 지배하고 있다"고 했으며,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일부 참가자가 마스크를 한 것을 들어 "자유한국당 패거리들이 어른어른하는 그런 거라고 본다"고 했다. 우리 편은 무조건 선이라는 진영 논리에 갇혀 '상식'과 '균형 감각'을 상실한 궤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눈을 씻고 귀를 씻어야겠다.

2019-08-30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왕의 남자

역사와 인간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며 한국사 속의 간신(奸臣)을 책으로 펴낸 역사학자 함규진은 그 유형을 3가지로 나눴다. 왕의 신임을 믿고 권력을 농단했던 유형, 왕보다 더한 권력을 추구했던 유형, 시류에 영합하며 일신의 영달만을 꾀했던 유형이다. 그는 첫 번째 유형을 '왕의 남자'라 부르며 삼국시대의 도림, 고려시대의 묘청 그리고 조선시대의 홍국영 등을 대표로 꼽았다.고구려 장수왕의 밀명을 받고 백제로 잠입한 승려 도림은 개로왕의 환심을 산 후 국사(國師)가 되었다. 그는 각종 토목공사를 건의해 백제의 국력을 낭비하며 백성을 곤궁에 빠트렸다. 그때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과 일가족을 붙잡아 죽였다. 어느 역사가는 도림 같은 인물을 일컬어 '역사를 훔친 첩자'라고 했다.고려 인종 때 묘청은 서경(평양) 천도와 함께 황제국을 자처하고 금(金)을 정벌하자고 주창했다. 당시 고려 사회는 외척의 반란에다 문벌 귀족과 신진 관료의 대립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있었다. 더구나 대륙에는 여진족의 나라가 흥기하며 고려를 핍박했다. 개경 귀족에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허황된 정치적 수사에 현혹된 왕은 결국 '묘청의 난'을 초래했고, 머잖아 무신정변과 함께 왕조는 나락으로 떨어졌다.조선 정조시대 초반의 정국은 홍국영이 전부였다. 모든 정사가 그에게서 나와 그를 통해 시행되었다. 외모가 준수하고 정무 감각이 뛰어난 그가 일찍이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조정 중신들 사이에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될 정도였다. 재야 선비들의 환심을 사고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인 홍국영의 독단적 권세는 그러나 정점에서 꺾이고 말았다. 도성에서 쫓겨나 폭음과 통곡으로 밤낮을 보내던 그는 30대 초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일개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를 둘러싸고 이렇게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은 그가 곧 권력의 실세이자 '왕의 남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의혹과 표리부동의 행각에 '조로남불' '조국캐슬'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자고로 간신이란 어리석은 권력자를 숙주로 삼는다. 역사상 충신과 간신을 구별할 줄 모르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과 국가의 말로는 비참했다.

2019-08-29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점(點)과 점(点)

에드윈 허블은 조지 헤일의 영향으로 시카고대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는데 사실 법률에는 흥미가 없었다. 귀국 후 교단에 서거나 법률회사에서 일하며 다른 길을 걸었다.다시 방향을 틀어 1917년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가장 성능이 뛰어난 망원경이 있는 곳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캘리포니아 마운트 윌슨 천문대에 도착한 때가 1919년 8월, 꼭 100년 전의 일이다.당시 윌슨 천문대에는 헤일이 설계한 구경 2.5m, 무게 100t의 후커(Hooker) 망원경이 있었다. 허블은 이 망원경으로 은하 관측에 매달렸는데 중노동이었다. 관측 포인트와 노출 시간을 일일이 수정해가며 유리 건판에 촬영했는데 각도가 조금만 틀어지거나 초점이 흐려도 자료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1923년 10월 4일, 안드로메다 성운 사진을 찍었다. 이를 현상하자 점 하나가 발견됐다. 재촬영해 확인한 결과 두 개의 점이 더 발견됐다. 그중 하나가 유명한 세페이드형 변광성이다. 이를 이용해 지구와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쟀는데 약 90만 광년이었다. 우리 은하의 지름인 10만 광년보다 더 멀었다. 허블이 안드로메다 성운을 통해 외부은하 존재를 처음 증명한 것이다. 이후 우주팽창론까지 증명해낸 그의 이름이 최초의 우주망원경에 붙은 것은 자연스럽다.정의당 김종대 의원이 그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와 관련해 '정보 강국'이라는 일본의 황당한 정보력 수준을 공개했다. 국회 국방위원이자 군사통인 김 의원은 페이스북에 "2017년 북한 미사일 정보를 얻으러 온 일본이 우리에게 건넨 정보는 위성 영상도 아닌 구글 맵 위에 발사 추정 지점을 표기한 도표가 전부였다"고 꼬집었다. 또 "지소미아 체결 이후 30차례 정보 교류에서 유용한 일본 정보는 단 한 건도 없었다"며 허탈해했다.빗대자면 스케치 한 장 주고는 우리의 알짜 정보를 받아간 일본이 지소미아 종료에 당황하며 극구 난색을 표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위대한 발견의 서막인 허블의 '점'(點)과 구글 맵에 달랑 찍은 점(点)은 같은 글자이지만 정자와 속자의 관계만큼 차이가 크다. 이로써 지소미아 논란은 이미 판가름이 난 셈이다.

