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이내 가을이 기운다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새벽을 걷는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도시는 고요와 적막으로 젖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을 피해 어두운 도시를 배회한다. 우러러 풍성했던 것들은 모두 바닥으로 내려와 뒹군다. 바스락이 말랐던 낙엽도 이슬에 젖어 무거워졌다. 어둠은 때론 가벼운 것을 무거워지게 한다.

나는 목적할 수 없는 목적을 향해 어둠 속으로 몸을 민다. 스스로 어두운 것을 즐기니 나는 어둠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어둠과 내가 서로 합일을 도모하니 어둠을 모른다, 말할 수 없다. 감정의 과잉과 결핍 사이에 나는 어느 밤 국경을 넘어도 보고, 어느 계절과 깊은 통정도 해 보았으니 또 다른 어둠을 손꼽아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내가 뜬 눈으로 새벽을 걷는 일은 어둠이 가지는 어떤 습성 때문이다. 그것도 바싹 마른 어둠이 아니라 오래오래 눅눅해져 무거운 어둠. 나는 천 개의 메마른 생각보다 한 개의 눅눅한 느낌을 동경하고 갈망하니 이 물기 머금은 낙엽과 내 눈과 그리고 사방의 눅눅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몽롱한 의식으로 오래오래 바라본 날들은 이제 잠시 뒤로 물리고, 이 늦은 계절만이 지닌 눅눅한 어둠을 오래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동공 속에 서서히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것들. 내 의식 속에 저것은 어느 산이고, 저것은 어느 빌딩이고, 저것은 그 누구와 앉았던 나무 아래라는 것을 의식할 때, 나는 비로소 원치 않는 아침을 맞는다. 어두워서 더 많은 소리를 듣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고, 그것을 내가 통역할 때 어둠은 비로소 내가 되고 나는 어둠이 된다. 번잡한 도심의 새벽이 이토록 고요하고 차분한지를 새벽이 일러 주듯, 쇠락해가는 계절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초연할 수 없는 어둠을 덥석 건져 올린다. 눈 끝으로 밀려오는 외로움과 허허로운 마음들을, 물러가는 계절만이 위로해 준다.

내가 무모하게 새벽과 통정하는 일은 몽롱하게 밀려오는 어떤 허접스러운 의식이 아니라 결국 나를 찾아가는 오래된 순례이니 매일 새벽이면 나는 나를 깨워 거리로 내모는 것이다. 걸음마다 천 개의 손이 천 개의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니, 나는 어두운 내면을 열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번안하고 통역할 것이다. 날이 밝고 나는 걸어갔던 길을 되돌아온다. 해가 뜨면 낙엽들은 더욱 바스락하게 말라 부서질 테고, 이내 가을은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국경도 없이 멀리 날아갈 것이다. 쇠락의 이야기를 나는 어떻게 통역할 것인가를 두고, 초연할 수 없어 오래오래 고민할 것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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