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훈수(訓手)

민송기 대구 능인고 교사 민송기 대구 능인고 교사

여름날 그늘 아래 평상에서 어른들이 장기판을 벌이는 모습은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매우 익숙한 장면이다. 그럴 때 장기판 주변으로는 으레 구경꾼들이 둘러서기 마련이다. 구경꾼들은 고이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한마디씩을 한다. 이렇게 구경하던 사람이 끼어들어 수를 가르쳐 주는 것을 '훈수'라고 하는데, 대결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점잖은 조언이 아니라 이래라저래라 하는 정신 사나운 간섭으로 들린다. 그래서 가끔은 대결에서 지고 마음 상한 사람과 훈수꾼의 멱살잡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훈수를 두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대결의 외부에 있고, 승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이 없기 때문에 기발한 수를 내놓을 수도 있으며, 외부에서 대결을 바라보기 때문에 대결을 하는 사람보다 넓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래서 대결을 하는 사람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훈수꾼의 조언은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책임감이 없기 때문에 훈수꾼들의 소리는 요란하지만 실속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번 아시안 게임 축구대표팀의 황의조 선수는 경기에 황의조 혼자만 보인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했었다. 그런데 황의조 선수를 와일드카드로 뽑았을 때, 일부 언론이나 누리꾼들은 노련한 수비수가 부족한데 왜 이름도 없는 공격수를 뽑느냐, 감독의 인맥으로 뽑은 것은 아니냐 하는 말이 많았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황의조 선수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해 김학범 감독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훈수꾼들은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훈수꾼은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고, 짧은 지식을 가지고도 전문가처럼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훈수꾼이 되는 길은 매우 쉽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훈수를 둘 때만큼 일이 쉽지 않고, 말도 조심을 해야 한다. 한편으로 훈수를 너무 안 듣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가 일의 책임자로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훈수꾼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큰 문제가 된다. 당나귀를 타고 가든, 끌고 가든 자기 소신대로 하면 되는데, 소신 없이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다 보면 결국 당나귀를 메고 가는 최악의 수를 택하게 된다. 여론을 의식하느라 자신의 교육관이나 정책을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하는 전임 교육부 장관의 모습을 신임 교육부 장관은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 말도 훈수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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