2019-08-28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장닭 없이 굵은 놈'

지금도 그런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으나 과거 경북 북부지방에는 '장닭(수탉) 없이 굵은 놈'이란 말이 있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 예의범절을 모르고 언행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비하(卑下)하는 말이다.기자의 선친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성장기에 타인의 무례한 말이나 행동에 화를 내면 그런 소릴 들었고, 사회 상규(常規)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해도 상대방이 음해할 목적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자의 선친은 "장닭 없이 굵은 놈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다"고 했다.아버지 없이 자란 사람 중에는 '장닭 없이 굵은 놈'이란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인간 승리'를 일군 사람도 숱하다. 바로 공자(孔子)가 그렇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粱紇)은 자식 복이 없었다. 60세가 넘도록 본처에게서 딸만 9명을 얻었고, 첩이 낳은 아들도 불구였다. 그래서 66세에 무녀(巫女)인 16세의 안징재(顔徵在)를 아내로 맞아 공자를 낳았다.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이를 '야합이생'(野合而生)이라고 기록했다.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결합, 요즘으로 치면 '사실혼'이나 '동거'라는 것이다. 그만큼 공자의 '출신 성분'은 미천했다는 얘기다. 그나마 숙량흘은 공자가 3세 때 죽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공자가 17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공자는 '장닭 없이 굵은 놈'이 아니라 유교의 비조(鼻祖)가 됐다.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황제 입시'를 겨냥해 "조국 같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용이 되지 못할 것 같다"고 비판한 백경훈 '청년이 여는 미래' 대표에게 YTN 변상욱 앵커가 "반듯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수꼴(수구꼴통) 마이크를 잡게 되진 않았을 수도"라고 했다가 하루 만에 사과했다.백 대표는 대학 때 아버지를 여읜 것으로 알려졌다. 변 앵커가 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알았든 몰랐든 '반듯한 아버지'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백 대표와 그 아버지, 그 가족 모두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이다. '반듯한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아버지인가? 조 후보자 같은 아버지여야 반듯한 아버지라는 건가? 변 앵커는 부끄러워해야 한다.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imaeil.com

2019-08-27 06:30:00

이대현

[야고부] '조국아 고맙다'

