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천경자(1924-2015), ‘생태(生態)’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채색, 51.5×87㎝,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종이에 채색, 51.5×87㎝,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다. 고흥보통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졸업 후 18세 때인 1941년 동경의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했다. 화가나 미술교사가 되려는 여성들을 위한 이 학교에서 배운 조선여성도 여럿 있었다. 나혜석이 1913년 입학해 서양화를 배웠고 일본화 전공으로 천경자의 2년 선배인 정온녀, 1년 선배 박래현이 있다. 천경자는 유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로 입선했고, 이듬해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老婦)'로 연이어 입선하며 일찍이 재능을 알렸다.

광복 후 23세 때인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 미술교사가 되었고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화가의 길을 갔다. 천경자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는 한국전쟁 중에도 화가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녀가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 개인전에 걸었던 '생태(生態)' 때문이었다. 이 뱀 그림은 산수나 인물 위주인 한국화 화단에 뱀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선보이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화제성으로 인해 많은 관객이 모여들어 마감시간이 되어도 전시장 문을 닫기 어려울 정도였다.

배경이 없는 막연한 공간에 35마리 뱀이 우글거리는 그림이다. 예로부터 새와 동물을 그리는 영모(翎毛), 꽃과 새를 그리는 화조(花鳥), 풀과 벌레를 그리는 초충(草蟲), 가축과 짐승을 그리는 축수(畜獸) 등의 분야가 있지만 뱀을 주인공으로 한 감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이 꺼리는 뱀을 소재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평범하지 않다. 천경자는 왜 초록색 독사를 그렸을까? 그녀의 수필을 보면 독사를 예쁜 허리띠인 줄 알고 집었다가 물려 죽은 어렸을 때 친구,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이라는 혈육을 잃은 고통, 실패한 첫 결혼과 애증이 교차하는 사랑하는 뱀띠 남자 등 불행한 개인사가 이 그림의 배경에 있다.

천경자는 "뱀을 그린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 징그러운 존재를 한 마리 한 마리 직시하며 그려 낸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맞서 이를 극복하려는 저항이었다. '생태'는 20대의 젊은 여성화가인 그녀가 인생을 정면 돌파하는 용기와 힘을 가졌음을 자신의 무기인 그림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천경자의 작가적 기질을 잘 증명한다. 여기에는 이 작품이 불러일으킬 세간의 구설을 감당할 배짱도 포함된다.

'생태'라는 제목은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태어남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며, 부여받은 조건들 안에서 타고난 모습대로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제는 존재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천경자 자화상의 주제 또한 그녀가 가장 잘 아는 대상인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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