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김윤겸(1711~1775) '해인사'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30.3×32.9㎝,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소장 종이에 담채, 30.3×32.9㎝,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소장

정양사를 그리면서 일만이천봉을 다 넣었던 스타일대로 정선은 '해인사'에 가야산과 홍류동을 다 담았으나 김윤겸의 '해인사'는 산사의 모습이 오롯해 절 생김새가 자세히 눈에 들어온다. 제일 위쪽 높은 축대 위에는 지금도 엄연한 팔만대장경 판전 두 채가 나란하고 그 아래 대적광전이 우람하다. 정선과 김윤겸의 그림 속 대적광전은 법보종찰 금당의 위용이 넉넉한 2층인데, 1817년 큰 불로 타버려 지금은 그 기단 위에 다시 지어진 단층 건물로 서있다. 그 앞 구광루도 지금은 맞배지붕의 일(一)자 건물인데 18세기에는 앞쪽으로 누마루를 달아낸 팔작지붕의 티(T)자형 누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규모 있는 정연한 가람 배치는 해탈문, 봉황문, 홍하문으로 이어진다.

일주문인 홍하문 왼쪽에 길쭉하게 그려진 것은 원표(元標) 석주(石柱)일 것이다. 지금의 원표는 광복 후 해인사 주지를 지내며 선원, 율원, 강원을 종합한 도량인 총림을 최초로 설치하여 수행 기풍을 진작하고, 일제가 파괴한 사명대사비를 새로 건립하는 등 해인사의 위상과 한국불교 회복에 큰 업적을 남긴 환경(幻鏡, 1887~1983)스님이 1929년 건립한 것이다. 이 원표 돌기둥에는 4각의 동서남북 방향으로 있는 합천, 김천, 진주, 대구까지 거리가 몇 리(里) 몇 정(町)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구 도로원표 표석은 경상감영공원 안에 있고, 우리나라 도로원표 표석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데 대구까지 306㎞, 독도까지 435㎞이다.

홍류동 골짜기 해인사에 이정표가 서 있는 것은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명대사 입적처인 해인사는 일제강점기 불교계 민족운동에 큰 역할을 한 곳이다. 환경스님은 해인사 여러 스님들과 함께 민족정신을 유포한다는 혐의로 1929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만해스님이 잠시 머물며 강론하여 많은 스님들이 영향을 받았고, 극락암은 용성스님이 출가한 곳으로 지금도 용탑선원으로 가풍이 이어지고 있다.

김윤겸은 붉은 기둥을 윤곽선 삼아 크고 작은 당우(堂宇)를 심플하게 그렸는데 일주문은 붉은 색을 가장 짙게, 대적광전은 붉은 색을 가장 넓게 해서 시선의 강약 리듬을 안배했다. 절 좌우 능선의 숲은 녹청색의 동글동글한 덩어리들을 칠해 놓고 각양각색의 점을 찍어 나무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나타냈다. 화보의 점법(點法)을 다 소화한 후에 나온 발랄하고 즉흥적인 점들이 상쾌하다. '해인사'는 김윤겸이 진주에서 함안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소촌역 찰방으로 근무하러 왔을 때 경상도 실경을 그린 '영남기행화첩' 14점 중 한 점이다. '해인사'로 장소 이름을 쓰고 호인 '진재'(眞宰) 인장을 찍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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