지인이 SNS에 '아베야 고맙다'는 글을 올렸다. 아베 신조가 경제 보복에 나선 것을 계기로 한·일 역사, 경제 등 지금껏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고 깨달음을 얻어 역설적으로 아베에게 고마워한다는 내용이었다.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씨와 가족을 둘러싼 의혹들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조 씨에게도 고마워할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학 필기시험이 필요 없는 방식으로 고교, 대학, 의학전문대학원까지 들어간 조 씨 딸 '덕분에' 입학시스템이 허술하다는 게 드러났다. 고교 재학 중 단 2주간 인턴에 의한 논문 제1저자 등재, '황제 장학금' 논란 역시 이들 분야에 대한 점검 기회를 안겨줬다. 부동산 차명 보유, 웅동학원 채무 면탈 및 교사 부정 채용, 사모펀드 투자 등 다른 의혹들도 '가족이 뭉치면 뭣이든 할 수 있다'는 가족애(?)를 일깨워준 것과 함께 관련 제도들의 미비점을 손질할 계기를 제공했다.'우파 못지않게 좌파도 부패하다'는 논거를 조 씨와 가족이 입증한 것도 고마워할 이유다. 촛불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이 박근혜 정권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조국 사태'는 일깨워줬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문 대통령 취임사가 빈말이란 것도 보여줬다. 외모나 언변에 속지 말고 거짓·위선을 판별할 수 있도록 국민을 경각시킨 것도 의미를 둘 만하다. 청년들에게 불공정의 장벽이 어둠 속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무엇이 정의인가를 숙고하게 하고 분노·행동하게 한 것도 조 씨가 이바지한 바다.집권 세력의 참모습도 '조국 사태'는 국민에게 알려줬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가 조 씨를 보호하기 위한 꼼수라는 야당 비판에 청와대는 '갖다 붙이기'라며 부인했다. 그러나 직접증거가 없을 뿐 정황증거와 심증은 차고 넘친다. '조국 구하기' 나아가 내년 총선 프레임을 '한·일전'으로 몰고 가려고 지소미아를 파기했다면 어느 국민이 용서할 수 있을까. 권력형 비리인 '게이트'로 비화한 '조국 사태'에 대한 청와대, 더불어민주당의 도 넘은 비호도 집권 세력 실체를 국민에게 일깨워줬다. 장외 집회에 10만 명이나 모이게 해준 조 씨에게 자유한국당은 '조국아 고맙다'라며 청문회 준비에 바쁜 그에게 김칫국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2019-08-26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투 머치 토커

SNS나 유튜브 영상에서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라는 용어를 종종 접하게 된다. '지나치게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영어의 프래틀러(Prattler)나 개시(gassy)와 같은 의미다. 간단하게 얘기하고 끝낼 일도 장황하게 늘어놓아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을 이르는 용어다.이 용어가 크게 부각된 것은 전직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 때문이다. 은퇴 후 TV 예능 프로에 종종 얼굴을 내비친 그는 겉보기와 달리 한번 시작하면 좀체 끝이 나지 않을 만큼 말을 많이 해 '투 머치 토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말하는 것을 즐기는 스타일이고 또 엄청난 달변가다. 그가 출연한 TV 상업광고도 자연스레 '수다쟁이'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진다.요즘 딸 문제로 의혹의 중심에 선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SNS상에서 '투 머치 토커'로 불릴 만큼 늘 대중의 주목을 받아온 사람이다. 교수 재직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청와대 입성 이후에도 트위터 때문에 종종 구설에 올랐다. 좋게 보면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하고 참여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표현이 지나치거나 공감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아 못마땅하게 보는 부류도 분명 있다.조국 후보자가 매일같이 신문 방송을 독차지하면서 '오늘도 조국, 내일도 조국' 푸념도 나온다. 딸의 부정 입학 의혹에서부터 논문, 장학금 등 각종 논란이 이어지자 조국 후보자의 해명도 길어진다. 진위 공방이 기어코 인사청문회까지 이어질 모양이다.어떤 특정 사안의 진위가 엇갈리면 누구나 있는 그대로를 밝히고 억측과 오해를 불식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실을 밝히는 것 못지않게 결말에 이르는 과정도 중요해서다. 의혹을 풀기 위해 자신을 항변하는 것은 의혹의 중심에 선 당사자로서 의무인 동시에 보편적 권리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쏟아내는 말과 드러나는 정황 증거들이 진실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면 항변권은 효력을 잃기 마련이다. 지금 국민들은 밑도 끝도 없는 그의 해명을 반복해 듣고 있다. '투 머치 토커'의 고문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유다.

