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목의 아침놀] 눈을 보지 말고 눈물을 보라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인간은 '눈'이 아니라 '눈물' 때문에 위대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지구적 존재'라 하지만, 나는 '눈물의 존재'로 바꾸고 싶다.

인간의 눈은 마그리트가 그린 '가짜 거울'이 잘 말해준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스스로 '신의 눈'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만든 과학기술은 인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이자 또 다른 노예이다. 눈의 본질은 보는 것(분별-심판-단죄-폭력-지배)이 아니라 눈물(동정-배려-용서-포용-참회)에 있다.

다니엘 다 볼테라의 그림 '십자가 아래의 여인'이 생각난다.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한 예수의 죽음을 통곡하며, 쏟아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감싼 여인. 이 모습이 인간들의 '조건'이거나 '자화상'이 되면 어떨까. 관자재(觀自在)의 '이성-지혜'도 좋으나 관세음(觀世音)의 '구원-자비'에 더욱 관심이 간다. "성경"의 루가복음에 근거하여 그린 램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균형 잡힌 희망을 제시한다.

근현대사에서 우리의 정치는 투쟁이고 상처였기에 더더욱 그렇다. 서로가 가해자였고 동시에 피해자였던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논해야 할까. 머리카락은 빠지고 옷도 신발도 다 해진 작은아들의 등에 얹은 아버지의 두 손을 보자. 왼손은 억센-강한 남자의 손이고, 오른손은 여린-부드러운 여자의 손이다. 왼손은 모든 시련을 해결해 줄 아버지의 강한 능력의 손이고, 오른손은 자식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사랑의 손이다. 양 극단화된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점은 돌아온 탕자를 따사롭게 감싸 안고 용서해주는 도량이리라.

눈물은 감정의 시편(詩篇)이자 능동적 관계성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처럼,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자락엔 늘 대롱대롱 눈물이 맺혀 있다. 어떤 눈물이든 이성-논리의 문맥에서 일탈한-도망친 자아의 그림자이다. 뭐라고 말 못할 복잡한 감정은 '눈가'에서 서성댄다. "꽃을 보지 마라! 꽃이 너즐브레 떨어진 저 꽃자리를 보라!"는 말에 나는 동감한다. 눈가의 주름과 눈물을 살피는,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사회는 이미 마비된 신체와 같다. 이성-논리로 무장한 투쟁의 정치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에 대해 차릴 기본 예의란 없다.

물론 눈물에도 진위(眞僞)와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황하의 넘실대는 물결 앞에 서서, "아름답다, 강물이여. 저렇게 출렁대는구나! 내가 이 강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다!"라며,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서서 탄식하던 공자의 체념 어린 눈물도 있다. 중국 고대에 창힐(蒼頡)이 문자를 만들자, 혹여 그런 말단허위에 골몰해 굶주릴까봐 밤새 슬피 울었다는 자애로운 귀신의 눈물도 있다.

그뿐인가. 로마를 떠나 밀라노에 와서 살 때 집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 꿇어앉아 과거를 반성하며 펑펑 쏟아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에 빠진 눈물도 있다. 아니,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피고름 나는 눈물은 민생고에 지친 서민들의 한숨소리 아닐까. 민주(民主)는 민생(民生)이 핵심이다. 나머지는 허울이다.

동양의 전통에서 보면 통치자들이 반드시 보살펴야 할 사회적 약자들이 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이다. '환'은 홀아비, '과'는 홀어미, '고'는 어려서 부모 잃은 아이(고아), '독'은 자식 없는 독거노인을 말한다. 모두 천하에 의지할 데 없는 빈곤층이다. 환과고독-네 글자 가운데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환' 자인데, 물고기 어(魚) 변에 '눈(目)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의 글자가 붙어 있다. '환'은 전설상의 큰 물고기 환어(鰥魚)이다. 요놈은 늘 혼자 돌아다니는데 근심이 많아 밤잠을 못 이룬다. 요즘 경제침체로 시름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닮았다. '눈물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뜻의 '회'(懷) 자가 자꾸 눈에 어른댄다.

부디 우리 정치여, '밥 한 그릇 따숩게 먹고파하는(食一碗)' 서민들의 눈물과 주름을 살펴라! '일자리'에서 '살 자리' 찾기로 몰입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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