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ger Script [시니어문학상 논픽션부문 당선작]노병의 증언②/김길영

[시니어문학상 논픽션부문 당선작]노병의 증언②/김길영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대공표지판을 메다

50년 9월 7일. 새벽 5시, 보현산 쪽으로 북진한다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맡은 임무는 대공표지판을 메고 맨 앞에 전진하는 것이었다. 대공표지판이란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크기의 두 장의 천이다. 한 장은 흰색이고 또 한 장은 붉은 색 천을 똘똘 말아서 매고 다녔다. 통신병과 함께 중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임무로 아군 비행기가 공습할 때 재빨리 우리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작업이었다. 내가 맡은 일을 게을리 하면 자칫 아군에게 인명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아군의 최전방 공습을 꾀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나의 임무가 부대 맨 앞에 서는 위치라서 적에게 집중포화를 맞을 수도 있지만, 총검을 들고 싸우는 전투병 못지않게 내가 맡은 임무 또한 작전수행에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격전을 치른 곳은 보현산 줄기의 작은 봉우리였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고, 가파른 비탈에서 격전이 벌어지다보니 쌍방 간 부상병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인민군 병사 몇 명은 나무 둥치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퇴각하는 인민군 잔병들도 부상병들을 돌보지 못하고 달아나기 바빴다. 저들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전우애를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석양녘에 고지를 탈환하고 산 정상에서 점호를 해본 결과 중대병력이 소대 병력으로 줄어 있었다. 나는 고향 친구이자 경주중학생이던 박준영을 만났다. 둘이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느 형제가 이렇게 반갑겠나 싶었다. 같이 징집되어 같은 부대, 같은 소대에 편성된 전우들 중에 박준영을 포함한 몇 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중대병력이 소대병력으로

중대장과 소대장이 전사하고 이등상사가 중대장 임무를 대행했다. 첫날 전투에서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다. 조그만 봉우리 하나를 탈환하는데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은 것이다. 이렇게 병력 손실을 입으면서 백두산, 압록강까지 전진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낮에 점령한 고지를 사수해야 했기 때문에 최정상을 기준으로 사방 4-50미터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2인 1조로 야간보초를 섰다. 암호도 하달 받았다. 생면부지 병사와 한 조가 되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부대에 소속되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전우애 때문일 것이다. 참호 속에서 전우의 나이와 고향, 가족사까지 일일이 묻고 물어 모든 것을 알고 나선 마음이 놓였다.

◆보현산 전투

영천 보현산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며칠 동안 보현산을 샅샅이 뒤져 인민군 잔당을 소탕한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진지를 구축하고 정밀수색 중에 능선 아래 골짜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총상을 입은 인민군 소좌 한 명과 사병 두 명이 발견 되었다. 소좌는 포로로 후송처리하고, 사병 두 명을 심문했더니 포천, 원주가 고향인 중학교 상급생이었다. 그들은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단기 훈련을 받고 전투에 참가한 학생들이었다. 두 사병은 포로로 처리하지 않고 부대에서 우리 병력처럼 데리고 다니다가 북진할 때 원주에서 귀가시켰다.

50년 9월 11일. 우리 8사단과 3사단의 연합작전으로 인민군 15사단 보병연대를 청송일대에서 섬멸했다. 아군은 단번에 15킬로미터를 북진했다. 이때가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기 며칠 전의 전황이었다.

50년 9월 17일. 영천전투에서 기선을 잡은 8사단은 의성을 거쳐 안동 강변에서 야영을 했다. 그날은 추석 전날이었다. 달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고향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입대 며칠 전 결혼한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다. 몽달귀신을 면해주려고 부모님이 부랴부랴 맺어준 인연이었다.

야영을 마친 16연대는 영주. 풍기. 죽령까지 북진하여 인민군 주력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폈다. 8사단 3개 연대는 도송산 죽령-소백산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우리 16연대는 단양. 21연대는 예천지역에 각각 배치되었다.

50년 9월 19일. 밤에는 인민군 1개 사단 규모와 맞닥뜨렸다. 작전이 시작되자 치열한 공방전이 이틀이나 계속 되었다. 완강하게 버티던 적과 싸웠으나 우리의 인명 피해는 미미했다. 이때 생포된 인민군병사들만도 몇 백 명쯤 되었다.

◆생포된 인민군

안동에서 제천으로 그리고 원주로 가평으로 숨 가쁘게 북진하는 동안 큰 전투는 없었다. 적의 꽁무니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쫓고 쫓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서울성동중학교에 도착한 8사단 전 병력은 4일간 재정비검열을 받았다. 내가 군에 입대 후 처음으로 소고기 맛을 보았고 술을 마셔봤다.

50년 9월 28일. 부대검열이 끝나고 작전수송차량에 승차 했다. 중부전선 동두천을 경유 철원에 입성하면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철원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약간 경사진 길이었다. 길 양편으로 띄엄띄엄 경주 봉황대 같은 봉우리마다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영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환영인파가 도열하듯 계속 늘어났다. 우리 부대는 의기양양하게 환영인파에 손 흔들어 답하면서 걸어 들어갔다.

◆철원평야 대 혈전

철원시가지 곳곳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상황이 급한 인민군 부대는 민간복장으로 갈아입고 위장하면서 우리를 환영하는 척했던 것이다. 철원시가지를 경유하면서 진격명령이 내려져 마침내 대 혈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마땅히 은폐할 곳이 없었다. 대평원에서 논두렁이나 밭고랑에 몸을 숨겼지만,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져 피아간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었다. 3대대장이 철원시내 작전 도중 도로에 매설된 지뢰 폭발로 전사하자 부대 병사들은 적개심에 불타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적군도 만만치 않게 대응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논두렁을 타고 공격하던 허경행 전우가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우리 부대는 전방 고지에 집중포화를 퍼붓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생포한 포로 중에는 적군의 사단군악대원 2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병사들은 모두 북한지역 중학생이었다.

<11월27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이 게재됩니다>

 

관련기사

AD

문화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