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선의 디자인, 가치를 말하다] 디자인, 참 운이 좋다

김태선 경일대 디자인학부 부교수 김태선 경일대 디자인학부 부교수

올해는 어떤 운이 있나? 누군가에게 새해는 신년 운세를 따져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운세가 꼭 맞아서가 아니라 잘 준비하기 위한 바람일 것이다. 같은 바람에서, 나의 새해는 새 다이어리의 준비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 해는 열흘 늦게 시작되었다. 2020년이 시작되고도 열흘이나 지나서 다이어리를 샀기 때문이다. 2020년도 열흘만큼 익숙해졌지만, 포장에서 다이어리를 꺼내는 순간 나는 가슴속에서 묘한 설렘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새 거라서? 처음 쓰는 브랜드라서? 아니면 디자인이 맘에 들어서? 사실 나는 매년 새 다이어리를 처음 꺼낼 때마다 비슷한 경험을 한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경험과 비슷한 체험도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경험은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 또는 거기서 얻은 지식이나 기능'이며, 체험은 '자기가 몸소 겪음, 또는 그런 경험'으로 정의된다. 사전적 정의에서 차이를 읽어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심지어 영어에선 모두 'Experience'로 번역된다. 하지만 독일어에도 이 두 단어는 존재하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체험'(Erlebnis)은 '원자화되고 불연속적인 일련의 순간'이며, '경험'(Erfahrung)은 '의식조차 되지 않는 자료들이 축적되어 하나로 합쳐지는 기억의 산물'이다. 즉 체험이 일상에서 겪어내는 수많은 순간의 자극이라면, 경험은 그런 체험들이 응축된 산물로, 내면화 과정을 거쳐 주관적으로 기억되는 내용이다.

'경험'은 디자인에서도 중요 이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 하면 '예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경험이 상품의 핵심 가치로 인식되면서, 디자인은 '차별적인 경험'의 창출을 위한 포괄적인 활동으로 변화했다. 그래서 디자인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시각 요소나 브랜드 이미지를, 또는 프로세스를, 혹은 이 모두를 활용해 경험을 창출한다.

디자인은 사물의 외면을 다루는 스타일의 디자인에서, 디자인적 사고 과정을 통한 문제 해결의 디자인으로 외면을 확장, 진화하고 있다. 이제 디자인의 대상은 유형적 제품, 시설 환경은 물론 무형적 서비스와 정책을 포함한다. 우리는 매일 제품·서비스의 구매·사용자로서, 그리고 정책의 수요자로서 수많은 디자인을 체험하고, 무의지적으로 동반된 체험의 파편들이 수렴된 디자인 경험을 소유한다.

내가 겪어낸 하루, 한 해가 모여 내 삶이 되는 것이면 제품과 서비스 그리고 정책 등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의 내용이 내 삶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디자인 영역이 확장됨은 삶에 대한 영향력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경험 창출의 도구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의 디자인' '디자인에 대한 디자인'이라는 성찰적 차원의 디자인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지금의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보는 메타인지적 디자인은 결국 '가치'의 문제이다. 디자인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디자인은 무엇을 향한 '진정성'을 담아야 하는가. '디자인 가치에 대한 논의'는 순간의 관계들을 더 특별하게 인지시켜, 미래를 열어가야 할 이 시대에 요구되는 디자인의 방향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게 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라고, 참 운이 좋게도 말이다. 김태선 경일대 디자인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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