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현의 사진, 삶을 그리다] 별거 아닌 풍경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석재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 석재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

누가 나를 좀 봐주기를 나를 좀 알아주기를, 소리를 내보지만 빈 메아리요, 존재감을 찾기 힘든 시절이 있다. 차마 고개 들어 하늘을 볼 수 없기에 고개 숙인 눈길엔 하염없이 땅만 밟힌다. 울퉁불퉁한 자갈길, 정돈되지 않은 거친 땅, 참 별거 아닌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 별거 아닌 풍경을 '별거'로 담아 한국 사진계에 이름을 새긴 이가 바로 사진가 민병헌이다.

 

2018년 11월쯤이었다. 중국 전시기획에 참여 작가로 만나 진한 백주 한 잔을 기울이고 2019년 파리포토에서 다시 그를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에 돌입한 것은 80년대 중반이요, '사진가로서 존재감이 없던 시절' 고개가 절로 땅바닥을 향했기에 '별거 아닌 풍경'을 발견하게 됐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저 새로운 대상을 찾아냈다고 해서 사진계에 그처럼 센세이셔널 한 반응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흑백사진의 묘미는 콘트라스트다. 흰색과 검은색의 강렬한 대비, 참 매력적이다. 하지만 민병헌은 청개구리처럼 그 길을 거꾸로 걸었다. 명확한 콘트라스트는 검고 흰 것만 남기는 대신 다른 디테일들을 존재감 없이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마치 공부 잘하고 잘난 사람들만 살아남는 세상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흑백의 콘트라스트가 활개를 펴지 못하도록 최대한 억누른다. 그러면 그 때 흰색과 검은색 뒤에 숨어있던 회색 톤들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다.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중간 톤의 밋밋하기 그지없는 색감이지만 너무도 다양한 높낮이의 회색 톤들은 사진이 아니고서는 절대 표현해내지 못할 작품을 완성시킨다. 별거 아닌 풍경이 '별거'가 되는 순간이다.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1987년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초기 연작 <별거 아닌 풍경>에 이어 그는 잡초, 안개, 하늘, 강, 나무, 폭포, 고군산군도, 새에 이르기까지 늘 인화에 있어 아날로그 흑백 프린트, 젤라틴 실버 프린트만을 고집한다. 혹자는 디지털 컬러 시대에 이 무슨 뒷걸음질이냐 하겠지만 달리 보면 수십 년간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지켜온 진정한 고수의 숨결이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톤을 밝혀 연회색으로 물들이고 때로는 진하디 진한 회색으로 무장한 작품들은 은은하게 에너지를 뿜어낸다. 밋밋한 빛들이 더 묘하게 풍부한 질감과 촉감을 그려내니 색채의 전복과 재탄생, 그가 강렬하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키는 이유다.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그는 늘 '머리가 곤두설 때 셔터를 누르고, 소름 돋게 톤이 좋아야 작업을 마친다.'는 말을 들려준다. 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지 않을까, 그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하지만 민병헌은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사색가요, 사진에 대한 치명적인 사랑꾼이다. 어제 부산에서 그를 만났다. 평생 철없이 살고 싶은데 군산 작업실로 옮기고 나서는 '철이 든 것 같아서 기분 나빠' 라며 소년 같은 웃음을 터트린다. 만남이 즐거운 선배다. 별거 아닌 사진가가 이처럼 별거인 사진가가 됐듯 우리 모두 희미한 존재를 벗어던지고 각자가 원하는 '별거'가 되는 날을 한 번, 기다려보자.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민병헌 작 '별거 아닌 풍경' 시리즈.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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