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파워 인터뷰] 검정고시학원 신화 김구표·선표·석표 씨

"어르신들 행복한 노후 돕고 싶어" 삼 형제의 꿈 현실에 펼쳐지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과 우애를 잃지 않았던 경주 안강 출신 삼 형제. 왼쪽부터 막내 김석표 대구시노인복지협회 회장, 첫째 김구표 탑학원 이사장, 어머니 안출 여사, 둘째 김선표 진명복지재단 대표.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과 우애를 잃지 않았던 경주 안강 출신 삼 형제. 왼쪽부터 막내 김석표 대구시노인복지협회 회장, 첫째 김구표 탑학원 이사장, 어머니 안출 여사, 둘째 김선표 진명복지재단 대표.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경주 안강 한 마을에 삼 형제가 살았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여덟 식구(부모님과 3남 3녀)가 오손도손 그 나름대로 행복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막막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생활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그래도 삼 형제와 가족들은 사랑과 우애를 잃지 않았다.

하늘이 도와서일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어렵게 시작한 검정고시학원은 대박을 터트렸다. 곧이어 과외 금지 규제가 대폭 완화되고, 입시학원이라는 새로운 블루오션이 열렸다. 학원 운영의 노하우와 열정을 겸비한 삼 형제에게 학원업은 그들을 성공으로 이끈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맏이 김구표(63) 탑학원 이사장, 둘째 김선표(59) 진명복지재단 대표, 막내 김석표(52) 대구시노인복지협회 회장(진명고향마을 원장), 삼 형제를 팔공산 진명고향마을에서 만났다. 어르신 요양시설인 진명고향마을은 진명복지재단의 12개 산하기관 중 한 곳이다. 시련을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은 삼 형제의 이야기는 어머니 안줄이(87) 여사의 감사기도로 시작되었다.

▶"굶어 죽어도 같이 죽자"

경주시 안강읍은 넓은 평야를 안고 있다. 하지만 제방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엔 한 해 걸러 한 번씩 홍수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대목(집을 지을 수 있는 목수)이었던 삼 형제의 집은 가난했다. 도시락을 쌀 때는 꽁보리밥을 밑에 깔고 그 위에 흰 쌀밥을 살살 부렸다.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쌀밥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식구(食口)를 줄이는 것이 당면과제로 떠올랐습니다. 막내아들을 해외에 입양 보내기로 입양기관과 부모님이 합의를 했습니다. 미국에 가면 잘 먹고 교육도 더 잘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죠. 그런데 미국으로 보내기 이틀 전 온 가족이 모여 가족회의를 하다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굶어 죽어도 같이 죽자'며 대성통곡을 했고, 해외 입양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때 입양기관은 ○○사회복지회였고 입양기관 본부가 많은 미국 미네소타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막내 석표 씨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중에 미국 미네소타에서 유학을 하며 노인학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자녀가 없는 고모에게 딸 하나를 양녀로 보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제안 역시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결의(?)에 따라 끝내 무산되었다.

▶쓰러진 아버지, 막막한 생계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당시 52세였다. 한 달간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냈고, 그 이후 깨어나셨지만 기억을 잘 못 하고 장애 후유증으로 경제활동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맏이 구표 씨가 대학을 휴학한 뒤 군에 입대한 직후였다.

"고향 안강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땅한 밥벌이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와 초등학교 4학년 막내 여동생을 안강에 남겨두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대구로 나왔습니다. 열 살짜리가 겨우 거동할 수 있는 병든 아버지 뒷바라지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둘째 딸은 "대구에서 밥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경주여고에서 경산여고로 전학을 해야 했다.(큰딸은 시집을 감) 어머니 안줄이 여사는 기사식당, 공사장 함바집 허드렛일을 비롯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장 좌판과 버스 토큰박스 등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했다. 그래도 집안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30만원을 빌려 여자중학교 옆에 분식점을 차렸습니다. 바로 옆 분식점은 손님이 넘쳐 나는데 우리 집은 장사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버스 토큰박스를 임차해 장사를 할 때도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일하고, 겨울에 난방비를 아낀다고 난방조차 하지 않았지만 한 달 수입이 30만~40만원에 불과했습니다."