2019-08-24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위령비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가곡 비목(碑木)의 노랫말 2절이다. 화약 연기 사라진 달빛 처연한 전장에 쓸쓸히 남은 비목을 노래하는 것은, 두고 온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애틋하게 스러져간 이름모를 병사들을 위한 진혼곡이다.참혹한 전쟁의 여운과 미려한 자연 풍광이 빚어낸 역설이 모태가 된 가곡 비목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천진한 뒷모습을 남기고 떠난 청춘의 호곡성이기도 하다. 경주 안강읍 용운사 경내에 서 있는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의 모습도 비목과 다름이 없다. 태극기를 새긴 전투모 형상의 비석갓이 치열한 전투 속에 죽어간 젊은 넋들을 상징하고 있을 뿐, 비석에 새겨 놓은 20여 명의 전사자가 정규군이었는지 학도병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20일에 세웠으니 6·25 전사자 위령비로는 가장 빠를지도 모른다. 사각 기둥 위에 철모 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것도 특이하거니와 비문에 신라 경순왕과 마의태자가 등장한 것도 특별하다. 위령비 옆면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기록하던 표기법인 신라의 이두(吏讀) 흔적도 있다고 하니, 문화재적인 가치도 지닌 듯하다.안강은 인민군 주력부대인 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국군이 북진하는 6·25전쟁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다. 위령비가 있는 용운사 주지 스님은 '내년이면 비를 세운 지 70주년이 되는 해'라며 관련 당국과 대중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시절이 수상하니 젊은 넋들의 표상이 오히려 더욱 서러울 따름이다.미증유의 민족적 비극을 초래한 북한의 공산왕조는 아직도 미사일 도발을 거듭하며 남쪽을 향해 온갖 욕설을 내뱉고 있다. 남한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 '겁먹은 개'라고 조롱한 데 이어, 이번 광복절 '남북협력 및 한반도 평화구상'에 대해서는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북쪽에서 사냥총 소리만 나도 똥줄을 갈기는 주제에…"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대꾸 한마디 못한다. 비목과 위령비조차 피눈물을 흘릴 지경이다.

2019-08-23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8조원과 20만 혁신 인재

올 들어 경북 영주에서 호미를 만드는 60대의 석노기 장인(匠人)이 언론에 등장, 화제를 모았다. 쇠 두드려 만들기 외길 인생의 보람인지 그의 혼(魂)이 깃든 호미가 지난해 세계 최대 온라인 판매망인 미국의 아마존을 통해 지구촌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주문이 잇따랐던 덕분이다.그러나 이전까지는 누구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호미였다. 그의 '영주대장간' 역시 지난 2017년 '향토 뿌리기업'과 '경상북도 산업유산'에 지정되고, 지난해 그 역시 '경상북도 최고장인'에 선정되는 영광도 얻었지만 그를 이을 사람은 없었다.지난 52년 동안 이어온 호미 만드는 일을 어느 누가 감히 물려받을 생각이나 했을까. 겨우 한 젊은이가 기술을 배우겠다고 나타났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둔 안타까운 사연도 들렸고 뒷받침이 없으면 아마 대(代)는 끊어질 터이다.기술을 잇는 장인 육성은 옛날에도 난제였다. 물론 사정은 지금과 달랐다. 조선 선조 시절 경북 청도의 도공(刀工)으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기술을 지녔고, 특히 철의 품질을 구분하는 데에는 마치 신과도 같았다'던 저재(抯才)와 아들에 얽힌 사연이 그렇다. 일제 때 다카하시 도루가 남긴 기록을 보자. '임란 때 일본군 병사가 그 장인의 제품을 보고 대단히 칭찬했다…저재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이 가업을 이었다…그는 관아의 가혹한 상납 재촉을 견뎌내지 못했다…저재의 아들은 끝내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서 겨우 파산을 면했다.'시대가 바뀌고, 우리 사회 역시 기술을 인정하고 장인을 받들기도 했다. 과거와 달리 직업의 귀천도 옅어졌고, 상납 요구도 사라졌다. 그렇지만 특정 직업에 젊은이와 부모가 목을 매는 모습은 여전하다. 어쩌면 더 심한지도 모를 일이다. 기술 계통 기피나 오직 공무원의 길을 바라는 현상은 좋은 사례다.한·일 경제 전쟁을 맞아 정부가 연일 투자를 강조하고 뭇 정책을 내놓고 전쟁 승리를 다짐하고 있다.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앞으로 7년간 100대 핵심 전략 품목을 골라 8조원 이상을 투자한다고 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21일 2023년까지 20만 명 혁신 인재 양성을 약속했다. 정부 외침처럼 돈을 넣고, 사람도 키운다니 앞의 두 사례 같은 일은 역사 속의 일로만 기록되리라 믿어본다.정인열 논설위원 oxen@imaeil.com

