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책

 

징검다리/박영미 지음/문예미학사 펴냄

대구에서 활동하는 박영미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징검다리'를 펴냈다.대구경북작가회와 삶과 문학 회원으로 활동하며 의성군에서 자두랑 복숭아 농장을 경영하는 지은이는 이번 시집에서 가족, 종교 등 주변 일상들을 아름답고 따뜻한 시어로 풀어내면서 인생의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남편의 얼굴이 어둡다/지난겨울, 혹한과 잦은 눈으로/자두나무 복숭아나무 42그루가/얼어죽어 버렸다/(중략)/올해는 살아남은 나무 둥치에, 도회의 가로수처럼/짚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는/호강(?)을 시켜야 하겠다'시를 통해 내뱉는 시인의 목소리에 가성은 없다. 생명노동과 기도로 삶을 평화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구도의 길 위에 그의 시는 소박하면서도 새벽이슬 머금은 풀꽃처럼 빛난다.시인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청구중 교사와 매일신문 기자 등을 지냈으며 2007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했다. 110쪽 9천원

2018-10-18 15:12:04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서혜정 지음/소소담담 펴냄

2012년 장애인 문학상 공모 우수상과 올해 전국 장애인 글쓰기 공모 은상을 받은 지은이가 180여 편의 짧은 글을 수록한 에세이집이다.경력에서 알 수 있듯 지은이는 사고로 다쳐 어릴 때부터 장애인으로 생활했고 독서와 글쓰기는 자신을 지키고 세우는 유일한 길이었다. 육체적 고통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고뇌를 글로 풀어냈던 것이다. 처음엔 숨은 사연과 속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긴 수필을 창작했었는데 결국 긴 글은 자신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짧은 아포리즘 에세이로 글쓰기를 전환한 작품집이다.책의 특징은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순간과 세련된 아포리즘이 돋보이고 살에 대한 긍정과 자기애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장애인이지만 사업체를 운영하며 생활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삶의 소중함과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짧은 글 속에서 큰 웅변으로 다가온다. 248쪽, 1만4천원

2018-10-17 10:12:04

세상을 뒤흔든 전투의 역사/유필하 지음/들녘 펴냄

이 책은 고대 카이로네이아 전투부터 제2차 세계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까지 역사상 기념비적 전투 25장면을 뽑았다. 전투의 원인, 시대적 배경, 전투의 양상, 그리고 그 영향도 정리해 역사적 흐름을 연결해 연대기처럼 서술했다. 특히 고증을 위해 50여컷의 진형도를 첨부해 이해도를 높였다.출판사 자료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21장~25장에서는 기존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동부전선에 집중해 독일과 소련 사이 전쟁의 진상을 파헤친 점 또한 이 책의 큰 특징이다.무엇보다 독서의 재미를 더하는 것은 인물에 대한 묘사로 일개 병졸이나 스파이, 상인과 문지기 등 역사에서 외면했던 인물을 되살려 그 캐릭터를 그려내고 그들의 역사적 의미를 새로이 조명하고 있는 점이다.객관적 사실과 함께 지은이의 주관이 어우러져 책 읽는데 몰입하게 만드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648쪽, 2만2천원

2018-10-17 10:11:34

부키야 놀자 북 페스티벌 행사 사진. 새마을문고 대구광역시북구지부 제공

아이들과 함께하는 '2018 부키야 놀자 북 페스티벌'

아이들과 함께하는 '2018 부키야 놀자 북 페스티벌'이 다음 달 3일 대구 북구 함지공원일대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열린다.이번 행사는 새마을문고 대구광역시북구지부(회장 이승로 수성고량주 대표)가 주최한다. 책읽기의 소중함과 독서 생활 습관정착, 북구 상징 부키를 이용한 그림 그리기를 통해 지역사랑을 고양하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문화 행사로 건강한 공동체 만들기에 이바지한다.생명·평화·공경 그림 그리기 대회, 대구전통 활쏘기대회, 초중고 댄스 경연대회가 마련된다. 주최 측은 "작년에 이어 올해는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는 경연대회와 참여마당을 다채롭게 준비한다"고 설명했다.참여마당에서는 ▷전통예절교실 ▷수준별 책읽기 지도 ▷청소년 진로상담 ▷오피니언리더 도서교환전 ▷시 낭송 체험▷국채보상운동 나라 사랑▷가상현실과학교실▷구암고분해설등 교육적인 부대 행사가 펼쳐진다. 특히 네일아트, 페이스 페인팅, 쥬얼리 체험 등 생활예술체험 아트마켓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이번 행사는 지역의 단체들이 참여해 의미를 더한다. 서부교육지원청과 대구 북구청의 후원 아래 행복북구문화재단, 칠곡향교, 북구청소년회관이 힘을 보탠다. 특히 칠곡향교의 전통예절 교육은 학생들이 한복으로 곱게 갈아입고 손님맞이 예절, 인사하는 법, 차 따르는 법 등을 체험하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북구 보건소의 아동건강 바로 알기, 어르신 기억 솔솔 바람개비 만들기 참여와 건강 걷기 행사도 병행하여 지역 주민들의 참여도를 높인다.작년 행사 보다 행사 규모가 커졌고, 초·중·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더 다양해졌다. 사전 신청자에 한해 도시락과 기념품이 무상으로 제공되고 경품 행사도 푸짐하다. 접수는 새마을문고 대구광역시북구지부(053-383-3787).

2018-10-16 14:28:25

[시니어 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소감]달빛상념

창밖은 초록세상이다.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초하(初夏)가 막 눈앞에 어른거리며 잡히기 시작했다.지금껏 내 글쓰기는 감성이 아닌 팩트(事實)속에 갇혀 있었다. 팩트란 주관성과 감수성 쪽이라기보다는 객관성과 논리성의 편이 아니던가. 팩트의 우산 속에서 밖을 쳐다보지도 쳐다봐서도 안 되는 줄 알고 살아온 것 같다. 팩트 밖은 늘 불안하고 위험한 곳으로 여겨왔다. 마치 나의 작은 우주요 나의 따뜻한 안식처로 여기며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학창시절에는 가끔씩 팩트를 넘어서고 싶은 생각들이 나를 꼬드기며 부추긴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수절하는 심정으로 허벅지를 찔렸던 기억이 오롯이 떠오른다. 문학적 DNA를 찾지 않고 걷어찬 셈이다. 그땐 그랬다.간만에 어둡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팩트 밖의 새로운 세상을 봤기 때문이다. 밝고 찬란하다. 좁고 얇은 속박의 틀을 벗어나니 새로운 신세계가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온 몸으로 느껴진다.이젠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싱그러운 세상, 내 가슴으로 느껴지는 상큼한 세상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 누구의 것을 흉내 내고 싶지 않다. 내 느낌과 감성을 그저 글로 토해내고 싶다.어쭙잖은 글을 예쁜 시선으로 봐준 '매일신문'이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인생 2모작에 빛나는 디딤돌이 되어주었으니 말이다.「수필과 지성 」글벗들이 생각난다.새롭게 펼쳐지는 이 길이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절감한다. 전도양양하게 걸어갈 것이다. 새로운 길을 내고 닦는 심정으로 말이다.하안거(夏安倨)로 축 쳐진 어깨에 새로운 서광이 비춰짐이 느껴진다. 내 글쓰기도 창밖의 신록처럼 푸르름이 가득 돋아나길 떨리는 가슴으로 기원해본다.

2018-10-15 11:27:20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달빛상념

달빛 상념/장기성 한가위에 고향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가슴을 뛰게 한다. 그리움일까 설렘일까. 아무래도 달빛에 대한 환상이 폐부 깊숙이 각인 된 탓일 게다.초저녁이 되면 앞산자락에 둥근 달이 나무가지에 걸린다. 한낮에 대지를 뜨겁게 달구었던 햇빛은 온데간데없다. 간간히 길섶과 논두렁에 몸을 숨긴 희뿌연 열기의 흔적만이 햇빛이 다녀갔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줄 뿐이다.무심한 세월이 흐른 탓일까. 고향엔 길동무가 되어줄 도반(道伴)이 없어진지 오래다. 혼자서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달빛을 쫒아 바람도 쐴 겸 호젓한 오솔길로 나서본다. 어슴푸레 달빛 속에서 눈대중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이곳이 그곳이고 그곳이 이곳이다.길섶의 벤치 위에 턱을 괴고 앉으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 언저리를 맴돌며 지금의 나를 잊게 만들고, 잡다한 상념들이 이 틈새를 놓칠세라 먼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우리 동네는 산비탈에 위치해있어, 달빛이 창문을 통해 몰래 들어와 방안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달빛이 너무 해맑고 투명하여 차마 잠자리에 들기가 아쉬울 지경이었다. 이런 밤이면 나는 뒷마당 뜰에 물끄러미 서서 물처럼 출렁이는 달빛 풍경을 탐닉했다. 멀리서 가까이에서 서로 사모하듯이, 나뭇잎들 속으로 달빛이 깊게 스며들었다.나무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들쭉날쭉 땅위에 수묵화를 그려낸다. 그리움이 이 순간을 놓칠세라 빗살무늬를 일으키며 가슴팍으로 내려앉는다. 내친김에 달님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본다."달님은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나요?""아무래도 달맞이꽃이지요.""왜요?""달맞이꽃은 원래 나를 따르던 요정이었답니다. 그믐이 될 때마다 나를 볼 수 없게 되자, 상심한 나머지 그만 쓰러져 달맞이꽃이 되었지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애절한 그리움의 상징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죠. 지금도 꽃말이 그리움이 아니던가요. 그 꽃을 생각하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답니다.""해님은 달맞이꽃을 좋아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그야 그렇겠지요. 자신을 따르는 꽃이 따로 있으니까요.""궁금하네요. 무슨 꽃입니까?""해바라기 꽃입니다. 그 놈은 해님을 지겹게 따라다니지요. 심지어 해님이 귀찮아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흐린 날에도, 님 향한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답니다.""달님, 혹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물론이지요. 이태백이 나를 처음으로 낭만적인 사모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었지요.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신다는 '월하독작'은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가 경포대와 인연 맺을 것이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어요. 한 번 들어보실래요. 거울처럼 맑은 호수라는 뜻의 '경포호'에는 네 가지 낭만의 얼굴이 보인답니다. 첫 번째는 하늘에 뜬 저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바다에 뜬 모습, 세 번째는 호수에 뜬 모습. 마지막 모습은 술잔 위에 뜬 저의 모습이지요. 하나를 더한다면 해맑은 눈동자에 들어있는 저의 모습이랍니다. 그 당시만 해도 풍류와 해학이 넘칠 시절이라 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답니다."상념이 상념의 꼬리를 물며 심연의 세계에 빠지니, 광음의 촉감이 무디어져 간다. 해님과 달님의 열광적인 팬은 누구일까? 생뚱맞은 쪽으로 생각이 미치기 시작한다. 해님의 팬은 아무래도 '해바라기'가 아닐까. 이글거리는 태양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퍼부으니 말이다. '너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숨쉬기조차 힘든 폭염 속에서도 맹목적으로 퍼붓는 사랑, 그것은 출세와 소유, 격정과 독선의 이미지와 왠지 닮은 듯하다.하지만 달님의 팬인 달맞이꽃은 새색시 마냥 수줍은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앞에 나서는 법이 없다. 양보와 인내, 조화와 공존 같은 이미지와 왠지 닮아있다. 해님이 이성이라면 달님은 감성에 가까워 보이고, 해님이 현실이라면 달님은 낭만에 가까워보인다. 해님보다는 달님이 왠지 텅 빈 내 가슴에 포근히 내려앉는다.환영(幻影)적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의식세계로 돌아오니, 달님은 이미 서녘에 걸려있고 밤이슬은 내 가슴속에 함초롬히 파고든다.

