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컬럼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매일춘추] 주관식

해마다 이 날이 되면 대한민국은 마치 종말이라도 온 듯 조용해진다. 북적대던 출근길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비행기들도 한동안 상공을 맴돌다 무전을 받은 뒤에야 대한민국 땅에 착륙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든 이 희한한 광경이 일어나는 날은 바로 1년 중 딱 하루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선 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인생을 결정짓는 시험이라고 생각하며 이 수능을 위해 학생들은 10년을 공부한다. 그리고 이날 수험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게 온 나라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수능의 시험 문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객관식과 주관식이 그것인데 객관식은 주어진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고 주관식은 빈칸에 알맞은 답을 적어 넣는 것이다. 학생들은 난이도가 높은 객관식 문제도 어려워하지만 보기가 없는 주관식 문제를 더욱 어렵게 느끼곤 한다. 객관식 문제는 어쨌거나 보기 중 하나는 답이기에 답을 모르는 경우라도 5분의 1 확률로 정답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주관식 문제는 그 문제에 관한 나만의 생각과 해답을 적는 것이기에 알지 못하면 답을 적을 수 없다. 또한 단답이 아닌 경우에는 답을 대강 알고 있어도 그 내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적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주어진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생각을 나만의 문체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비단 시험 문제를 풀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다 큰 성인이 된 후에도 나만의 답을 나만의 생각으로 이야기하는 일은 쉽다.필자가 초등학생일 때의 일이다. 당시 HOT와 젝스키스가 아이돌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유행할 때였다. 어느 날 친구들이 어느 가수를 좋아하느냐 물었고 필자는 외국 아이돌 밴드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필자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아이돌 그룹 중 하나를 이야기하지 않고 보기에도 없는 외국 아이돌 그룹을 말하는 필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 마음에 더 이상 이상한 사람이 되기 싫었던 필자는 그 이후부터는 당시 친구들이 좋아하는 가수 중 하나를 골라 그 가수를 좋아 한다고 말했다. 남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는 내 마음에 드는 답이 없어도 그저 주어진 보기 중 선택하는 쪽을 택하며 그렇게 성장해 온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은 나만이 주관적인 답을 찾으려 더 노력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항상 주관적 판단만이 가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로 내가 선호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와 타인이 제시하는 객관식의 문항들 외에 나만의 취향을 드러내는 주관적인 해답들을 찾아보는 일은 나라는 사람을 완성하는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2019-11-07 11:41:23

황기호 수성구의회 의원

[기고]지방분권 의지 강한 총선후보 보고 싶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듯 조선시대부터 수도로 사용한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은 수백 년 동안 국가의 수도가 되면서 한국의 도시 중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1990년대 이후로 지방도시가 쇠락하고 서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더욱 높아져 사람과 대기업들이 중앙인 서울로 서울로 몰려드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기현상을 보였다.시골 마을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산골오지의 마을이 아니라 군 단위의 마을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대구와 같은 대도시도 예외는 아니다. 인구 유출이 점점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 층 인구의 유출로 지방 도시는 갈수록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이 서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기회를 찾아 태어나고 자란 지방을 떠나 서울로 서울로 가고 있다.매일신문에 임기 반환점을 도는 문재인 정부의 지방분권(地方分權) 정책이 '포장만 화려했지 알맹이는 없다'는 기사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참여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겠다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지방소멸을 재촉하는 정책들을 더 많이 내놓았다는 것이다.필자는 수성구 자치분권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방분권이 무엇인가? 권리를 지방으로 나누는 것 즉, 중앙으로부터 집중된 많은 권리를 지방정부로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방자치단체에 행정 기능의 책임과 권한을 돌려주는 것이다.왜? 지방분권이 필요한가?중앙정부를 중심으로 살림을 살다 보면 지방의 특수성과 애로사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지방의 균형발전이 어렵기 때문에 지방분권이 꼭 필요하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중앙정부로부터의 하달식이 아닌 지방정부 스스로가 지역 특성에 맞는 경제, 문화, 행정 등을 함으로써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주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준다.우리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관습처럼 되어 있다. '중앙으로 중앙으로부터'라는 잘못된 악순환의 관습을 깨야 한다. 지방분권의 활성화 차원에서 작년에는 지방분권 관련 마술쇼, 올해는 지방분권을 주제로 한 뮤지컬과 토크쇼를 통한 홍보 등이 있었다. 1년에 한두 번의 홍보가 아니라 축제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많이 만들어 주민들의 참여도를 높이고 교육과 홍보를 통한 지방분권 필요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물론 시작은 중앙의 살림을 사는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내려 놓는 게 전제되어야 지방분권이 가능한 것이다. 과연 그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겠는가?역사적으로 볼 때 자기에게 주어진 많은 권리를 내려놓은 왕이나 지도자는 없었다. 그러나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은 지방분권 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틀림없다.자치분권이 이루어지면 행복한 시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지방분권이 이루어지면 주민이 주인인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아닐까.내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방분권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의원들이 당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꼭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2019-11-07 02:30:00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새론새평] 시장(市長)이 할 일

도시가 살기 좋으면 사람 모이고 불만이 있으면 다른 도시로 떠나대구 시민들에게 필요한 市長은 삶의 편의성을 높여주는 행정가사람들은 발로 투표한다. 현재 사는 도시에 불만이 있으면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그래서 살기 좋은 도시는 인구가 증가하지만 살기 힘든 도시의 인구는 감소한다. 이는 소비자가 한 제품에 불만이 있으면 다른 제품을 사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발로 또는 돈으로 투표한다. 도시가 기업과 다른 점은 무한정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도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가 늘면 혼잡이 증가해서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그래서 한 나라 안에는 큰 도시도 있고 작은 도시도 있다.대구광역시 인구는 1990년 223만 명이었으나 1995년 달성군과 통합하면서 245만 명으로 증가한 후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인구는 1995년 정점을 찍었다. 인구 대비 전입자와 전출자 비율은 1990년 13%에서 2017년 7%로 감소하였고 전입자 수는 1995년을 기점으로 전출자 수를 밑돈다. 이에 따라 매년 약 1만3천 명의 인구가 유출되고 있다. 지난 40년의 통계는 대구광역시 인구가 안정적으로 유지됨을 보여준다. 안정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정체되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균형에 도달했다는 뜻이다.모든 도시가 인구 100만 명 이상일 필요는 없다. 큰 도시도 있고 작은 도시도 있는 것이다. 대구광역시의 목표가 인구 300만 명을 달성하는 것일 수 없다. 도시 성장 자체는 의미가 없다. 한 도시가 살기 좋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 결과 인구가 증가한다. 대구광역시의 목표는 편의성(amenity)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치안, 전염병 예방, 깨끗한 물, 일정 수준 이상의 병원, 양질의 초중등 공교육, 혼잡하지 않은 도로, 원활한 대중교통, 적당한 면적의 녹지와 공원, 적절한 가격의 주택 등이 도시 편의성을 결정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중하층에 속하는 시민들에게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관건이다.시장은 도시 상징의 변경, 국제행사 유치, 경전철 또는 지하철 건설, 랜드마크 시설 건축, 유명기업 유치, 공연장 또는 미술관 건립을 통해 도시가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업은 발전하는 도시가 해야 할 일이지 이로 인해 도시가 발전하지 않는다. 예산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대구광역시의 편의성이 높아져서 살기 좋은 도시가 되면 인구가 증가하고 많은 기업이 유치될 것이다. 저렴한 공장 부지를 제공하고 세금을 감면한다고 해서 기업이 유치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기 힘든 도시에는 기업도 오지 않는다. 기업에 사람은 수요인 동시에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선호한다. 그러한 도시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고 혁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을 오게 하려면 도시가 살기 좋아야 한다.최근 대구광역시 청사와 대구공항 이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내년 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청사와 공항이 오래되었고 규모가 작은 것은 사실이다. 토건사업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이 사업들을 추진할 적기인지는 의문이다. 청사와 공항을 이전하기에는 대구광역시의 재정적 여력이 없다. 지하철 부채, 버스 보조금, 복지 지출만으로 예산의 대부분이 소진되는 것이 현실이다.도시 편의성을 높이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몇 번의 극적인 행사로 도시 편의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예산만 낭비될 뿐이다. 시장은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시민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일은 빛이 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손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이 일을 해야 한다. 시장은 정치인이 아니다. 시장은 행정가이다. 시민들에게 필요한 시장은 정치적인 선동가가 아니라 청렴하고 합리적인 관리자이다.

2019-11-06 19:50:13

이도수 경상대 명예교수

[불가사의 인도] 힌두교 경전 속의 괴물 '좀비'

현대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좀비'는 도깨비처럼 친근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고대 힌두교 경전에 등장하는 좀비(zombie) 원형은 극히 흉측한 괴물이었다. 영혼이 떠난 육신은 분해되어 잔해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거나 흙에 동화되어야 윤회 법칙이 정상 가동된다. 그러나 때로는 윤회 법칙 작동 이상으로 영혼 없는 육신이 그대로 무덤 속에서 매우 오랜 세월을 보내는 기현상이 생기기도 한다.무덤 속 산송장인 좀비들은 오랜 세월 동안 무덤에 갇혀 지내다가 이들을 불러내는 악령의 나팔소리를 듣고 좋아하며 무덤 밖으로 달려 나가 인간사회를 어지럽히고 돌아온다.현대 영화 제작자들이 흥행 목적으로 이 흉측한 괴물에다 인간 친화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도깨비처럼 친근감을 느끼게 한 결과로 요즘 상호나 상품명에 '좀비'를 애칭처럼 붙이게 되었다. 필자가 처음 고대 인도의 신비 사상에 심취되었을 때, '좀비'라는 흉측한 괴물이 과연 존재할까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신화와 전설은 은유적이라지만 좀비만큼 흉측한 괴물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그런데 최근에 그 '좀비'라는 흉측한 괴물이 우리나라 도처에서 득실대는 것을 목격하고 경악하게 되었다. 그 좀비 군상들을 한동안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보다가 중앙의 모 유튜브 방송 대담 프로에 출연하여 국내에 득실대는 좀비 목격담을 털어놓고 있다. 대담 사회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국내에서 설쳐대는 좀비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해보라기에 나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했다. 드루킹, 킹크랩! 그들은 악령의 나팔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우우 몰려나와 국민 여론을 밤 사이에 뒤집어놓기도 하고, 청와대 게시판에 귀신이 곡할 장난질을 하고는 어둠과 함께 사라지니 이게 좀비일 것이다. '알릴레오'라는 요상한 이름의 나팔수는 좀비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어 악역을 시키는 악령 괴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얘기를 들은 수십만 시청자 중에 공감 반응은 많아도 반감 댓글은 여태 없었다.