2019-08-22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야고부] 문자의 옥(獄)

근대 이전 중국에서는 황제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인물을 숙청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자의 옥(獄)'이 자주 이용됐다. 문자의 옥이란 책이나 문서에 적힌 내용이나 글자를 파자(破字)해 황제를 비판한다고 몰아붙이는 것으로, 명의 홍무(洪武)제와 청의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제 때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그중 하나가 옹정제 때인 1726년에 터진 '사사정'(査嗣庭) 사건이다. 한족(漢族)으로 강서성 주시험관을 맡은 사사정이 시험 문제에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방기천리 유민소지(邦畿千里 維民所止, 나라의 도읍 사방 천 리는 백성이 멈추어 사는 곳이다)에서 따온 것으로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그러나 이 문구의 '維'와 '止'는 옹정(雍正)에서 윗변 'ㅗ'와 '一'을 의도적으로 걷어낸 것으로, 옹정제의 참수를 의미한다고 해석되면서 피바람이 불었다. 고문을 받다 자살한 사사정은 잠시 땅에 묻혔다가 부관참시됐고, 그의 가족 중 16세 이상 남자는 모조리 참수됐다. 일본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제거하려고 꾸민 '호코지 종명'(方廣寺 鐘名) 사건이다.히데요리는 도쿠가와의 건의로 호코지를 재건하면서 범종(梵鐘)도 만들었는데 거기에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이란 문구를 새겼다. 너무도 좋은 의미였지만 도쿠가와는 자신의 이름을 '安'자를 이용해 두 글자로 쪼개고, '臣'과 '豊'을 이어놓아 도요토미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저주를 거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말하자면 일본판 '문자의 옥'을 벌인 것이다.홍콩 최고 갑부인 리카싱(李嘉誠)이 홍콩 시위와 관련해 홍콩 언론에 게재한 광고에 숨은 의미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표면적인 메시지는 '폭력 시위는 안 된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의미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광고를 둘러싸고 있는 문구를 좌우로 오가며 각 문구의 끝 글자를 모으면 '홍콩 사태의 책임은 국가(중국)에 있다. 홍콩 자치를 용인하라'(因果由國, 容港治己)가 된다는 것이다. 표의문자인 한자에서만 가능한 해석의 기예다. 이런 해석이 빌미가 돼 홍콩판 문자의 옥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2019-08-21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야고부] 조국의 길

