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눈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한밤중에 눈이 내린다. 겨울이 미처 닿지 못한 도심의 구석진 마을에도 눈이 내린다. 무럭무럭 만개한 천상의 꽃이 만년의 꿈을 품고 아름답게 지상으로의 밀어를 즐긴다. 자고 나면 가뭇없이 과거로 사라져버릴 테지만, 이 순간만큼은 얼마나 넉넉한가. 우리는 모두 잠들었고, 세상은 고요로 가득하다. 지금쯤 인기척 끊긴 저 먼 곳의 대지는 꽁꽁 얼었을 테고, 풀과 꽃들은 다한 생을 접고 한 톨 깜깜한 씨앗으로 눈을 맞으리. 이 추운 계절을 잘 견뎌야만 암흑의 벽을 뚫고 또 한 번의 절정으로 피어나리.

나는 해쓱해진 낯빛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벗들을 떠올린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도 절정이 있었으리. 낯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인연을 엮고, 무슨 연유로 소원해져 우리는 '이별'이라는 말조차 사치인 양 멀어졌다. 아옹다옹 다툼하던 벗들은 어디에서 이 눈을 맞을까. 아직 혹한의 계절이 절정에 이른 것도 아닌데 요즘 부쩍 밤이 길다.

눈은 누구의 부름을 받고 지상으로 오기에 차디찬 대지를 이토록 따스하게 감싸 안는가. 오늘 밤 불면의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눈'이라 말하리. 이 밤이 지나고 나도 세상은 뭣 하나 달라질 것 없겠지만, 새하얀 저 빛이 누군가의 사소한 허물들을 덮어, 그를 다시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눈! 아침이 오면 누군가에게 가장 희고 깨끗한 처음이 되리. 그의 발에 꾹꾹 짓눌리면서도 가장 선명한 그의 흔적이 되리. 떠나버린 이와의 따뜻한 재회는 기대하지 않으리. 조용히 내게로 다가와 확확 치밀어 오르는 내 화기를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인연이라 해도 눈, 이 짧은 이름을 부르리. 발가락이 꽁꽁 얼고, 철저하게 위장되었던 생각과 믿음들이 모조리 빙점에 이를 무렵, 나는 온몸으로 눈을 맞는다. 볼에 떨어진 꽃들이 주르륵 녹아내린다. 냉정한 사람, 냉정하지 못하여 결국 짧은 생을 마감하는 눈꽃. 그저, 당신이어서 좋았다.

좀 더 거세진 눈발들이 슬픔의 발자국과 아픔의 손아귀들을 모조리 덮어 나간다. 천상의 꽃이 새하얀 절정으로 피어난 밤. 먼 곳에서부터 겨울이 오고 있다. 눈이 그치고 새까만 동공을 비집고 쏟아지던 깜깜한 밤도 숙면에 든다.

숨죽였던 인기척이 되살아나고, 인간사 모두는 백설의 아침과 조우할 수 있을까.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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