2019-11-06 18:00:00

대구 영남중 교사

[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장진홍 의거

경북 칠곡군 출신의 장진홍(1895~1930)은 인명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4년 대한제국 친위대를 개편하여 창설한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1918년 중국 봉천으로 이동한 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 100여 명을 모집하여 군대 양성에 힘썼으나 러시아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점령하자 활동을 멈추고 귀국하였다.장진홍은 전답을 매각하여 600여원의 자금을 들고, 서적 행상을 가장해 전국을 누비며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였다. 이후 그는 미군 하사관 김상철에게 조사한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할 것을 당부하였다.이후 장진홍은 1927년 4월 무렵에 호리키리 시게사부로(堀切茂三郞)로부터 폭탄제조법을 익힌 후 직접 폭탄을 만들어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등 4곳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대구의 덕흥여관에 투숙한 후 그해 10월 18일 여관 종업원인 박노선에게 4곳마다 폭탄이 든 나무 상자를 건네줄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나무 상자 1개를 전달하였으나, 포병 출신 은행원 요시무라 게츠(吉村潔)가 화약 냄새를 맡고 나무 상자를 개봉하여 도화선을 절단하였다. 그는 나머지 3개 상자도 찾아내어 건물 밖으로 내놓은 후 경찰에 신고하였다. 곧이어 폭탄 3개가 연달아 폭발하였는데, 은행 창문과 출입문이 부서지고 경찰과 은행원이 부상당하였다.그 후로도 장진홍은 안동의 주요 기관과 영천경찰서를 폭파시키려다 무산되자, 곧바로 도일하여 동생 장의환의 집에 머물며 동경경시청 폭파를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1930년 7월 31일 대구형무소에서 자정순국하였다.조선은행 대구지점은 옛 하나은행 대구지점이 있던 장소인데, 현재 건물은 허물어지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 앞 빈터에 장진홍 의거를 알려주는 푯말을 세워 그의 독립정신을 되새기려는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다.

2019-11-06 18:00:00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찬란한 예술의 기억] 대구가 품고 있는 이야기 하나

여기 한 장의 포스터가 있다. 파스텔 톤의 색 면을 여러 겹 겹친 화면 위에 빨간색과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 물감을 고루 사용한 글씨가 연주회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대구현악회 창립 연주회, 현악합주, 편곡·지휘 이기홍, 특별출연 첼로 김경임, 바이올린 독주, 바이올린 이중협주, 찬조 출연 바리톤 이점희, 피아노 김경환, 일시 6월 2일, 장소 청구대학 대강당, 주최 대구음악가협회, 후원 일간신문사, 능인중·고등학교, 대구청년로타리클럽….' 이 포스터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 대구현악회의 창립 공연(1957. 6. 2) 때 사용된 것이다.대구현악회 창립을 주도한 이기홍 지휘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포스터는 당시 능인중학교 동료 교사였던 백태호 화백이 30장을 제작해 준 것이다. 당시 공연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이기홍 지휘자가 소장용으로 간직한 단 한 장이다.이 포스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궁금한 점이 생긴다. 1957년에 현악합주 연주회를 열었다는 것은 우리 지역에 합주를 할 만큼의 연주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해방 후 혼란기를 지나 6·25전쟁이 일어났고 대구는 직접적인 포탄의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어떻게 이런 연주회가 가능했을까. 더군다나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그리고 바리톤 협연까지.한 사람씩 이름을 짚어가며 의문점을 풀어봤다. 대구현악회를 창단한 이기홍 지휘자는 영천 금호 출신으로 서울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6·25전쟁과 함께 대구로 내려와, 대구로 피란 온 음악가들과 함께 교류하며 음악 활동을 했고, 레슨을 통해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길러냈다. 어느 정도 연주자가 모이자, 합주 형태의 공연을 기획했고 여기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사람이 바리톤 이점희 선생이다.협연자로 이름 올린 이점희 선생은 이기홍 지휘자보다 열한 살이나 많았지만, '음악으로 대구 사회를 치유하자'는 데 뜻을 모은 음악 동지였다. 이점희 선생은 계성학교에서 박태준 선생의 영향으로 음악가의 꿈을 키웠고 계성학교 교사로, 지역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며 음악가들을 길러냈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된 후 1970년대부터는 오페라운동에 몰입해 대구오페라협회, 대구오페라단을 거쳐 대구시립오페라단 창단을 위해 노력했다.행사를 주최한 대구음악가협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이점희 선생을 비롯한 음악인들이 1952년 대구음악연구회를 발족했고, 3회의 발표회를 연 후 1956년 대구음악가협회를 새롭게 조직했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음악가들이 순수하게 음악만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금을 해서 음악회를 열어 관객을 맞았다. 음악이 가진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연주회 장소였던 청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 강당은 지금의 노보텔 자리에 있었다. 이곳은 연주회 장소가 부족했던 당대 예술가들에게 소중한 공간이었다. 공연장이라고는 공회당(현 콘서트하우스)과 키네마극장(현 CGV한일), 문화장 여관(현 금융결제원 자리)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다시 포스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백태호 화백의 유려한 필체로 제작된 이 포스터는 캘리그래피로 제작된 대한민국 최초의 연주회 포스터일 가능성이 높다. 이 포스터의 영향이었을까. 대구현악회 창립 연주회는 크게 호평을 받았고 그해 연말 대구교향악단의 창단을 이끌어냈고 1964년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됐다.이제 포스터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이기홍 지휘자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안타깝게도 이 포스터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제는 사진만으로 남아 있기에 이 포스터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더 소중하다. 더 늦기 전에 그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낼 준비를 마쳤다. 이 포스터를 모티프로 대구시와 지역방송이 다큐멘터리 '대구 음악 이야기'를 공동 제작했다. 오는 14일(목) 오후 11시, TBC대구방송에서 음악가들의 행적을 통해 대구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9-11-06 18:00:00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 수필가

[매일춘추] 헬리콥터 맘과 캥거루족

봉준호 감독이 2009년에 만든 김혜자, 원빈 주연의 '마더'는 모성애의 극한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이가 5살 때, 너무나 살기가 힘들어 동반자살을 하려고 음료수에 농약을 타서 먹였으나 미수에 그친다. 그 아이가 28살의 청년이 되었지만 지능은 어린이 수준이다. '바보'란 소리만 들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들이 어떤 연유로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자 엄마는 지능이 떨어지는 순수한 자신의 아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면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직접 나선다.영화는 여성의 극단적 모성애를 보여주는데, 첫째는 동반자살 시도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반자살이란 말은 맞지가 않다. 아이를 소유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오류일 뿐인 것이다.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엄마가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다. 모정의 결핍은 어쩔 수 없겠지만. 두 번째는 자식을 해코지 하려는 대상에게 가하는 공격성이다. 이는 새끼에게 위해를 가하면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어미와 같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처참하게 살인을 하고는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말을 한다. 의지였다기보다는 반사적 행동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단순한 모성애에만 끌려 아이를 키우는 다소 푼수기의 홀어머니를 보면서, 아이는 농약사건이 아니었어도 마마보이로 밖에 자랄 수 없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육아와 양육을 구별하지 못하는 엄마들이 너무나 많다. '헬리콥터 맘'이니 '캥거루족' 같은 말도 모두 극성스런 엄마들 때문에 생긴 신조어 아니겠는가. 지나치게 간섭하며 과잉보호를 하는 엄마를 헬리콥터 맘이라고 한단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말이 바로 캥거루족이다. 성인이 되어도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는 자녀를 일컫는다.필자는 첫돌 사진은 고사하고 어릴 때의 사진이라곤 없다. 아래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사진이 없는 이유가 너무 시골이어서거나 가난해서가 아니다. 누나나 형은 어릴 때 사진이 꽤 있다. 부모님께서 두 서넛 키우시다보니 넷째부터는 심드렁해진 것이다. 아무래도 손길이 덜 미쳤다는 이야기인데, 역설적이게도 나와 여동생이 형제 중 생활력이 강하다.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 길을 모색하게 되어 있다. 그게 성장하면서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키우기란 쉽지가 않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을 생각하면 애처로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정말로 꽃길을 걷게 하고 싶다면 눈보라 치는 거리로도 내몰 줄 알아야 한다. 자녀에게는 춘풍과 같은 사랑도 중요하지만 추상같은 엄격함도 필요하다. 부모는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잘 적응하게 훈육시킬 의무가 있다. 장삼철 삼건물류 대표·수필가

2019-11-06 11:16:54

전헌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종교칼럼] 중앙분리대에서 자란 이름 모를 풀

어제도 여느 때와 같이 앞산 밑 북카페에서 수요일마다 하는 강의를 위해 길을 나섰다. 태풍이 부는 상황이긴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는 일상의 날이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키가 1m 정도는 될 그 풀이 지난 봄부터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겠는데 어제 처음 나의 인식 범위에 와닿은 것이다. 범안로에서도 고가도로인 롯데플라자 옆을 지나 시내로 가는데 저 앞에서 그 풀이 태풍에 흔들리고 차가 지나갈 때마다 흔들렸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건강한 모습으로 가지마다 씨앗을 잔뜩 달고 있었다.중앙분리대 콘크리트 틈새에 바람을 타고 모인 먼지들과 각종 풀잎과 낙엽들에 뿌리를 박고 자라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 거다. 그의 동료들이 씨앗으로 저 넓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동안 그는 저 좁고 열악한 곳에 떨어졌건만 발아하여 자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동안 나의 차를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차들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 흔들어댔으며 소음과 매연은 또한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비오는 날들이 있어서 저렇게 자랐겠지만 지난여름 한낮의 강력한 햇빛은 얼마나 목마르게 했겠는가.그의 건강한 모습은 이 모든 열악한 상황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여 그 자신이 되어갔으며 자신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로 하여금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자라고 그 모든 분란을 견디게 했는지 궁금하다. 그가 그곳에서 자라는 동안 어떤 의식과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궁금하다.그 풀은 금년 봄에 그곳에서 발아할 만큼의 조건이 되지 않았더라도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씨앗의 상태 그대로 여러 해들을 기다릴 것이다. 태풍도 지나가고 가을이 짙어지면 그가 맺은 수많은 열매들은 다음 해를 위한 씨앗이 되어 이리 저리 흩어져갈 것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알 수 없지만 강력한 생명력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그러면서 나는 그동안 어떤 의식과 생각으로 살아왔는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의 수고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육십 중반에 이르도록 살면서 겪었던 온갖 일들은 글로 소상하게 쓴다 하더라도 제대로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고 망각의 세계로 접어든 부분 또한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앙분리대에서 자란 그 풀만큼 의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모님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는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기억에 떠올릴 수도 없으며 말로 다 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조국과 국제사회가 나의 생존과 성장 그리고 교육을 위해 제공한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대충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이 역시 다 헤아릴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나의 생존을 위해 지구환경이 나에게 제공한 것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절실하게 필요한 이 공기를 아무런 조건 없이 무상으로 계속 제공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물과 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먹는 음식을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희생되고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들어가 있는가.그런데 나는 나의 삶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왔는가. 이 수많은 요소들에 대해 인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얼마나 갖고 살아왔는가. 참으로 반성하며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

