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중개인(agent) 아닌 협상가가 되라(negotiator)

이춘수 편집부국장 이춘수 편집부국장

북측 김정은'여정 30대 초반의 '백두혈통' 남매가 최근 며칠간 남측 평창을 지배했다. 평화의 제전이어야 할 올림픽을 핵 정치'국제정치 게임판으로 확 바꿔버렸다. 삼지연관현악단과 대규모 응원단으로 꾸려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미녀 군단'은 핵 도발과 인권유린, 봉건적 세습체제로 각인된 북측의 이미지를 일순간 잊게 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여동생을 특사로 보내 남북정상회담을 전격 제안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남한과 미국을 죽일 듯, 집어삼킬 듯 위협하더니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대화를 하자고 한다. 미국의 핵 항모에 맞서 북측은 만경봉호에 미녀 예술단을 태우고 내려와 남한과 전 세계를 향해 미소 공세를 폈다.

남북정상회담 한 방으로 한'미'일의 허를 찌른 김 위원장은 적어도 올림픽 초반 기간만은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승자이자, 평창의 지배자였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도 공세적으로 나올 것이 자명하다. 북측의 숨통을 조이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이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면서 체제 위기로까지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북의 고통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은 돌파구 마련이 시급해졌다.

앞으로 북측은 이산가족상봉,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가동, 이미 제안한 남북정상회담 조속 개최 등 파상적인 대화 공세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다. 아버지 김정일과 김 위원장은 핵 무력이 없었던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처참하게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핵이 없으면 미국으로부터 언제든지 참수될 수 있다는 망각에 시달릴 법했다. 김 위원장에게는 핵을 지렛대로 미국의 침공을 막거나 최소한 체제 보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는 '핵이 있는 평화'만 있을 뿐이다.

김 위원장의 운명은 남북정상회담이 그 분수령이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은 한반도 위기를 해소하는데 기여하지 못했다. 남북이 2000년 6'15선언(김대중), 2007년 10'4선언(노무현)을 했지만 북측은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등으로 남한을 기만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요건 없는 북미 대화만 요구하고 있다. 대화는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북측, 아니 김정은의 핵 포기다. 북핵으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의 가장 큰 피해 당사자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민과 한국 정부다. 문 대통령은 북측에 비핵화 원칙을 수용한 뒤 미국과도 대화를 시작하라는 요구를 강력히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문 대통령의 북미 대화 촉구는 협상이 아닌 중개인의 역할에 다름없다.

중개인(agent)이 뭔가. 제3자로서 두 당사자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고 소정의 대가를 받는 장본인이다. 반대로 협상가(negotiator)라면 어떤 목적(핵 없는 평화)에 부합되는 결정을 하기 위해 선택을 요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서로 의논(남북한과 미국)하는 당사자이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한반도의 운전자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피해 당사자인 한국이 중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협상을 주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은 아쉬울 게 없다. 정상회담이라는 미끼로 시간을 벌며 핵탄두를 늘리고, 실전배치까지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협상가가 아닌 중개인에 머물 경우 한반도 종전 선언과 북미 수교, 주한미군 철수 등 북한의 목표대로 한반도의 운명이 흘러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도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부디 문 대통령의 안보와 외교 해법이 '핵 없는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민의 목표로 연결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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