조선 중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曺植)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사화(士禍)로 얼룩진 16세기의 위기와 혼돈을 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 정신사의 거목이었다. 이 위대한 사상가로 인해 유교가 유례없는 혁명적 실천 기능을 담당할 수 있었다.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는 민암부(民巖賦)의 설파에서 남명은 민중적 지식인의 풍모까지 내비친다.남명은 협객의 이미지도 지녔다. 실제로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귀를 새긴 칼을 차고 다녔다. 벼슬을 사양하며 올린 '을묘사직소'에서도 조정의 실정을 준엄하게 통박하며 청고한 선비의 기개를 드러냈다. 남명의 유학 정신은 개방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불교와 노장사상을 포용했으며, 제자들에게 병법과 천문, 지리, 의학 등 실용 학문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가르쳤다.그의 문하에서 임진왜란 때 많은 의병장이 나오고 광해군 정권에서 현실 정치에 참여한 것은 '앙가주망'에 다름 아니었다. 남명의 유교는 실천철학이요 마음의 철학이었다. 외부 세계의 변혁과 함께 자신의 혁신에도 주목했다. 남명의 정신은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앙가주망은 문중의 선조인 남명 조식과는 많이 다른 듯하다.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규정한 앙가주망도 지식인의 사회참여이긴 했지만, 권력에 편승해 감투와 권세를 얻거나 사익을 챙기는 길은 아니었다. 앙가주망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뇌이며 불의에 맞서 진실을 설파하는 지식인의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리페서를 비난했던 조국 후보자는 서울대생들이 뽑은 가장 부끄러운 동문 투표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벼슬길에 나선 후 그의 언행은 지성적이기보다는 선동가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죽창가로 애먼 국민을 분열시키고 친일파로 갈라치기 하고 있다. 할 말이 없으면 "맞으면서 가겠다"고 한다. 조국(曺國) 뜻대로 가다간 좌국(左國)이 될 것이라는 비아냥과 함께 조국(弔國)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수상한 소송과 투자 의혹까지 받고 있는 강남좌파의 길에 앙가주망이 웬말인가.

2019-08-20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야고부] 대구의 두 일본인 남녀

두 일본인 남녀가 있었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여럿이다. 1905년에 태어나 1997년 삶을 마감한 노구치 미노루(野口稔) 또는 노구치 가쿠츄(野口赫宙)와 지금도 활동 중인 1927년생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 대구에서 태어났고, 한때 경주에서 삶을 살았던, 글을 쓰는 작가이다. 또 일제강점기의 한국 관련 작품을 썼고, 한국과 일본에 걸쳐 살았지만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이어간 이력을 가졌다.다른 점도 있다. 앞의 남성은 망한 식민지 나라 사람으로서, 장혁주(張赫宙)라는 한국 이름을 하나 더 가졌다. 한국어, 영어, 특히 일본어로 된 작품을 더 많이 남겼다. 한국 여성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었으나 다시 일본 여성과 결혼했고, 1952년에는 일본에 귀화를 했다. 한국을 비판하고 자신을 낳아준 땅을 싫어했고 마침내 등지고 나라를 버렸다.일본 여성 모리사키는 17년 머물렀던 한국을 떠나 1944년 귀국, 지금까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장혁주와 달리 한국에 '원죄' 의식을 가졌다. 식민지배 시기, 일본 때문에 죽은 숱한 한국인은 자신을 대신해 희생됐다는 '원죄'에 시달렸다. 그가 태어난 대구나 살았던 경주의 한국을 고향이 아닌 원향(原鄕)이라 불렀다. 1984년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나의 원향(原鄕)'이란 책은 이런 배경으로 탄생한 셈이다.두 작가의 운명은 일제의 식민지배 결과였다. 생명을 준 땅과 나라까지 버린 장혁주, 그 땅과 나라에 원죄를 느낀 모리사키 가즈에. 스스로의 조국을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여기지 못했던 두 사람. 그러나 세월은 두 사람을 달리 평가하고 있다. 대구(한국)는 장혁주를 잊었고, 그와 그의 뭇 작품은 잊혀졌다. 반면, 대구(사람)는 모리사키를 다시 기억해 그 작품도 머잖아 번역, 출판될 모양이다. 두 사람의 역사가 얄궂다.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15 광복절 행사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였으면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도 없었을 터인데 안타깝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일본과 한창 경제 전쟁을 치르는 지금, 나라 사정을 살피면 과연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는 실현될지, 언제쯤 이뤄질지 답답하다. 안팎에서 어려운 한국을 흔드는 '아무'가 벌써부터 바다 건너는 물론, 안에서조차 여기저기 우후죽순이니 말이다.