2019-11-06 10:13:57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매일춘추] 국화 옆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던가요?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던가요? 소쩍새 울음과 먹구름 속 천둥과 간밤 무서리 안부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을은 왔고 국화꽃은 어김없이 피었습니다. 공원에서 혹은 수목원에서 국화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가을햇볕에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가을의 소유권을 가지고도 가을을 소유하지 않은 채, 가을을 세공하고 있었습니다.서정주 시인은 왜, 국화 앞에서가 아니고 국화 옆에서 라고 했을까? 라는 생각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대구수목원의 국화축제장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있는 국화코끼리, 국화기린, 국화곰돌이…. 살아있는 동물 보다 피어있는 동물을 보는 눈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화는 국화 '위'나 '아래'에서 피지 않고 오직 '옆'에서 피어나고 있었지요.마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해 CBS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스튜디오를 찾은 마더 테레사에게 앵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테레사 수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지요. "나는 듣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을 들은 앵커는 당황해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듣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잠시 생각하다 다시 "그분도 듣지요" 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앞에 있는 눈, 코, 입에 비해 옆에 있는 귀가 좀 더 큰 이유는 왠지, 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옆에 있는 것 잘 들으라는 당부나 계시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만 보고 가다 놓친 것들 귀담아 들으라고요. 그런데 옆을 강조하거나 사족 같은 귀 없이도 국화는 잘 듣고 있었습니다. 잘 듣는 다는 것은 잘 보는 것이겠지요. 상대방 소매 끝에 달랑거리는 실밥을 떼어 준다거나 입가에 묻은 국물 보고 휴지를 슬쩍 건네는 일처럼요. 휴지를 건네 듯 국화는 여린 날개의 벌들에게 한 모금의 달콤한 가을을 선사하였습니다.잠깐 동안 국화는 피어나지 않고 새어 나기도 했습니다. 국화의 속도로 힐끗힐끗 새어 가을을 누설하느라 바빴습니다. 꽃잎에서 꽃잎은 새어나고, 벌들도 새어나고, 가을도 새어났습니다. 국화의 몸은 더욱 부풀어 지고 벌들도 더 분주했습니다. 가을의 얼굴은 또 얼마나 빨개지는 지. 옆에서의 일들은 앞에서의 일보다 대체로 자잘한 대신 즐거움은 오래갑니다. 오래가는 것은 훨씬 더 큰 일입니다. 국화 옆에서도 국화는 온통 가을의 귀를 곤두세웁니다.예컨대 옆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옆이 된다는 건 누군가의 옆이 되어 주고 싶은 것이겠지요. 옆은 나란한 것이며 닮아가는 것이며 손잡는 것입니다. 봄과 여름을 지나 함께 가을을 맞는 국화처럼. 임창아 시인·아동문학가

2019-11-05 11:05:54

[세월의 흔적]<46> 주판

"368원이요, 473원이요, 389원이면 ". 선생님이 문제를 내면 여기저기서 주판알 굴리는 소리가 '토독토독' 합창을 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입학시험에 주산 과목이 있었다. 저마다 주판을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문제지에는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문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적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조그만 손가락으로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며 판셈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중학교에 입학하자 상업이라는 과목도 있었다.세월이 빠르게 흘러서 직장인이 되었다. 숫자를 많이 사용하는 부서에서 일하였고, 늘 계산을 하는 게 맡은 업무였다. 옆자리의 동료 가운데 주판을 잘 놓는 직원이 있었다. 덧셈이나 뺄셈은 물론 곱하고 나누는 셈까지 척척 해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복잡한 곱셈이나 나눗셈을 얼마나 잘하는지 부러웠다. 심지어 소수점 이하의 계산까지도 막히지 않고 해냈다. 때로는 손을 빌리기도 하였지만.문명의 이기가 수고를 덜어주었다. 손잡이를 앞뒤로 돌리며 계산하는 기계식 계산기가 나왔다. 돌릴 때마다 '땡 땡' 하는 소리가 났다.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참으로 신기했다. 열심히 배워서 업무에 이용하였다. 그런 세월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전자계산기라는 게 등장하였다. 성능이 좋을 뿐 아니라 크기며 모양도 다양하였다.그러나 사용하다 보면 틀릴 때가 있었다. 한 번은 동료가 해놓은 계산이 틀려서 나무랐다. 그랬더니 "계산기로 했는데요" 하면서 볼멘소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아, 계산기를 만지는 손가락에 잘못이 있었겠지" 하였더니 머리를 긁적거렸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컴퓨터는 못하는 일이 없다. 고성능의 기계 설비를 제작하고, 인공위성을 원격 조정하는 일도 척척 해낸다. 하지만 그것을 조작하는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다.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주판이 널리 쓰이지 않았다. 특히 사대부 집안에서는 주판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전래되어 오던 산목(算木)에 의한 계산법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주판이 보급되었는데,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주판보급회라는 조직을 만들고부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쓰이고 있는 윗알이 1개, 아래알이 4개인 주판이 사용된 것은 1932년부터이다주판은 오랫동안 상업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상업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주산의 급수를 정하여 문교부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검정을 실시해 왔다. 전자계산기가 널리 보급되는 바람에 비록 쇠퇴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도 속도라는 면에서 뒤지지 않기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숙련된 전문 기능사는 수많은 현대의 기계식 계산기와 경쟁이 가능하다.해마다 대구엑스코에서 '전국 주산 수리영재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학생들의 두뇌계발과 인성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올해는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금상까지는 메달과 상장을, 그 이상의 수상자에게는 트로피를 주었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2019-11-04 18:06:00

강판권(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나무와 창의성] 12월의 나무: 상수리나무

상수리나무는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대표적인 구황식물이었다. 어려울 때 목숨을 구해준 구황식물은 본초학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약효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본초학은 전근대 시기의 식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 심지어 식물학자조차도 식물을 본초학으로 이해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초학에 기초한 식물 인식은 모든 식물을 약효로만 바라보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식물을 보면 가장 먼저 약효를 따진다. 식물원조차도 식물 이름표에 약효를 적는다. 어려운 시대가 아닌 요즘도 가을철 산에 가면 참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의 열매를 줍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식물에 대한 본초학적 인식에서 벗어날 때 우리나라의 국민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상수리나무가 열매를 떨어뜨려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회남자" '시칙'에는 12월을 다음과 같이 바라보았다.천자는 현당(玄堂)의 좌개(左个)에서 조회를 하고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즉 사방에 개고기나 양고기를 찢어놓고 크게 푸닥거리하게 하고, 흙으로 빚은 소를 밖에 내놓게 한다. 어업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물고기 잡이를 시작하게 하고, 천자도 몸소 나아가 물고기를 잡으며, 잡은 고기를 태묘에 먼저 올린다. 백성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꺼내 놓게 하고, 농업 담당 관리에게는 씨 뿌릴 일의 계획을 세우게 하고 가래 보습 등의 쟁기를 수리하여 농기구를 갖추게 한다. 악사에게는 대규모의 합주를 연주하게 한 후 한 해의 음악 활동을 마감하게 한다. 그런 다음 산림을 관리하는 담당자에게 명령하여 땔나무를 거둬들여 종묘 제사와 각종 제사에 사용하는 땔거리를 공급하게 한다.상수리나무의 이름은 임진왜란 때 피란 갔던 선조가 피란지에서 먹은 도토리묵을 환궁해서도 수라상에 올린 것과 관련이 있다. 묵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토리는 털로 덮여 있다. 상수리나무의 열매는 같은 과의 굴참나무와 거의 같다. 그래서 두 나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잎을 봐야 한다. 상수리나무의 잎은 앞뒤의 색깔이 거의 같은 반면 굴참나무의 잎은 앞뒤의 색깔이 다르다.상수리나무의 한자는'역'(櫟)이다. '역'은 '쓸모없는 자' 혹은 '장수'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중국 전국시대 장주가 편찬한 "장자-인간세"에 등장하는 제나라 근처 곡원의 사당 앞에 살고 있는 상수리나무에 얽힌 우화 때문이다. 이곳의 상수리나무는 굽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덕분에 천명대로 살 수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철학을 낳은 나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자"에 등장하는 우화를 모방해서 '역옹'(櫟翁)의 호를 사용했다. 그중에서 고려시대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은 자신의 호를 딴 작품이다.무용지용의 철학은 생명체에 대해 비교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은 쓸모를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의 가치는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따라 생명체의 가치를 판단한다.내가 자주 다니는 대구시 북구 구암산에는 콩과의 갈잎큰키나무인 아까시나무가 상수리나무와 더불어 많이 살고 있다. 산등성이 등산로 주변에도 아까시나무가 적지 않게 살고 있다. 그중에 한 그루가 상수리나무의 뿌리와 얽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가보니 누군가가 상수리나무는 살려두고 아까시나무만 잘라버렸다. 지금 아까시나무는 목이 날아간 채 죽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아까시나무를 자른 사람의 심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까시나무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구암산의 아까시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리기는커녕 영문도 모른 채 타살되어 버렸다. 인류의 역사에서 구암산의 아까시나무처럼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위대한 목숨을 잃어버린 존재가 아주 많다. 구암산의 아까시나무를 벤 자의 행동은 만행이다. 생명에 대한 만행은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나쁜 것이다. 아까시나무에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지금 아까시나무의 꽃으로 만든 꿀을 맛있게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산객들 중에는 이같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도 갖지 않고 버젓이 살아간다.

2019-11-04 18:00:00

배상식 대구교육대학교 교수

[배상식의 여럿이 하나] '동시통역의 어려움'

한국어를 외국어로 통역하거나 혹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특정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통역하는 것은 단순히 의미가 비슷한 낱말을 대체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라도 그 안에는 소리나 문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정신도 함께 녹아 있다.얼마 전, 우리 대학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국제행사이다 보니 당연히 발표 및 토론을 위한 통역요원이 필요하였다. 지인을 통해 우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 중국 출신의 결혼이민여성을 소개받았는데, 통역 경험이 제법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행사를 주관하는 입장에서 이 여성을 신뢰하게 된 것은 바로 통역에 대한 그녀의 자신감과 한국에 거주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 오전의 첫 발표자부터 통역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대만 원로학자의 발표 내용을 제대로 통역하지 못하였고, 대회장은 곧바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행사를 주관하는 입장에서 매우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이 결혼이민여성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통역을 잘 하는 편이나,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학술대회에서는 어려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2년 전, 우리 대학 주관으로 한일 교육대학 총장포럼을 개최했을 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3일 동안의 일정으로 진행된 행사에는 한국과 일본의 모든 교육대학 총장들과 교육관계자들이 모여서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비하여 어떻게 교원을 양성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열띤 토론이 있었고, 이 행사에도 통역요원이 필요하였다.그 당시에도 필자는 지인을 통해 일본 출신의 결혼이민여성을 소개받았다. 이 분은 한국에서 10년을 넘게 살았고 또 한국어를 아주 잘 구사하였다. 그런데 첫 행사인 환영만찬회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단순히 행사 순서를 진행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으나, 질의나 응답 혹은 즉석에서 진행되는 인사말 등은 제대로 통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그럼에도 이 통역요원은 행사를 마칠 때까지 전체 일정을 소화하였다.물론 모든 행사가 그러하듯이, 많은 분들을 초청해 놓은 상태에서 행사 진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다음 기회에도 행사에 필요한 통역요원으로 결혼이민여성을 추천하고 싶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노력과 경험이 조금씩 축적된다면 충분히 전문 통역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프랑스의 저명한 통번역학자인 르드레르(Marianne Lederer)도 지적했듯이, 통역은 문화적 요소나 전문용어의 무지 혹은 표현능력의 미숙함에서 다양한 어려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비록 국제학술대회 중 학회장이 직접 발표자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혹은 일본의 한 교육대학에서 통역자로 참석한 사람이 우리 행사의 통역을 지원해 주는 일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다음 국제행사에서도 결혼이민여성에게 동시통역을 부탁할 것이다. 분명 이들에게는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말이다.