2018-10-15 11:27:03

이종문 계명대 교수

[이종문의 한시산책] 그 사람 오지 않네 -권필

벗 만나 술을 찾아도 술 얻기가 어렵더니 逢人覓酒酒難致(봉인멱주주난치)술 생겨 그리워해도 그 사람 오지 않네 對酒懷人人不來(대주회인인불래)백년 인생살이가 일마다 다 이러하니 百年身事每如此(백년신사매여차)허허허 크게 웃고서 벌컥벌컥 마시노라 大笑獨傾三四杯(대소독경삼사배) "창 밖에 국화 심어 국화 밑에 술을 빚어/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 돋아온다/ 아이야 거문고 청(淸)쳐라 밤새도록 놀리라."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있어/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놂이 좋아라." 둘 다 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시조다.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둥근 달이 휘영청 돋아 오고, 게다가 거문고를 치며 밤새도록 놀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도 이런 금상첨화는 없다. 좋은 날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놀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다시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인생살이에서 이처럼 박자가 척척 맞아 떨어지는 금상첨화가 얼마나 될까.조선중기 시단의 기린아(麒麟兒)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이 지은 위의 시만 봐도 그렇다. 좋은 벗을 만나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을 때는 바로 그 놈의 술이 없다. 좋은 술이 생겨 벗과 한 잔 하고 싶을 때는 같이 마실 그 벗이 없다. 길지도 않은 인생살이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이처럼 엇박자 나기가 일쑤다. 그러니 허허허 헛웃음을 웃으며 혼자서 막걸리를 연거푸 들이키는 수밖에 없다. '그 님이 오마하고 오시지 아니하니(可人期不至)/ 이 푸른 술동이를 어찌하면 좋을까나(奈此綠尊何)'라고 노래했던 퇴계선생의 시구도 석주의 시와 번지수가 같다.이 작품에는 '윤이성이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아서 혼자 몇 잔을 퍼마시고 장난삼아 우스개 시를 지었다'(尹而性有約不來 獨飮數器 戲作徘諧句)는 긴 제목이 붙어 있다. 석주가 강화도의 한 초가집에 살고 있을 때,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동쪽 이웃에 살고 있던 윤이성이 가끔씩 술을 들고 찾아와서 적지 않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아서 장난삼아 이 우스개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석주는 하는 일마다 엇박자가 났고, 심지어 죽음마저도 난데없는 엇박자로 맞았던 사람. 설사 장난삼아 지었다 치더라도, 덩달아 장난삼아 읽을 수는 없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이유다.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2018-10-10 17:49:46

현지인이 다니는 진짜 도쿄 맛집을 알려주세요/네모 지음/자기만의 방 펴냄

주말마다 도쿄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취미인 지은이가 관광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로컬 맛집 70곳을 엄선해 소개한 책이다. 지은이 네모(본명 에노모토 야스타카)는 일본 맛집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글로 SNS에서 유명인사.신주쿠 사람들의 추억의 맛집, 에비스역 근처 회사원들의 점심 맛집 등 도쿄 사람만이 아는 가성비 맛집을 소개하며 일본 음식에 대한 상식과 스토리도 풍부하게 담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지은이는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서강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인에게 도움 되는 정보를 주고 싶어 인스타그램에 한국어로 도쿄 맛집 탐방기를 연재했고 이 책도 한국어로 집필했다."일본에서는 돈부리를 비벼먹지 않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한일간 음식문화의 차이를 알고 그 과정에서 여행의 색다른 재미를 느껴보라는 지은이의 배려가 참 아름답다.340쪽, 1만4천500원

2018-10-09 17:24:38

ㄱ이 ㄴ에게/김사윤 지음/문학공감 펴냄

시인 김사윤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시를 짓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주제어로 내세우고 있다. 시인들의 양심과 지성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얼마나 주효한가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매번 해학적 표현과 미사여구의 관용구들을 깨뜨리는데 주력하는 그의 시어들은 낭송을 하면 할수록 곱씹어보는 감동이 있다. 그의 작품은 잔인하고 혹독하리만치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희망'을 길어내기 위한 것임을 이르는 일도 잊지 않는다. 시집에는 시인이 시인에게 건네는 간절한 당부로부터 독자에게 건네는 안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돼 있다.문단내 성희롱문제를 비롯해 패거리 문학을 꼬집는가 하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공감하는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다소 거친 시어지만 희생을 감내하는 모습도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1만원

2018-10-09 17:24:25

미지의 문/김종진 지음/효형출판 펴냄

미지의 문/김종진 지음/효형출판 펴냄 건축가의 눈으로 본 공간과 예술에 대한 에세이이다. 저자의 시선은 건축 밖 예술 장르를 해석할 때도 '공간'의 그림자를 생각한다. 그에게 공간은 보다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면서 편재해 있는 개념으로 건축과 예술을 보는 근본적 안목을 안내하고 있다.건축가가 쓴 책이니만큼 설계안과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지만 설치나 개념미술로 대표되는 현대미술 작품, 심지어 철학과 문학, 음악의 요소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건축과 예술은 별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대상 사이에는 서먹서먹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이에 저자는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 될까'에 착안에 '무엇'보다는 '어떻게'를 , '명사'보다는 '동사'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정해진 답이 아니라 나름대로 답을 찾게 하는 책의 전개방식은 때로는 철저한 과학적 원리에 바탕한 분석을 보여줌으로써 예술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하고 창의적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모자람이 없다. 288쪽, 1만8천원

2018-10-09 17:23:19

흔들림에 대하여/김광규 시집/문예미학사 펴냄

흔들림에 대하여/김광규 시집/문예미학사 펴냄 '저마다/무게 중심이 있다고 말하지만/수시로 흔들이는 우리/바람 부는 광야에서 흔들리며 살아온 뒤안길/…(중략)…/내가 흔든 그 사람은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왔을까'시집 제목을 딴 대표시 '흔들림에 대하여'이다. 지은이 김광규는 현재 봉화에 거주하며 영주청년학교 영어 강사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그이 시론은 시집 자서에 쓴 것처럼 '시를 쓰는 작업은 과거의 현상에 대한 기억을 현재에 관조하여 그것을 불멸화시키는 과정'이다. 그에게 시는 기억의 복원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내심 그의 시에 대해 미심쩍은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가보다.'사물의 내면을 파고들어가서 그 사물의 입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에 그는 아직도 시를 붙잡고 있지만 대상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맴돌다가 어설픈 시를 내어놓은 자신을 자책한다.이 때문에 시집 말미의 시에서 노래한 '두 귀를 쫑긋 세운 기약 없는 불안'은 그로 하여금 시를 계속해서 쓰게 되는 힘인 듯하다. 113쪽, 9천원

