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농도 짙은 우리의 진심을 보고 싶다면… '환한 숨'

환한 숨 /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대구시내에서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시내에서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연합뉴스
환한 숨 /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환한 숨 /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우연한 기회에 조해진 작가의 성우 뺨치는 목소리를 듣다 순간 소설과 작가가 곧이곧대로 연결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노라는 말을 듣고 수긍과 반색의 고갯짓을 한 적이 있다. 음울하며, 심지어 대책도 없어 보이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뿜어내는 먹먹함과 작가의 순도 높은 청량한 음성이 서로를 모른 체하는 듯했다는 얘기였다.

소설가의 일이란 무릇 글로 배경을 묘사하고 인물 캐릭터를 설정해내고 서사를 풀어가기 마련인데 작가의 목소리가 웬 말인가 싶었더니 오디오북이 활황인 지 오래고, 읽어주는 소설의 시대가 도저한 흐름으로 트렌디하고 스마트하게 정착돼 가고 있다는 업황이 답으로 온다.

이런 와중에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읽어도, 서너 페이지만 넘기면 '조해진 작품인가' 한다는 그의 소설집이 나왔다. 2004년 등단, 2008년 첫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2014년 두 번째 소설집 '목요일에 만나요', 2017년 세 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 그리고 2021년 등단 18년 차를 맞은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환한 숨'이다. 단편 '환한 나무 꼭대기'와 '하나의 숨'을 조합한 이름으로 해석하면 되는지 짐짓 고민하게 되는 표제다.

2014년 나온 '문래'와 2016년 나온 '눈 속의 사람'을 제외하면 사실상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각종 문예지 등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이다. 총 아홉 편이 실렸다. 국내 주요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나 앤솔러지 등에서 이미 소개돼 눈에 익은 작품이 많다. 그만큼 작가의 수상력이 막강하다는 뜻이다.

한 등반객이 북한산 인수봉에서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한 등반객이 북한산 인수봉에서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소설집 등장인물들은 어느 샌가 작가의 페르소나라 할 만큼 약자와 빈자가 다수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데 정작 법을 몰라 허약하고, 서툴게 눈치를 보고, 그래서 내 코가 석 자인 이들의 진퇴양난을 작가는 화학식 못잖은 농도와 순도와 밀도와 질감으로 구현해낸다. 솔직한 감정들의 릴레이에 독자는 읽는 내내 불편할지 모른다.

시용기자로 들어와 시키는 대로 충실히 일했지만, 해직기자들이 복직하면 어떻게 할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자.

"다른가. 저들과 내가 다르다면 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강렬한 확신을 양손에 쥔 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위에 가담한 선배 기자들을 볼 때면 그런 식의 의문이 시작됐고, 그 다른 무언가를 의식하고 열거하고 분석하다 보면 도덕적 열등감이 뒤따르곤 했다. 때로는 열정과 신념이 휘발되는 공허가 엄습했는데, 그럴 때면 연진은 자신의 전 생애가 부식해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내장과 피와 뼈가 더럽혀지는 것 같았고 누군가의 농담을 듣고 무심결에 흘러나온 단순한 웃음은 곧바로 스스로를 향한 조소로 변성됐다. 연진은 조금씩 선배 기자들을 못 본 척 지나가게 되었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에 전력을 다해 둔해지는 연습을 해야 했다."(경계선 사이로)

다른 인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말기암 동창의 간병인으로 일하다 그의 아파트, 동창이 아들에게 물려주라고 부탁한 그곳에서 살아가는 50대 간병인(환한 나무 꼭대기), 현장실습 중 뇌사 상태에 빠진 제자의 뒷감당에서 벗어나 다행스러워하는, 제 앞가림이 급한 기간제 교사(하나의 숨), 성추문 끝에 실종된 아빠의 존재감을 확인하러 피해여성에게 여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어쩌면 좋겠냐고 연락하는 언니(높고 느린 용서)까지 등장인물 모두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욕망을 감추기 어려워한다.

한 커플이 어둑해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한 커플이 어둑해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마치 천붕의 괴로움 중에 느낀 배고픔처럼 생존을 위한 욕구로 인식되기도 한다. 문득 이 소설집이 가련한 이기주의자들의 수용소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이들에게 윤리의 잣대를 가져다대는 건 좀스러운 걸까. 315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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