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작아지는 일본

이성환 계명학교 교수(일본학전공, 국경연구소장)

이성환 계명학교 교수(일본학전공, 국경연구소장) 이성환 계명학교 교수(일본학전공, 국경연구소장)

1868년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근대 아시아에서 획기적 사건이다. 그 후 일본은 중국을 대신해 아시아의 맹주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일본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세계 최고의 일본(Japan as No.1)이 글로벌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기관차론(Japanese locomotive theory)이 등장한다. 한때 ODA(공적개발원조)가 미국을 능가했고, 일본의 세기(Pax-Nipponica)를 예측하는 호사가들의 시나리오도 회자되었다. 한일 관계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여기까지였다. 199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지고, 정치도 혼란을 거듭했다. 잃어버린 20, 30년의 시작이다.

2010년은 일본에게는 위기와 굴욕의 순간이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자리를 중국에 내주었다. 이를 상징하듯, 같은 해 9월 조어도(센카쿠) 부근에서 중국 어선이 일본 순시선을 들이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중국 선장을 구금하자 중국은 전자제품의 핵심 원료인 희토류 수출을 제한했다. 일본 정부는 곧바로 중국 선장을 석방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G2 반열에 오른 중국에 일본이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을 재개하고 전세기로 선장을 데려왔다.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일본은 경제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 ODA를 비롯해 중국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이를 발판으로 중국은 급성장했고, 일본에 부메랑이 되었다. 충격이었다.

10년의 시차를 두고 꼭 같은 일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작년 말 일본에서 '이제 일본은 후진국'이라는 책이 화제를 불렀다. '일본은 가까운 장래에 1인당 GDP(국내총생산)에서 한국에 추월당할 것이다'는 경고였다. 몇 년 전부터 IMF와 세계은행 등도 머지않아 한일 관계가 역전될 것이라는 예측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세계적 투자가 짐 로저스는 2018년 일본 관련 주식을 전부 팔았다. 2019년에 펴낸 일련의 저서에서는 '망하는 일본 흥하는 한국'을 설파했다.

지난 1일로 일본이 한국에 수출규제를 한 지 꼭 1년이다. 강제 동원 문제가 원인이었으나 풀릴 기미가 없다. 수출규제로 한국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다는 예상은 빗나가, 외려 일본이 손실을 입었다는 평가다. 한일 관계 악화로 양국이 입은 피해는 강제 동원에 대한 배상액보다 훨씬 크다. 1차 공격의 패배를 만회하려는 듯, 일본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한국의 G7 참가,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의 WTO 사무총장 출마 등에 사사건건 반대하며 한국을 옥죄려 한다. 2차 보복 조치도 예고하고 있다. 수출규제로 인한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추가 공격을 하겠다는 것은 일본의 한국 정책이 경제적 손익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강제 동원 문제가 해결되어도, 아베 정권이 바뀌어도, 관계 호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예견한다(다소 변화는 있겠지만).

일본은 왜 이토록 한국에 대해 안달일까? 최근의 한일 관계는 미중 관계와 무척 닮았다. 남중국해 문제, 무역, 과학기술, 코로나 문제 등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공격한다. 왜일까. 패권 불안이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이 더 크기 전에, 성장을 늦추거나 저지하려 한다. 중국이 타고 오르는 사다리를 걷어차야 하는 것이다. 일본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금 아시아에는 근대 이후 일본 중심으로 형성된 역학관계에 근본적 변화가 일고 있다. 아편전쟁 이후 약 200년 만의 질서 재편이다. 일본은 아시아 패권국의 지위 상실을 용인하지 못한다. 마지막 자존심일까. 한국에 대한 옹졸한 대응은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초조감의 표출이라는 분석이다. 그럴수록 일본은 작아진다(아베 총리의 코로나 마스크처럼). 오히려 한국이 여유가 있다.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관용을 낳는 걸까. 반일 구호보다 소리 없는 불매운동이 그들을 더 불안하게 한다. 이제 한일 관계는 자기 주장에 자존심을 걸고 논의할 단계는 지났다. 어떠한 틀(framework)에서 문제를 해결할지, 관계 악화로 인한 손실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인식 재고에서 출발해야 한다.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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