2018-10-09 17:23:04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이름짓기

며느리가 임신하였다는 기쁜 소식이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며느리가 빙판길에서 넘어지면서 한 차례 실패가 있고 난 뒤라 너무 서두른다고 나무랐다. 내심으로는 손자를 얻는다는 반가움에 좋은 이름을 지어보려고 궁리를 하였다. 본관의 같은 항렬자에 부르기 쉽고 적기 쉬운 것으로 짓기로 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름을 지으려고 노력하였다.오래전 N 학교에 도서관을 신축하고 이름을 공모하였다. '한울'이라고 응모를 한 결과 그 이름이 채택되어 현판식을 했다. 그때 특정 종교 신자로부터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중학교 동기생들이 모여 산악회를 조직하고 이름을 지었다. 학교가 자리한 곳이 높은 산이기도 했고 높은 산을 오른다는 뜻으로 고산회(高山會)라고 지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둘레길이나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이니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 되고 말았다.학교 관리자가 되고 운동장 동편에 다목적 건물을 지었다. 개관을 앞두고 이름을 공모하였다. 고심 끝에 제출한 '미래관'이 채택되었다. 그곳을 가끔 지나가다 현판을 보며 학생들이 저마다 미래의 꿈을 갖고, 가꾸어 간다고 여기니 가슴이 뿌듯하였다.퇴직하고 건강을 챙기기 위하여 파크골프를 배웠다. 클럽에 가입하고 첫 모임을 했다. 임원에 선정되지 않았으나 클럽을 상징하는 이름을 '한마음'이라고 정하였다. 골프 회동 시 가끔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우리 클럽 이름이 뭐냐고 들먹이면 이내 수그러들기도 한다.내 이름에는 항렬자 외에 소나무 송자가 들어간다. 백부님께서 나무 목(木)에 귀족의 작위를 일컫는 공(公)을 합하여 만든 글자로 지었단다. 한학을 공부한 대구의 K 교육장은 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란다. 그때마다 백부님에게 감사했다. 그렇지만 내 이름을 소개할 때 제대로 듣거나 쓰는 사람은 별로 없어 아쉬움이 있다.어릴 때 동네 여자 이름 끝 자가 대부분 숙, 순, 옥, 자였다. 그네들이 시집을 가더니 고상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나는 '보람' '아라' 등으로 이름을 지었다. 우리 반 출석부를 작성하다 깜짝 놀랐다. 이름이 '아라'인데 하필이면 성이 박씨가 아닌가.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놀림감이 될까 염려가 되었다. 학생 어머니와 의논하여 개명 절차를 밟아 주었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모습이 떠올랐다.아들 이름을 족보의 항렬자에 맞게 지었다. 가운데 한 글자만 짓다 보니 쉽사리 해결되었다. 딸 이름 짓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부르기 쉽고 쓰기 쉬운 이름으로 지었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의 일이다. 딸은 자기 반에 같은 이름이 셋이나 있다며 몇 날을 뽀로통했다. 시집을 가서 딸이 태어나자 직접 예쁜 이름을 지어 주었다.출산 예정일이 다가오자, 아들은 연일 독촉을 하였다. 지금까지 여러 이름을 짓는데 자부심을 가졌다. 막상 내 손자 이름을 짓는 일에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평소에 본인의 사주와 맞는 이름에 복을 더하기 위하여 짓는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너희 부부가 의논하여 짓든지 아니면 철학관을 방문하여 상담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할아버지가 지어야 한다며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출산일은 수도꼭지 틀어 놓은 양동이에 물이 차오르듯 다가오는데 그럴듯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 중에는 이름을 이태나 늦게 지어 두 살이나 적은 이도 있었다. 이름을 짓겠다고 서점에 가서 작명에 관한 책을 모두 샀다. 산책을 하나하나 정독을 해봐도 기준이 제각각이었다. 읽은 책 내용의 공통점을 나 나름대로 정리하였다.먼저 본관에 돌림자가 같은 훌륭한 사람을 찾아보았다. 고심 끝에 선대에 훌륭하신 분의 이름으로 내정하고 여러 사람에게 자문했다. 모두의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드디어 손자의 이름을 '신채호'라고 지었다.아들과 며느리를 집으로 불러 앉혔다. 이름을 짓게 된 연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면서 그분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훌륭하게 키우라고 당부하였다. 아들과 며느리가 마주 보더니 이내 얼굴이 보름달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았다. 손자가 자라서 반드시 이름값을 하리라 기대해 본다.신송우

2018-10-08 10:39:24

멍서방과 똑서방/서정오 글'신병근 그림/토토북 펴냄

멍서방과 똑서방/서정오 글·신병근 그림/토토북 펴냄 세상이 메말라 갈수록 모두가 자기 이익 챙기느라 바쁠 때일수록 우리는 어쩌면 바보가 그리울 줄도 모른다. 이 책은 안동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지금은 교직에서 물러나 우리 옛이야기 다시 쓰기와 되살리기에 힘을 쏟고 있는 서정오의 신간이다.책 '멍서방과 똑서방'에 나오는 15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대개 바보스럽다. 아니 바보가 맞다. 내용은 전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바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만 골라 다시 썼다. 그러나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개 바보가 똑똑해져서 복받는 게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도리어 그 바보짓의 결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곱씹어 볼 만하다.또 매 쪽수 마다엔 신병근이 글에 맞는 그림을 큼직만하게 그려 넣어 어린이들이 지루하지 않게 읽도록 배려했다.저자의 말대로 이런 생각 그런 생각 다 그만두고 그저 재미나게 읽고 즐기기만 해도 좋다. 하하 호호 깔깔, 한 바탕 시원스레 웃어가면서 말이다. 114쪽, 1만1천원

2018-10-03 13:12:46

누가 선생 아니랄까봐/박정곤 지음/글과 그림 펴냄

누가 선생 아니랄까봐/박정곤 지음/글과 그림 펴냄 국어교사 생활 18년 6개월, 대구시교육청서 교육행정과 연구 생활 12여년 등 교직에 발을 들여 놓은 지 35년이 된 저자가 2006년부터 9년 동안 대구 언론사에 쓴 교육칼럼 150여 편 중 100편을 뽑아 편집한 책이다.칼럼들은 뽑고 나니 책으로 묶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다. 왜냐고? 우선 시의성이 없어 재미없는 글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과 더불어 글 쓸 당시 생각과 철학이 지금도 가슴 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현직 달성교육지원청 교육장인 저자가 보기에, 미래 사회 대비를 외치면서 수능이 그대로 있고, 역량 평가를 주장하면서 객관식 평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교육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출판사 사장과 후배 교사들의 조언과 수고로 칼럼집 '누가 선생 아니랄까봐'을 낸 저자는 교육현장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에 대한 반성과 향후 교육이 나아갈 길에 대한 전향적 고민 등 글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242쪽, 1만5천원

2018-10-03 13:12:34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지심도 동백/류재홍

지심도 동백류재홍 불현듯 눈을 떴습니다. 시계가 네 시를 막 지나고 있습니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직 깜깜합니다. 창문을 열려다 밀려오는 바람에 놀라 얼른 닫고 맙니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바람이 차갑습니다. 양팔을 벌려가며 스트레칭을 합니다. 어떤 이는 글쓰기로 새벽을 밀어내고 누구는 독서로 하루를 연다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몸부터 풀어야 합니다. 한 번 망가진 몸은 좀체 돌아오지 않아서 어르고 달래가며 쓸 수밖에 없습니다.부부 동반으로 지심도에 가기로 한 날입니다. 낮부터 따뜻할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남편이 봄옷을 꺼냅니다. 조금 이른 게 아닌가 싶지만, 모른 체했습니다. 일찌감치 세탁해서 넣어둔 겨울옷을 꺼내기도 싫었거니와, 추운 것보다 더운 걸 더 못 견디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남편은 집을 나서자마자 어깨를 웅크립니다. 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버스 안을 아무리 훈훈하게 해 놓아도 자꾸만 웅숭그립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는 쉼 없이 달려 거가대교 휴게소에 다다랐습니다. 모두 전망대로 올라간 틈을 타 휴게소에 있는 옷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오리털 조끼를 본 남편이 반색하며 입어봅니다. 시중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고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가 조금은 낯설어 보입니다.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더니, 나이는 못 속이나 봅니다.지심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하늘에서 본 섬 모양이 마음 심(心)을 닮아서 지심도라 한다는데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이름인 동백섬이 더 정감 있게 다가옵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도 동백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왔는지 섬은 사람들로 만원입니다. 모두 봄바람에 신명이 나 있습니다. 우리도 콧노래를 부르며 둘레 길을 올랐습니다. 섬 전체를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하니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작년 이맘때 보았던 사량도 동백이 생각납니다. 사량도에는 온갖 종류의 봄꽃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을 지나다 무엇에 끌린 듯 멈춰 섰습니다. 나무도 땅도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는 게 묘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수많은 동백꽃이 한데 어우러져 아우라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달렸거나 누웠거나 한결같은 색이었는데, 조석으로 변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 같기도 해 섬뜩함마저 들었습니다.이곳에서도 그런 동백꽃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렬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기는 꽃을 볼 수도 있을 거야. 여기는 말 그대로 동백섬이 아닌가. 마음은 벌써 부풀어 오른 풍선입니다. 둘레길 초입에 조그만 카페가 보입니다. 많은 이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이 있어 나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한 무리의 붉은 꽃이 하트 모양으로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카페주인이 손님을 끌려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아무려면 이것뿐일까. 인위적인 것에 코웃음 치며 발길을 돌렸습니다.군데군데 동백꽃은 피어있었습니다. 땅에는 더 많은 꽃이 서로를 껴안고 누워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붉은빛도 분홍도 아닌 희멀건 색은 내 마음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비수처럼 꽂히는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허망했습니다. "날씨 탓인가 아니면 끝물이라 그런가, 꽃이 왜 이래." 지나가는 사람들도 투덜거렸습니다. 맛도 멋도 잃어버려 휘적휘적 걷기만 했습니다.한 바퀴 빙 돌아 다시 하트 모양의 동백꽃 앞에 섰습니다. 아직도 선홍색 그대로 환합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지막하고 여린 아기 동백이 몇 개의 꽃을 달고 바람에 하늘거립니다. 그제야 떠올랐습니다. 지심도 동백은 수백 년 이상 된 아름드리나무라고 말한 것을. 이곳은 원래 국방부 소유의 땅이라 오래된 나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늙을 대로 늙은 몸에서 청춘의 힘을 맛보려 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새삼 지나온 산을 뒤돌아봅니다. 장대한 거목들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꽃은 그저 꽃일 뿐인데 미우니 고우니 하며 호들갑 떨게 무어냐며 일갈하는 것 같습니다. 희미하거나 선명하거나 다 같은 동백꽃이라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2018-10-02 05:00:00

