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스토리] 원로화백 최병소

"그림 잘 그린다고 작가 아냐…자신만의 예술세계 찾는 게 중요"

최 화백은 최 화백은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소(75) 화백은 캔버스와 물감 대신 신문지와 볼펜, 연필로 작업한다. 신문지를 정교하게 접은 뒤 그 위에 볼펜과 연필로 수천, 수만 번 선을 그어 완성한다. 얼핏 얇은 철판처럼 보인다. 검은색 광목 같은 느낌도 난다. 찢겨 나간 곳도 있고 마치 타버린 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철판이나 광목 같은 물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늘거리면서도 결이 살아 있는 모습은 종이가 틀림없다. 최 화백은 이런 작업을 40여 년이나 했다. 지금도 하고 있다. 대구 북구 산격동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구현대미술제 창립 멤버로 활동

최 화백은 194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한 살 때 충남 논산 신도안(현재 계룡시)으로 이사했다. 6·25전쟁 때 서울로 피란 갔다가 돌아와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신문지로 인쇄된 교과서로 공부했다. "6·25전쟁으로 모든 생산시설이 초토화됐고 인쇄소와 제본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과서는 유네스코가 지원한 신문 용지에 인쇄한 것이었다"고 했다. '신문지 교과서'의 너덜너덜한 모습은 그의 기억에 새겨졌고, 1970년대에 신문을 지우는 행위로 나타났다. 최 화백은 초교 6학년 때 대구로 이사 왔다. 다른 분야에 비해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최 화백은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미대에 진학했다. 교수의 교수법이 맘에 들지 않았다. 미술은 혼자서 해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로 돌아왔다. 당시 대구는 고 박현기, 이강소, 김기동 등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를 시도하는 등 실험예술의 분위기로 충만했다. 최 화백은 김구림의 작품을 보고 현대미술에 눈을 떴다. 그의 파격성에 매혹됐다. "김구림 작품을 보고 나도 내 방법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했다. 박현기, 이강소 등과 어울리며 국내 최초 현대미술제인 '대구현대미술제'(1974~79)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1975년에는 대구의 위도와 경도를 의미하는 '35/128'이라는 전위미술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과 토론하고 경쟁하면서 자신의 작품 형식을 찾던 그는 노점상에서 산 불경을 들으면서 신문 지우기 작업을 시작했다. "1975년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할머니 있는 데로 달려갔는데 우리 할머니를 닮은 분이 낡은 LP판과 카세트테이프를 팔고 계셨다. 그걸 사서 집으로 가 틀어보니 '천수다라니경'이었다. 들으면서 우연히 신문지 위에 낙서하듯 볼펜으로 글씨를 지워갔는데 그게 신문지 작업의 계기가 됐다." 볼펜이나 연필로 신문지를 검게 칠해 기사를 지우는 작업이었다. 선을 긋는 행위는 일상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기사 하나하나를 지워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신문이 제대로 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왜곡된 논조로 지면을 가득 채워 놓은 것에 반발해 그걸 지워나가는 행위 예술이기도 했다. 최 화백은 버려지는 재료를 가지고 오롯이 선 긋기라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로만 사회를 지우고 또 지우고, 채우고 또 채웠다. 어느덧 그가 지우고 채운 종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닌 예술적인 무언가로 향하고 있었다. "유신시대 땐 신문이 재미가 없었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고 회고했다. 30대 초반이었던 그에겐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지우는 일은 금방 지루해졌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신문 지우기 작업을 중단했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하기 싫었다"고 했다.

◆온몸으로 작업

두문불출하며 지내던 그는 1990년대 중반, 한 화랑에서 전시 의뢰가 들어오면서 신문 지우기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 면만 지웠던 것을 양면으로 확장했다. "몇 점 걸었는데 대박을 쳤어요."

그의 재능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전시 이후 곳곳에서 초대장을 보내왔다. 프랑스 파리의 한 갤러리는 특이한 재료와 작업 과정을 높이 평가해 2005, 2012년 두 차례 최 화백을 초대했다. "부스가 전시장 맨 뒤쪽에 있었는데 제 작품에만 관람객이 몰렸어요. 대박을 친 거죠." 아트페어 아트바젤홍콩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작품도 조금 변했다. 초기에는 한 면만 지웠으나 1990년대부터 양면을 지웠다. 볼펜만으로 작업하다 연필로 한 번 더 덧칠했다. 평론가들은 연필심의 광물질(흑연)이 내는 검은 광택은 단색화를 연상시키지만 연필과 볼펜 등 일상의 오브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실험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흑연 성분으로 광물성 느낌과 함께 작품의 경도가 높아졌다. 그는 "신문을 지우는 일은 나를 지우는 일"이라고 했다. 지우는 것은 생각을 비우고 생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우는 것처럼 맘 편한 게 없고 비우는 것처럼 홀가분한 게 없다"고 했다 온종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하염없이 신문을 지운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신문지는 본래의 모습과 달리 먹지처럼 새까맣게 된다.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하는 작업과 달리 그는 몸으로 작업한다. "내 작업은 부지런하면 못 한다. 느리고 게을러야 한다. 나는 엉덩이 힘으로 일하는 작가"라고 했다. 매일 반복되는 작업이 지루할 법도 하지만 그는 "지루함을 몸으로 견뎌내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며 활짝 웃었다.

◆자신만의 방법 있어야

최 화백은 40여 년 동안 고집스러운 아이처럼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을 이용해 선을 긋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까맣게 그은 선들로 덮이고 마찰로 얇아져서 군데군데 찢어질 때까지 집착스럽게 이 일에 몰두한다. 그는 작업할 때 줄곧 써왔던 특정 볼펜만을 사용한다. "이유는 없다. 이 회사는 심만 따로 팔기 때문"이란다. 볼펜심 100개를 사면 일주일 만에 다 쓸 정도로 지금도 일기 쓰듯 하루 10시간씩 볼펜으로 신문을 지우고 그 위에 연필로 다시 지우는 작업을 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연필 대신 샤프도 사용한다는 것. "느낌이 달라요.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게 단점이죠." 최 화백은 지금껏 보통 크기의 신문지를 사용했는데 요즘은 기존 신문지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신문지도 사용하고 있고, 영국이나 중국 신문지도 사용한다고 했다. "구할 수만 있다면 북한 신문지도 사용하고 싶고 신문지가 아닌 캔버스에도 작업해보고 싶다"며 싱긋 웃었다.

최 화백은 그림만 잘 그린다고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고희를 훌쩍 넘긴 그는 여전히 수줍은 소년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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