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속 실크로드] <4> 신라인은 세계화의 주역

매일신문 창간 74주년 기념 계명대학교 실크로드중앙아시아 연구원, 경상북도 공동기획

신라 역사 최대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는 처용(處容)일 것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는 897년 신라 헌강왕 때의 일이다.

왕이 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신하들은 동해 용의 조화이므로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그런데 처용은 정말 용왕의 아들이었을까?

◆처용은 정말 용왕의 아들이었을까?

처용의 모습. 출처 악학궤범 처용의 모습. 출처 악학궤범

처용의 에피소드는 알려진 대로다. 아내의 미모에 반한 역신이 찾아와 아내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도 화를 내는 대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에 감동한 역신은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처용의 가면만 봐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역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처용의 아내를 능욕하는 모습은 질병 귀신이 들어 병들게 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처용의 관용은 역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질병의 전염성을 자극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물러가도록 한 것이다. 처용 화상(畫像)은 질병 부적의 효시로서 신라 시대에 처음 나타나 벽사(辟邪) 부적으로 변용, 전승됐다.

이 역시 부적 관습이 실제로 아랍인들의 정복 전쟁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제임스 캐릭 무어는 저서 '두창의 역사'에서 팬데믹과 관련된 문명교류사를 자세히 보고했다. 유럽 왕가에서도 부상이나 질병을 방지하려고 맨몸이나 실크 위에 아랍어 주문이나 인물을 그린 부적을 붙였다는 것이다.

처용 전승에 남아있는 축사(逐邪) 행위 또한 이방(異方) 문화가 가져왔던, 의료와 주술이 혼재한 문화 혼융의 중요한 흔적일 수 있다. 전염병을 피해 물러서는 것,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격리'야말로 가장 중요한 경험적 치료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달마 부적 달마 부적

부적에 쓰이는 글자들도 뜻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한자와 페르시아 혹은 아랍 문자에서 변용된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울러 부적에 처용처럼 인물 형상이 그려지는 것은 오늘날 중동지역 부적 관습과 연관돼 있다. 동아시아에서 쓰이는 달마부 또한 다른 부적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인물 형상이 중심이다. '달마'(達磨·Bodhidharma)가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의 기록도 이런 가설을 뒷받침한다.

처용은 과연 서역에서 왔을까? 9세기를 전후한 실크로드의 인문지리가 그런 정황을 설명해준다. 혜초의 서역 여행이 끝난 이후 당나라는 외교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북쪽에서는 발해의 침략을 받았고, 남쪽에서는 남조의 압박이 거셌다.

어수선한 틈을 타 소그드 출신의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다급해진 당은 위구르에 원정군을 요청했다. 페르시아-소그드계 기병 5천 명 이상을 불러들인 결과 760년대 장안의 무슬림 거주민이 4천여 가구에 달했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이 일어나 학살당한 무슬림이 무려 1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하니, 그 사이 100 년 세월 동안 당나라의 무슬림 거주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동남부 해안지대에서 교역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현지에서 동화되거나 주변 국가로 흩어졌고, 그 가운데 일부는 신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처용은 그들의 흔적일 수도 있다.

경주 괘릉 무인상. 김도훈 기자 hoon@imaeil.com 경주 괘릉 무인상. 김도훈 기자 hoon@imaeil.com

이렇게 되면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경주 괘릉 무인석상에 대한 의문도 풀린다. 석상의 얼굴은 서역인이고 의상은 소그디아 풍이다. 실제로 고구려와 신라는 돌궐의 지배 아래 있던 소그디아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9세기 이후 무슬림들의 한반도 진출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경주 괘릉 무인상. 김도훈 기자 hoon@imaeil.com 경주 괘릉 무인상. 김도훈 기자 hoon@imaeil.com

신라에서는 장보고가 등장하면서 해상 교역이 크게 활기를 얻었고, 해상 실크로드와의 연결도 자연스러웠다. 급기야 흥덕왕(826~836) 때는 수입 사치품을 금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법령이 공포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는 그 당시를 '사치와 호화를 일삼는 백성들이 진귀한 외래품만을 선호하고 토산품을 배척하니 문란하고 풍속이 파괴되기 이르렀다. 하여 법령으로 이를 시정하고자 하니 어기는 자는 법에 따른 징계를 면치 못하리라'라고 기록했다.

향료, 에메랄드 종류인 슬슬(瑟瑟), 모직품 사용이 금지됐다. 향료는 진골이 타고 다니는 수레에 쓸 수 없도록 했고, 동남아시아산 자단(紫檀)과 서아시아산 침향은 6두품에서 백성까지 아예 쓸 수 없도록 했다.

