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만세 행진에 ‘까꾸리로 찍고 철봉으로 쑤시고’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3월 1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3월 1일 자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새장(현 덕산염매시장 부근)날을 기해 군중의 집단적 제2차 만세 소동이 있었을 때는 일본소방서원까지 출동해서 소방용 까꾸리로 무참하게 허리를 찍는다. 철봉으로 넘어진 자의 안면을 쑤신다 해서 오히려 큰장보다 제2차 새장 만세 소동에는 상당한 희생자가 난 것이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3월 1일 자)

사람들을 해칠 듯 앞발굽을 들 때마다 버적버적 소름이 끼쳤다. 말 등에는 무장 군인이 타고 있었다. 서문시장에서 종로를 돌아 나오는 길에서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바로 일제의 기마 헌병대였다. 헌병들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할 목적으로 말발굽을 치켜들며 위협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때마다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지라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만세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일제는 대구에 주둔 중인 군대와 경찰을 투입해 폭력으로 진압했다. 새장날 만세 시위 때는 소방서 직원까지 동원했다. 소방용 까꾸리(갈퀴)로 시위대를 찌르며 무참하게 폭력을 자행했다. 게다가 철봉(쇠몽둥이)까지 진압 무기로 활용했다. 넘어진 시위 참가자의 안면을 쇠몽둥이로 때리고 쑤시는 등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새장은 덕산정 시장의 다른 이름으로 예전의 남문시장이었다.

1919년 3월 8일은 맑고 따듯한 봄 날씨였다. 이날 대구의 큰 시장인 서문시장은 장날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중에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자주독립의 만세 운동을 벌이려 모여든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월 첫날에 시작된 독립운동의 불꽃이 대구로 전해진 터였다. 이날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종교단체와 남녀학생들은 비밀리에 소통하며 준비를 해왔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서문시장에는 사람들이 더욱 불어났다. 신명학교, 계성중에 다니는 학생 100여 명도 두루마기를 입고 모여들었다. 품속에는 고이 접은 태극기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는 이미 도착해있어야 할 대구고보(경북중)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선언문 낭독과 시가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 있던 누군가(이만집 목사 등)가 차체 위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절반이나 읽어 내려갔을까. 일제 경찰이 들이닥쳤다. 선언문 낭독자를 무지막지하게 끌어내렸다. 돌발적인 상황에 잠시 움찔했던 만세 운동 시위자들은 곧바로 흥분했다. 치솟는 혈기를 감당치 못한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경찰에 달려들었다. 이들의 예상치 못한 저항에 놀라 일본 경찰은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늦게 도착한 고보생들이 합류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전단을 뿌리고 행진을 시작했다. 어느새 만세 소리는 온 거리를 뒤덮었다. 이 광경에 놀란 것은 일제 경찰만이 아니었다. 부근 건물에서 광목을 파는 중국 상인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급히 점포 문을 닫고 몸을 피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이렇듯 만세운동의 열기는 순식간에 대구를 달구기 시작했다.

첫머리에 인용한 남선경제신문 기사는 당시 학생으로 대구 만세 운동에 참가했던 독자의 회상기다. 그때는 덮어놓고 목이 메도록 만세만 부르면 독립이 되는 줄 알았단다. 독립만 되면 누구나 배부른 세상이 되는 줄 알았다는 해방 직후 민초들 이야기와 오버랩 된다. 올해는 3‧1운동 102주년이다.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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