2019-11-04 18:00:00

이은주 힐링드라마아트센터 대표,심리치료사

[이은주의 잉여현실] 조커, 악당이 된 한 남자의 잉여현실

'조커'는 배트맨 시리즈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말씀을 잘 듣고 착하고 섬세하고 유약하다. 하지만 세상은 비정하고 약자를 누르고 조롱하며 무시로 침범하고 폭력을 한다. 약자들은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아닌 척 좋은 척 웃는 얼굴의 가면을 써야 한다. 웃음은 약자의 전형적인 자기방어 양식 중 하나다. 억압된 두려움과 슬픔의 가면이 웃음이다.조커는 어느 순간 가면웃음 뒤에 숨겨진 감정과 분노를 드러낸다. 마음속에서 꿈틀대던 상상의 세계, 즉 잉여현실(사이코드라마 따위와 같은 심리치료극에서, 참여자인 주인공이 실재 현실을 뛰어넘어 경험하는 극 속의 현실)의 세계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줘야 한다고 믿었던 틀을 깨고, 자기를 모욕했던 자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지하철에서 한 여성을 희롱하던 세 은행원을 죽이고, 웃음의 가면 속에서 누추한 인생을 살게 한 엄마를 살해하고, 자신을 무시하고 때렸던 직장 동료와 첫 만남에서 자신을 비웃었던 옆집 애인도 죽인다. 조커는 TV에 나오고 유명해지고 내가 원하는 쇼 프로그램에 나가 스타가 된다.거리는 점점 피에로 분장을 한 억압당하는 또 다른 조커들로 넘쳐난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돌을 던지고 분노와 저항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고 영웅이 된 것이다. 마치 프랑스대혁명을 이끌었던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라도 된 것처럼. 병원 복도 끝에서 추는 춤은 음울한 세상을 감싸고 지금 여기를 축하하듯 가볍고 우아하다.인정이 없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거짓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도 수많은 '조커'들이 있다. 시장에도, 교회에도, 직장에도, 집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다. 우정을 나누기보다는 경쟁해서 이기기, 존중하기보다는 조롱하고 학대하는 관계 방식이 만연해 있는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조커'들이 있다.특히, 폭력과 멸시 속에 자라는 아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다 어떻게 할 것인가!

2019-11-04 17:52:33

이춘희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춘희의 시사로 읽는 한자] 事必歸正(사필귀정): 반드시 정의가 이긴다

일(事)은 결국(必) 바른 이치로 돌아간다(歸正)는 뜻이다. 바르지 못함이 잠시 기승을 부려도 결국 정의(正義)가 이기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이다. 춘추시기 각국의 역사를 기록한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배신의 아이콘으로 진(晉)나라 혜공(惠公) 왕의 이야기가 있다.혜공 6년,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진(晉)나라를 쳐서 한원(韓原)에 이르렀다. 혜공이 장군 한간(韓簡)을 보내 탐문케 했다. "군사는 적으나 싸우려는 의지가 있는 병사가 우리보다 많습니다"라고 했다. 혜공이 이유를 묻자, "진(秦)은 우리에게 은혜를 세 번이나 베풀었는데 보답이 없어 치러 왔는데, 또 맞서 싸우겠다니 분노하지 않는 병사가 없습니다"라고 했다.일찍이 혜공은 목공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5개 성읍을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혜공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혜공 4년에 진(晉)에 흉년이 들자, 목공은 백성을 살려야 한다며 쌀을 주어 고비를 넘게 했다. 다음 해 거꾸로 진(秦)에 기근이 들어 목공이 진(晉)에 식량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혜공은 진(秦)의 사신에게 "과인에게는 능히 모을 수 있는 군사는 많지만 해산시킬 수는 없다"면서 식량은커녕 군사를 일으켜 곤경에 처한 진(秦)을 공격하려 했다.돌아온 사신에게 목공이 말했다. "전에 혜공이 입국하지 못했을 때도, 왕위를 잘 지키지 못할 때도 과인은 걱정했다. 그를 직접 만나겠다." 신하 집(縶)이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면 제후들의 비웃음을 살까 두렵다"고 하자, 목공은 "은혜를 외면하는 것은 하늘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늘이 있다면 반드시 내가 이길 것이다"며 직접 전투에 임했다. 결국 혜공은 도망가던 중 생포되었다. 그는 목공의 아내인 누나 덕에 목숨은 부지했으나 곧 병사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맹자'(孟子)는 "정의(道)를 얻으면 돕는 자가 많다"(得道多助)고 했다.

2019-11-04 17:51:37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매일춘추] 이 편한 세상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서 우연히 스텝회의가 약속되었다. 이동 경로와 위치를 고려하다보니 반가운 우연과 마주하게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시간이 남아 30년 가까이 된 기억을 더듬어 살던 곳을 찾았다. 나지막한 2층 주택을 개조해서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부엌과 욕실은 신발을 신고 가야하는 불편한 구조였다. 하지만 기억 속의 2층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외벽이 대리석으로 된 높은 빌라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전 몇 개를 손에 꼭 쥐고 달려가 불량식품을 사먹던 구멍가게도, 늘 기름 냄새를 풍기던 인쇄소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작은 양말 공장도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사각형의 빌라가 들어섰다. 축구공을 옆에 메고 벽돌담 위로 고개를 쭈욱 뺀 채 "누구야 놀자" 라고 외치던 그 시절 친구 집도 사라졌다. 네모난 인도블록으로 좁고 울퉁불퉁했던 골목길은 빌라의 그림자 때문인지, 매끈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때문인지 더 어두워 보였다. 바닥에 선을 그어 땅따먹기를 하던 공터는 이편한세상 아파트 단지의 입구가 되었다. 차량 몇 대가 입구에 있는 바리게이트 앞에 서자 차단기가 열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유를 설명하긴 힘든 서글픔이 몰려왔다.우리는 참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면 친구를 불러낼 수 있고 전화번호도 외울 필요가 없다. 비밀번호 몇 자리를 누르면 투명한 자동문이 열리는 대문, 등록된 차량번호를 인식하고 자동으로 차단기를 열어 반겨주는 아파트 입구, 지인의 생일선물은 기프티콘으로 보내고 내비게이션 하나면 지도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다. 친구를 불러내기 위해 목청을 높이다가 친구 부모님과 인사할 일도 없을 것이고 유선전화로 친구 집에 전화할 일도 없을 테니 전화예절도 필요 없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힘들게 맞춰 넣을 필요도 없고 삐걱거리는 대문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 지인의 생일선물을 포장할 일도 없고 차를 타고가다 길을 잃어 지나는 행인에게 머쓱한 인사를 건넬 필요도 없다. 우리는 참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편한 세상이 될수록 사람의 능력은 저하되고 사람간의 교감은 기계가 대신 한다. 눈빛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높낮이가 있는 음성은 텍스트가 대신한다. 그 시절 대문을 두드리며 음식을 나눠먹던 이웃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는 만큼 이 편한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깊어진다.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2019-11-04 11:19:54

정순옥 대구시가정어린이집연합회장

[기고] 소규모 가정어린이집원장의 호소

꽃다운 나이 20세, 아이들이 좋아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아이들과 웃으며 보낸 30여 년 동안 줄곧 대구의 영아들이 행복하고, 평등한 보육을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이 없는 소규모 가정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영아 보육에 헌신해 왔으나 지금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직업이 되어 버렸다. 또한 극심한 저출산 문제가 현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영아들이 점점 줄어 운영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힘든 날이 되고 있다.최저임금은 10.9% 인상되었지만 보육료 인상률은 6.3% 상승에 그치면서 소규모 20인 이하 가정어린이집은 운영 자체가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가정어린이집의 폐원 속도도 나날이 빨라지고 있다. 가정어린이집은 다른 유형의 어린이집보다 지원이 절실한 현실이며, 국공립 지원 시설과 정부 지원이 없는 가정어린이집 간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정부는 공공성 강화를 위해 2021년까지 국공립 어린이집 이용률 40%를 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공립 어린이집을 선호하는 부모들은 나날이 늘어나고 대학입시를 방불케 할 만큼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반면 올해 소규모 20인 이하 가정어린이집은 운영이 더욱 어려워지고, 가정어린이집의 폐원 속도도 나날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하지만 보육의 공공성 확보는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만으로는 힘들다. 국공립은 최선의 보육 대안이 아니며 민간, 가정이 함께 공존하며 상생하는 보육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영유아는 어느 유형의 어린이집을 선택하더라도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규모와 어린이집 유형에 상관없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소규모 20인 이하 영아 중심 가정어린이집 지원 체계가 동일하게 개편되어야 한다. 우선 국가의 예산 정책에서 어린이집 지원 차별이 시정되어야 한다. 공공형 인건비 지원 시설의 예산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민간 어린이집 영아 보육 지원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공공형 지원 시설과 민간 부문 지원 시설에 대한 예산 증가율의 격차는, 결과적으로 노골적인 보육 수준의 격차를 유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용하는 시설의 설립 주체가 국가인지 개인인지에 따라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획일적인 국공립화보다는 다양한 형태로 공보육을 확대하는 방향이 현실적이다. 보육 환경 개선을 위해서 대구시의 적극적인 관심과 반별 운영비 지원이 필요하다.정부의 인건비 지원 없이 보육료에만 의존해 운영하는 가정어린이집은 최저임금과 2차성 인건비(4대 보험, 퇴직금)를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20인 이하 영아 중심 가정어린이집에 아동별 지원이 아닌 100% 반별 지원비가 조속히 지급돼야 한다.서울시, 경상북도, 경상남도, 울산시, 전라남도 등 전국에서 특수보육시책 사업으로 일반 및 가정어린이집의 영아반당 운영비를 0세 20만원, 1, 2세 반당 15만원 정액으로 지원하고 있다. 대구시도 영아반당 운영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보육교사의 처우 개선, 영아 보육료 현실화 등 소규모 20인 이하 영아 중심 가정어린이집 공보육 확대 방안을 마련해 대구가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9-11-04 11:17:56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세계의 창] 솔론의 행복