경주 천마총 출토 유리잔.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 천마총 출토 유리잔.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 미추왕릉 출토 유리목걸이.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 미추왕릉 출토 유리목걸이.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로 미뤄 신라 사회에 외래품이 얼마나 광범하게 사용됐으며, 외래문화 수입 또한 얼마나 활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유행했던, 표면을 원형으로 깎아 장식한 유리잔이 천마총에서 발견된 사실을 예로 들 수 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인면 유리구슬도 미추왕릉에서 출토됐다. 경주박물관 월지관 앞뜰에 있는 석조 유물 '입수쌍조문'(立樹雙鳥紋)'은 전형적 페르시아 문양이다. 원 가운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서 있고, 가지 아래로 긴 목을 교차한 채로 두 마리 새가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입수쌍조문 석조 유물.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입수쌍조문 석조 유물.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입수쌍조문 석조 유물.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입수쌍조문 석조 유물.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

유사한 문화현상이 서로 다른 문화구역에서 함께 나타날 때 이를 전파에 의한 것으로 단정하려면 심증 이상의 근거가 필요하다. 신라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쿠쉬나메' 서사시가 그런 증거가 될 수 있다.

'쿠쉬의 책'이란 의미로 풀이되는 이 작품은 페르시아에서 구전되던 이야기가 11세기 무렵 편찬된 것으로, 필사 원본은 현재 영국에 남아 있다. 국내에는 10여 년 전 이희수 계명대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 특임교수에 의해 알려졌다.

내용을 살펴보면 아랍에 의해 멸망당한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는 당나라로 망명했다. 하지만 당나라 역시 혼란에 빠지면서 페르시아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피루즈의 후손인 아비틴은 결국 동쪽의 섬나라, 신라로 망명을 떠나고, 그곳에서 태후르 왕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신라와 함께 연합군을 결성해 당나라 침략군을 물리친 그는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을 하게 됐다. 그들은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바그다드로 돌아가 아들 파리둔을 낳았고, 그는 페르시아의 지도자가 된다. 파리둔은 신라의 새 왕 '가람'과 우정을 이어나가며 중국의 왕 쿠쉬를 제압, 나중에 구국의 영웅이 됐다.

중국을 통치하던 쿠쉬도 나중에는 노인 현자의 도움으로 개과천선했다. 쿠쉬가 신을 섬기고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보기 드문 지도자로 변신하는 것으로 쿠쉬나메 서사시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비록 허구이기는 해도 아비틴이라는 페르시아 왕자가 처용의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처용과 아비틴을 7세기부터 인도양 해안을 배경으로 교역을 도모하던 문화영웅으로 이해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처용이 '용의 아들'이듯 아비틴의 이름은 '물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바다로부터의 출현 방식이나 결혼 방식을 보면 그들에게는 역사적 원형이 따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비범함이나 신이함의 상징으로 용손(龍孫)이 등장하는 건국신화들이 주로 한반도 서남부에 분포돼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일찍부터 해상교류가 활발했고, 다양한 페르시아풍 유물이 전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교적 윤색이 더해지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격과 국가 운명을 관장하는 호국룡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비틴은 사치스럽고 진귀한 물품들을 가져와 새로운 문물의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신라의 태후르왕과 벌인 폴로 경기는 경북 경주시 구정동 방형분 무덤 입구의 모서리를 장식했던 돌기둥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한쪽 면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이 깊고 코가 큰 이국적 모습의 인물상이 폴로 스틱을 들고 있다. 돌기둥 다른 한 면에는 사자상이 조각돼 있다.

경주시 구정동 방형분 무덤 무인상 모서리상 기둥 경주시 구정동 방형분 무덤 무인상 모서리상 기둥

중앙대학교 정형호 교수에 따르면 폴로경기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에서 시작돼 기원 후 7세기에 티베트를 거쳐 당나라에 전해졌다가 8세기 발해를 거쳐 일본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아비틴과 태후르 왕의 폴로 경기는 7세기 이후 신라에서 격구(擊毬)라는 이름으로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사자 역시 한반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짐승이다.

그러나 아비틴과 프라랑의 아들 파리둔이 태어날 때 태몽에 등장했으며, 파리둔이 왕이 되어 신라왕 가람에게 사자를 닮은 살아 있는 코끼리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사자나 코끼리 역시 용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불교 유입과 관련되는 이야기들이다.

김중순 교수(계명대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장)는 이를 초기 불교가 페르시아 동쪽에서 출발해 인도로 흘러들어 간다라에서 꽃을 피우고 신라로 향했음을 확인해주는 내용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아비틴과 태후르의 대화 내용에 주목하면 이야기는 더욱 분명해진다"며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일체유심조 만유불성'(一切唯心造 萬有佛性)의 일반적 불교 관념이 미륵(maitreya)사상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종교사 연구에 많은 영감을 준다"고 말했다. 미륵 신앙은 신라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인데 보살(菩薩·Bodhisattva) 가운데 유일한 창세신이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특히 "자국의 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지지 않고 타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로 지혜를 나누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실크로드와의 관계 속에서 신라가 꽃피웠던 최고의 문화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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