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벽(癖)과 덕 1

대구 능인고 교사

민송기 대구 능인고 교사
민송기 대구 능인고 교사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학창 시절 수학과 물리 외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 수학과 물리 교사들이 보기에는 천재성이 있는 학생이었지만, 다른 교사들이 보기에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는 문제아였다. 이 문제아는 자기가 의문을 가진 물리 문제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빠졌고, 그 결과 규율이 엄격한 김나지움에서 퇴학을 당하고 만다. 독일의 교육 제도 아래서는 대학을 갈 수 없었던 그는 스위스로 가서 취리히 공과대학에 시험을 보지만 수학, 물리 외에는 낙제였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태어났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 남은 위대한 천재 중에는 아인슈타인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하나에 몰두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성향을 나타내는 우리말로 '벽'(癖)이라는 말이 있다. 글자를 풀어보면 병적으로 한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접미사로는 '도벽, 낭비벽'처럼 고치기 어렵게 굳어 버린 버릇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때도 부정적인 의미가 많다. 그런데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는 '백화보'(百花譜) 서문에서 전문적인 기예는 '벽'을 가진 사람이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며, '벽'이 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한다. 박제가가 생각한 '벽'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열정과 전문성, 성취해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벽'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말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오타쿠'가 있다. '오타쿠'는 특정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전문가라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는 '벽'과 비슷하다. 그러나 '오타쿠'에는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없어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강하다. 우리나라 누리꾼들은 '오타쿠'를 '오덕후'(五德侯)로 변형을 하였는데, 오덕후보다 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숫자를 올린 '육덕, 십덕'과 같은 말이 생겨났으며, 줄인 말인 '덕후'는 '영화덕후, 소시(소녀시대)덕후'처럼 접미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더 줄인 말인 '덕'은 '덕질(취미를 위해 돈과 시간을 쏟는 일), 입덕(주로 아이돌 팬으로 입문하는 것)'처럼 다양한 신조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오덕후'에서 '덕'으로 말이 줄어들수록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는 느낌은 떨어지고, '마니아'나 '광팬'의 의미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만 보아도 창의적인 '오덕후'였고, 물리에 빠져든 '물리덕후'였을지는 몰라도 누군가의 팬으로 '입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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