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빨치산의 딸이 쓴 '자본주의의 적'

자본주의의 적 / 정지아 지음 / 창비 펴냄

'자본주의는 인류의 적이다! 공산주의 만세!'라는 문구가 적힌 옛 소련 선전 포스터. '자본주의는 인류의 적이다! 공산주의 만세!'라는 문구가 적힌 옛 소련 선전 포스터.
자본주의의 적 / 정지아 지음 / 창비 펴냄 자본주의의 적 / 정지아 지음 / 창비 펴냄

소설의 최고 덕목 중 하나는 독자의 시선을 붙드는 힘이다. 시선을 마비시키는 힘은 대개 제목에서부터 풍겨나오기 마련인데 '자본주의의 적'이라는 제목은 소설 제목치고 상당히 도발적이다. '자본주의의 적'이라는 소설집 제목을 훑고 작가 이름을 더듬는다. 설마, 정지아 작가다. 그녀의 전작, '빨갱이의 딸'로 오독하곤 하는, '빨치산의 딸'(1990년 作)까지 끌고 와 소설판 사상총화서적으로 분류하는 건 섣부른 오해다.

정지아 작가가 8년 만에 낸 소설집이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된 단편들이 실렸다. 표제작인 '자본주의의 적'부터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검은 방', '아하 달', '애틀랜타 힙스터',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 '계급의 완성', '존재의 증명',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까지 작품 아홉 편은 독자의 시선을 끝까지 붙든다.

제목부터 심상찮던 표제작 '자본주의의 적(敵)'은 사회주의자였던, 설마했던 작가의 부모를 초장에 등판시킨다. 선입견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작가 자신으로 추정되는 작중 화자가 그려낸 자본주의의 적은 왕년의 사회주의자, 칼빈 소총을 들고 지리산을 뛰어다니던 화자의 부모가 아니다.

화자가 내세운 자본주의의 적은 실제 절친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표현된 친구 방현남이다. 화자는 자본주의의 적을 어떤 것이라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귀차니즘 구현이 신념인 듯한 무욕덩어리,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비기(祕技)의 고수 방현남의 삶을 풀어놓는다. 승진이나 경쟁, 다른 이들과의 비교에 목숨 걸지 않는 방현남에게서 떠올리는 한 마디는 '안분지족'이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왜 실패했나. 출처 frozenfire.com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왜 실패했나. 출처 frozenfire.com

소설집에서 유쾌하게 단 한 편만 읽을 수 있다면, 시트콤을 재현한 듯한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이 남을 것이다. 제목에서처럼 작중 화자가 작가 자신이다. 소설에서 첫 문장의 중요성을 말하나마나인데, 이 작품은 다급함이 듬뿍 밴 초간단 격문 세 음절 'X됐다'로 시작된다. 소셜미디어로 왜곡된 생활의 불균형을 온동네 주민들이 합력해 선을 이루듯 바로 잡으며 해피엔딩 스토리로 매조지는 이야기다. 훈훈한 마무리임에도 소셜미디어의 공허함과 비현실성이 엿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셜미디어의 폐해, 보여주기 위한 거짓을 꼬집는 부분은 '애틀랜타 힙스터'에도 등장한다. 무엇을 좋아하든 취향으로 존중될 만하지만 소셜미디어의 프레임에 들어가면 이미지 발산과 소모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뜨개질이 취미인 애틀랜타 출신(실제로는 애틀랜타 근처 시골 출신인) 영어 강사 스텔라의 무의미한 행위나 반복되는 동작인데 이것이 장인(匠人)의 단면인 양 힙스터의 표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긴다.

커피나 취미 등 취향이 현대인들에게 중요 키워드가 됐음을 암시하는 작품들도 관심을 끈다. 갑자기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이 커피, 가구 등을 통해 기억을 되찾아 가는 여정을 그린 '존재의 증명'에서는 취향이 결국 정체성이라는 걸 설파한다. 복숭아꽃 빛깔의 발바닥을 되찾고 싶었던 경비원의 욕망 실현 과정을 그린 '계급의 완성'도 몰입도 높은 심리 묘파가 압권이다. 가장의 무게감과 스스로를 향한 동정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아버지들의 자화상으로 비친다.

영화 '남부군'의 한 장면. 영화 '남부군'의 한 장면.

소설집을 널리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더 기여한 작품은 단연 문학상 수상작일 것이다. 심훈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검은 방'과 김유정문학상을 받은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작가의 어머니와 사촌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

특히 '검은 방'은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어머니 이옥남 씨를 주인공으로 했다. 이 작품은 우리 문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영문과 한글로 함께 펴내는 'K-픽션 시리즈'에 선정되기도 했다.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에도 어머니(로 강하게 추정되는 인물)는 주요 인물로 소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298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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