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정확하고 명료했던 이용수 할머니의 진짜 언어였다

윤 당선인 용서할 수 없다면서도 30년간 함께해 온 정대협, 정의연 성과는 인정
개인 피해 경험에 머물지 않고 청년 세대가 함께하자는 미래 지향적인 대안까지
기자회견문 보지 않고 정면 응시, 이따금씩 눈물 보이기도… 숙연해진 기자회견장

정의연의 불투명한 회계 의혹을 제기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2차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정의연의 불투명한 회계 의혹을 제기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2차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변선진 사회부 기자
변선진 사회부 기자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열악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 건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등에 대한 할머니의 폭로 이후였다. 정의연 전 이사장이었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당선인이 현금으로만 다섯 채의 주택을 구입했다는 의혹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죄송스러워지는 감정은 이 대목에서 더욱 짙어졌다. 정의연에 대한 각종 의혹의 불씨를 지핀 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입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의연의 다른 관계자가 아닌 정의연이 보호하겠다며 나섰던 할머니였다는 것이었다.

수십 년간 위안부 관련 단체에 시민 기부금이며, 정부 보조금이며, 기업 후원금이 쏟아졌을 터였다. 적어도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만큼은 안락한 곳에 계시는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사실은 권력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기생하고 있던 사람들의 존재였다. 한편의 비즈니스를 보는 것만 같았다. '돈을 벌기 위해선 한국과 일본은 절대 화해해서는 안 되고' '이 사업에 대해 비판하는 할머니들은 제외시키고'….

지난 11일 정의연은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지원만을 위한 단체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적어도 피해자 지원이 1순위여야만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26일 1명이 별세해 현재 17명만 생존해 있다. 대부분 90세가 넘는 고령이다. 10년만 지나도 생존자는 확 줄어든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을 모아 할머니들에게 주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최근 2년간 기부금 9억여원 중 4천700만원(전체 기부금의 약 5%)만 피해자 지원에 쓰였다고 한다. 25일 기자회견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내가 배가 고픈데 맛있는 걸 사달라 했더니 돈이 없다더라"던 말이 억지 주장으로만 들리지 않은 이유였다.

기자회견에서 이 할머니의 발언은 정확하고 명료했다. 기자회견문을 보지도 않고 정면을 지그시 응시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노인'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기억은 잊히지 않지만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만 했다.

이 할머니의 기자회견은 한풀이용이 아니었다. 충분히 소통하려 했음을 대중 앞에서 밝혔다. 할머니는 지난 3월 윤 당선인에게 "(국회의원 출마 등에 대해) 이러면 안 되지 않느냐. 기자회견을 하겠다"며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윤미향 당선인은 당당하게 "하라" 했다고 한다. 지난 30년간 있었던 일을 폭로하게 된 배경이다.

1차 기자회견 이후 일부 언론에서 '이 할머니가 윤 당선인을 용서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 할머니는 자신의 진의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아 속상했다고도 했다. 2차 기자회견 서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써달라며 큰 장소로 옮긴 이유였다.

할머니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윤 당선인과 정의연에 대해 추가로 의혹을 폭로하지 않았다. 이제껏 불거진 의혹을 푸는 건 검찰 몫으로 넘겼다. 다만 윤미향 당선인이 와서 폭로에 해명해주길 바랐다. 기자회견장에서 윤 당선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기자회견을 이어가던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 당사자를 청년 세대로 확장시켰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6·25전쟁 당시 가족의 학살, 정의연 사태 등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음에도 개인의 피해 경험에만 머물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정부가 주도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넘어 한일 양국 청년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과거 역사를 바로잡자는 '정확하고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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