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 (8) 대구읍성(하)

하룻밤새 성벽 허물어지고 읍성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감영과 중영은 지금의 감영공원 일대, 부아는 지금의 대구 중부경찰서 자리, 진영은 지금의 한일극장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남서쪽과 남동쪽에 주거지역이 형성되었고, 성곽 바깥쪽에 촌락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종로를 중심으로 남북은 행정 중심권, 동서는 생활 중심권으로 발전했다.

대구읍성은 축성한 지 134년 만인 1870년에 크게 중수했다. 그동안 이렇다 할 전란이 없었던 관계로 큰 변화 없이 유지돼 오다가 대원군 집권 초기에 서구 열강들의 침탈에 대비하기 위해 추진됐다. 당시 상태는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며, 관찰사 김세호(金世鎬)의 주관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대구읍성수성비(大邱邑城修城碑)에 기록된 내용이다. 비석은 망우공원 내 영남제일관문 옆에 옮겨 놓았다.

대구읍성은 대구의 정신적 공간일 뿐 아니라 도심 형성에 중요한 공간이며, 삶의 터전이자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밤중에 뜻하지 않게 헐리고 말았다. 그 중심에는 당시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朴重陽)이 있었다. 그와 함께 일본거류민회를 앞세운 일본인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던 것이다.

일본이 대구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것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군부대가 달성토성에 잠시 주둔했을 때부터였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도 철수하지 않고, 뒤이어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병력을 강화했다. 1904년 대일본 거류민회를 설립, 식민지 개척의 길을 열었다. 당시의 일본인은 약 1천명 정도였고, 인두세를 거둬 민회를 운영하였다. 거류민회를 설립한 데는 경부선 철도 공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04년 대구역이 설치되자 거류민회는 시가지 쪽 철도용지 6천800여평을 차용, 거류민들에게 임대하였다. 그 재원으로 역전 도로변 상점가를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1906년에 이르러선 대구읍성 외곽의 토지 절반 이상을 일본인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자 성벽이 성 안팎을 격리시켜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도시의 발전에도 장애가 된다며 박중양에게 성벽 철거를 주장하였다.

1906년 11월 박중양은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고 성벽을 허물었다. 부산에서 건설공사 인부들을 데리고 와서 한밤중에 허물기 시작했던 것. 뒤늦게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으나 타당성이 없다고 허가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죄를 물어 해임하려 하였으나 이토히로부미의 후원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항간에서는 박중양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사실은 아니었다. 성벽은 이미 철거작업이 반 이상 진행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중단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이듬해 동남쪽 성벽마저 허물고 말았다. 뒤이어 1908년에는 경상감영의 객사와 주요 건물마저 파괴돼 대구읍성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성벽에서 나온 섬돌 하나를 엽전 한 냥에 팔았다고 하니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라 하겠다. 그뿐이랴. 일본인들의 성내 침투가 속도를 더했다.

그 뒤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은 1909년 이른바 십자도로를 개통하였다. 즉 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말하는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이 도로가 개통될 무렵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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