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성리학과 도시브랜드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대표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기술·전문성 천대한 성리학 습성
아직도 정부 당국자에 뿌리 깊어

전문성 필요한 도시 브랜드 개발
시민 투표 아닌 전문가에 맡겨야

조선은 단연 성리학의 나라였다. 세상만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성리학의 틀 안에 집어넣었다. 이조판서든 공조판서든 따지고 보면 다 성리학자였고 그림 그리는 도화서도 의약을 다루는 내의원도 모두 성리학자의 통솔 아래 놓여있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경계를 넘어선 무불통지(無不通知)의 학문, 절대 권위의 이념 체계처럼 사람의 일상과 머릿속을 속속들이 관장하고 지배했다. 그리고 그런 성리학의 절대적 권위는 오직 사대부, 즉 양반들의 것이었다.

양반들은 성리학을 앞세워 무엇에든 간섭하고 무엇이든 평가를 내리며 내내 조선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했다. 그들에게 있어 성리학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 즉 인간의 재능과 노력이 만들어내는 기타의 결과물이나 지식들은 다 하찮은 것일 뿐이었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사람에 더해 학문과 지식까지 차별할 만큼 온갖 것에 차등을 두었다. 그리고 대략 100여 년 전, 그랬던 조선이 몰락했다.

지금의 세상은 그때와는 모든 것이 딴판이다. 나라의 형태와 권력의 구조가 바뀌었고 경제와 산업의 생태계도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당연히 양반도 없고 하늘의 해처럼 모든 곳을 내리쬐던 성리학도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습성, 기술을 천대하고 전문성을 무시하던 그 뿌리 깊은 습성만은 곳곳에 살아남아 자리를 틀고 있다. 거기엔 대개 조선의 양반이 그랬던 것처럼 나 정도 되면 웬만한 건 다 지도 편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한류가 뜨니 온갖 정책에 무시로 K-POP을 갖다 붙이고 걸핏하면 연예인을 행사에 동원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오페라도 아닌 대중음악쯤이야 쉽게 개입하고 참견해도 되는 것쯤으로 낮춰보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들 대부분이 정작 K-POP을 알지도 못하고 평소 즐겨 듣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10여 년 전 SM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가 한 모임에서 정부 관계자들에게 호소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는 아무것도 안 도와줘도 되니 제발 자기들을 그냥 좀 내버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현 정부는 급기야 한류 팬을 1억 명까지 늘리는 것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히트를 칠 때 그를 독도 홍보대사로 위촉하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처럼 SM엔터테인먼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부의 '지원과 격려'는 어렵게 개척한 해외시장을 위협하는 하나의 불안 요소일 뿐이다.

같은 맥락, 즉 이념이나 권위에 짓눌린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울시의 황당한 도시 브랜드 'I.SEOUL.U'도 마찬가지다. 운용이 불가능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더 황당했던 건 당시 서울시의 설명이었다. 새 도시 브랜드는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의견을 모아 함께 결정한 것이므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냐는 거였다. 세상에! 이런 식이라면 환자의 치료 방법도 의사가 아니라 시민의 투표로 결정하는 게 맞다.

도시 브랜드에 관해선 대구시 또한 별반 다를 게 없다. 아무려면 '컬러풀 대구' 이상 나올 게 없을 만큼 대구란 곳이 콘텐츠와 정체성이 빈약한 도시일까? 그건 아니다. 시간과 돈을 들이고도 '핫플레이스 대구'라는 어이없는 결과가 나온 건 그것밖에 못 내놓을 사람들이 그 일을 했거나 그런 사람들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브랜드 개발은 브랜드 전문가가 하는 일이다. 서울시처럼 시민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국문학자나 역사학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애플을 비롯해 다양한 BI(Brand Identity) 프로젝트를 수행한 마티 뉴마이어(Marty Neumeier)는 '브랜드란 당신이 말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그 무엇이다'라고 했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말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 정체성을 이해하고 콘셉트를 수립하며 직관, 유추, 통찰, 공감, 몰입을 통해 그것을 형상화시키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 브랜드 개발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전문성이 필요한 일은 제발 전문가에게 좀 맡기자. 오죽하면 한 젊은 디자이너의 새해 소원이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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