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경교수의 프랑스 수도원 탐방기] <9>아름다운 원색과 빛이 어우러진 현대 수도원 건축의 최고봉, 라 투레트 수도원

 

라 투레트 수도원은 르 코르뷔지에의 예술혼과 쿠티리에 신부의 영성이 만나 세워졌다. 르 코르뷔지에는 빛과 그림자의 진실, 수도원 벽에 떨어지는 빛을 활용한 채움과 비움의 공간적 효과를 재발견했다.빛은 건물의 형식과 모습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르 코르뷔지에의 예술혼과 쿠티리에 신부의 영성이 만나 세워졌다. 르 코르뷔지에는 빛과 그림자의 진실, 수도원 벽에 떨어지는 빛을 활용한 채움과 비움의 공간적 효과를 재발견했다.빛은 건물의 형식과 모습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 했던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1965년 8월 27일 지중해 연안에서 사망했다. 거장에 대한 예를 표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국장을 준비하던 중 그가 써두었던 유서 같은 메모가 발견되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시신을 라 투레트 수도원 교회에 하룻밤 안치해 둘 것을 부탁했다.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어린 시절 교회에서 보았던 하느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평생 무신론자로 살았던, 그가 마지막 밤을 보낼 곳으로 라 투레트를 선택한 것이다. 빛의 흐름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는 아름다운 원색과 빛의 향연, 라 투레트 수도원을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르노블에서 라 투레트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아침 일찍 짐을 꾸렸다. 하지만 순례 여정에는 예기치 않은 일이 종종 일어나기 마련이다.

부킹닷컴을 통해 이틀 예약을 했는데, 확인을 한다고 한 번 더 클릭을 한 것이 그만 두 번 예약을 한 모양이다. 본사에 전화를 걸어 환불을 약속받았지만, 주인은 기어이 하루 분을 더 받겠다고 시간을 끌었다. 프랑스인들도 돈 앞에서는 젠틀하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르노블을 떠났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리옹(Lyon)에서 30km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에브 쉬르 아브렐론'(Eveux-sur-Arbresle Rhone)은 언덕 속에 꼭꼭 숨어 있었다.

이정표도 인적도 없는 시골 길, 나지막한 산 능선을 몇 번이나 돌고서야 간신히 언덕 위에서 수도원을 만날 수 있었다. 산 중턱을 돌자 줄을 지어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는 울창한 상수리 나무 너머로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라 투레트는 볼품없는 콘크리트 덩어리의 나신(裸身)이었다. 세상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높은 담벼락은커녕 낮은 울타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걸음에 수도원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위대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무게 때문인지, 수도원이 주는 엄숙함 때문인지, 쉽게 수도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천병석 교수와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라 투레트를 마음에 깊이 담았다. 길은 수도원 건물 3층과 연결되어 있었고, 출입구는 길옆에 서 있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 예배당안은 교회가 아니라 생동하는 조각품이었다.백색을 바탕으로 빨깡,노랑,초록이 하나가 된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 예배당안은 교회가 아니라 생동하는 조각품이었다.백색을 바탕으로 빨깡,노랑,초록이 하나가 된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Monastery of Sainte Marie de la Tourette)은 리옹의 도미니크회에서 세웠지만, 알랭 쿠튀리에 수사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다.

1930년대부터 프랑스 종교예술(L'Art Sacré) 운동의 주역이었던 그는 1952년 리옹의 도미니크회 참사회를 설득하여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을 맡겼다.

1953년 설계를 시작한 수도원은 3년이 지난 1956년에야 비로소 첫 삽을 뜰 수 있었고, 1960년 10월 19일에 완공되어 성대한 헌당식을 거행했다.

쿠튀리에 신부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을 맡기면서 "조용하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단 한 가지만을 부탁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수도사도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그는 스위스 쥐라 산맥에 자리잡은 라쇼드퐁의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무신론자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현대 수도원 건축의 최고 전당을 이 땅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는 쿠튀리에 신부의 권유로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르 토르네(Le Thoronet) 수도원을 방문했다. 그곳은 폐허로 남아 있는 수도원이었지만 천재 건축가에게 놀라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는 빛과 그림자의 진실, 수도원 벽에 떨어지는 빛을 활용한 채움과 비움의 공간적 효과를 재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건축가로서의 인생의 절정기에 수도원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20대 초반이던 1908년에 피렌체 근처 에마의 샤르트르회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을 잊지 못해 1911년 다시 찾았다.