구표 씨가 제대 후 복학을 하고 곧이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대학을 주간에서 야간으로 바꿔 고학을 하다 보니 열악한 공무원 월급으로 학비조차 버거웠다.

사춘기에 접어든 석표 씨는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 탓에 자존감이 땅에 떨어졌다. 교복을 빌려 입는 것 정도는 참을 만했다. 하지만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담임선생님의 호통을 들을 때면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집 논이 안 팔려 (육성회비를) 못 내고 있다'고 억지를 부려 봤지만 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추락한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2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가족의 기둥, 둘째 아들!

아버지가 쓰러질 때 둘째 선표 씨는 고교 1년생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돌보는 데 전념해야 했고, 형은 군에 입대한 뒤였다. 선표 씨가 사실상 가장이었다. 비즈니스 감각은 타고난 듯했다. 중학교 다닐 때 중고 사진기를 구입해 친구들 사진 찍어주고 용돈을 벌었고, 대구 교동시장에서 라디오 부품을 구입한 뒤 집에서 조립해 판매하기도 했다.

"돈 벌 사람이 없으니 저라도 뭔가 해야 했습니다. 형 친구의 도움으로 학습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요. 회원을 모집하고 배달한 뒤, 다시 수거해 채점을 하고 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선표 씨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는 달랐다. 영업 능력이 탁월했다. 얼마 후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한 동네 전체 책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고교를 졸업한 후에는 어엿한 안강지역 총책임자가 되었다. 2, 3명의 직원을 거느렸다. 그 나름 성공한 사업가였다. 대학 입학 뒤에도 대구와 경주를 오가며 사업(!)을 지속했다. 가족들의 생계 문제도 선표 씨의 사업 성공 덕분에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다.

문제는 선표 씨가 1981년 9월 군에 입대하면서 발생했다. 애써 키워놓은 학습지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선표 씨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둘째 형이 군에 입대하면서 우리 가족의 형편은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 되었습니다. 사글세를 내지 못해 친지를 통해 달러빚을 내야 했고, 효목동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함께 지냈습니다."(안강과 대구의 두 집 살림은 어쩔 수 없이 대구로 합칠 수밖에 없었다)

▶온 가족이 뭉치다

선표 씨가 제대하면서 집안은 활기를 되찾았다. 대학생 선표 씨는 친구와 연탄 장사를 하며 살림에 힘을 보탰다.

"당시에는 아파트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연탄 한 장에 2원을 더 받았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더 벌 수 있어 힘들어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선표 씨는 2년 정도 연탄 장사를 해 모은 돈으로 승합차를 구입한 뒤 성심여고에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았다. 승합차 임대료가 연탄 배달을 하고 얻는 월수입만큼 되었다. 꽤 짭짤했다.

"성심여고는 3년 과정의 야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정을 마쳐도 졸업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학력이 인정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검정고시는 1년만 공부해도 졸업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검정고시가 훨씬 경쟁력이 있다는 걸 간파하고, 검정고시학원을 열기로 결심했습니다."

연탄 배달로 모은 돈과 승합차 임대료, 그리고 새마을금고 대출을 합한 1천만원으로 1986년 3월 원대고시학원을 개업했다. 비용을 아끼려고 패널과 각목'합판을 구입해 학원 내부 인테리어를 직접 했다. 온 가족이 나섰다. 어머니는 청소를 맡았고, 맏이는 틈틈이 운전과 강의를, 몸이 불편한 아버지도 막내와 함께 학원 홍보물을 붙이고 전단지를 나눠주며 전력을 쏟았다. 가난 탓에 대학 진학이 좌절됐던 딸들은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며 학위를 받았고, 강사로 맹활약했다.

선표 씨는 개업하면서 '1년 과정 중 결석 5% 미만인데 합격하지 못하면 합격할 때까지 무료'라는 슬로건이자 마케팅 전략을 내세웠다. 모의고사 성적이 내려가면 족집게 개인학습을 실시하고, 보강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개업 1년 뒤인 1987년 대구의 전반기 고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서 1~10등 중 우리 학원 출신이 9명이나 됐습니다. 이 소식이 매일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2년 만에 학원생이 50명에서 400명으로 급증했고, 합격률은 94% 이상을 자랑했습니다."