느긋하게-홋카이도/남자휴식위원회 지음/생각정거장 펴냄

느긋하게-홋카이도/남자휴식위원회 지음/생각정거장 펴냄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에서 편집숍이 대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편집숍은 주인장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흥미로운 물건들을 찾아내고 매력적으로 진열하여 소비자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그 덕에 소비자는 힘들게 발품을 팔 필요 없이 한 가게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다양한 제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쇼핑 방식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삿포로에서 유명한 편집숍 디앤디파트먼트가 생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무조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일부러 매장 오픈 시간에 맞춰 찾아가 휴일의 한적함을 맘껏 즐겼다.'여행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풍광이 좋은 곳이나 환경이 쾌적하고 힐링이 가능한 곳을 찾거나 이색적인 멋과 맛이 공존하는 장소에 들러 평소와 다른 호사를 누리는 게 보통이다.하지만 이 책은 이방인의 시선에 걸린 낭만적인 홋카이도의 일상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있는 주제별 컬러 사진과 길지 않은 텍스트로 인해 오히려 잔잔한 영상을 훑어보듯 홋카이도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지은이 '남자휴식위원회'도 이색적이다. 휴식이란 말은 좋은데 도대체 휴식에 뭘 가리고 거를 것이 있어 위원회를 둔 걸까?◆남자휴식위원회의 정체여행기획과 글쓰기를 담당하며 현재 온라인 음원사이트와 잡지 등에 책과 음악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다토(DATO), 웹 디자이너이자 SNS와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다양한 사진과 영상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카이, 유일한 여자 멤버로 출판 기획과 진행을 맡고 있으며 현재 인터넷 미디어사이트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아요나.남자휴식위원회는 이들 3인으로 구성된 대만의 창작집단이다. 이들은 '삶이 곧 여행'이라는 모토 아래 휴일을 주제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문화를 소개하는 잡지 '꽁치'를 발간해 여행소식을 전하고 홍콩 에어비앤비와 협업을 기획하고 일본 무인양품과 이벤트를 여는 등 대만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첫 저서로 '교토감성'에 이어 '느긋하게-홋카이도'가 두 번째이며 지금은 홍콩에서 휴식여행을 주제로 세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홋카이도의 일상 풍경 속으로남자휴식위원회 이들 3인의 여행은 홋카이도에 사는 누군가의 일상과 닮아 있다. 화려하게 포장된 관광지를 훑어보는 대신 골목골목 느긋하게 걸으며 도시의 숨은 매력을 들여다본다. 삿포로 니시주핫초메(西18丁目)의 고르고 골라 찾은 편집숍에선 충동구매를 유도하지 않은 정갈한 진열에 놀라고, 편집숍을 나서자마자 문득 배가 고프던 차에 코를 자극하는 빵 굽는 냄새에 이끌려 들어간 카페에선 입에 딱 맞는 음식과 홍차 맛에 한껏 매료되기도 한다.평범한 외관의 아파트이자 지금은 다양한 상점이 들어선 건물 스페이스 1-15에 들러 찾은 501호 가게 '타케차스 레코즈'에선 음악에 관심이 많은 다토가 레코드가게 주인과 음악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떤다. 그 모양새가 외국을 여행 중인 타국사람 같지가 않다.이들 3인은 또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그곳 소재 대학 캠퍼스를 꼭 방문한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 이유인즉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공놀이를 하고 연못가에 앉아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떠들며 지나가는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활기 넘치기 때문이다.이뿐 아니라 삿포로 시내 브루클린 파라의 따끈따끈한 3단 팬케이크 맛에 반해 사진 캡션에 '삿포로에 가면 꼭 들려야 할 곳 중 1순위로 등극할 만큼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은 핫케이크'라고 인쇄돼 있어 얼마나 그 맛에 반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커피를 곁들인 팬케이크 점심 한정세트 값이 850엔으로 가성비갑임을 빠뜨리지도 않았다.◆여행도 잠깐 쉬어가야 할 때'지하철과 연결된 지하상가에서 생화 두 다발을 고르고 숯불구이 돼지고기 도시락과 미소 된장국을 샀다. 슈퍼마켓 마감특가세일을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절대 놓칠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다.'(94쪽)물 설고 땅 낯선 타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이들 3인은 홋카이도로 오기 전 일본 출판사에 다니는 친구의 소개로 현지 지인을 소개받았다. 이들이 일본의 유행문화에 대해 꿰뚫고 있듯 소개받은 일본 친구도 대만 마니아라서 그동안 SNS로 충분한 교분을 쌓아두었던 터였다. 당연히 함께 만나 멋진 식사와 술, 노래 그리고 우정의 시간을 보낸다.◆홋카이도 여행, 더 깊숙한 곳으로일부러 토요일 아침 일찍 삿포로에서 전차를 이용, 오타루로 간 이들 3인은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무농약 채소시장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산지 직거래 장터를 체험하고 더 나아가 홋카이도 생활 속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고 싶어서 여행 중에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농장 아르바이트를 일정에 집어넣는다.오타루 도착 후 다시 버스로 이동해 찾아간 샤코탄 반도에 있는 농장. 여기서 그들은 황무지 정리, 잡초 뽑기, 신선한 계란 닦고 포장하기, 마늘종 정리 등 실제 농장일을 모두 소화해내는 가운데 농장주 아주머니와 때때로 파스타와 스키야키 등 일본요리를 만들며 일본인처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농장에서 며칠을 보낸 후 이들은 다시 하코다테로 와서 휴식을 위한 그 나름의 관광모드를 모색, 포장마차, 수제햄버거, 커피향과 음악 등 다양한 문화체험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이 책은 또 단락마다 그들이 들렀던 가게나 장소의 전화번호, 홈페이지, 쉬는 날 등 정보를 빼놓지 않고 기록, 여행가이드 역할도 충실히 하고 있다. 336쪽, 1만5천800원.

2018-09-27 13:45:52

무라카미 하루키. 매일신문DB

[잠깐상식] 소확행(小確幸) 뜻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20여년 전 주장한 행복론, 21세기 들어 인정 받은 셈?

소확행(小確幸)의 뜻을 궁금해하는 네티즌이 적잖다. 정부에서 관련 정책을 언급하며 쓰고도 있어 정부에서 만들었거나 언론에서 만든 조어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온 용어 또한 아니다. 바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가 원조다. 물론 이 책이 나온 후 대중적으로 널리 쓰인 것은 아니고, 최근 이 책에서 발췌돼 유행하게 된 셈이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와 워라밸(Work Life Ballance, 일과 삶의 균형) 등의 용어가 유행하면서 소확행 역시 필요에 의해 쓰이게 됐다는 것이다. 소확행은 욜로와 워라밸과는 또 다른 의미 및 느낌의 단어이다. 한자어 그대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한다.

2018-09-17 14:18:08

일러스트 전숙경 (아트그룬)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내 영혼의 까치발

내 영혼의 까치발 쉰의 중반을 넘던 때는 꽁꽁 동여맸던 허리띠를 잠시 풀어놓고 싶었다. 여유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지만 그마저도 사치였을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내 목숨은 갑자기 벼랑으로 추락했다. 나는 호소할 틈도 없이 뉘누리는 큰 입을 벌리고 날 향해 달려들었다. "대장암입니다. 위치도 몹시 나쁜, 횡행 결장암입니다." 눈을 감았다. 그때 바람이 불었던가. 눈앞에 있던 창이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리고 사람들 옷자락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긴장으로 손에 땀이 흥건했다. 눈을 떴을 때 컴퓨터 화면에는 내 몸의 일부인 내장 부위가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둥근 통로를 막고 있는 대롱들, 피고름이 엉겨 붙은 붉은 형체를 나는 무심히 바라보았다. "영상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3기로 추정되는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됐다면 수술도 불가능합니다." 그 순간, 날 붙잡고 있던 어떤 끈이 툭,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편치 않았던 지난날 삶의 조각들이 물거품처럼 바위에 산산이 부서졌다.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은 수시로 날 향해 날아들었다. 어느 날, 남편의 폭력과 인권유린에 길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내 존재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자유를 찾게 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대가는 처절했다. 거기엔 절망이란 단어가 찍혀 있었다. 대장 내시경 검사 전날, 무엇에 이끌리듯 나는 도깨비 시장으로 향했다. 깊은 어둠 속을 몇 시간째 정신없이 헤맸는지 모른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내 손에는 겨우 몇 가지 찬거리가 들려 있었다. 오래 살았던 만큼 많은 추억이 스며있는 동네였다. 낡은 집들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빌라가 들어서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 나오다 폐가를 만났다. 불에 탄 듯 폐가는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텃밭에 타다 남은 개나리 가지 앞에서 나는 서성였다. 손을 뻗어 개나리 가지를 쓸어내리는데 가지가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어차피 폐가와 함께 사라질 생명에 대한 애착이었을까. 난 무작정 개나리 몇 뿌리를 파헤쳐 까만 봉지에 주섬주섬 담았다. 검게 그을렸지만 가지 끝은 마치 사위어가는 내 모습 같아 신들린 듯 창가 화분에 심었다. 대장암 선고를 받던 날은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뒤척였다. 겨우 새벽녘에 잠이 들 무렵, 독서실에서 돌아온 아들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요즘 암은 웬만하면 다 치료가 된대요. 아무도 엄마를 못 데려가게 수술실 밖에서 내가 지킬게요. 그렇게 큰소리치던 아들은 겨우 대학생일 뿐이었다. 수술 전날 아들은 쪽 침대에서 노트북에 코를 박고 졸고 있었다. 검색창에는'대장암'이란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신에게 매달렸던 순간에 아들은 훌쩍 커버린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아들은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병은 그렇게 우리에게 각자의 길을 알려주었다. "지금부터 마취제가 들어갑니다. 천천히 하나, 둘, 셋을 세어보세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내 의식은 서서히 무의식으로 이동했다. 그때 온몸을 파고드는 경쾌한 리듬이 있었다. 급박한 수술실 안에 울려 퍼지는 요한슈트라우스의'봄의 소리 왈츠'는 무엇을 의미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건 내가 꼭 붙잡아야 할 삶의 끈이었던 것도 같다. 얼마쯤 지났을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온몸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지독한 한기와 함께 통증이 몰려왔다. 아들이 덮어준 푸른 담요 한 장의 온기로 나는 죽음과 싸웠다. 아들은 내게 온기였고, 아들에게 난 울타리였다. 수술 후 회복 기간은 죽음과 맞닥뜨린 후 찾은 또 다른 평안이었다. 비로소 영혼의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창가에 심어 둔 개나리도 겨울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자 파릇한 숨이 느껴졌다. "피~움!!" 한밤중 어디선가 새털같이 가냘픈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난 무심코 창문을 열어보았다. 어둠 속에서 노랗게 반짝이는 등불을, 부러질 듯 깡마른 시커먼 나뭇가지 끝에 생명의 환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들던 시간이 그 작은 꽃잎에 맺혀 있음을 알았다. 십 년이 지났다. 해마다 개나리를 보면, 아니 봄기운이 느껴지면 가슴이 뛴다. 마취 직전, 수술실 안에 흐르던 요한 슈트라우스의'봄의 소리 왈츠'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이던 내 영혼의 까치발이었다.

