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속 실크로드] <3> 코드명 왕오천축국전…교류의 가치

매일신문 창간 74주년 기념 계명대학교 실크로드중앙아시아 연구원, 경상북도 공동기획

낯선 길 위에서 깨달은 삶의 의미를 꼼꼼히 기록한 영혼들! 현장도, 마르코 폴로도, 이븐 바투타도 견문을 넓히기 위해 젊음을 바친 사람들이다. 움직일 때 그들은 빛났고, 움직이면서 무언가 기록을 남겼기에 그들은 위대했다.

이마 푸른 신라의 소년 혜초는 704년에 태어나 16살 되던 719년에 당나라로 떠났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일이다. 그는 인도 출신 금강지로부터 밀교의 가르침을 받고 광저우를 떠나 723년 뱃길로 서쪽 천축국에 닿았다. 그리고 4년 동안 철저히 길 위의 영혼이었다.

신라는 7세기에 삼국통일을 이룬 뒤 8세기에 이르러 세계를 향한 진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많은 신라인들이 서역을 향했고, 혜초는 당시 당나라로 떠난 400여 명의 유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선행자와는 달랐던 혜초의 행보

혜초의 이동 경로. 혜초의 모습은 박진호 씨 작품. 혜초의 이동 경로. 혜초의 모습은 박진호 씨 작품.

신라의 세계 진출은 결코 우연히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때를 만나기 위해 엄청난 역경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특히 이웃 당나라와의 관계가 그랬다. 긴장 관계는 외교적으로 풀고 문화와 상업 교류는 장려했다. 산동반도 쪽에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을 설치하고, 신라원이라는 사찰과 신라소라는 관리청까지 세웠다.

덕분에 신라는 당나라가 장안을 중심으로 전개해 온 글로벌 문화의 소비에도 거의 동시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목이 말랐다. 이제는 당나라가 아니라 그 문화의 원천이 됐던 아득한 미지의 땅, 서천서역국이 궁금했던 것이다.

혜초의 여행은 특별했다. 선행자들과 달리 아시아 대륙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했다. 그의 발길은 인도는 물론 멀리 서쪽으로 이슬람 세계인 아랍(大食)과 페르시아(波斯), 그리고 비잔틴(大拂臨)까지, 불교와 상관 없는 땅까지 이어졌다.

왕오천축국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왕오천축국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리고 왕오천축국전에 그 기록을 남겼다.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 그리고 왕성(王城)의 위치와 규모, 통치 상황, 대외 관계, 특산물과 음식, 의상과 풍습, 언어, 불교와 이교도들에 대해서도 간명하게 기술했다.

왕과 백성들 옷은 한가지로 구별이 없고, 음식을 먹는 데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한 그릇에서 먹으며, 무릎 꿇고 절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가 보지 않고서는 묘사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서쪽을 향했다고 했으니 아마도 지금 이란의 마샤드(Mashhad)를 거쳐 당시 호라산 총독부가 있던 니샤부르(Neyshabur)까지 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니샤부르는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새머리형 유리병을 닮은 유리병을 비롯하여 페르시아에서 가장 많은 중국 도자기들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황남대총 출토 새머리형 유리병.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황남대총 출토 새머리형 유리병.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그 길은 고대부터 이용되어 온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의 한 구간이었다. 일찍이 기원전 4세기 초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공략할 때 이 길을 밟았고, 14세기 말 마르코 폴로도 아프가니스탄을 향할 때 이 길을 따라 파미르 고원을 넘었을 것이다.

혜초는 이곳의 지리적 정보는 물론이거니와 당시 페르시아가 아랍에 병합됐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우마위야조 10대 칼리프 히삼(724~743)이 시리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상황도 파악하고 있었다. 시리아와 비잔틴에 대해서는 '하느님을 믿고 불법을 모른다(事天不識佛法)'고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상당했을 것이고, 당시 페르시아와 아랍에 관한 역사 인식도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중앙아시아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고대 동서양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인문지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혜초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인색했다. 20년 가까이 성지 순례와 구도 생활을 했던 법현, 현장, 의장 등 고승들에 비해 혜초의 여행 기간은 겨우 4년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황 석굴. 계명대 제공 돈황 석굴. 계명대 제공

문서를 돈황 동굴에서 처음 찾아낸 펠리오(P. Pelliot)조차 그 내용에 대해 혹평했다. 시가 몇 편 들어있기는 해도 그의 문체는 문학적 가치도 없고 정밀한 서술도 없이 평면적이며, 절망적일 만큼 간단하고 단조롭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다른 순례자처럼 득도를 위해 진지하게 수행했다는 증거도 없고, 경전을 필사하지도 않았으며, 성지에서 경전을 구해오지도 않았다. 불교학의 최고 전당인 나란타(Nālandā)를 지날 때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글은 낯선 세계에서 보고 들은 예술과 이야기에 대한 기억의 현재화에 다름 아니었다. 애초에 구법이 목적이 아니라 문명 탐사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혜초는 곳곳의 지명 표기에서부터 풍물의 표현 방법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정리를 했다.

