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48>유학의 본산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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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선비 요람 김산·개령·지례향교, 한말엔 '영남만인소' 주축

첫눈이 온다는 소설(小雪)이 지나자 여기저기에서 눈소식이 날아온다. 먼 발치의 황악산도 첫눈을 맞고 흰옷을 입었다. 첫눈 소식은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렌다. 스키장 개장 소식도 뒤따르는 것을 보니 겨울이 성큼 다가온 모양이다.

대통령선거가 목전에 다가온 탓인지 온통 선거 이야기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이번 선거의 중요함을 대다수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차분히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선거가 치러지면서 잃어버리는 것들도 많은 것 같다. 매년 이맘때면 이웃돕기 김장, 불우시설 연탄 배달 등이 신문이나 방송의 한쪽을 장식했지만 올해는 선거 얘기에 매몰돼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소외계층에겐 더욱 추운 겨울이다.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인데 정치 때문에 국민이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전편에서 김천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섬계서원(剡溪書院)을 소개했다. 서원이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 교육기관이라면 이에 대칭되는 공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 '향교'(鄕校)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설치된 향교는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고 불교의 폐단을 부각시키기 위한 교육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더욱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임진왜란 이후 왕권이 추락하고 지방호족들이 득세하면서 향교는 독보적인 자리를 서원에게 내주게 된다. 황악산자락인 김천에는 김산'개령'지례향교가 있다.

◆김천 선비의 요람 김산향교

김천시 교동에 있는 김산향교를 찾았다. 김산은 김천의 옛 이름이다. 향교가 있는 동네 이름은 대부분 교동(校洞)이라고 불린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벚꽃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연화지를 지나 주택가 좁은 골목을 따라 가면 금방 향교에 닿는다. 향교에 가까와지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만히 보니 어미개가 새끼를 낳을 때가 다가온 걸까. 개집에는 불이 켜져 있고 옷가지까지 깔아 놓았다. 낯선 이가 혹시라도 뱃속 강아지에게 해를 줄까봐 걱정돼 으름장을 놓은 모양이다.

외삼문 앞 안내문에는 김산향교의 설립년도가 1392년으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김산향교는 임진왜란 중 소실되며 관련 자료가 모두 불에 타 정확한 설립 연대를 알 길이 없다. 다만 1530년(중종 25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김산군 관아의 남쪽 1리에 향교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중종 25년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34년(인조 12년)에 조마면 출신 진사(進士) 강설이 대성전과 명륜당을 재건하고 그의 아들 강여구가 선친의 뒤를 이어 동'서재와 내삼문을 복원했다. 진산으로 불리는 산자락에 설립된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외삼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동무'대성전으로 구성돼 있다. 김산향교에는 유난히 배롱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 배롱나무는 성장하면서 스스로 껍질을 벗어 때가 끼지 않는다. 선비가 글을 읽지 않으면 마음에 때가 낀다는 것을 경계한 말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서원이나 향교, 서당 등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이 향교가 있는 자리는 원래 12개의 암자를 거느린 '고산사'(孤山寺)란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 관아에서 향교 지을 터를 물색하던 중 교동 중앙에 자리한 고산사를 향교터로 잡아 스님들을 내쫓고 향교로 사용했다고 한다. 불교의 폐단을 내세워 '숭유억불'의 칼날이 무서운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졸지에 절터를 빼앗긴 스님들은 암자 중 하나였던 벽루암 자리로 옮기고 절 이름을 구화사로 바꿨다고 전한다. 지금의 구화사가 옛 벽루암 터였던 것이다. 향교 뒷쪽에 있는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主享)으로 맹자'자사 등 중국 유현 7인과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 등 동방 18현을 모시고 있다.

1718년 여이명은 '금릉지'(金陵誌)에서 "전에는 동'서재의 유생들이 50인에 불과했다. 지금은 100여 명이 넘고 큰 소리로 떠들고 이리저리 앉자 농담이나 하고 젊은이가 연장자를 이기고 양반을 능멸하는 일이 다반사다. 교임을 택함에도 문필이 있는 사람을 골랐는데 이제는 배우지 않은 자가 뽑혀 문서도 글귀가 안 맞고 아무곳에나 뒹굴어자니 수치스러움이 한도 없다"고 당시 김산향교 전경을 묘사했다. 어른들 눈에 비친 아이들의 행실은 부족해 보이고 걱정스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과거와 미래의 성현들이 함께하는 공간인 개령향교

김산향교를 나와 승용차로 선산 방면으로 가다 개령면 동부리에 닿으면 감문산 초입에 개령향교가 있다. 개령향교도 처음에는 서부리 웅현 고갯마루의 사자사(獅子寺)라는 절에 향교 현판만 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향교를 새로 세울 형편이 안돼 절의 대웅전을 폐하고 간판만 향교로 바꾸어 사용했다. 1473년(성종 4년)에 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절터에서 유학을 공부함은 도리가 아니다"며 관아 북쪽 감천변에 근사하게 향교를 세웠다. 하지만 1600년 개령현 소속인 아포의 길운절(吉雲節)이 정여립의 처남인 소덕유와 함께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돼 개령현이 역모지군으로 몰려 1601년 폐현(廢縣)된다. 옛날에는 고을에서 민란이 발생하거나 역모 등이 발각되면 백성들을 함경도 등 먼 오지로 이주시키거나 고을을 강등시켜 속현으로 만들었다. 이 여파로 개령 출신 유생들의 벼슬길이 막히고 향교가 문을 닿을 위기에 처하는 등 시련을 맞는다. 지역 유림들의 개령현에 대한 복현(復縣) 상소가 이어졌고, 1609년에야 조정에서 받아들였다. 지역 유림은 복현을 기념하기위해 개령향교 재건 운동에 나선다. 그 결과물로 현감 이창거(李昌居)가 앞장 서 경관이 수려한 유동산 아래 향교를 새로 지었다. 그러나 감천 냇가와 너무 가까워 홍수로 물이 범람하면 줄곧 잠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837년(헌종 3년) 홍수로부터 안전한 감문산 자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일부에서는 개령향교가 유동산 아래 감천변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기 전에 관학산 중턱으로의 이전이 한 번 더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은 "김산'개령'지례향교 등 김천지방의 향교가 주축이 돼 조선 말 개화에 반대하는 만 명의 선비가 연명으로 상소한 '영남 만인소 사건'을 이끌었다"며 "향교는 대성전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제향의 공간과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미래의 선비들이 공부하는 교실인 명륜당으로 구성된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의미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글'박용우 특임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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