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의 영국이야기] 우리가 사는 곳에 벤치가 많았으면 좋겠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새긴 의자가 곳곳에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새긴 의자가 곳곳에 있다.

사람 사는 모습을 의자로도 알 수 있다. 영국에는 의자가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책상의자, 식탁의자, 안락의자뿐만 아니라, 화장대 앞에 놓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stool), 다리를 올려놓는 나지막한 스툴, 작고 깜찍한 어린이 의자도 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편한 의자(nursing chair)와 몸이 나른할 때 잠시 누울 수 있는 데이 베드(day bed)까지 있다.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때, 공원에 들고나가는 접이의자는 집집마다 있다.

벤치도 곳곳에 무척이나 많다. 띄엄띄엄 공원에도 있고, 시내 한복판에도 있고, 가게 앞에도 있다. 자연을 감상하기 좋은 곳, 조용해서 생각하기 좋은 곳, 편안하게 쉬기 좋은 곳, 오붓하게 이야기나누기 좋은 곳, 느긋하게 책읽기 좋은 곳마다 잘도 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곳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벤치가 말하는 듯하다.

아무 것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외진 구석에서 벤치를 만나면 의아하면서도 반갑다. 한참을 올라간 언덕 꼭대기에서 마주치면 감탄이 나오면서, 이 무거운 걸 이렇게 높은 데까지 운반해온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까지 든다.

유독 눈길이 가는 건 누군가가 기증한 벤치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이름은 대단한 사람만 남기는 줄 알았는데, '사랑을 준 사람'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길 수 있는 거였다. 떠나간 사람을 길이길이 기리며, 세상과 두루두루 나누는 방식이 근사하다. 하찮은 인생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방식이 훌륭하다.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떠나간 삶은 충분하다.

영국의 공원에는 다양한 의자들이 많다.
영국의 공원에는 다양한 의자들이 많다.

벤치에 앉기만 해도 금세 느긋해졌다.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면 마음이 쉽게 평화로워졌다. 거대한 나무에 매달린 가지들이 한꺼번에 뭉글뭉글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면 머릿속에서 상상이 넘실댔다. 사방이 확 뚫린 언덕꼭대기에 앉아 바람을 맞으면 가슴이 뻥 뚫렸다. 온몸의 감각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일이 어디 이것뿐이겠나. 더러 헐거운 공기와 헐거운 생각이 간절한 날이 있다. 열심히 사느라 하루는 빡빡한데도 나는 허전하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사느라 마음이 답답하다. 배운 대로 사는데도 나는 변변찮고 시시하다. 기운이 빠지고 허탈해지면서 바보 같다. 거의 울음이 터질 지경이 된다. 무거운 속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도 싶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도 싶다.

메리 앤 섀퍼와 애니 배로스가 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이 갑갑해지는 날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공원에 간다고.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다보면 갑갑한 게 어느 정도 풀린다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반드시 쉬는 것만은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나를 반겨줄 곳이 있으면 좋겠다. 이불 속에서 울기보다는 나을 거라며 나를 초대하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 당장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시간과 돌이켜보면 쓸모없을 것 같은 시간이라도 함께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 그저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을 곳이 있으면 좋겠다.

의외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벤치일 수도 있다. 벤치가 나 자신에게 솔직하라고 하면서, 가만히 마음 가는 길을 따라가라고 할 수도 있다. 잊을 건 잊어버리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줄 수도 있다. 어느새 나를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고, 어쩌면 고되고 힘든 삶을 아름답게 느껴지게 할 수도 있다.

스페인 화가 에바 알머슨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작은 흠집만으로도 쓰리고 아플 수 있고, 똑바로 잘 가다가도 길을 잃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보듬어주고 챙겨줄 곳이 필요하다. 길을 잃은 곳이 어디쯤인지 알아볼 곳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세심한 배려와 친절을 베푸는 곳이 벤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곳에 벤치가 많았으면 좋겠다.

이진숙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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