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

12세기의 신(新)플라톤주의 철학자 베르나르두스는 훗날 길이길이 회자되는 구절을 남겼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Nanos gigantum humeris insidentes)라는 그의 표현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식견과 성과가 선학(先學)들의 축적된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경구로 쓰인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소개한 아이작 뉴턴 경은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 바 있고, 얼마 전에 작고한 스티븐 호킹 박사 또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라는 제목으로 물리학과 천문학의 거장들을 조명하는 책을 썼다.

무릇 탁월한 업적과 놀라운 혜안은 혼자만의 영감과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앞서 디딤돌을 놓고 생각의 물길을 틔워 준 이들이 없었다면, 그 어떤 거장이나 대가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쟁이로 하여금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해준 그 거인들이 반드시 학문의 대가이거나 그 분야의 거장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최초로 실험실(In Vitro)에서 성공적으로 배양, 증식되어 의학 연구의 신기원을 열었던 헬라 세포주(HeLa Cell line)의 경우를 보자. 이 인간 세포주가 있기 전까지 인간 세포를 이용한 실험과 연구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인간의 세포는 배양 접시에서 적절한 조건만 갖춰 주면 무한정 배양하거나 증식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까닭에 연구자들은 세포에 대한 실험 자체보다 세포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할 지경이었다. 생리학, 병리학, 세포생물학, 면역학 등 의학 및 관련 학문의 연구에 있어서 인간 세포 실험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인간 세포를 배양하는 첫째 관문조차도 채 넘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가운데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가난한 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1920~51)에게서 유래한 세포 조직이 세포주로 확립돼 수없는 생명을 살리고 의학의 도약을 가능하게 한 디딤돌이 되었다. 제약회사들과 병원들이 이 세포주로 인해서 얻게 된 금전적 이익은 도무지 얼마나 될지 추정하기도 어려울 만큼 컸다.

하지만 헨리에타 랙스와 그의 가족들이 얻은 것은 저 획기적인 세포주가 헨리에타 랙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고, 그 외에 어떤 경제적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곤궁한 삶을 견뎌야 했다. 그뿐 아니라 세포의 채취와 이용, 그리고 상업적 활용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고, 동의 과정도 없었다. 훗날 헨리에타 랙스의 딸 데보라는 이렇게 묻는다. '엄마 세포가 의학 발전에 그렇게 큰일을 했다는데, 왜 우리 가족은 마음 놓고 병원에 갈 수도 없는 것인가?'

의학 연구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들과 자료들은 결코 책상에서 몇 가지 공식을 풀어냄으로써 얻어낸 것이 아니다. 의학은 질병과 통증에 신음하던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데이터의 원천으로 삼는다. 오늘날 병원에서 생검을 통해 채취된 환자의 세포들부터 수술실에서 새로운 수술법의 적용을 받는 환자의 몸,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했던 환자들의 사연까지 모두가 의학 연구와 의료 발전의 도구로 사용된다. 최근 등장한 인공지능 진단 프로그램 Dr. Watson이 사용하고 있는 빅데이터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신체 정보이며 누군가가 겪었던 고통의 기록이다.

오늘을 사는 난쟁이들은 자신이 구사하는 현묘한 학문과 압도적인 기술에 스스로 도취되곤 하지만, 그 밑에는 누구인지 얼굴조차 모르는 수많은 거인들의 어깨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결국 다른 이의 기여와 희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전문지식과 기술이라고 그것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과 보상만을 바라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가진 기술과 학문적 역량이 공공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지 고민해야만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용욱 신부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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