2018-09-17 11:29:06

인도불교의 역사/다케무라 마키오 지음/산지니 펴냄

인도불교의 역사/다케무라 마키오 지음/산지니 펴냄 인도 북동부 광대한 옥토를 가로지르는 강이 있다. 갠지스강이다. 이 갠지스강의 한 지류로 그 옛날 '네란자라'라 불렸던 강이 흐르고 강의 유역 근처에 높이 52m의 석탑과 그 안쪽에 무화과 나무 한 그루가 큰 가지를 드리우고 서 있다. 바로 석존이 그 아래서 좌선해 무상의 깨달음을 얻은 덕택에 이 무화과 나무를 '보리수'라 일컫는다. 하지만 그 보리수 근처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절도, 불상도, 보살도 없다.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불교는 최초 출현 이후 어떻게 전개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은 걸까? 그 해답이 이 책에 있다. 책은 주로 인도에서 석존이후부터 밀교이전까지 불교의 사상적 전개를 추적하고 있다. 석존의 생애부터 입멸 후 부파불교의 전개, 대승불교의 출현, 공(空)의 논리, 유식의 체계 등을 자세히 설명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들어온 대승불교의 출현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게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불교의 분열, 부파불교의 전개 '하여튼 상당히 다른 불교가 같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이상, 거기에는 무엇인가 입장이나 공통의 사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8쪽) 깨달음을 최대 목표로 삼는 불교의 가르침도 석존 입멸 100년쯤(BC283년경)에 이르면 하나의 교단으로 존속해 왔던 승가에서 의견의 대립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를 해결하고자 교단은 1차 결집에서 석존이 제정한 계율은 고수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지만 이른바 혁신파들은 여기에 납득하지 않고 새로운 분파를 형성, 혁신파인 '대중부'와 보수파인 '상좌부'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분열될 무렵 제2차 결집이 이어지나 다시 한 번 교단이 분열되면서 20개 정도의 교단이 형성되고 이를 '부파불교'라고 부른다. 부파불교는 본래 석존의 생존 때의 간명한 가르침과 사후 경전에 대해서 개념을 정확히 하여 불교 교의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점차 복잡한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들은 석존의 언어를 해석하고 또 깊이 천착해 감에 따라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인식을 극도로 자세하고 치밀한 논리로 규명해 나갔다. 한 예로 대표적 부파불교인 설일체유부파는 세계를 5범주로 나누고 또 이를 75법에 따라 분류하는 복잡성을 갖추기도 했다. ◆불교의 개혁, 대승불교의 출현 '석존의 설법은 아함경으로 정리되어 각 부파에 전해져 유지되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3, 4백 년가량 지나서 새로운 불설(佛說)이 천연스럽게 확장되고 있었다.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무량수경과 같은 경전이 석존의 설법으로서 선포되었던 것이다.'(129쪽) 이것은 새로운 불교의 출현이었다. 부파불교에서 전혀 생각도 못했던 불교의 '신흥종교' 탄생이었다. 새 불교의 주체들은 자신들을 '대승불교'(위대한 교의)라 부르고 종래의 불교를 '소승불교'(저열한 교의)로 비난했다. 이때 불교문학 운동도 유입됐다. 대승불교 수행의 핵심이 되는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은 불전문학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에 귀의하여 보리심(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의 마음)을 발한 자는 모두 보살로 불렸다. 오늘날 우리네 절에서 자주 듣는 '보살님'도 이때부터 생겨난 용어이다. 원래 종교라는 세계에서는 확실히 객관적 사실이나 역사적 진실만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가령 신화든 설화든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 종교적 의미이며 진실이다. 대승불교는 문학을 통해 석존을 해석하고 깊이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종교적 진실을 체험하고 있는 불타를 만나고 그 핵심을 널리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대승불교도들은 선정 속엣 이루어지는 깨달음의 체험에 근거를 두고 그 과정에서 자아와 존재일체가 공(空)임을 밝히기 위해 연기설이나 유심(唯心)과 같은 다양한 언어들을 주도면밀하게 표현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본체를 가지지 않는 공의 존재방식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현상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공의 논리와 유식의 체계 대승 경전을 기반으로 불교의 철학적 사상체계가 정리되어 가던 중 불교는 이제 중관파와 유가행파의 2대 학파로 확립된다. 중관파는 나가르주나를 조사로 하는 학파이며 유가행파는 마이트레야, 아상가 바수반두가 이 사상의 대성가들이다. 다만 중관파는 일체의 언어를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반면 유식행파는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 다 같이 하나의 식(識) 속에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마치 궤변을 갖고 우롱하는 것과 같은 중관파의 '중론'은 모순율을 구사하는 형식논리학을 고수하는 한편 유식행파의 유식론은 깨달음을 실현하면 어떤 길을 걷고 성불하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는 게 서로의 다른 점이다. 이후 인도불교는 1203년 이슬람의 침공으로 파괴되어 갔지만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 전해져 계속 생존했다. 288쪽, 2만원. ▷지은이 다케무라 마키오… 1948년 도쿄에서 출생. 도쿄대학교 문학부 졸업. 문화청 전문 직원. 미에대학 조교수와 쓰쿠바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도요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승불교사상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유식의 구조' '대승불교 입문' '성유식론을 읽다' 등 다수가 있다.

2018-09-12 17:57:28

인생의 밀도/강민구 지음/청림출판 펴냄

인생의 밀도/강민구 지음/청림출판 펴냄 매주 월·화요일이 되면 전국의 크고 작은 출판사에서 펴낸 신간 200여권이 문화부로 배달된다. 쪽수와 판형도 다양하지만 배달 목적은 단 하나, '날 좀 소개해주세요'이다. 그러나 지면에 소개되는 도서는 열 권 안팎이 고작이다. 이번 주도 간택(?)을 기다리는 책들을 정리하던 중 눈에 띄는 책이 손에 잡혔다. 지은이 이름이 낯익었다. '인생의 밀도'란 제하에 부제가 '날마다 비우고 단단하게 채우는 새로 고침의 힘'이었다. 지은이는 강민구. '어랏! 혹시 내가 아는 사람?' 약력을 보니 맞다. 그렇다고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기자와의 인연은 이렇다. 2014~2015년 그가 창원지방법원장이었던 시절, 딱딱하기만 했던 법원 인테리어를 그림과 서화로 장식, 세간에 관심을 모으면서 전화통화와 이메일로 그를 인터뷰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 카카오톡으로 그는 관심사나 강연내용 등을 기자에게 수시로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기자가 늘 답변을 하는 편은 아니다. 한때 대법관 물망에 올랐고 현재 서울고법 부장판사(전 대법원 법원도서관장)인 그가 쓴 '인생의 밀도'는 2017년 유튜브를 통한 화제의 명강 '혁신의 골목에 선 우리의 자세'를 엮은 것이다. 영상은 1시간이 넘는 분량이었음에도 조회 수는 금세 100만을 넘어 150만 건에 이르렀다. 책은 올 2월 출간됐지만 다시 '신간'이란 이름으로 배달됐다. ◆60대 법조인의 강연이 회자되는 이유 '현대 생활의 필수품인 스마트폰은 확장된 외뇌(外腦)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몸을 깨우는 새벽에, 스마트를 리부팅하면서 나의 뇌를 깨운다. 새로운 날의 시작을 맞는 나만의 의식이다.'(29쪽) 60대 현직 법조인의 유튜브 강연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뭘까? 적지 않은 나이의 남성이 낯선 디지털 툴을 능숙하게 다루고 시연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각성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으리라 짐작된다. 또 한 분야서 오래 천착한 전문가가 보여준 변화에 대한 자세와 인생론이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랬다. 그는 자기만의 의식을 통해 변화의 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섬세함의 소유자다. 흔히 나이 들수록 생소함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걸 그는 해내고 있고 왜 그래야 하는 지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답을 제시하고 있다. ◆깊은 통찰은 분야를 넘어 두루 적용 한국 사법정보화의 틀을 마련한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한 저자는 경험에 비추어 정체되지 않는 인생과 변화를 맞이하는 자세에 대해 7가지로 요약된 개념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첫째, 리부팅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관성에 의해 살아지는 힘겨운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순간마다 지나온 길을 복기하며 스스로를 정비할 리부팅의 순간이 필요하다. 리부팅을 않으면 삶에 찌꺼기가 쌓이고 그 찌꺼기는 삶 곳곳에 스며들어 인간을 마모시킨다. 둘째, IT감수성이다. 외부 변화에 반응하며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급변하는 글로벌 IT환경을 유연하게 이용할 줄 안다면 어떤 변화도 맞닥뜨렸을 때 당당할 수 있다. 셋째, 적자생존(기록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이다. 경험을 정리해 통찰하는 글쓰기 습관을 들인다. 넘치는 정보도 기록이라는 과정을 거쳐 정리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넷째, 생각근육이다. 외부 반응인 IT감수성과 내부 갈무리인 적자생존과 아울러 통찰의 힘을 배양한다. 생각근육은 다양한 독서와 꾸준한 글쓰기, 명상과 사고실험의 생활화, 용기 있는 질문 등으로 길러진다. '생각의 근육은 육체의 근육과 같아 점점 단련이 될 수도 있고 퇴화될 수도 있다. 한 군데만 집중적으로 단련할 수 있고 여러 부분의 근육을 균형 있게 단련시킬 수도 있다'(75쪽) 수집과 사유를 통해 축적되는 단단한 생각의 힘은 웬만한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다섯째, 디지털 디톡스다. 사람은 저마다 내면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 바로 편견과 선입견이며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이 둘을 적용하곤 한다. 만약 매일 모든 디지털 기기를 꺼두고 명상에 잠기는 시간을 가진다면. 현대의 디지털 문명이 주는 피로감을 씻고 디지털 기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여섯째, 적자생존(積者生存)은 자신이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을 나눔으로써 선을 쌓는 변주이다.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닌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삶의 블루오션인 '적선'인 셈이다. 마지막은 조각모음이다. 하루를 마감하기 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고요히 나를 돌아보고 하루의 오류를 찾아내고 여전히 빈 공간을 채움으로써 다가올 내일의 새벽을 준비하는 것이다. ◆논리와 설득의 만만찮은 내공 저자는 책을 통해 농밀한 인생의 밀도를 어떻게 축적하며 또 이를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를 경험과 많은 독서 분량으로 설득하고 있다. 글을 전개하는 논리 또한 적절한 인용과 경구를 사용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주목을 이끌어 낸다. 간절한 공부와 치열한 성찰로 충실히 채워진 삶의 밀도. 그 밀도가 껍질을 비집고 나와 청자(聽者)의 심금을 울린다. 268쪽, 1만5천원 지은이 강민구 구미 출신으로 1988년 판사로 임명해 창원지방법원장, 부산지방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함께하는 법정' '손해배상 소송실무'(공저) 등이 있다.