새로운 기회도 열리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과외 금지가 풀리고 입시학원이라는 블루오션이 펼쳐진 것이다. 원대고시학원은 원대학원(이후 탑학원으로 변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맏이 구표 씨가 맡아 검정고시와 입시학원을 병행했다. 둘째 선표 씨는 제일영수학원, 서부진명학원, 동구진명학원 등 진명학원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며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막내 석표 씨는 '유학 가서 구약을 공부한 뒤 신학대학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에 도전할 수 있었다. 어릴 적 해외 입양될 뻔한 석표 씨는 시카고 소재 미국 명문 신학교인 트리니티신학대학(신학 석사'목사)을 거쳐 바로 그 입양기관의 본부가 있는 미국 미네소타로 유학을 떠났다.

▶진명복지재단을 세우다

IMF 외환위기는 두 얼굴로 들이닥쳤다. 맏이 구표 씨의 탑학원은 감삼탑학원, 원대탑학원, 시지탑학원, 성서탑학원, 대곡탑학원 등 프랜차이즈가 성업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과도한 투자 탓에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곤경에 처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는 원대탑학원, 명성탑학원, 사유수학, 라온과학학원이 남았다. 지금 구표 씨는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

반면 둘째 선표 씨는 제일영수학원, 서부진명학원, 동구진명학원 등 5개의 학원을 빚 없이 알차게 운영하고 있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질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수강료를 환불해 준다.'

"외환위기 초창기 움츠렸던 학부모들이 '그래도 공부는 시켜야 한다'면서 학원으로 몰려들었는데요. 이미 많은 학원이 문을 닫아 우리 학원에는 외환위기 전보다 더 많은 수강생들이 찾아왔습니다. 학원 프랜차이즈 숫자가 10개로 두 배나 확대되었습니다."

선표 씨는 교육사업으로 번 돈을 보람 있게 쓰기 위해 학교법인을 설립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미국 유학을 떠난 막내 석표 씨는 1년 만에 눈과 근육'관절에 이상이 생기는 희귀병을 앓았다. 한때 법적인 맹인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현재 아주 약한 시력을 유지하고 있다) 당장 죽을 병은 아니지만 평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만성질환이었다.

"아프면서 아픈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관절 때문에 병원에 자주 가면서 어르신들을 많이 접하게 됐는데요. 노인학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생겼습니다. 신학이 아니라 노인학이 제 소명이라는 열정이 가슴에서 불타올랐습니다."

먼저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교수 동생을 기대한 형님들에게 미안하지만 신학대학 교수가 아닌 노인학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인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워킹비자로 1년간 미국 노인요양센터 요양보호사 경험을 하면서 소명의식은 더욱 분명해졌다. 가족들의 양해와 지원 아래 석표 씨는 미국 미네소타주 루터대 노인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 노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미네소타 한인장로교회 부목사로 2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밖에서 아프지 말고 고국으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8년 6개월의 미국 생활을 끝냈습니다. 둘째 형이 학교법인 설립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요. 저는 '우리나라는 조만간 노인 문제가 아주 심각하게 닥쳐올 것'이라면서 이미 시설 과잉 상태에 놓인 학교가 아니라 노인 분야에 관심을 가질 것을 주장했습니다. 둘째 형과 함께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노인 관련 시설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진명복지재단은 이렇게 2004년 7월 출범했다. 둘째 선표 씨의 입시학원은 2013년까지 점차 정리하고, 사재 60억원 이상을 재단에 출연했다. 이후 정부의 노인 관련 정책들이 수립되어 추진되면서 재단은 급격히 성장했다. 현재 12개 관련 기관에 종사자만도 600여 명에 이른다.

선표 씨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노령화되고 있다. 지금의 노인들은 한국전쟁, 산업화 등 엄청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지만 그러면서도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어르신들이 조금이라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재단의 꿈이자 저의 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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