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 이정환 시조선집, 고요아침, 2019

빚과 빛

노을 품에 그윽하던 해가 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어둠의 손아귀에 놓인다. 천지를 지배한 어둠의 옷자락을 뚫고 빛들이 피어난다. 어두울수록 싱싱하게 살아나는 빛은 업고 안고 뒹굴어도 가벼워서 좋다. 오타로 빛이 빚이 되어도 마음 무겁다. 가로등 아래 엎드려 은행잎들 땅을 깊고 있다. 정처 잃은 잎들은 처량하지만 뼈대가 다 드러나도 은행나무는 부채를 해결한 듯 평온하다. 뿌리의 힘으로 나무들이 몸시(詩)를 쓰는 만추(晩秋)다.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는 이정환 시조선집이다. 이 책은 이정환 시인의 40여 년 시조 일대기를 함축해 보여준다. 발표순으로 100편의 시조가 5부로 나뉘어 실렸다. 책의 제목은 한 줄 시조로 시인의 자서 전문이다. 짧지만 기나긴 문장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많은 시조집과 동시조집, 시조비평집을 집필했고, 다수의 시조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의 '삶'이 곧 '시조'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이력이다.

아껴 먹는 음식처럼 음미하며 거듭해서 읽고, 더러는 생각나는 시만 찾아 읽기도 했다. 첫 번째 시 '어느 날 저녁의 시'에서부터 마지막 쪽 '톱클래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주제가 주는 감동과 즐거움이 있었다. '자신의 미친 언어와 승부'하는 시인의 성정(性情)도 느낄 수 있다. '삶이 둥글어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 때로는 뚫려야 함을 너는 말하고 있다 // 세상을 / 줄줄이 꿰어 / 흔들어 보겠느냐' -70쪽 '상평통보' 전문-

'에워쌌으니 아아 그대 나를 에워쌌으니 향기로워라 온 세상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온 누리 향기로워라 나 그대 에워쌌으니 –46쪽 '에워쌌으니' 전문 뜨거운 사랑이 흐른다. 오로지 시조만 생각하며 세상을 바라보니 시인과 눈을 맞추는 것들 기어코 시에 미친(及)다. 미치지 않고서야 천(千) 수가 넘는 시조를 어떻게 쓸 수 있었으랴. 시인에게 시는 '마지막까지 남을 버팀목'인 듯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헌사' 중에서-

유모차/ 천천히 밀며/ 길을 가는/ 할머니// 기울어진 몸이 점점 땅에 가까워져서// 종내는/ 저 언덕에 기대어/ 흙이 되어/ 갈 것이다// -91쪽 '예각에 대하여' 전문-

요즘은 유모차가 지팡이도 되고, 발도 되고, 몸 불편한 사람 균형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유모차 끌고 다니는 어르신들이 많다. 굽은 허리로 유모차 끌고 가지만 한 번 굽은 허리는 펴지지 않고 끝내는 자신들이 들어가 누울 땅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이다.

안영수 작 '야경' 안영수 작 '야경'

부끄럽게도 남루한 삶에 붙들려 미칠 수 없는 필자는 빚쟁이다. 갚지 못한 책(冊) 빚이 너무 많다. 이 책도 그렇다. 시인을 아는 친구 덕에 덥석 받아놓고는 웅크린 마음이 빚이라는 동굴에 갇혀서 감사 인사도 못했다. 빚으로 얻은 책은 볼 때마다 묵직한 채무를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시들은 깊은 눈빛으로 마음을 쓰다듬었다. 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을 시인은 한 송이씩 붉게 꽃피워 놓았다. 빚을 빛으로 꿈꾸게 한다.

'올곧게 사는 것만 사는 일 아니다 // 반기와 / 반항과 / 반란과 / 반역을 // 꿈꾸지 않는 이에게 어둠은 몰려든다 –128쪽 '생의 반역' 1연-

강여울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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