2018-09-05 14:29:47

어느 물리학자의 세상 보기/김찬주 지음/ 우리교육 펴냄

어느 물리학자의 세상 보기/김찬주 지음/ 우리교육 펴냄 인류가 만든 가장 충격적인 이론은 뭘까?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다. 인류가 이룩한 현대 문명의 거의 모든 것이 이 두 이론에서 나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책은 물리학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나'라는 개인인 대학교수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모은 것이다. 필자 김찬주 교수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우주론과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의 간략한 역사와 성과, 그 가치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최근의 중력파 발견 등 최신 물리학을 소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는 우주선 뉴허라이즌스호와 영화 '인터스텔라' 등을 소재로 과학의 가치와 과학 교육에 대해 생각하고 과학과 종교, 진화와 창조의 관계를 과학자의 입장에서 소개하고 여운을 던지기도 한다. 또 본질적으로 전혀 실용적이지 않는 과학이란 학문의 위대함을 설명하면서 우주의 약 75% 넘게 존재하는 암흑물질을 통해 세상에 보이지 않는 힘의 작동을 역설한다. 196쪽, 1만2천원

2018-09-04 15:24:15

불교의 탄생/미야모토 케이이치 지음/한상희 옮김/불광출판사 펴냄

불교의 탄생/미야모토 케이이치 지음/한상희 옮김/불광출판사 펴냄 기원전 6세기 쯤 인도는 사회'사상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밀의 수확량과 수공업이 번성하면서 출신 계급보다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됨에 따라 전통 종교 베다에 반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불교 역시 이 시기에 베다에 반발해 생겨난 많은 사상 중 하나였다. 이 책은 불교 성립 이전부터 붓다 입멸까지를 다루며 실용주의자 붓다는 원칙을 고집하는 것을 엄격히 경계한 인물로 불교의 긴 생명력의 원천을 역설하고 있다. 더불어 초기 불교 문헌을 중심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해설을 덧붙이면서 붓다 생존 당시와 가장 가까운 초기 불교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일례로 붓다를 칭하는 명칭 가운데 '타타가타'(Tathagata)라는 용어도 '이와 같이 온 분'이라는 뜻의 여래(如來)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와 같이 건너간 분'이란 뜻의 여거(如去)로 이해해야 하며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세상의 무상함이나 찰나멸이 아니라 인간은 그리 오래 사는 존재가 아니므로 수행에 몰두해야 한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240쪽, 1만6천원

2018-09-04 15:23:34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고급 노숙자/김정래

어느 늦은 봄날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 떠돌이 개 한마리가 들어왔다. 개는 머리털이 텁수룩한 것이 앞으로 길게 내려 한 쪽 눈을 가렸고 크기는 어미 고양이만 했다. 몇 날 며칠을 굶었는지 배는 등가죽에 붙었고 바싹 마르고 꾀죄죄한 것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평소에 개를 좋아하는 아내는 불쌍하다면서 밥을 국에 말아다 주었다. 개는 멀찍이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면서 가까이 오지 않고 사람을 몹시 경계하였다. 아내는 개 밥그릇을 개가 보는 한쪽에다 놓고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얼마 후 나가보니 개는 밥그릇에 입도 대지 않았다. 주변을 의식하여 밥그릇에 가까이 오지 않는 것으로 짐작하고 그냥 놓아두고 하룻밤을 지났지만 그대로였다. 아내는 작전을 달리하여 식구들이 먹다 남은 고깃덩이를 갖다 주었다. 개는 여전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고기가 담긴 그릇을 두고 자리를 피해주니 설설 다가 와서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먹기 시작했다. 개는 떠돌이 신세로 여러 날을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굶으면 굶었지 아무 것이나 먹지 않는 입맛은 고급이었다. 아마도 어느 돈푼이나 있는 집에서 귀여움과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쓰라린 배신을 당하여 쫓겨난 것 같았다. 이웃 주민들도 우유를 갖다 주고 외식하고 남은 고기도 가져다주면서 보살펴 주었다. 잠자리는 정문 가까이 베란다 밑 화단에다 정해놓고 기거하였다. 저층 아파트에, 노년층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이웃 간에 인심도 그리 박절하지 않았다. 굴러 들어온 개라 신고를 하자는 주민도 있었지만 한 울타리 동거를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아내는 우유와 고기를 구해다 주면서 개를 거두는 성의가 보통이 아니었다. 개도 그 정성을 아는지 우리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아파트 출입문 입구에 앉아 기다리다가 꼬리를 흔들면서 주위를 빙빙 돌다가 발딱 뒤집어 누워 네 다리를 흔들면서 재롱을 피웠다. 그리고는 집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것을 억지로 떼어 놓곤 했다. 아내의 신조는 개는 어디까지나 밖에서 키우고 집안에 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내 맘을 놓이게 했다. 나는 사실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애완견이 진열되어 있는 거리를 지나갈라치면 개 특유의 노리끼한(노리착지근한) 냄새가 비위를 몹시 뒤틀리게 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개에게 고급 천으로 옷을 입혀가지고 안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지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개 주둥이에다가 연신 입을 맞추면서 엄마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개를 어르는 것은 꼴불견이다. 한술 더 떠 죽은 개를 화장시켜 납골당에 안치하는데 수백만 원이 드는데 대구에는 화장장이 없어 부산까지 가서 화장을 한다고도 했다. 주변에서 개를 부모형제보다 더 챙기고 정성을 쏟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 누려야할 사랑과 행복을 애완견이 앗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에 개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어머니를 따라 동네 입구에 있는 과수원집에 간적이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마당에 있던 송아지만한 개가 정면으로 뛰어와 달려드는 바람에 엉겁결에 고함을 지르며 뒤로 돌아섰는데 개는 내 어깨위로 확 뛰어올라 머리를 물었다. 개 주인이 빗자루를 들고 쫓아 나와서 개를 후리 쫓지 않았으면 더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 개 주인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개털을 잘라 주는 것을 볶아서 기름에 개 가지고 물린 상처에 발랐지만 별 효험도 없이 쉽게 아물지 않아 한 동안 고생을 했다. 그로부터 개를 만나면 물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서 피하게 되었다. 아내가 개를 너무 좋아해서 오래전 단독 주택에 살적에 개를 키운 적도 있었다. 이웃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 받아서 아내가 바둑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지극정성으로 거두니까 개도 식구들을 잘 따랐다. 다 자랐는데도 고양이 크기만 한 것이 어린아이들과 장난을 치면서 잘 어울려 놀았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걸음으로 마당에 들어서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반가이 맞이하여 무덤덤하게 대해주던 내 마음도 돌려놓았다. 온 식구들의 귀여움을 재롱으로 보답하여 주던 바둑이가 어느 날 사람을 물 듯 한 표정으로 마당을 정신없이 몇 바퀴 돌더니만 마루 밑 컴컴한 구석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는다. 이웃집 할머니가 쥐약을 섞어놓은 음식물을 먹은 것 같았다. 말은 못하고 사경을 해매이고 있는 것이 너무 애처롭고 안타까워 약이라도 먹여 보려고 마루 밑을 들여다보고 손짓으로 불러내어도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짖어 대면서 식구들이 접근을 못하게 했다. 마당에 똥 한번 눈 적이 없는 영리하고 순한 것이 배속에 창자가 녹아 내려가고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생각하니 내 마음도 녹아 내렸다. 그렇게 가족들의 가슴을 졸이고 애태우던 바둑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개에게는 정을 주지 않기로 했다. 베란다 밑에서 노숙하는 것이 안쓰러워서(안슬프서) 이곳저곳 수소문을 해서 아담한 개집을 구해다가 말끔히 청소와 소독을 하여 이부자리까지 깔아서 뒷담벼락 밑에 호텔처럼 마련하여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밥그릇까지 그 앞에 가져다 놓았지만 개는 안에 들어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개집 안에 입맛 당기는 음식을 차려 놓고 유인을 했지만, 들어가서는 그릇만 비우고 다시 나와 버렸다. 제 의지를 쉽게 바꾸지 않는 주관이 뚜렷한 면모를 가졌다고 할까, 아니면 고집불통이라고나 할까? 끝내 개는 고급 호텔에는 들어갈 생각도 않는다. 그날로부터 아내는 개에게 "고급 노숙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고급노숙자의 입맛은 변함없이 고급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고급노숙자가 때 물을 좀 벗고, 털에는 윤기가 돌 즈음부터 밤에는 가끔씩 "컹컹" 하고 짖기 시작하였다. 풍신에 비해서 목소리는 우렁차고 듣기에 부드러웠다. 제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 지나가면 한 번씩 영역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늦잠으로 일관하던 나도 고급노숙자가 둥지를 틀고 부터는 밤새 안녕을 문안하는 아침이 잦았다. 낙엽이 한잎 두잎 쌓여 가을이 깊어 가던 날, 아침이 되어도 고급노숙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주변과 골목길을 둘러보아도 흔적도 없고, 외출을 했나 해서 저녁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그 날 이후로는 영영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 올 때면 어디에 있다가 조르르 달려와서 재롱을 피우던 것이 보이지 않으니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다. "고급 노숙자"는 첫 만남부터 내안에 잠재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자아내게 했는데, 떠나면서는 애잔한 그리움을 남기는구나! 몇 달 동안이나마 우리들 가슴에 따스한 정을 일깨워 준 "고급 노숙자"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더 따사롭게 보살펴 주는 새 주인을 만나 귀여움을 받고 있을까? 아니면 굶주리고 지친 모습으로 어느 골목을 해매고 있지나 않을까? 우연히 닥아 와서 홀연히 가버린 "고급노숙자"의 재롱이 못내 애련한 흔적으로 아롱아롱 겹쳐진다.