2019-08-19 06:30:00

이대현 논설위원

[야고부] 망조(亡兆)든 미국

로마의 첫 통치자 로물루스는 첫 전쟁을 사비니와 치렀다. 승리한 로물루스의 결정은 뜻밖이었다. 승자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사비니에 로마와 동등하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로물루스와 사비니 왕 타티우스는 공동으로 왕이 됐고 두 부족은 권력을 나눠 가졌다. 세계제국 로마는 패자까지 품은 관용(寬容)에서 싹이 텄다.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보편제국'을 이룬 로마의 힘은 관용 한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로마제국 설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통치 방침을 관용이라고 선언했다. 갈리아족, 유대인 등 로마는 이민족들의 다양성을 존중했고 그들에게 시민권을 줬다. 관용을 바탕으로 민족, 문화,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성을 극복해 제국을 만들었다.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아 로마에 자주 비견되는 것이 미국이다. 실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로마 공화정은 이상적 통치 체제였다. 대통령과 의회, 법원이 권력을 나눠 갖는 체제는 로마를 모델로 했다. 다양한 이민족을 포용해 '팍스 아메리카'를 만든 것 역시 로마를 빼닮았다.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던 30대 후반의 한국계 외교관이 자괴감을 견딜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인종주의, 여성 혐오 등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게 외교관을 그만둔 이유다. 관용을 비롯해 자유, 공정 등 미국적 가치를 확산하려고 외교관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이런 가치들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에 나설 때 트럼프의 참모습을 알아봤어야 했다. 급기야 적도 아닌 동맹국에까지 폭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대아파트에서 114달러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달러를 받는 게 더 쉬웠다"고 한국을 조롱·폄훼하고 문재인 대통령 말투를 흉내 내며 희화화했다. 품격·관용은 차치하고 동맹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다. 관용은 사라지고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아프리카인 노예로 부를 쌓은 초기의 '야만 미국'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트럼프에게서 볼 수 있다. 미국도 망조(亡兆)가 단단히 들었나 보다.

2019-08-17 06:30:00

서종철 논설위원

[야고부] 조강(糟糠)

일본에서 250만 부나 팔린 후지와라 마사히코(전 오차노미즈대 교수)의 '국가의 품격' 한글판 서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때 조선인들이 베풀어준 음식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패망 후 1946년 8월, 저자 가족이 귀국길에서 겪은 고생과 굶주림, 자신을 핍박하던 일본인을 되레 도와준 조선인들의 온정에 대한 이야기다.피난 경로를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만주 신경(창춘) 태생인 그와 가족이 만주나 한반도 북부에서 살다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머니와 다섯 살이던 저자 등 삼 형제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개성(開城)에 다다르는 과정이 나온다.무사히 귀국 후 어머니가 저자에게 여러 차례 들려준 말도 서문에 담았다. "돈 많은 조선인은 차가웠지만, 궁핍했던 조선인들은 음식을 베풀어주는 등 우리를 따뜻하게 도와주었다"는 내용이다. '비에 젖어 거지꼴인 우리를 따뜻한 마구간에 재워준 분도 있었다.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준 조선인 여러분이 없었으면 우리 가족은 북한의 산 어딘가에 묻혀서 흙이 되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회상한다.그때 후지와라 가족이 얻어먹은 음식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돌이켜보면 격식을 차린 음식은 결코 아닐 터다. 해방 무렵 이 땅의 사람들이 먹던 흔한 밥과 반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음식이 한 가족을 살렸고 먼 훗날 기억에 박제된 것이다.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청와대 초청 오찬에 제공된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 화제다. 백범이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휴대하기 편해 자주 먹었다는 대나무 잎으로 감싼 '쫑즈'와 돼지고기 간장조림 요리 '홍샤오로우'다. 요즘 사람에게는 생소한 음식이지만 그 음식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최근 안동에서 독립군이 먹던 밥상을 복원하는 사업도 활발하다. 항일 투사들이 평소에 먹던 보리개떡, 소금에 절인 콩자반 등을 되살려내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조강(糟糠)과도 같은 음식이다. 조강은 지게미와 쌀겨를 말하는데 가난한 이들이 늘 먹는 음식이다. "조선인은 밥을 많이 먹어서 늘 배가 고프다 투정한다"며 혐한 망언을 쏟아내는 저질 일본 TV 출연자들은 음식의 가치나 박애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2019-08-16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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