재물과 권력 가진 정복자 왕보다 아테네 시민이 행복하다는 솔론금수저·흙수저 논란의 우리 사회 금권 신분제도 자리 잡을까 우려그리스는 어떤 나라일까?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이렇다 할 교류도 별로 없다 보니 북한이나 미국, 또는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에 비교해 보면 전해 오는 뉴스가 많지 않다. 최근에는 어려워진 경제 상황이나 불안한 정치 소식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다.하지만 고대의 그리스는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해 사상과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서양 고전 100선에 반드시 포함되는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 현대 민주주의의 기원이 된 아테네 민주정 등을 통해 인류 역사에 매우 굵직한 역할을 담당하여 그 영향력이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다.아테네 민주정의 기초는 솔론(Solon)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정치가로, 감수성이 풍부한 시인이기도 한 까닭에 법률을 시로 표현할 정도였다고 한다.당시의 상황을 보면,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시민들은 원래 균등한 경제적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져 곡물 생산량으로 환산한 소득의 차이가 무려 500대 1에 이르게 되었다.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빈민으로 전락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급기야 신체를 저당 잡히는 일까지 발생했다.솔론은 부의 불균등한 배분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해악과 그 심각성을 깨닫고, 이른바 '솔론의 개혁'으로 불리는 입법을 단행했다. 신체 저당 금지와 부채 말소를 중심으로 한 경제 개혁과 귀족세력 약화와 민중 법정 창설을 골자로 한 법질서 확립이 주된 내용이었다. 안타깝게도 솔론 이후 아테네는 여러 당파로 분열되어, 솔론의 개혁이 열매를 맺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솔론은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가 추구했던 것이 단순히 경제적 부의 균등한 배분이었다면, 그의 이름이 현인(賢人)으로 기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솔론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배경 삼아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라고 물었는데, 물론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기 원했을 것이다.하지만 뜻밖에도 솔론은 아테네의 평범한 시민인 '텔루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텔루스는 크로이소스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며 조국을 지키다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행복의 이유였다.왕은 재차 "그 사람 다음에는 누가 행복한가?"라고 물었다. 솔론은 '클레오비스와 비토'라는 아테네 형제를 소개하며, 그들이 용감하며 서로를 아끼고, 어머니에 대해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에 역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분노한 왕에게 솔론은 지상의 재물과 권력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니 그것으로 행복을 가리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에게 패하여 화형당하게 되자, 뒤늦은 후회와 함께 솔론의 이름을 크게 세 번 외쳤다고 한다.우리 사회는 어떨까?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금권정적 신분제도가 자리 잡아가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한 달 수업료가 200만원을 훌쩍 넘는 영어 유치원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는 일반 시민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솔론과 크로이소스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정직하고 용감하고 자식을 정성껏 키우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평범한 서민들이 행복한 사회이기를 희망한다.

2019-11-04 11:17:38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이른 아침에 ] 펭수, 어른들의 뽀로로

우주대스타 꿈꾸는 자이언트 펭귄 캐릭터 인기에 제작사 EBS도 놀라많은 돈'기술 없이도 탄생한 펭수 그런 콘텐츠 만드는 건 우리의 몫요즘 '펭수'가 대세다. 검색창에 '펭'을 치면 펭귄보다, 페이스북보다 '펭수'가 먼저 뜬다. 한마디로 '핫'하다는 이야기다. 제작사인 EBS조차 이만큼 잘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부랴부랴 연말까지 '굿즈'를 내놓겠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니 잠시 펭수에 대해 알아보자.남극 펭씨에 빼어날 수, 펭수는 '자이언트 펭 TV'의 주인공 캐릭터, 우주 대스타를 꿈꾸는 펭귄이다. 올해 10살, 키 2m10㎝, 그래서 자이언트 펭귄이다. 남극에서 한국까지 헤엄쳐 왔다고 한다. 방송국 소품실 한 구석에서 먹고 자며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는 EBS 연습생, 준비된 글로벌 스타이기도 하다. 당연히 모국어는 펭귄 말이다. 랩도 하고 비트박스도 조금 하며 심지어 프레디 머큐리처럼 록도 한다. 오는 길엔 스위스에 들러 요들송도 마스터했단다.지난 4월 초, 첫 이야기가 전파를 탔고 9월에 방영된 이육대(EBS아이돌육상대회) 편이 온라인상에서 히트를 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인기가 올라가자 그에 관한 의혹이 제기됐다. 펭수가 펭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즉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만 펭귄인 척하는 게 아니냐는 거였다. 일부 네티즌들은 '뽀로로'가 펭귄을 꼭 닮은 것에 비해 펭수는 너무 인간을 닮았다며 꼬집었다. 의혹이 점점 커지자 EBS 측은 자이언트 펭 TV, '펭수가 알고 싶다' 편을 긴급 편성했다.방송을 보면 EBS 취재진이 하루 종일 펭수를 따라다닌다. 그러다 급기야 "당신은 펭귄이 맞습니까?"라며 차마 못할 질문을 날린다. 하지만 펭수는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면 기자님은 사람이 맞습니까?"라고 되받는다. 고향 남극에서 부모 펭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취재진이 영 못 믿겠단 눈치를 보이자 결국 동물병원을 찾아 엑스레이 사진까지 찍는다. 그리고 99.99% 펭귄이라는 수의사의 판정이 있고서야 사태가 일단락된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엉성했지만 이 검증과정을 지켜본 네티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떤 이는 잠시나마 펭수의 정체를 의심했던 나를 용서하라며 EBS 만세를 외쳤고, 또 어떤 네티즌은 탈을 썼든 그 안에 누가 있든 펭수는 펭수일 뿐이라는 말로 격정을 토했다. 그러자 다른 네티즌들이 '펭수는 펭수다'에 울컥했다며 지지와 공감을 표했고, 이로써 펭수의 정체성 논란은 끝이 났다. 펭수는 자신이 펭귄임을 믿어 달라 했고 팬들은 그러기로 했다.이젠 누구라도 펭수를 보고 탈 속에 있는 사람이 궁금하다거나 고생이 참 많겠다고 하면 그야말로 물색없는 사람으로 몰리기 딱 좋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세칭 전문가들은 제각각 견해를 쏟아내고 있다. B급 캐릭터의 새로운 전성시대가 왔다고도 하고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도발적 캐릭터가 대중에게 어필했다고도 한다. 넌버벌(non-verbal)이 아니라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하지만 우리가, 특히 서울 아닌 지역의 사람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돌아보면 '마시마로' '뿌까', 강남스타일, K팝이 그랬듯 새로운 기술은 늘 새로운 기회를 가져왔다. 펭수도 마찬가지다. 우주 대스타로 목표를 상향 조정하기 전까진 꿈이 최고의 크리에이터였던 것처럼 정규 방송에 앞서 유튜브 채널 '펭 TV'를 먼저 오픈했다. 즉 새로운 기회, 새로운 플랫폼을 작정하고 겨냥했던 것이다.하나 더, 펭수는 돈이 아주 많이 드는 것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무엇보다 서울이라야만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다, 다만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통칭되는 문화적 맥락을 제대로 꿰뚫고 있을 뿐이다. 사실, 산업으로서의 캐릭터는 늙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펭수를 100% 캐릭터로 보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을 표방하는 터라 예기치 못한 실수나 돌발 상황에 쉽게 노출될 수 있고 생각보다 빨리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펭수는 지금 잘나간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며 '어른들의 뽀로로'가 되었다.문화산업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고 말한 지도 십수 년이 지났다. 펭수에서 보듯 기회는 늘 있다. 그걸 잡는 건 우리의 몫이다.

2019-11-03 16:02:51

채명 무용평론가

[매일춘추] 발레의 다른 얼굴

지역대학에서는 발레를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 대학 외에는 발레전공 교수 채용도 하지 않고 있다. 발레 교육이 무너져 가고 있어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일반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요즘 여성들 건강관리에 요가를 젖히고 발레가 1위가 되었다고 한다. 여성들이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은 욕구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예전에는 단순히 말라깽이 몸매를 선호했다면, 21세기 들어오면서 균형 잡히고 섹시한 몸매로 시선이 옮겨가고 있다.한 기관에서 올 새해 결심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반드시 이루고 싶은 새해 목표 1순위로 '건강과 균형 있는 몸매를 위한 운동'이 꼽혔다. 응답자 중 '건강을 위한 운동'이 34%로 가장 많았고, 외국어 공부, 자격증 등 자기계발은 23%, 다이어트(22%), 저축(16%), 금연(5%) 등이 뒤를 이었다. 매년 새해 단골 결심으로 꼽히던 다이어트 대신 운동을 선택했다는 것은, 마른 몸매보다는 건강과 균형 잡힌 몸매를 선호하는 바람직한 트렌드가 되었다는 것이다.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초창기에는 에어로빅이나 수영, 달리기, 등산 등에 집중했다면, 요가, 웨이트 트레이닝, 필라테스, 암벽등반, 무용 등으로 종목이 점점 다양해졌다. 특정 운동보다는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꾸준히 병행하면, 자세도 잡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필자가 30여 년 전 유럽에 살던 당시 그 나라의 사회체육에 감동받아 수영과 발레 클래스에 참가한 적이 있다. 출산 후라 레오타드 입는 일이 부끄러워 쭈삣거리는데, 나보다 배가 더 나온 한 여성이 당당하게 발레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녀에 비하면 좀 낫다는 생각으로 레슨을 받는데, 그녀가 임신한 상태라는 걸 알게 됐다. 점프만 조심하면 임산부가 발레를 할 정도로 보편적 이용이 놀라웠다.이와 같은 일이 이제 대구에도 일어나고 있다. 환갑이 넘은 여고동창들이 모여 발레에 도전하고, 동창회모임이지만 작은 무대에서 발레공연도 한단다. 한 발레학원장의 말을 빌면, 자신이 수업하는 성인 발레 클래스가 7, 8개가 되고, 임산부도 수업 받고 있다고 한다. 발레의 확산이 눈에 보인다. 발레로 몸을 가꾸고 건강도 챙기겠다는 여성이 많아진 것이다.이제 대학 무용학과에서도 전문적인 발레리나, 발레리노 양성에만 초점이 맞춰질 것이 아니라, 균형 있는 몸매와 운동으로서의 발레 요구에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발레로 몸을 가꾼다는 이야기 때문에 미를 추구하는 여인들의 발길이 발레 쪽으로 잦아졌다. 발레의 다양한 얼굴을 활용하는 무용계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채명 무용평론가

2019-11-03 06:30:00

우은희 작 '휴식'