20대를 갓 넘긴 나이에 그는 그리스 아토스산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수도사들의 생활과 그곳의 풍광,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사들이 살던 작

라 투레트 수도원 모습 라 투레트 수도원 모습

은 방에 여장을 풀고 우리는 수도원 주위를 돌았다. 나지막한 언덕 위, 경사면에 올라앉은 수도원, 그 아래 남서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시골 풍경, 그 뒤로 흐르는 잔잔한 등고선. 수도원을 둘러싼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마음에 평화와 신비를 안겨주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이곳을 처음 방문한 순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을 짓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 2차 대전 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도원에 대한 붐으로 인해 수도사를 양성할 공간이 부족했던 도미니코 수도회는 이곳에 라 투레트 수도원을 건축하여 시대의 요청에 응답했다. 한 때는 80여명의 수도사들이 이 아름다운 곳에서 기도와 묵상, 공부, 깊은 사색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6-7명의 수도사들만이 은폐된 공간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

이곳에 있다 보면 이곳이 수도사들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그것은 수도사들의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이 엄밀히 구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문객들은 수도사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들의 사적이고 은밀한 세계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북적이는 방문객들에도 불구하고 라 투레트는 언제나 조용하고 평온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바늘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수도원은 늘 고요에 묻혀 있었고, 그 고요가 방문객들의 마음에 쉼을 주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라 투레트의 성무는 오전 8시에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정오 예배와 오후 7시의 저녁기도로 이어진다.

다른 수도원에 비하면 기도와 예배의 횟수도 적었고, 시간도 짧았다. 지친 몸으로 저녁기도에 참여했다. 문을 열고 교회에 들어선 순간 눈을 의심했다. 예배당 안은 교회가 아니라 생동하는 조각품이었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느낌의 백색을 바탕으로 빨강과 파랑, 노랑, 초록이 하나가 된 공간, 실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었다. 엄숙하고 장엄하면서도 평안이 깃든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열었고, 어느덧 내면의 작은 기쁨이 되었다. 우리는 예배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수도원을 둘러싼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마음에 평화와 신비를 안겨주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수도원을 둘러싼 자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은 마음에 평화와 신비를 안겨주었다.

 

독특하게 지어진 기하학적 공간을 빠져나와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20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식사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이곳 식당에는 솔렘의 전통과 세낭크의 단아함도 보이지 않았다. 대 여섯 명씩 한 테이블에 앉아 자유롭게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테이블에는 폴란드에서 온 중년 부부와 미시간에서 온 대학생이 함께 했다. 미국 청년들은 역시 말도 많고 자신감이 넘쳤다. 파리에서 유학을 하다 이곳에 들른 이야기며 여자 친구 이야기까지 끝이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 부부는 서로 간에도 말이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나는 오래 전 방문했던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와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밤이 깊어가자 우리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 투레트는 역설적인 수도원 정신을 가지고 있다. 대중성을 추구하는 도미니코 수도원이 대중과의 단절을 추구하는 시토 수도원의 정신을 담은 것이다. 평생 인간을 위한 건축을 추구했던 건축가가 이곳에서 인간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건축을 한 것이다. 라 투레트는 수도사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적 공간은 4층과 5층이며, 나머지 세 개 층에 크고 작은 예배당과 식당, 회의실 도서관 등이 몰려 있다. 그리고 수도원 중앙 로비에 사방으로 연결된 불규칙한 십자가 형태의 길이 나 있다. 수도사들의 방은 가장 높은 곳에 있고, 그들의 개인 예배실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수도원의 가장 낮고, 깊은 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공간이 바로 개인 예배실이다. 수도사들은 매일 아침 이곳에서 자신의 재단에 무릎을 꿇고 침묵으로 예배를 드린다.

이곳은 구약시대 성막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至聖所)와 같은 곳이다. 제단은 6개의 플렛폼이 하늘로 상승하는 블록과 테이블 형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나타낸다. 수도사들은 매일 아침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천국의 이슬을 머금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라 투레트 수도원 예배당안은 백색을 바탕으로 빨깡,노랑,초록이 하나가 된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 예배당안은 백색을 바탕으로 빨깡,노랑,초록이 하나가 된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었다.

 

가장 위층에 있는 방은 수도사들이 잠을 자고, 독서와 사색, 묵상을 하는 공간이다. 방안에는 독거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있다. 테이블과 책장, 침대, 작은 옷장과 테라스가 전부다. 자유롭게 숨 쉬고 살 정도의 작은 공간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청년 시절 방문했던 에바의 샤르트르회 수도원을 회상하며, 사람이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이 방에 적용했을 것이다. 그는 아내 이본느와 함께 4평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 작은 통나무집은, 대규모 도시를 기획하고, 국제회관을 설계했던 건축의 거장이 던지는 삶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우리에겐 과연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한가!

 

라 투레트 수도원은 르 코르뷔지에의 예술혼과 쿠티리에 신부의 영성이 만나 세워졌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곳에 인간을 위한 거처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50년 세월 동안 그 많던 수도사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났지만, 라 투레트는 여전히 그 때 그 모습, 하느님의 거처로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송한필의 시 "우연히 읊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간밤 비 맞아 꽃을 피우곤/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누나./ 슬프다 한바탕 봄날의 일이/ 비바람 가운데서 오고 가노매"(花開昨夜雨 花落今潮風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글·사진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영성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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