통상적인 중국식 명칭과 더불어 원래의 지역명을 함께 기록한 것은 처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코 폴로나 몽골 시대의 중국측 기록보다 5세기 이상 앞선 일이었다. '소륵'(疎勒)을 현지 명칭인 '가사기리국'(伽師祇離國, Kashgar)으로 정확히 음사한 것 등이 예라고 할 수 있다.

혜초가 마지막으로 거쳤던 쿠차는 당의 안서도호부 소재지였다. 서부지역을 압박하던 토번이라는 강대국을 견제하고 카슈미르와 카불, 시리아와 아랍 등 서역을 이어주는 교두보이기도 했던 이곳을 지키던 이는 바로 고구려 유민 고선지였다. 그는 나중에 탈라스 전투를 통해 세계사의 한 가운데 섰던 사람이다.

시기적으로 혜초와 고선지가 만났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그들은 이미 신라인과 고구려인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인으로서였다. 그들이 함께 있었던 공간은 아랍에서 페르시아를 장악하고 비잔틴을 교두보로 삼아 안달루시아까지 진출했던 이슬람이 최초로 동양을 만나게 된 공간이기도 했다.

장안으로 돌아와 787년에 입적한 혜초는 문명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의 깨달음은 신라를 실크로드의 동단으로 주목받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중순 교수(계명대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장)는 혜초가 자랑스런 신라인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그가 문명 교류의 개척자적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가 단순히 신라인이 아니라 세계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담 너머 세상이 지금 이곳의 우리와 연결되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소통과 교류를 통해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신라와 실크로드를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라인의 개척 정신과 통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펼쳐진 거대한 문명의 벨트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3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구의 폭염에 녹아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3일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구의 폭염에 녹아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통일신라의 번영, 전염병 속에서 이뤄져

8세기, 코로나 19에 비견할만한 엄청난 팬데믹이 서쪽으로부터 몰려들었다. 삼국을 통일하고 일렁거리기 시작한 세계화의 물결은 사실 심각한 전염병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7세기 중반 페르시아와 아랍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던 소위 '쉬라와이흐 역병'(Plague of Shirawayh)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628년 시작해 10년 이상 계속됐던 이 역병은 사산 왕조의 중심이자 인구 밀집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인구의 반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당시 샤한 샤(shâhân shâh)였던 카바드 2세(Kawad II)의 목숨까지 가져갔다. 그것은 사산 왕조의 결집력을 크게 와해시켜 사실상 제국이 공중분해되는 계기가 됐다. '신당서'에 따르면 18건의 유행병 가운데 6건이 동 시대인 당 태종대에도 발생했다.

티벳을 비롯한 서역 정벌을 위해 당은 대병력의 잦은 이동을 감행했다. 병사들은 새로운 질병에 자주 노출됐을 터이고, 이들의 본국 귀환은 숙주의 이동이었던 셈이다. 새로운 질병에 대해 면역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본토인들의 발병률과 치사율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 전쟁이 일어난 것도 이 때였다. 신라·고구려·백제를 위시하여 당과 돌궐·회흘·말갈의 기병 및 일본이 참여하면서 몇 십만에 달하는 외국 군대가 서로 조우했다. 신라 사회 내부에서 새로운 전염병이 유행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전염병을 13차례로 기록하고 있다. 660년 6월 백제 사비성 앞에 집결한 신라와 당나라 군대 15만 대군은 여름철에 오염된 백마강으로 말미암아 전염병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그해 9월 철군하던 신라군은 전염병과 함께 신라로 돌아왔다. 두창(천연두)도 당나라 군대에 의해 신라군에 전파된 것이다. 한반도 출병을 앞둔 당나라에선 652년부터 이미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역사의 지각 변동이라고 할 만한 대변혁이 꿈틀거리고 있던 시대였지만, 신라는 전염병에 대한 엄청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714년 여름에는 가물고 질역에 걸린 사람이 많았다. 747년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고 기근이 들고 역병이 발생하였다.

같은 기간 일본에서는 모두 4차례의 두창이 크게 유행해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앓아 누워 조정에서는 백관의 조회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화여대 이현숙 교수는 "8세기에는 당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신라를 거쳐 일본에 이르기까지 수 년이 소요되던 것이 9세기에 이르면 불과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윌리엄 멕닐은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에서 당시 중앙아시아 전역은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인구 감소 등 일종의 사회적 위기에 있었다고 한다. 탄저병이 유행,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자연재해까지 덮쳐 사람들은 들쥐를 잡아먹거나 심지어는 인육을 먹을 정도였다.

840년 위구르가 멸망한 것도 바로 전염병 때문이었다. 유목민의 생산구조가 무너져내렸기 때문이다.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전염병은 더 크게 유행했고, 전염병이 유행하는 만큼 교류도 더욱 활발해진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신라가 서역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동서 간에 교류의 물꼬를 튼 것은 이처럼 위기의 상황에서도 도전 정신을 발휘한 신라인들의 용기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

AD

사회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