2018-09-03 11:33:36

위험한 미래/김영익 지음/한스미디어 펴냄

위험한 미래/김영익 지음/한스미디어 펴냄 고속 성장하던 한국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충격타를 맞았고, 수많은 서민들의 피눈물을 자양분 삼아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0년만인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또 한 번 글로벌 경제 체제를 뒤흔들어 놓았고 이에 각국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 및 통화정책을 운용해 지금의 세계 경제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마구잡이식 통화 팽창 정책은 개인과 기업이라는 경제주체를 부실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글로벌 경제의 성장 한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경제주체들을 그저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다가올 10년의 글로벌 경제의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세워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생존경제학'이 됐다.지은이 김영익 교수(서강대 경제학부)는 2014년 '3년 후 미래'에서 중국발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위협할 것임을 경고했고 정확히 1년 후 현실화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글로벌 경제가 심상찮다2008년 주택을 담보로 한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론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주요 국가들은 이른바 '양적완화'란 이름으로 천문학적 돈을 찍어내는 재정'통화정책을 운용했다. 이로 인해 풀린 유동성자금 때문에 각종 자산 가격에 거품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자 이 거품은 실물경제에까지 전이돼 각국은 성장의 한계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출의 증가로 일시적인 소비와 투자가 늘면서 경기가 회복되는가 싶었는데 결국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면서 선진 각국의 정부재정이 부실해지고 신흥국에선 기업마저 부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 여파로 주요 국가의 채권과 주식시장은 거품이 빠지면서 경제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명목금리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까지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 도화선을 붙인 것은 최근 미중 무역마찰의 조짐이다. ◆미중 무역마찰, 금융전쟁으로 확산?'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말이 있다.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기존 지배 세력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위협해 올 때 전쟁과 같은 극심한 긴장이 발생하는 상황을 의미한다.현재 글로벌 시장은 신흥세력인 중국이 기존 지배 세력인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2017년 미국의 대중무역적자는 3천752억달러로 2001년부터 2017년까지 누적적자로는 4조3천793억달러에 달한다. 만약 중국이 자국의 경제구조조정을 명분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엄청난 액수의 미국 국채를 내다 팔 경우 미국에 미치는 경제적 충격은 가히 쓰나미급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중국의 경제성장과정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국가는 한국이다. 2000년부터 2017년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 누적흑자는 5천535억달러로 만약 중국이 글로벌 금융시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자국 경제의 구조조정에 나선다면 상대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크게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경제의 현실 진단1958년생 개띠인 지은이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한국 경제의 과거와 미래를 진단한다. 1958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81달러. 지은이가 대학을 진학할 무렵인 1977년엔 1인당 국민소득이 갓 1천달러를 넘어섰다. 이후 1988년까지 우리나라는 연평균 10%의 고속성장을 하는데 그 바탕엔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라는 '3저 현상'이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그중 하나가 실물경제에 비해 돈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소위 마샬케이(총통화/경상 GDP)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다른 하나는 국민소득 가운데 가계비중은 낮아지고 기업 몫은 증가했다는 점이다. 임금상승률이 기업이익증가율에 미치지 못했고 자영업자가 어려움을 겪게 됐고 이자소득이 줄었다. 이러 이유로 IMF이후 우리나라 가계는 가난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기업은 투자를 줄이고 돈을 모아 저축이 많아져 점점 부자가 됐다. 현재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문제도 가계가 가난해져 물건을 살 돈이 점차 줄고 있다는 데 있다. '가계가 신발을 사주지 않으면 신발공장도 망한다. 가난해진 가계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기업이 임금인상이나 고용증대를 통해 먼저 나서야 한다. 더불어 조세 등을 통한 정부의 소득분배 역할이 더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책 151p)이 논리가 바로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소득주도성장이론의 배경이다. ◆미래 위기 대비 10가지 조언지은이가 예측하는 미래 글로벌 경제의 주요 관점은 ▷달러는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원화는 지속적인 상승 추세에 있다 ▷0% 금리시대 도래한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잠재성장률의 저하와 정부 재정적자가 확대된다 등으로 요약된다.이에 따라 지은이는 에필로그에서 미래 생존경제학의 위한 10가지 조언을 들려준다.1)향후 10년은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 혹은 디스인플레이션의 시대다. 가능한 한 부채를 줄여야 한다. 2)갈수록 부동산은 유동성이 떨어진다. 고정소득이 나오는 임대 부동산에는 자산의 일부를 투자해도 좋다. 3)집은 투자재가 아니라 소비재다. 전세제도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4)금리는 장기적으로 0%대로 떨어질 것이다. 금융자산의 30% 이상은 채권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 5)주가는 일정 범위 내에서 조정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변동성이 작고 배당금을 많이 지급하는 기업을 사라. 6)해외주식도 포트폴리오에 담아라. 7)자산 가격변동에 대비할 수 있는 해지펀드에 투자비중을 늘려라. 8)달러 가치 하락으로 금 가격은 상승한다. 금 투자를 늘려라. 9)거래 금융회사를 잘 선택해야 한다. 금융회사들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보험회사도 구조조정될 것이다. 10)자산 배분을 잘 하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252쪽, 1만6천500원 지은이 김영익현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한국금융연수원 겸임교수와 LG하우시스 사외이사로 활동 중. 자신만의 '주가예고지표'를 바탕으로 9'11 테러 직전의 주가 폭락과 그 후 반등, 2004년 5월 주가 하락, 2005년 주가 상승 등을 맞춰 '족집게' 애널리스트로 떠올랐다.

2018-08-30 11:12:22

[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파도

파도(波濤)/최병길 구부러지는 길목을 두고 떠다니는 것들 날을 간다, 벼린 날을 갈며 그늘에 벼리고 베인 물이랑들이 한없이 거세어진다 물줄기의 향방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몸 상처로 물결을 이끌고 내몰아서 지느러미를 이루어 낸다 어차피 밀물과 썰물의 교대는 공간너머 시간의 터울 속에 이루어지는 원리니까, 수평선을 깔고 오는 붉어짐 속에서 벼랑어깨 위 축축한 것들이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며 곡선의 부유(浮遊)권을 암시하듯 해송 옆, 가지들 되돌아온 해풍에 추적추적거리며 파도의 노도(怒濤)를 집요하게 지새우며 지켜보았다. 서둘러 낮달의 낯빛을 비추는 무렵 길목을 거스르는 파도 휘두르고 있는 연유다 오후는 저물어지고 새벽의 항로는 정처 없이 깊어져서 곡선의 눈부심이 되었다. 물살에 박힌 가벼운 날로 귀밑머리 무늬에 묻혀 삼켜진 것들은 투명하지만 차갑고 날카롭지만 처량하다 이제 파도라 밑줄 긋고 나면 켜켜이 풀어놓는 숨비소리가 들숨과 날숨의 표류하며 소용돌이친다 비수를 품은 엽선들이 숨줄을 틔우고 있다

