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칼럼]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자

아름다움이 비난 받는다. 상상할 수 있는가. 나오미 울프는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아름다움의 신화'를 고발했다. 아름다움은 사회적 욕구이고, 그것이 여성의 몸과 정신을 파괴한다고 역설한다. 여성은 '아름다움'의 사회적 덫에 걸려,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다. 불행이다.

우리말 '아름다움'에서 '아름'은 '알다', '이해하다'를 의미하고, '다움'은 '아름'의 성격이나 특성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美)을 '에우리드미아'보다 '심메트리아'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 두 단어 모두 비례나 질서, 조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두 단어가 의미하는 질서와 조화에는 차이가 있다. 심메트리아는 눈에 보이는 질서가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는 지성적 질서를 의미한다. 그것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성적인 아름다움이다. 반면에 에우리드미아는 청각적, 시각적 질서를 뜻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것 이상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美)는 신의 빛이며 그 빛을 받아 완전한 형태로 빛나는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은 외양의 웅장함이나 화려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소리의 감미로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중세 교회는 외적인 아름다움의 과잉이었다. 교회 건축물은 금과 은으로 휘감겨 있었고, 스테인드 글래스와 갖가지 그림으로 치장된 예배당은 천상의 세계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시토 수도회와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그러한 감각적인 미를 비판했다. 그들은 외적인 미가 신앙인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기도와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했다. 이뿐인가. 아퀴나스는 예배에서 기악곡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기악곡이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여 쾌락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감각적 미는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지만, 내면적 미는 그것을 관조하는 영혼을 기쁘게 한다."는 기욤 도베르뉴의 말은 옳다. 내면적 아름다움은 그 영혼으로 창조주를 향하게 한다. 나는 한 화가의 그림에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반 라인의 그림은 감동적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풍부한 붓놀림과 극적인 명암의 대비에서 오는 것인가? 그가 남긴 60여점의 자화상이 그것을 말해 준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살아 있는 그를 보는 것 같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금욕은 금기어다. 건강을 위한 단식과 절제는 있어도 신앙을 위한 금욕은 찾기 힘들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금욕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며, 아름다움을 향한 노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갈망이 가라앉아야 비로소 마음의 평정이 찾아온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져야만 말씀이 묵상되고 기도가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했다.

내적인 아름다움은 곧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내적인 아름다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의 이미지라고 했다.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은 육체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이 영혼 깊숙한 곳에 가득 채워지면 그 아름다움은 숨겨진 등불과도 같이 바깥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간 영혼의 내적인 아름다움도 이와 마찬가지다. 참된 아름다움은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

영남신학대학교 유재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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