[내가 읽은 책]'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 한겨레출판 / 2018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이 비판이 적다는 이유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어쩔 수 없다고, 한정된 시간 안에서 좋은 것만 말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잘라 말한다. 욕망과 사랑을 대놓고 발설하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인어공주처럼 태생이 벙어리 냉가슴인 예술을 통역하고 위무하기 위해 비평가가 존재한다는 인터뷰어의 말은 곧 우리나라 평단에 신형철이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영화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있다. 이번 책은 저자의 두 번째 산문집으로,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의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었다. 1부는 지난 10년간 유독 슬픔에 대한 글이 많았기에 따로 묶어 배치하였다. 영화 「킬링디어」의 첫 장면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보며 느끼는 저자의 생각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객체로서 타인이라는 한계를 인정하게 만든다. 이 특별한 인식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펼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28쪽)" 그렇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당신은 슬프지만 나는 지겹다.' 이것이 너와 내가 타인이라는 한계의 슬픔이다. 너의 슬픔을 알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에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저자는 묻는다.'그 남자네 집'에 대한 글의 한 대목을 보자. 선을 보고 조건에 맞는 남자와 약혼한 여자가 첫사랑을 찾아가 이별을 고한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대가의 문장이다." (중략)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 버리는 것이다.(132쪽)" 무엇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안다는 것은 인식에 대한 세심한 감지능력이다. 차이 같지 않는 차이를 감지하는 이 정확한 인식만이 진정한 위로다. 문학이나 세상일이나.지면(紙面)은 지면(地面)이다.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하다.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은 결국 인식의 차이다. 한 작품이 왜 좋은지와 어떻게 좋은 지에 대해 자신만의 특정한 인식을 생산해 내고,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정확한 문장을 찾는다. 물론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견고하고 온전한 하나의 건물은 다른 무엇으로는 대체될 수 없다. 자, 이제 건물은 있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독자 스스로를 납득하게 만드는 저자만의 설득력이다. "좋은 작품은 내게 와서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 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책 읽기란 그런 것이다.(402쪽)"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당분간은 '신형철 따라 읽기'가 될 것이다. 우은희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2019-11-02 06:30:00

영국판 '구운몽'(Kuunmong) 삽화 '다리 위의 선녀들'(1922)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아홉 사람의 구름같은 꿈 이야기, '구운몽'

한강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덕분에 최근 서양권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한국문학은 무엇이었을까.대략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창작된 이 소설은 1922년 'Kuunmong: The Cloud Dream of the Nine', 즉 '아홉 사람의 구름 같은 꿈'이라는 멋진 제목으로 번역돼 영국에서 출판된다. 번역자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1889년 조선에 건너와 조선에 자신의 삶을 묻은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다.'구운몽'은 승려 성진이 하룻밤 동안 꾼 꿈을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그 꿈의 내용이 독특하다. 욕망과는 담을 쌓아야 할 승려 성진이 꿈속에서 멋진 남성이 되어 팔선녀, 즉 여덟 명의 아름다운 여성과 만나서는 동침한다. 뿐만 아니라 그 여성들을 모두 아내로 맞아들여서 다시없는 화려한 삶을 누린다.물론 소설은 엄숙한 조선조 시대에 발맞춰 엄숙하게 결론 내렸다. 세속적 욕망달성의 허망함을 느낀 성진이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서는 정신 수양에 정진하는 것이다.어찌 보면 성진의 꿈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닌 은밀한 욕망이며 꿈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담은 '구운몽'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선교사가 조선을 대표하는 문학으로서 서구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역설적이어도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제임스 게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 '로빈슨 크루소'와 '걸리버 여행기'를 조선 대중이 읽기 쉬운 형태의 조선어로 번역한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복음 전파에 강력한 '소명'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그가 '구운몽'을 번역작으로 선택한 것이 이해되기도 한다.욕망의 허망함을 깨닫고 종교적 삶에 정진하는 '구운몽'의 성진의 모습은 선교사 게일이 지향하는 삶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운몽'의 영어 번역이 이처럼 종교적 이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게일이 살고 있던 조선은 "오래된 것은 모두 사라졌고 새로운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그 조선에서 게일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으나, 이미 사라져버린 찬란한 조선 문화의 흔적을 '구운몽'을 통해 읽고 있었다.물론 1922년의 영국 대중이 동양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건너온, 아홉 사람의 구름같은 꿈을 담은 이 몽환적 이야기를 게일만큼 좋아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시기 영국은 황폐했다. T.S. 엘리어트가 시 '황무지'를 발표하며 생명이 소생하는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황폐했다.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그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사람들 마음에 남아 있었고 공허하고도 폐허와 같은 황량함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이런 시기 영국의 누군가는 환상과 같은 '구운몽'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차가운 현실을 잊고 잠시 쉴 수도 있지 않았을까.

2019-11-02 05:30:00

이예식 경북대학교 사범대 학장

[광장] 정시확대, 무엇이 문제인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부정 대학입시 의혹으로 촉발된 대학입시제도 공정성의 문제는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교육개혁 관계장관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입시 공정성 제고 방안으로 정시 비율 확대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대통령의 지시를 따르려면 이미 공론화를 통하여 결정된 2022학년 대학입시제도의 정시 비율 30%에서 각 대학들은 적어도 10% 이상 확대하여 신입생을 선발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정시 비율 확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대통령이 바라는 대학입시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 교육경쟁력과 국가경쟁력을 심히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것으로 전망된다.첫째, 정시는 객관식 시험인 수능 성적을 위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제도이다. 4차 산업혁명 변화의 파고를 넘기 위해 우리 아이들은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창조 능력,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수행할 수 없는 비자동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비자동화 영역에 속하는 일들은 하나의 답이 아닌 다양한 답을 창의적으로 찾는 사고방식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대학입시에 유일한 하나의 답만을 찾게 하는 수능의 중요성을 확대하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의 변화에 역행하는 교육적 조치이다.둘째, 수능 성적에 근거한 정시 전형이 비교과 활동 스펙을 이용하는 학종 수시제도보다 더 공정하다는 보장이 없다.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수능 성적도 부모의 학벌, 경제 능력에 상당히 좌우된다. 부모의 소득수준이 1분위 상승할 때마다 수능 1, 2등급을 획득하는 자녀들의 수가 두 배로 증가된다. 결국 수능 성적에 기반한 정시도 온전히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셋째, 수능시험과 같은 객관식 시험은 다른 차원에서 공정성도 결여되어 있다. 언어학을 전공한 필자의 견해로는 수능 영어 문제 중 답으로 적합한 선택지가 없는 문항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험생은 어쨌든 선택지 하나를 답으로 골라야 한다. 출제자가 답으로 정한 선택지를 고른 수험생들만 점수를 획득한다. 이렇게 받은 점수로 대학입시의 당락이 좌우된다면 이 또한 결과의 공정성조차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위에서 언급한 문제 외에도 정시 비율 확대는 대학의 교육에 악영향을 끼치는 문제를 야기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보면 거의 모든 학과에서 정시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가장 낮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하나의 답을 고르는 객관식 문제풀이에만 익숙한 정시로 입학한 학생은 수시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에 비에 대학의 논술형 문제나 다양한 프로젝트형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향을 보이는 학생이 더 많이 대학에 들어오면 올수록 그만큼 대학 교육의 수월성은 저하될 것이다.우리나라는 대학입시의 교육 역류효과가 너무 크다. 대학입시에 있어 객관식 시험인 수능을 위주로 하는 정시 비율을 확대한다면 초·중등 모든 교과 과정은 객관식 문제풀이 능력인 수렴적 사고력의 향상에 집중할 것이다. 따라서 확산적 사고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하는 2015 개정 초·중등 교육과정의 정상화는 물 건너 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 교육의 결과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시 비율의 확대는 우리 교육 경쟁력을 갉아먹고 국가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교육당국은 명심해야 한다.

2019-10-31 11:31:26

강성환 대구시의원(예산결산특별위원장)

[기고]대구시 예산 제때 제대로 사용되나

예산이란 오늘날 젊은이들의 표현으로는 '시민의 피와 땀', 선인들의 말씀으로는 '백성의 살점(肉)이고 기름(脂)'이다.1980년대까지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기둥엔 영조(英祖)가 친필로 써서 내린 주연이 걸려 있었다.'그대가 사용하는 봉록(예산)은 바로 백성의 살이고 기름이니, 아래 백성이라고 학대하지만 하늘을 속이기는 어려울 걸세.'이 말은 두말 할 필요 없이 달구벌 선비정신의 토대를 마련한 여말(麗末) 추적(秋糴) 선생의 명심보감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중국 속담에도 '성을 쌓기는 쉽다. 성을 지키자면 백성들이 죽어야 한다'(築城易守城民死)라고 했다.비록 대구시 예산이 미스매칭·나눠먹기·주먹구구·선심성 예산이라 불리고 있지만 앞으로는 '마카 디비자'(모두 다 뒤집자), 이 외침이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이 될지라도 적어도 다음과 같이 예산 편성이 되도록 감시할 것이다.첫째, 손발이 따로 노는 미스매칭 예산을 이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예산으로 변혁하겠다. 아무리 좋은 대통령 선물 보따리이고 국비 예산폭탄이라도 지역 현실과 맞물리지 않으면 한 푼도 편성하지 않는다는 각오다. 더 이상 치적 쌓기로 후손에게 고정운영비를 부담으로 지우지 않겠다. 또한 국책사업은 타당성, 현실성, 미래확장성 등을 매트릭스로 분석해서 유치하도록 할 것이다.둘째, 대구시 자체 예산을 ▷지렛대 예산 ▷해독제 예산제도 ▷미래 종자 예산으로 집행되도록 하겠다. 2019년 대구시 연간 일반 예산은 약 6조원, 2017년 기준 1인당 지역내총생산은 약 54조원으로 11% 정도가 된다. 즉 대구시 예산은 지역경제에 지렛대 효과를 가진다. 같은 예산이라도 적소 적시에 투입해서 예산 낭비를 제거하고 지역산업에 최소 예산 최대 효과를 도모할 것이다.또한 위기 때 황금시간을 절대로 놓치지 않고자 특정산업에 직접 투입하는 '헬리콥터 기법'도 감행하겠다. 수요 이상의 과잉 개발, 필요 이상의 초과 투입, 과도한 고정비용 부담을 자초하는 사업, 모태산업과 불협화 국책사업 등은 사전에 방지하도록 해독제 예산제도도 도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 반대로 아무리 사소하고 어려운 산업이라도 미래 먹거리가 된다면 미래 종자 예산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마지막으로, 350m 도로를 개설하는 데 6년에 걸쳐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구시 예산 편성 실태이다. 우선순위를 정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완공해 시민 불편을 최소화해야 한다.또한 355억원을 들여 2008년 준공한 달성2차산업단지 소각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가동하지 않아 연간 관리비만 2억8천만원을 낭비하고 있다. 2천836억원을 들여 설립한 대구스타디움은 지나치게 과대 투자해 2018년 기준 연간 주경기장은 이용일수가 61일, 이용자수 15만 명에 불과한 실정으로 대구FC 전용구장인 DGB대구은행파크가 설립된 이후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하고 있다.이런 예산 낭비 사례를 교훈 삼아 대구시에서 다시는 시민들로부터 비난받는 시설물이 건설되지 않도록 견제 및 감시 역할을 철저히 하여 시민들이 꼭 필요로 하는 곳에 예산이 투입될 수 있도록 하겠다.

