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세상 읽기] 골목길 연가(戀歌)

지산 아파트 단지 조성 도로 녹지 공간 조성. 매일신문 DB 지산 아파트 단지 조성 도로 녹지 공간 조성. 매일신문 DB

어딜 가나 공사중이다. 주택들이 뭉개지고, 저층 아파트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대형 가림막이 둘러쳐지고 굴착기 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얼마 뒤면 불쑥 30, 40층짜리 아파트들이 솟아있다. 동네가 통째로 후딱 바뀐다.

차를 타고가다 보면 "아니, 저 아파트는 언제 생겼노?" 탄성 아닌 탄성이 터져 나온다. 수국(水菊)이 한창이라는 한 카페를 찾아 나선 며칠 전도 그랬다. 두어해 전만 해도 차량들만 오가는 한적한 길이었는데 처음 보는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신기루를 보는 듯 했다.

지난 해 초봄, 초등생 조카와 케이블카를 타고 앞산전망대에 올랐다. 밤이면 캄캄한 앞산에서 하얗게 빛나는 그것의 실체가 궁금해서였다. 거기선 시내가 한 눈에 보였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파트 군락. 사방 어디랄 것 없이 회색 콘크리트군(群)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주택들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

앞산에서 본 대구시 야경. 대구시 제공(박성원 씨 사진) 앞산에서 본 대구시 야경. 대구시 제공(박성원 씨 사진)

두 아이와 함께 대만(臺灣)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서울을 거쳐 대구에 처음 왔다는 부부는 시내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살짝 민망했다. 하필 그 날따라 분지의 도시는 매캐한 미세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기괴할 만큼 많은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을뿐 별 특색없는 도시의 전경이 그들 눈에 어떻게 비쳐질까 싶었다.

노후 아파트들이 늘어나면서 앞으로 고층 아파트 재건축이 봇물을 이룰 터이다. 요즘같은 추세라면 지금 남아있는 주택가들도 언젠가 아파트단지로 바뀌지 않을까. 20세기의 80년대초만 해도 지산·범물쪽은 한촌(閑村)이나 별다를 바 없었다. 지금에사 큰 도로들이 뚫려 있지만 그때만 해도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다시피 했다. 그속에 점점이 토박이집들이 있었고, 전답들이 있었다. 20번 시내버스가 다문다문 오갔다. 법이산 자락 쪽에는 저층 아파트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적하던 마을은 90년대 들어 아파트 대단지로 급변신했다. 자연부락의 정취도 삽시간에 사라졌다. 비단 이곳만일까.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우리나라 전역에서 매일같이 경쟁하듯 아파트가 솟아오를 것이다. 좁은 국토라는 한계 탓에 어쩔 수 없다지만 아쉬움은 있다. 안타까운 것 중 하나가 급속히 사라지는 골목길이다. 집들 사이로 이어지는 조붓한 골목길!

지산동에는 아파트 단지 한켠에 아직 개인주택들이 좀 남아있다. 산책삼아 가끔 그곳 골목길을 걷는다. 구불구불한데다 샛길도 많다. 차가 못 다니는 좁은 길, 막다른 길도 있어서 '멍 때리며' 걷다간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그래도 이방인처럼 헤매며 골목길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 날 동네 골목은 늘 아이들 차지였다. 여자애들은 땅바닥에 네모난 칸을 긋고 납작한 돌멩이를 한쪽발로 차서 칸 안에 밀어넣는 '올캐바닥' 놀이 , 노래 부르며 노는 고무줄 놀이, 작은 돌멩이 다섯 개를 손으로 갖고 노는 공기놀이 따위를 했다. 머스마들은 주로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했다. 여자애들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악동들도 있었다. 해질 무렵, 담 너머로 구수한 밥내가 퍼질 때면 엄마들의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골목길을 채우곤 했다. 땀 빨빨 흘리며 뛰어놀던 아이들도 어느샌가 뿔뿔이 흩어져 갔고…. 요즘의 도시 골목길에선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진밭골 진밭못 주변 모습. 매일신문 DB 진밭골 진밭못 주변 모습. 매일신문 DB

시골 골목길들은 아직 괜찮으려나…. 예전 시골에는 집마당 외에 대문 바깥에 또 마당이 있기도 했다. 외가 마을의 '배꾸마당'(배꼽마당)에서 누런 콧물을 흘리며 뛰놀다가 땟국물로 빤질빤질해진 소맷부리에 콧물을 쓰윽 닦고 야트막한 흙담에 기대 햇볕 쬐노라면 겨울도 그리 춥진 않았다. 그 배꼽마당을 끼고 긴 골목이 있었다. 늦봄의 감꽃부터 시작해 계절따라 풋감이며 홍시가 떨어져 있곤 했다. 이제 외가는 거기 없지만 추억여행 삼아 연전에 찾아가 보았다. 한데 마을은 놀랄만큼 볼품없어졌고, 가끔 생각나던 긴 골목길도 추레한 몰골로 변모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전경옥·언론인 전경옥·언론인

지산·범물에서 30여 년 살고 있으니 스스로 원주민이라 여긴다. 가끔 흑백 스틸사진 같은 잔영들을 재생해 본다. 진밭골 산자락 초입까지 이어지던 옛길과 지붕 낮은 집들, 20번 버스 정류장 옆의 당근밭, 여름밤이면 온 천지에 왁실왁실하던 개구리떼의 합창…. 점령군마냥 쳐들어온 아파트군(群)에 떠밀려 연무(煙霧) 흩어지듯 사라져 버린 풍경들이다.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몇 그루 노거수(老巨樹)들이나 그 시절을 기억하려나.

골목길이 사라지는 시대! 생전의 김현식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부르던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이 오늘따라 이명(耳鳴)처럼 계속 들린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전경옥·언론인

관련기사

AD

오피니언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