2018-08-27 11:43:00

[시니어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파도 당선소감

파도/최병길 당선소감 저에게 이런 큰 상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시를 쓴지 거의 20십여 년 만에 이런 상을 받으니 과연 이 상을 받아도 될지 무안한 마음만 듭니다. 제가 이 상을 타기에는 저의 시는 좀 진부하고 낡았지만 이렇게 좋게 보시고 뽑아주신데 대해 무엇보다도 심사의원이하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 분들이 없었으면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했겠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갑작스레 이런 귀하고 영예로운 연락을 주시니 제겐 너무나 충격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앞으로도 열심히 시를 쓰겠습니다. 언제나 시는 제게는 오랜 갈증이었고 늘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시에 대한 애착이 있었으나 어느 순간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시를 놓았습니다. 뒤늦게 쉰이 넘어서야 조금씩 시를 쓰게 되고 특히 문학상을 탄 시들을 즐겨 읽었고 언어의 놀라움을 깨닫곤 했습니다. 늘 어려울 때나 힘들 때 제게 알 수 없는 큰 힘이 되어주었던 시가 이렇게 무한한 영광까지 주니 무어라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저보다 훌륭한 시를 쓰신 분들에게 죄송스럽지 않도록 앞으로도 시를 계속 쓸까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 손자 그리고 사위들에게 자랑하게 되어서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시를 쓸까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08-27 11:42:46

사본_[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시부문 당선작]천(千)의 손

천(千)의 손 / 우옥자 장갑만 파는 가게가 있다면 저마다 다른 설명서가 붙어있을까 뒤처리가 버거워질 땐 빨간 고무장갑을 낀다 기름 때 비린내 그의 타액 까지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쿨한 이별이라고 가끔 빼내기 어렵고 잘 찢긴다는 걸 주의하라고, 사각의 갑에 천 개의 손을 상비한 보살의 손, 크리넥스 뽑아 쓰듯 톡! 하고 비닐 손을 꺼내 나물을 조물거리다 홀랑 뒤집어 버린다 손가락 끝에 코팅된 눈이 반짝! 장미를 꺾을 땐 바닥이 단풍든 목장갑을, 달아오른 손을 잡을 땐 누군가는 가죽장갑을 추천한다 손뜨개 벙어리장갑이 눈덩이를 굴린다 아기를 안아 올린 산파의 피 묻은 장갑, 죽음을 닦는 장의사의 장갑, 추운 장날 마디 잘린 장갑을 끼고 지폐를 세던 장꾼들, 장갑만 끼면 알통과 근육이 솟는 공사판 남정네들, 삶아 빨아 걸어놓은 푸줏간의 목장갑들…그들은 모두 손의 전신 가장 오래된 戰士는 저기 바닥에 굳은 살 박히고 물때 낀, 슬픔조차 맛깔스런 맨손이라는 장갑을 낀 어머니 손 뜨거운 것 번쩍 들었다 귓불에 대고 호 불던 마지막까지도 벗지 못한 저승꽃 흐드러진 저 장갑이다

2018-08-27 11:41:29

21세기에 새로 쓴 인간불평등사/이선경 지음/프리스마 펴냄

21세기에 새로 쓴 인간불평등사/이선경 지음/프리스마 펴냄 2017년 크레디트 스위스의 데이터를 인용한 옥스팜에 따르면 지구촌 부(富)는 상위 1%가 이미 전체 부의 50%를 넘게 차지해 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다. 더 실감나게 말하자면 지구촌 약 37억 명의 부를 합한 것과 맞먹는 부를 소유한 부자는 2000년 388명, 2013년 85명, 2017년엔 다시 42명으로 부의 집중도가 점점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2018년 7월 현재 세계 최고 부자 순위 1, 2위인 제프 베조스(아마존 창립자)와 빌 게이츠의 재산은 각각 1천490억달러와 938억달러로 매일 1억원씩 아낌없이 써도 대략 4,600년과 2,900년이 걸린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IMF이후 '88만원 세대'와 같은 책이 회자되면서 불평등 문제가 어렴풋이나마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책은 생물학, 역사, 철학, 사회학, 경제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불평등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한 역작(무려 696쪽)으로 평가된다. 놀라운 건 저자가 교수나 학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으로 6년에 걸친 끈질긴 연구와 놀라운 통찰력이 돋보인다. ◆평등한 세상은 유토피아에 불과? 인간을 폭력성과 욕망의 덩어리로 일단 규정하면 인류 역사는 불평등의 피라미드를 유지'강화하려는 자와 이를 허물려는 자의 투쟁으로 점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인간은 호혜적 협력과 상호 관심, 자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집단지성을 발휘할 줄 아는 존재이다. 또 이러한 인간의 양면적 특성은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적 불평등과 정의에 관한 본질적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 같은 모순의 근거로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헌법과 법률에 정의에 관한 보편적 개념을 담고 있으나 정의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세상이 아직도 충분히 정의롭지 않다면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불평등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연 생태계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뱀, 소, 돼지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불의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식인행위'는 또 어떠한가? 자연의 눈에서 보면 동종살해나 전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선악이나 시비의 개념으로 부자연스럽다고 잘못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판단은 독자의 몫인 것 같다. 결국 정의란 것도 인간 사회 내에서의 '상호생존'이라는 토대위에서 요구될 수밖에 없는 필요조건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한가? 생물의 시각에서 인간을 보면 크게 3가지 특성이 있다. 물질대사, 환경적응, 후손 복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성은 생태계의 맨 밑바닥을 차지하는 단세포 생물인 박테리아의 작동원리와 다르지 않다. 또 역사의 기원을 거슬러 가면 도덕성이나 정의를 전제로 하는 사회는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한 후 첫 복제가 일어난 그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하고 사회 속의 생물은 이때부터 경쟁과 협력이란 두 바퀴를 굴리며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생물은 그들이 선택한 생존전략에 따라 ▷각자도생형 ▷진사회성형 ▷사회적 동물형을 구분된다. 진사회성은 독립된 개체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가는 형태를, 사회적 동물형은 동종의 혈연이나 비혈연 개체와 조직적인 사회를 형성해 살아가는 동물을 의미하며 인간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 경우에 독립적인 개인플레이형(호랑이)의 세계가 지배하는 원리가 '경쟁'이고 팀플레이형(개미) 진사회성 동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협력'이라면 사회적 동물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개체들 간 '경쟁'과 '협력'이 묘하게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한다. 또 사회적 동물 사회는 상호 이기성의 충돌과 상호 의존이라는 딜레마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면서 사회 내에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존재하고 또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사회 속 질서와 집단 유지라는 명목으로 서열이 생겨나고 이 서열이 결국은 불평등의 기원으로 작용하게 된다. ◆보다 높은 수준의 정의는 가능한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든 간에 때때로 나 자신이나 나의 행위는 선에 부합하고 타인이나 타인의 행위는 악에 부합하는 것처럼 꾸미는 속임수를 발명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본문 중에서) 인류의 역사의 단계에서 노예제, 봉건제,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공통점을 꼽으면 소수로 하여금 다수에 대해 구조적 기생을 가능하게 해주는 피라미드 구조임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저자가 책에서 든 다양한 사례처럼 역사는 피라미드와 반(反)피라미드의 얼개로 짜여져 있다. 왕과 귀족은 전 국민을 도구로 사용하려 했고 평민은 노예를 도구로 사용하는 피라미드형 권력을 형성한 대신, 고통스러운 불평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한 하층민과 노예들의 저항 또한 다른 역사의 물줄기를 형성해 왔던 것이다. 이러던 것이 근현대에 이르러 불평등 피라미드 구축원리인 자본주의와 평등을 전제로 한 민주주의가 묘한 동거를 시작하면서 정의라는 개념은 흥정과 협상의 산물로서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그럼 보다 높은 수준의 정의는 가능할까? 저자는 사회적 신뢰가 구축된다는 전제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그 일례로 열린 정보와 초공간적 소통이 가능한 블록체인을 든다. 개체는 분산하되 집단지성과 비슷한 상호 작용으로 모든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블록체인 같은 효율성을 보장한다면 '정의구현'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지은이 이선경은 한양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예술디자인대학 석사과정을 중퇴했다. 현재 원스탑잉글리쉬 대표이자 유튜브 채널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의 운영자이다

2018-08-23 14:50:42

사마천의 마음으로 읽는 사기/이승수 지음/돌베개 펴냄

책을 읽음에 글자에 매달리지 말고 글쓴이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가히 독서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사기열전' 70편 중 30편의 열전을 뽑아 새로 번역했고 여기에 평어를 덧붙였다. 선정기준은 서사가 지닌 박진감과 문장의 구성미에 있다. 또한 사마천의 입장과 판단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들을 대상으로 했다. 저자에 따르면 사마천은 '사기' 속에 자신의 기쁨과 슬픔, 조소와 신음을 숨겨놓았는데 이는 명백히 인물과 사건에 대한 주관적 태도이자 감성적 작용으로 갈등이 첨예하게 묘사되기도 하고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사건을 제시하고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사마천의 문심(文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기'가 시대를 넘어 책장 속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사기' 독법에서 저자는 각 편마다 네 글자의 한자 어구로 읽기를 제안한다. 마치 길안내 표지판처럼 말이다. 역사가 사마천이 아닌 소설가 사마천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인 셈이다. 504쪽, 2만2천원

2018-08-22 14:47:41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김세진 글/호밀밭 펴냄

12세기부터 막부체제 아래 병영국가의 모습을 지켜오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면서 제국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인물의 절반 이상은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 현)의 하기(萩)에서 태어났다. 이토 히로부미, 명성황후 시해의 배후 이노우에 가오루와 시해 주범 미우라 고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이 모두 하기 출신이다. 왜 그런가? 조슈번은 19세기 서양세력의 등장과 함께 존왕양이 사상과 융합돼 젊은 사무라이들을 움직이게 한 중심지로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가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쇼인은 일본전역을 돌아다녔고 많은 학자를 만나 토론하며 시야를 넓힌 후 26세 때부터 조슈번 하기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개인학교를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책은 이런 요시다 쇼인의 일대기와 독특한 수업방식 및 쇼카손주쿠 출신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쇼인은 "만권의 책을 읽어야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스스로 노력한 것을 가볍게 여겨야 만민의 안위를 지킬 수 있다"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합병시켜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232쪽, 1만5천원.

2018-08-22 14:47:15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

기획 & 시리즈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