2019-10-31 11:21:36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매일춘추] 특별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가족에게는 매년 11월 1일이 무척이나 중요하고 특별한 날이었다. 그 날은 엄마의 생신이면서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심지어 살고 있는 집의 호수도 1101호여서 이 날은 부모님만의 기념일이 아닌 우리 가족 모두의 특별한 날이 되었다. 그래서 20년 가까이 이 집에서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매년 이 날이 되면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라고 말이다.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부모님은 엄마의 생신날에 맞춰서 결혼식을 올리셨을까? 결혼식은 주로 주말에 올리니까 그 해 11월 1일이 주말이라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그날 예식장을 대관할 수 있어야 식을 올릴 수 있으니 그날 대관이 가능한 예식장이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우연성을 더해 준다. 아파트의 호수는 또 어떻게 1101호로 맞춰졌을까? 기필코 1101호에 살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구하러 다니신 것도 아닐 터인데 신기하게도 구하게 된 집의 호수가 1101호였다니 정말 놀라운 우연이 아닌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날들과 아파트의 호수가 같은 숫자로 겹쳐지며 특별한 무언가가 되었다.사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런 일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생일이고 어느 부부에게나 있는 결혼기념일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고 그래서 11월 1일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 되었다. 남들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념일을 축하하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혹시나 이 날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우연이 발견된다면 우리 가족은 호들갑을 떨며 이 날을 더욱 특별한 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해도 뭐 어떤가? 그래서 이 날 우리 가족이 더 행복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우리는 매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힘들지 않다.어쩌면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우연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담아 특별한 일로 만드는 일. 특별한 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그 날과 관련된 것들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특별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정말로 어떤 특별한 부분이 있어서 다른 것들과는 차별되는 가치를 가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스스로 부여한 의미 때문에 특별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특별함이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유별나게 남들보다 잘해주신 것도 아니다. 하고픈 것을 다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이기에, 나의 부모님이기에 필자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의미를 다 갖다 붙여서라도 오늘을 더욱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다. 특별함은 우리의 간절한 마음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구지영 지오뮤직 대표, 작곡가

2019-10-31 11:07:05

김형준 명지대 교수

[춘추칼럼] 문재인 대통령 집권 2년 반의 치명적 한계  

무능'위선'무책임 드러낸 文정부 전반기 임기는 혼돈'분열의 연속대통령이라는 리더는 있었지만 국민 설득'야당 협치 리더십 없어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11월 10일)을 맞이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문재인 정부는 몇 가지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냈다.첫째, 무능이다. 문 대통령은 '비정규직 제로(0)'를 '대통령 1호 지시 사항'으로 추진하고 일자리 정부를 표방했다. 그동안 수십조원의 일자리 예산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일자리 참사가 벌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정규직 근로자 수는 전년 대비 35만3천 명 줄어든 반면 비정규직은 86만7천 명 증가했다.소득주도성장은 현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이다. "국민들의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투자가 늘어나면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경제가 성장한다. 소득 양극화는 덩달아 줄어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지난 8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소득 5분위 배율(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의 소득으로 나눈 값)은 5.3배로 2003년 이후 가장 악화됐다.한국은행은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이전 분기보다 0.4% 성장했다고 밝혔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경제성장률은 1%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 정부가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남북 협력 체제도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북한은 올해 한국을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했고, 문 대통령에 대해 '겁먹은 개' '삶은 소대가리'와 같은 입에 담기 힘든 막말로 비난했다. 심지어 북한은 금강산 내 '남측 시설 철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애써 외면하고 북한을 감싸면서 비겁하게 인내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부가 무능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둘째, 위선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민주당은 총 22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4대강 사업이 예비 타당성(예타) 조사 없이 진행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SOC 사업을 '토건 삽질'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 정권은 지난 1월 24조원 규모의 23개 국책사업의 예타를 무더기로 면제했다.2015년 9월 9일 당시 제1야당 새천년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는 "2016년 예산안에서 국가채무비율이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여겨 왔던 40%가 깨졌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지난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국가채무 40% 근거는 뭔가"라고 따졌다. 내로남불의 전형이다.셋째, 정부가 잘못한 일을 제도와 남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이다. 가령, 문 대통령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불법과 부정의 문제를 제도의 탓으로 돌리며 정시 확대를 주문했다. 조 전 장관 개인보다는 '합법적 제도 내 불공정'이 문제라는 인식이다.정부는 한국 경제가 추락하는 이유로 미중 무역 전쟁,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 등 대외 여건 악화와 언론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IMF가 전망한 우리나라 경제성장률(2.0%)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3.0%)보다 훨씬 낮고, 미국(2.4%)보다 뒤처진 것은 국내 경제정책의 실패가 더 큰 요인일 수 있다.문재인 정부 집권 2년 반은 그야말로 혼돈과 분열의 연속이었다. 대통령이라는 리더는 있었지만 국민을 설득하고 야당과 협치하는 리더십은 없었다. 문 대통령은 역대 실패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청와대가 모든 것을 처리하는 '만기친람'(萬機親覽)과 적기에 국민이 요구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하는 '만시지탄'(晩時之歎) 리더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문 대통령이 향후 무능과 위선, 무책임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고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서 중책을 맡겨야 한다. 진정 경제를 살리려면 확장 재정보다는 정책 기조를 바꾸어야 한다. 오기보다 겸손, 분열보다 통합, 힘에만 의존하는 통치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치중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혁신적 포용 국가→평화 경제→공정 사회 구축과 같이 수시로 국가 어젠다를 바꾸기보다는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과 역사로부터 평가받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김형준 명지대 교양대학 교수(정치학)

2019-10-31 10:22:11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새론새평] 대구경북 경제를 살리는 길

첨단 산업체 지역 유치 성공하면 인구 유입'복지 여건 개선 뒤따라생기 잃어가는 기존 기업 경쟁력 획기적으로 높이는 투자도 필요대구경북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자료 '대구경북 지역경제 성장요인'(연구2019-12)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2013~2017년 연평균 경제성장률과 2018년의 전년 대비 경제성장률 증가 폭을 기준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전국 16개 광역시 및 지방자치단체는 확연하게 두 지역으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한 지역(도약 지역이라 하자)은 연평균 경제성장률과 작년 대비 경제성장률 증가 폭이 모두 평균치보다 높은 광역시 지방자치단체로 되어 있고 다른 지역(낙후 지역)은 연평균 경제성장률과 2018년 경제성장률 증가 폭이 모두 평균치에 미달하는 광역시 지자체다. 도약 지역에 해당하는 광역시 및 지자체는 6곳으로 서울과 경기도, 인천, 충청남·북도, 제주도다. 나머지 광역시 지자체는 대구경북을 포함하여 모두 낙후 지역에 속한다. 특수성을 지닌 서울과 제주를 빼고 보면 도약 지역은 한반도의 군산-세종시-충주-원주-고성을 잇는 직선(군산-고성 라인)을 중심으로 왼편 위, 낙후 지역은 오른쪽 아래로 나누어진다. 굳이 국립공원으로 나누자면 치악산-월악산-속리산-계룡산 국립공원의 이북 서쪽에 도약 그룹이 있고, 그 이남 동쪽에 낙후 그룹이 소재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치악-월악-속리-계룡산 국립공원을 경제 마지노선으로 하여 한국의 경제지형은 발전하는 도약 지역과 낙후 지역으로 구분된다는 말이다.군산-고성 라인을 경계로 치악-월악-속리-계룡산 국립공원의 안쪽 지역이 바깥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이유는 수도권이 발전해온 이유와 꼭 같다. 지리적인 접근성과 교통 통신망과 의료문화 인프라와 인적자원과 금융자원이 모두 그 지역으로 집적되면서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수도권 과밀과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도 꾸준한 수도권 투자억제 정책을 펼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주, 평택, 천안, 화성, 청주, 충주 등 비교적 수도권과 가까운 지역에 대기업의 첨단 산업 투자가 집중되면서 군산-고성 라인 이북과 이남의 경제적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지난 1970년대와 80년대 대기업 투자가 지방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지역경제 균형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대기업의 투자가 군산-고성 라인 이북에 집중됨으로써 지역불균형 성장의 근원이 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대기업의 산업 투자가 수도권 중심으로 일어나도록 정부가 허용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고 생각된다. 지역균형발전의 관점에서 경기·인천 지역에 집중되었던 첨단 산업 투자를 좀 더 넓게 분산했더라면 지역경제의 심각한 단층화는 막을 수 있었다.정부가 2019년 1월에 발표한 4차 지역균형발전 5개년 계획은 그런 점에서 고무적이기는 하다. 2022년까지 총 175조원를 부어 지역주도형 자립성장기반을 만든다고 되어 있다. 51조원을 교육 문화 복지 여건 개선에 투입하고 66조원을 인구 유인책으로 지원하며 56조원을 지역 산업 활력 회복을 위해 지원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혁신도시 특화발전계획을 수립하여 대구경북지역의 경우 대구는 첨단의료융합 산업, 그리고 경북지역은 첨단자동차 산업을 특화 육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이 계획을 보면서 느끼는 개선점은 우선순위에서 인구 유인책이나 교육 문화 복지 여건 개선보다는 첨단 산업체를 지역에 들여오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된다. 만약 반도체 공장이나 최첨단 디스플레이 공장이 구미나 포항, 영천이나 경주에 들어섰다면 인구 유입이나 교육 문화 복지 여건 개선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닐까?대규모 사업체가 없는 상황에서 인구 유인책이나 교육 문화 복지 여건 개선 사업을 한들 무슨 큰 효과가 있겠는가. 돈을 들여 병원이나 학교, 어린이집을 지어 놓은들 일자리가 없고 사업체가 없는데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균형발전예산 175조원을 몽땅 털어서 신규 사업체 지역 유치에 투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사실 그 돈도 모자랄 것이다.또 한 가지는 신산업도 중요하지만 생기를 잃어가는 기존 기업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설비개조, 기술개발, 기업 간 융합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시름시름 앓고 있는 기존의 기업이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산업, 없는 기업의 혁신에 돈을 쏟아붓는 것은 과녁 없이 활을 쏘는 것과도 같다.

