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책] 문(文)의 문화와 무(武)의 문화

조선의 문-일본의 무, 주류가 가른 근대화 운명

문(文)의 문화와 무(武)의 문화/ 한준석 지음/ 다나 펴냄

나라의 흥망과 지역의 성쇠를 한두 가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근대화 당시(188년대 후반∼1900년대 초)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을 주류 문화와 이에서 비롯한 대외인식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조선은 1800년대 후반 급속도로 쇠약해져 일제 식민지가 됐고, 일본은 1800년대 후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하며 급속히 강해져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가 됐다. 서구적인 것이 다 옳다거나 동양의 전통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1800년대 후반은 전 세계가 서구 제국주의 앞에 맥없이 무너지던 때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과 일본 모두 쇄국정책을 폈다. 흔히 조선을 문(文)의 문화, 일본을 무(武)의 문화라고 한다. 조선이 문만 숭상한 것은 아니고, 일본이 문을 배격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선은 문(文), 일본은 무(武)가 주류였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서구열강의 침입 앞에서 이 같은 문화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잉태했다.

병인양요를 통해 조선은 외규장각 도서와 여러 상자의 은괴를 잃었고 강화도 관아 건물과 도서 6천여 권이 불탔다. 다만 양헌수가 소총병 500여 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에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 정찰대 150명을 공격해 6명을 사살하고, 60여 명을 부상 입히는 성과를 올렸다. 신미양요 때는 광성진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국 측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여 명이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조선은 외세를 몰아냈지만 전투에서는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우위, 과학과 무력의 우위를 인정하는 계기는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 각향의 선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체 서양 오랑캐의 총과 대포가 세면 얼마나 셀 것인가. 무력을 앞세우는 자들이 번성하면 얼마나 번성할 것인가. 그들이 앞세우는 것은 기껏해야 총칼과 병졸의 힘뿐이지 않은가."

까닭에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도 쇄국을 고집하고, 서구 열강이라는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1800년대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조선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보고도 '승리'했다고 인식한데 비해 일본은 단 한 번의 전투로 서양의 막강한 힘을 간파했다.

1853년 초여름 어느 날 일본의 에도(江戶'현재의 도쿄) 만에 검은 배(黑船) 4척이 연기를 뿜으며 나타났다. 당시 일본 배가 대부분 100t, 200t인데 반해 미국인들이 타고 온 흑선은 2천500t이나 되는 기함이었다. 미국 제독 페리가 이끄는 함대였다.

쇄국정책을 취했던 일본은 개항을 요구하는 미국의 국서를 거절했다. 그러나 바다 저 멀리서 쏘아대는 미국 함대의 포탄이 육지에 날아와 집과 항구를 부수는 데 반해, 자신들이 육지에서 흑선을 향해 쏘는 포탄은 바다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대포의 힘에서 일본인들은 서양의 힘을 보았던 것이다. 일본은 두말 않고 패배를 인정했다.

조선의 문(文) 즉, 시(詩)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는 낭만적이고, 창조적이며, 평화 때에는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뿌리가 된다. 그러나 무(武) 즉, 칼은 승패가 분명하다. 벤 자와 베인 자, 산자와 죽은 자가 극명하게 갈라지는 것이다. 난세에는 붓을 든 수염 허연 선비보다, 칼을 들고 말을 달리는 무부(武夫)가 필요하다. 근대 개항기는 난세였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선비보다는 '승패가 뚜렷한' 무부의 자세가 필요했다.

바로 이 같은 인식 때문에 지근거리에 있던 조선과 일본은 개항시기에 있어 22년의 차이가 난다.(조선은 1876년, 일본은 1854년 개항). 이 22년의 간극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물론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다.)

서양의 힘을 간파한 일본은 개항 후 서구로 다양한 문화사절을 파견했다.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과학, 법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유람단을 파견해 서구의 앞선 문화와 제도, 기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리고 불과 20년 뒤 미국의 페리가 일본에 그랬던 것처럼 함대를 이끌고 조선의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펼쳤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다 지난 일이다. 그리고 또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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