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대구에서 삼성을 시작하다

28세 열혈청년, 대구서 '글로벌 기업 삼성' 싹 틔우다

호암 이병철
호암 이병철
호암이 대구 삼성상회 시절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 대구 중구 인교동 164-8번지에 있는 이 집은 제일모직 직원 이항년씨(사진 안)가 직접 살면서 관리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호암이 대구 삼성상회 시절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 대구 중구 인교동 164-8번지에 있는 이 집은 제일모직 직원 이항년씨(사진 안)가 직접 살면서 관리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삼성상회가 만들어냈던 별표국수 상표, 삼성상회 시절 회의록 철. 사진제공 호암재단
삼성상회가 만들어냈던 별표국수 상표, 삼성상회 시절 회의록 철. 사진제공 호암재단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과 40여년 전까지만해도 아시아의 필리핀,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더 가난했던 나라였습니다.

그 기적의 현장에 우리 기업인들이 서 있었습니다. 1938년 대구 중구 인교동(당시 수동)에서 '삼성' 간판을 내걸었던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도 대한민국의 기적을 일궈낸 사람이었습니다.

매일신문은 삼성을 창업, 세계가 인정하는 초일류기업으로 키워낸 호암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기(2월 12일)를 맞아 국내는 물론, 일본 현지 취재 등을 통해 7회에 걸쳐 그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는 대한민국도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업을 통해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삼성의 싹을 틔운 호암은 제일모직을 대구에서 시작하고 삼성라이온즈의 연고지를 대구로 하는 등 눈 감는 날까지 대구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구가 호암을 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꼭 100년 전인 1910년 2월에 태어난 호암은 만 28세 때인 1938년 3월 1일 대구 중구 인교동 61-1번지(당시 수동, 현재는 이른바 '오토바이 골목' 끝자락)에 큰 가게를 세웠다. 지상 4층, 지하 1층의 목조건물이었다. 간판에는 '삼성상회'라고 씌어있었다. 호암은 글로벌 기업 삼성의 출발지로 대구를 선택한 것이다.

※글 싣는 순서

1. 대구에서 삼성을 시작하다

2. 장인정신으로 사업하라

3.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라

4. 최고가 아니라면 시작을 말라

5. 불가능이란 없다

6. 제국을 꿈꾸다

7. 호암이 전하는 말

◆대구가 최적지다!

경남 의령군 중교리가 고향인 호암은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열기 2년 전인 1936년 봄 마산에서 정미소를 시작, 사업에 발을 들여놨다. 부유했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300석지기의 농토가 사업 밑천이었다. 정미업에서 성공한 그는 운수업도 겸했고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호암은 정미업과 운수업을 통해 번 돈에다 은행대출까지 받아 땅에 투자했고 661만1천여m²(200만평)에 이르는 농지를 가진 대지주가 됐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빌린 은행돈이 문제가 됐다. 대출 회수 압력이 들어온 것이다. 농지 투기에서 큰 실패를 맛본 호암은 큰 교훈을 얻었다. 여러 가지 상황 변화 여부에 대한 꼼꼼한 분석 없이는 사업의 성공을 이루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첫 실패를 맛본 호암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사업의 종류와 사업장소를 물색했다. 한 번 실패를 겪은 만큼 전국은 물론, 중국 각지까지 여행하며 사업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결론은 무역업이었다. 그리고 무역업의 최적지로 대구를 선택했다. 영남의 한가운데 위치한 대구는 각종 농수산물과 화물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경부철도를 비롯해 각종 기반시설이 일찍부터 건설돼있었다. 대구만한 경제도시가 없다는 것이 호암의 판단이었다.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

삼성(三星)이라고 회사의 이름을 지은 것은 '3'이라는 숫자가 가진 의미 때문이었다. 화로나 삼발이의 다리가 3개인 것처럼 3이라는 숫자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기도 했다.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의미에서 그는 삼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성상회는 대구 근교에서 수집한 청과물과 포항 등지에서 들여온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에 수출했다. 제분기와 제면기도 설치, 국수도 만들어냈다.

호암은 이웃 상인들이 깜짝 놀랄만한 구매·판매·관리기법을 동원, 삼성상회를 착실하게 성장시켰다.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대구에는 5개의 국수공장이 있었으나,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는 단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가격은 다소 비싸도 별표국수의 맛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성이 그런 것처럼 호암은 싼 물건이 아니라 제대로된 물건을 만들어야한다는 품질경영을 사업초기부터 강조했다.

호암은 삼성상회 설립 1년 뒤에는 조선양조까지 인수, 양조업도 시작했다. 후일에도 호암의 사업 방식이 그랬지만 그는 한개의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곧장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삼성상회 창업초기부터 호암은 무역업에서 제면업, 양조업 등 잇따라 새 사업을 시도했다.

이런 가운데 성장을 거듭한 삼성상회는 1941년 6월 3일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 근대적인 기업 형태까지 갖췄다. 특히 삼성상회는 40여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면서 사장-지배인-사무직-생산직 등으로 업무를 구분, 사업초기부터 체계적인 기업 체계를 만들어냈다.

◆대구의 추억

삼성상회를 설립했을 초기, 호암은 달성 출신의 아내 박두을 여사와 장녀 인희, 장남 맹희, 차남 창희, 차녀 숙희 등 모두 5명의 가족을 두고 있었다. 호암이 삼성을 대구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삼성그룹을 비롯해 한솔그룹·CJ그룹 등 현재 범 삼성가(家)를 이루고 있는 호암의 자녀들이 거의 모두 대구를 거쳐간 것이다. 삼남인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1942년생) 역시 대구 삼성상회 시절 태어났다.

삼성상회 건물은 1997년 노후건물로 지목돼 헐렸으나 호암의 대구 생활 당시 살았던 집은 아직도 삼성상회 터 부근인 오토바이 골목 안쪽(중구 인교동 164-8번지)에 있다.

이 집은 호암이 대구를 떠난 뒤(호암은 해방 직후 서울로 사업 근거지를 옮겼다) 다른 사람에게 팔렸으나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인 1990년대 초 이 회장의 지시로 재매입이 이뤄졌다. 현재는 제일모직 직원인 이항년씨가 살면서 집을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 "이 집에서 호암이 사셨고 이건희 회장까지 난 만큼 이 집을 대구의 자랑거리로 만들어 널리 알려야한다"고 했다.

한편 호암은 대구에서 실업인들의 모임인 을유회에 가입하고 을유회 사람들과 함께 대구민보라는 신문사도 운영했으며 대구대학(영남대 전신)도 인수, 삼성을 시작한 대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1910.2.12~1987.11.19)= 경남 의령군의 1천섬 지기 부농(富農)인 이찬우(李纘雨)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중동중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政經科)를 중퇴했다.

이후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설립, 정미업으로 사업에 첫발을 들여놓았다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업하면서 '삼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다.

해방 후 사업근거지를 서울로 옮겨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만들고 1953년 제일제당, 1954년엔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1969년엔 삼성전자를, 1973년엔 삼성코닝을, 1977년엔 삼성종합건설과 삼성조선을 만드는 등 경공업에서 중화학 및 첨단정밀산업까지 우리나라 산업화·근대화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혁명적 사업 행보를 이어왔다. 그의 노력 덕분에 삼성은 국내 1등 기업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은 물론,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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