2019-10-30 19:05:17

가야명상연구원장·대구대학교 명예교수

[전영평의 귀촌한담] 한 끼 식사

텃밭 정구지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잘도 올라온다. 여기저기 심었더니 동네 나눠 먹고도 남는다. 보드라운 것으로 밑동까지 싹 잘라서 바구니에 담는다. 돌담 밑에 확 번진 미나리는 동네 할머니 작품이다. 삼 년 전 미나리 뿌리 자른 것을 가져다가 우리 집 담장 밑에 심어 준 덕분이다. 산골 미나리라서 향기가 그윽하다. 이것도 한줌 잘라서 소쿠리에 담는다. 늦가을 고추밭에서 빨간 고추, 푸른 고추 한 개씩을 딴다.오늘은 정구지 미나리 부침개를 만들어 먹을 거다. 부침가루를 물에 개고 정구지, 미나리, 고추를 설겅설겅 썰어 넣고 천일염을 손바닥으로 대충 부숴 소금 간을 한다. 돼지고기도 얇게 썰어 다져서 조금 넣어본다. 프라이팬을 달구고 기름 두르고 반죽 한 국자 부으니 부침개가 된다. 산골 부침개가 참으로 맛있다.'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정한 사랑은 없다'는 버나드쇼의 멘트가 쟁쟁하다. 귀촌인의 한 끼 식사가 참으로 번거롭다. 음식은커녕 설거지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귀촌을 하다 보니 밥하고 치우는 일이 참으로 어설프다. 아내의 일과를 우습게 알았던 과거를 반성하게 된다. 시골에 안 오겠다는 아내를 억지로 모셔올 수도 없으니 나 홀로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에 집 안팎 청소까지 다해야 한다. 한 끼 식사 제대로 먹고 치우려면 꼬박 두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일이 서툴다 보니 피곤함이 가중된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 먹는 밥이 식당 밥보다 맛있을 때가 많다.미인 소박은 있어도 음식 소박은 없다는 말에 혼자 웃는다. 한 끼 식사 해먹는 그 시간을 아껴 보았자 큰 소용도 없는 귀촌 생활이다. 이 나이에 도시에 살아봤자, 눈칫밥이나 먹고 차 한잔, 당구 한 게임 비용도 신경 써야 할 터이다. 소음, 먼지 걱정하면서 지인들 만나 골치 아픈 세상 얘기로 스트레스 받으면 화나고 무기력해질 것 같다. 물론 자기 위안을 받으려고 혼자 쓰는 각본이다. 나를 본다. 지금 내 귀촌 생활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2019-10-30 18:00:00

권미강 작가

[권미강의 생각의 숲] 상처와 치유

한 사내가 서 있다. 차가운 시멘트 벽 모서리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사내가 웃고 있다. 듬성듬성 흰머리가 나이를 가늠케 한다. 그 아래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간첩조작사건 고문 피해자들의 자기 회복을 위한 사진치유전' 포스터다. 사내의 이름은 '김태룡'. 전시를 준비한 임종진 작가의 SNS를 통해 처연하고도 착해 보이는 그의 웃음을 만났다."내가 이제야 말해 무엇해. 여기로 끌려와서 죽도록 맞고서 간첩이 돼버렸어." 이런 말들이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듯하다.'간첩'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옴짝해진 시절이 있었다. 얼굴이 아주 흉측한 표정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니 어림짐작한 간첩은 그랬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누구 하나 딱히 때리지도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간첩' 누명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다.이유도 모르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아무렇게나 짓밟히고 살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감내했다. 간첩 누명이 씌워진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권의 희생양으로 이용당했다. 정권이 바뀌고 간첩 혐의에서 풀려났지만 세상은 그들의 억울함을 기억하지 못했다.젊음도 가족도 친구도 사라져 버리고 흩어져 버려 그저 상처만 남은 그들에게 한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내밀었다. 국가 폭력에 노출된 그들에게 셔터를 눌러 자신들의 상처를 노출시키고 세상에게 기억시키라고, 그것이 상처를 다독이고 스스로 치유하는 길이라고 알려준다.상처를 마주해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작가는 무고하게 간첩단조작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몇 년째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길로 안내하고 있다. 또 다른 국가 폭력 피해자들에게도. 그들은 10월 31일 스스로 찍은 상처들을 고문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이 된 공간에서 전시한다. 이렇게 우리 현대사 또 하나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란다.

2019-10-30 18:00:00

김은아(그림책 칼럼니스트)

[북돋움] 이간질하는 사람, 이간질에 넘어가는 사람

옛날 어느 산골짜기에 하얀 물소, 검은 물소, 노란 물소가 살고 있었다. 색깔은 다르지만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하얀 물소가 친구들에게 세상 구경을 제안한다. 세 마리 물소는 모험길에서 만난 자칼 무리를 힘을 합쳐 물리친 후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한다.한참을 걸은 이들은 동물의 왕 사자가 다스리는 초원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머문다. 사자의 속내를 알지 못한 채. 물소들이 초원을 누비며 풀을 뜯는 사이 배가 고파진 사자는 혼자 세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 없었기에 검은 물소와 노란 물소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저기 있는 너희 친구가 너무 하얘서 걱정이야. 특히 밤에는 멀리서도 잘 보여 적들의 눈에 띌 거야. 저 물소 때문에 우리 모두가 위험해. 아무래도 하얀 물소를 없애야 할 것 같아." 검은 물소와 노란 물소가 외면한 사이 하얀 물소는 조용히 사라진다.어느새 또 배가 고파진 사자는 검은 물소를 조용히 부른다. 그러고는 여기 동물들이 노란 물소를 더 많이 칭찬한다는 말을 슬그머니 던진다. 심지어 노란 물소가 더 잘생기고 멋있으며, 검은색이 불행을 가져온다고 수군거린다는 얘기를 전한다. 물론 이간질을 위해 지어낸 말이다. 사자의 말에 검은 물소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그렇게 또 한 마리가 사자의 먹이가 되었다. 검은 물소는 때때로 친구들이 그리웠지만 혼자 사자 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검은 물소의 좋은 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검은 물소가 막 잠이 들려는데 목에서 사자의 입김이 느껴졌다. 검은 물소는 자신이 잡아먹힐 차례가 됐음을 알아차린다.살기 위해 도망치거나 목숨을 걸고 사자와 싸울 법도 한데 검은 물소는 순순히 목숨을 내어 준다. 자신이 너무 비겁했으며 하얀 물소가 잡아먹히던 날 그때 자신도 이미 죽은 것과 같다는 말을 남기며. 이야기는 세 마리 물소의 허망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우화 그림책 '사자와 세 마리 물소'(분홍고래)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세상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을 떠올려봤다. 삶의 터전, 희망, 아름다움, 회색빛, 암울함, 답답함, 한숨, 전쟁터. 사람들마다 그리는 풍경이 다르지만 이 책으로 상호작용한 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단어는 '정글'과 '씁쓸함'이다.밟지 않으면 밟히는 세상,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얕잡혀 보이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간질이라는 방법을 곧잘 사용한다. 이간질은 비열하긴 해도 돈과 시간이 적게 드는 효율적인(?) 무기임에 틀림없다.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을 화제로 올릴 때가 있다. 좋든, 나쁘든 남 얘기를 자주 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한다. 특히 험담은 더욱 강렬히 하는 것 같다. '힘이 되는 말, 독이 되는 말'(마일스톤)을 쓴 조셉 텔루슈킨은 우리가 남을 험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의 지위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심리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얻는 만족감이 엄청나다는 것이다.그런데 한참 남 얘기를 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이 역시 이간질의 또 다른 형태이겠지.' 어느 교수는 이간질이 한 사람의 인격적, 사회적 평판을 떨어뜨리는 야만적 행위라고 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뜨끔해진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야만적인 행위를 일삼았던가?살면서 누구나 이간질의 주체가 되거나, 피해자가 된 적이 있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양쪽 모두의 내면에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내 것을 잃을까 봐 두렵지만 남이 더 많이 갖는 것도 싫은 사람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는 만큼 눈빛도 흔들린다.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들수록 교활한 사자와 어리석은 물소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기는 상생의 미덕을 강조하지만 실현이 참 어렵다. 우화 그림책이 건네는 메시지가 유독 크게 다가오는 가을이다.

2019-10-30 18:00:00

자신의 서재에서 책을 찾고 있는 송일호 작가.

[기고] 죽어가는 독서 이대로 좋은가

한때 가을을 독서의 계절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고 할 만큼 책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았고,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한 창간 50주년을 맞이한 '샘터'가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쓸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1980년대 우후죽순같이 쏟아져 나온 정기간행물이 지금은 10분의 1도 남아 있지 않다.UN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독서량은 192개국 중 166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0분 이상 독서를 하는 사람은 10명 중 1명도 안 된다고 한다. 1년에 단 한 번도 서점에 들르지 않는 사람이 95%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독서는 완전히 죽었다.옛날과 달리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독서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세 살 꼬마부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스마트폰에 미쳐 있다. 스마트폰이 잠시라도 없으면 불안해할 정도로 중독되어 있다.독서와 국력은 너무나 정비례한다. 후진국 아프리카는 못사는 만큼 책을 읽지 않는다. 선진국 유럽이나 미국은 잘사는 만큼 책을 많이 읽는다. 우리나라도 도시인과 엘리트 직장인은 책을 많이 읽는다. 두 권 읽는 자가 한 권 읽는 자를 지배한다. 다양한 필독서를 읽지 않으면 평생 살아가는 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삶의 질은 보릿고개 때보다 훨씬 못하다. 물질문명은 나날이 발전했는데 정신문화는 뒤떨어졌기 때문이다.이것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밖에 없다. 이 때문에 '책은 최고의 스승, 마음의 양식,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다. 토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책이 없으면 역사는 침묵하고, 문학과 학문은 벙어리가 되고, 과학은 절름발이가 된다."2천 년 방랑 민족 이스라엘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은 '탈무드'란 책이다. 고등학교 졸업까지 1만 권 책 읽기가 의무로 되어 있는 나라이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강철왕 카네기가 전 재산을 바쳐 전국에 지어준 2천500개의 도서관이 큰 역할을 했다. 종교 탄압으로 영국에서 이민 온 청교도들에게 지식을 심어 주었기 때문에 오늘의 미국이 있다. 세계에서 도서관이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다.독서는 어릴 때부터 생활화·습관화되어야 평생 취미로 이어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5공 시절 정치적 목적으로 별을 보고 학교 가고 별을 보고 집에 오는 입시 위주 교육으로 독서의 길을 막았다. 이후 대학생은 취직 시험에, 직장인은 회사에 매달려 독서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나라 현실은 초등학교 때 독서의 기반을 잡아 놓아야 한다. 책을 많이 읽은 어린이는 어른과 대화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지적 수준을 쌓아 놓은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영상매체는 직선적이고 파괴적이고 쾌락적이다. 여기에 물들지 않게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각별한 지도가 필요하다.영상매체는 뇌파의 움직임이 거의 없지만 독서는 뇌파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은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독서는 지식을 심어주고, 기억력 사고력 집중력을 키워주고 인내심을 길러준다. 삶의 간접경험을 쌓게 하여 인생 진로를 열어준다. 입시나 취직에 도움을 주고 고민을 해결해준다. 교양을 쌓게 하고 재미가 있다. 독서 꼴찌 국가로 우리는 이것을 잃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19-10-30 1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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