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산책] 가을 아침 거울을 보고(秋朝覽鏡·추조람경)-설직

지는 잎에 나그네 맘 화들짝 놀라 客心驚落木(객심경락목)

밤에 앉아 가을바람 소리를 듣네 夜坐聽秋風(야좌청추풍)

아침에 거울 속의 내 모습 보니 朝日看容鬢(조일간용빈)

내 한평생 거울 속에 다 들어 있군 生涯在鏡中(생애재경중)

가을은 큰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불쑥 들이닥친다. 겨울 불이 지나간 자리에 풀잎들이 뾰족뾰족 돋아나더니, 맨발로 뛰어나온 온갖 꽃들이 한바탕 벅구통 광란의 축제를 벌이더니, 꽃 진 자리에 신록이 우지끈 다 들고 일어나더니, 이 넓은 천지에 나뭇잎 하나가 시나브로 휘청 떨어지더니,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가을이 난데없이 불쑥 닥치는 것이다.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정말 난데없이 불쑥 말이다.

당(唐)나라 초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에다 화가와 시인까지 겸했던 설직(薛稷·649~713)도 어느 날 문득 휘청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해놓은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나그네로 정처 없이 떠도는 동안 벌써 가을이 왔단 말인가? 그는 밤이 깊도록 혼자 앉아서 쓸쓸한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 세월이 지나가는 회한(悔恨)을 담고 있는 바람 소리에 아마 만감(萬感)이 교차했을 터. 문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날 밤 술이라도 흠뻑 마시면서 회포에 젖었을 것 같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에, 무심코 거울을 쳐다보던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 푸르던 젊은이는 도대체 어디 가고, 주름살 투성이의 웬 낯선 늙은이 하나가 흰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거울 속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 누구시죠?" 하고 하마터면 물어볼 뻔했는데, 다시 보니 자신의 얼굴이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우여곡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울 속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생 잘못 살았다 싶어서 슬그머니 후회가 되기도 했을 게다.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한 말이다. 내 나이 어언 예순일곱,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얼굴에 도무지 책임을 질 수가 없다. 그동안 잘못 살아왔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역력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마을 뒷산의 오솔길을 걷다가, 어린 고라니를 한 마리 만났다. 고라니는 입에다 풀을 문 채로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갑자기 화닥닥 다급하게 유턴을 하여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내 이마에 깊이 각인된 글씨를 그 사이에 읽었던 게 분명하다. "나쁜 놈!"이라는 주홍글씨 말이다. 어찌 숨길 수가 있겠는가? 마을 뒷산 고라니도 다 알고 있는 것을!

이종문 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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