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걸 칼럼] 국가의 폭력성과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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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건군 74주년을 맞는 국군의날 행사와 보도를 보면서 문득 '국가'의 폭력성과 도덕성의 문제가 생각났다. 사람이란 함께 모여 살아야 하는 동물이고, 모여 살다 보니 위계질서가 필요하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순응해 살아가는 다른 동물에 비해 사람은 개인의 자유를 조금씩 양보해 정치공동체를 만들고 그 정점에 '국가'가 있다.

국가에 대한 정의는 무수히 많지만 오늘날 사회과학에서 가장 보편적인 개념은 막스 웨버의 국가론이다. 그는 국가를 '유한한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로 정의했는데, 이 짧은 문장에 어쩌면 그렇게 국가의 요체를 명확히 지적했는지 놀라울 정도다.

특정 국가의 영향력은 영해와 영공을 포함한 배타적 영토 내에서만 미친다. 영토 내에서라면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모든 자연인과 법인이 국가 통제의 대상이다.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은 다른 주체의 폭력과는 달리 합법적이다. 재판을 통해 사형을 구형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생명권을 박탈하는 것이지만 합법이다. 반면, 모든 국가의 폭력행위가 합법적인 것은 아니다. 국가도 불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고, 그에 관여한 사람들은 범죄행위로 처벌받는다.

국가 폭력의 가장 극단적 수단이 군이다. 군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군은 영토 내의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고 훈련하며, 유사시에는 반드시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지켜내지 못하면 세계지도에서 국가의 이름이 사라지고 국민은 생명과 재산은 물론, 온갖 치욕과 불명예 속에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설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나라를 잃은 지 36년, 외교권을 잃은 후부터 따지면 41년 만에 정말 어렵고 힘들게 반쪽이나마 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 후 불과 2년 만에 북한의 남침으로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대한민국은 수많은 국군장병의 희생과 때마침 불어온 냉전을 등에 업고 간신히 격랑의 시대에 국권을 지켜냈다. 이후 부모 세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었고, 이제 세계 시민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문화대국으로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굴곡의 현대사에 어찌 억울함과 오해, 갈등이 없을 수 있을까. 독립운동을 할 때는 애국지사들 사이에서도 서로 믿지 못하고 반목하는 일이 허다했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늘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졌다.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는 것은 같으나 방법과 길이 다른 애국지사들은 오늘날 용어로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로 나뉘어 결코 힘을 하나로 합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모든 정파를 아울러 광복군을 창설하려고 노력했던 백범 선생도 가슴을 총에 맞아 목숨까지 잃을 뻔했을까.

광복 후 건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좌우 갈등과 분열은 극에 달했고, 결국 남북분단을 피할 수 없었다. 남북 갈등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 정치사는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속에 늘 방황했다. 오랜 지역 갈등이 이젠 좀 완화될까 기대했건만 오히려 빈부 격차, 세대 및 남녀 갈등의 가세로 더욱 해결의 길이 난망하다.

미국-중국 간 패권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이후 세계적 인플레이션 대응으로 물가·금리·환율의 3고 현상과 함께 급속한 저출산·고령화로 국가적 위기로 치닫는 지금이 나라는 너나없이 극단적 갈등과 분열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외교 정책마저 정파적 이익 극대화의 도구로 전락시키면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알량한 권력으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또는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미래는 아랑곳하지 않는 부도덕한 정치인들이 판을 친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는 개인이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선택을 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동체 전체의 이익도 극대화된다고 보았다. 이때 개인은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가 아니다. 아담 스미스의 개인은 마음속에 '도덕성을 갖춘 중립적 관찰자로서의 자신'을 갖고 있는 도덕적 인간을 가리킨다. 여야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자신의 내부에 도덕성을 갖춘 중립적 관찰자를 갖고 있는가. 그 도덕적 내가 각종 정치적 사안을 어떻게 판단하고 무어라고 충고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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