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경교수의 프랑스 수도원 탐방기]⑥생 푸아 수도원(The Abbey of Saint Foy, Conques): 순례자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곳

생 푸아 수도원(The Abbey of Saint Foy, Conques): 순례자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곳

 

생 푸아 수도원은 산 중턱 언덕에 기대선 중세의 집들과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다가왔다. 생 푸아 수도원은 산 중턱 언덕에 기대선 중세의 집들과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다가왔다.

 

"가슴속에서 대자연이 그토록 마음을 휘젓기에 사람들은 순례를 떠나고자 열망한다." 인간의 본성과 순례에 대한 초서(Geoffrey Chaucer)의 단상이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루덴스가 아니라 호모 비아토(homo viator, 순례하는 자)가 아닐까! 라틴어 순례자(viator)는 '움직임'이라는 표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순례는 움직임의 예술이고, 인간은 움직임의 존재다. 인간의 마음조차 자기 존재의 중심을 찾아 부단히 움직인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순례적 존재이고, 인류의 역사는 순례와 함께 시작되었다. 순례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 콩크, 생 푸아 수도원(The Abbey of Saint Foy, Conques)이다.

생 푸아 수도원 위치 생 푸아 수도원 위치

 

작열하는 여름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퐁트브로 수도원을 나섰다. 다음 방문지는 프랑스 서남부 옥시타니(Occitanie) 지역에 있는 생 푸아 수도원이다.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6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반나절도 남지 않은 늦은 오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중간 지점인 리모주(Limoges)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비스 버젯(Ibis Budget)은 저렴하고 시설도 괜찮았다. 이른 아침 콩크를 향해 출발해 2시간쯤 달렸을까? 자동차는 점점 고지대를 향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갈라놓은 피레네 산맥이 멀리 보였다. 깎아지른 듯 가파른 산악지대를 가슴조이며 오르내리자 골짜기가 나타났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지만 강물은 얕은 시내처럼 흘렀다. 로(lot) 강이었다. 태고적 신비를 품은 채 우아한 S곡선을 그리며 로강은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작정 차를 세워놓고 유유히 흐르는 강의 아름다움에 취해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속으로 잔잔히 흐르는 은빛 물결은 고요가 되어 내려앉았다.

강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 산 허리를 돌면 바로 수도원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콩크 동네도 수도원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콩크는 계곡 깊숙이 숨어 있었다. 산 중턱에 차를 세운 우리는 콩크를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언덕에 기대선 중세의 집들과 생 푸아 수도원의 교회가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다가왔다. 중세의 좁은 길과 가파른 언덕 위에 빼곡히 들어선 오래된 건축물, 길가에 놓인 벽돌 한 장 한 장은 경이 그 자체였다.

생 푸아 수도원은 중세의 좁은 길과 가파른 언덕을 지나야 한다. 생 푸아 수도원은 중세의 좁은 길과 가파른 언덕을 지나야 한다.

 

4세기경 인적 없던 콩크에 작은 교회당이 세워지기는 했지만, 8세기 경건한 은둔자 다동(Dadon)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를 존경하던 헌신적인 신앙인들이 움막이나 동굴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사라센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콩크는 피핀 3세(Pepin the Short)와 샤를마뉴(Charlemagne)의 도움으로 되살아났다. 샤를마뉴는 '성 십자가' 유물을 기증했으며, 루이(Louis)는 작은 교회당을 수도원으로 격상시키고 콩크라는 지명을 부여했다. 9세기경 수도원은 왕과 귀족들의 도움에 의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였고, 지역 주교와 정치세력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수도사들은 베네딕트 규칙에 따라 수도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콩크가 유명한 순례지로 탈바꿈 한 것은 한 소녀의 유골을 이곳으로 옮겨온 후부터다. 303년 13살 나이로 순교한 생 푸아(Sainte Foy)의 유골은 아쟁(agen)을 기적의 도시로 바꾸어놓았다. 콩크의 수도사 아리비스퀴스(Ariviscus)는 10년간 공을 들인 끝에, 866년 1월 생 푸아의 유골을 훔쳐왔다. 생 푸아의 유골과 기적 이야기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순례자들은 콩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013년 앙제(Angers)의 대학교수 베르나르도(Bernard)는 기적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왔으며, 기적과 신비에 관한 두 권의 책을 남겼다. 수도원의 명칭도 생 푸아의 이름을 따서 생 푸아 수도원으로 칭했다. 순례자와 성직자가 늘어나자 수도원 건축이 시작되었다. 1045년 초대 원장이 시작한 수도원 건축은 3대 원장인 베공(Begon, 1087-1107) 때에 완성되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당과 반쪽짜리 회랑 및 부속 건물은 그 때의 산물이다. 이 시기 생 푸아 수도원은 최고의 명성을 구가했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14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수도원은 15세기가 끝나기 전에 몰락의 길을 걸었다. 16세기 종교전쟁의 참화는 면했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생 푸아 수도원을 역사 속에 묻어버렸다.

생 푸아 수도원 교회당은 툴루즈 교회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교회당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다. 생 푸아 수도원 교회당은 툴루즈 교회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교회당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다.

 

언덕을 내려와 고색창연한 수도원 교회당으로 들어섰다. 건물도, 의자도, 제대도 어느 한 곳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없었다. 수도원이 '역사의 유물'로 남았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하얀 수도복의 도미니크 수도사와의 만남은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엔 6명의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자랑하듯 내년엔 한 두 명의 수도사가 더 이곳에 올 것이라고 했다.

온전하게 남은 건물은 수도원 교회당이었다. 교회당은 프랑스 툴루즈(Toulouse)의 교회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교회당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다. 교회당 내부 길이가 무려 56m이나 되었고, 212개의 기둥(주두)가 아치형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어느 곳을 보아도 화려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교회당은 단순함 속에 모든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생 푸아 수도원 교회당 정문을 장식하는 조각인 팀파눔(Tympanum).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팀파눔은 그리스도가 준엄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천국을, 왼손을 내려 지옥을 지시하고 있다. 생 푸아 수도원 교회당 정문을 장식하는 조각인 팀파눔(Tympanum).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팀파눔은 그리스도가 준엄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천국을, 왼손을 내려 지옥을 지시하고 있다.

 

교회당을 향해 걸어가다 맨 먼저 만나는 작품이 정문 위에 있는 팀파눔(tympanum)이다. 이 도상(圖像, Icon)은 중세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2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반원형의 팀파눔은 지름이 무려 6.7m, 높이가 3.6m에 이른다. 전체 위 아래 세 단으로 구성된 도상에는 120여명의 등장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둘째 단의 중심, 모든 인물의 중앙에는 세상을 주관하고 심판하시는 절대자 예수님의 모습이 다른 인물들보다 크게 새겨져 있다. 팀파눔의 주제는 최후심판이다. 미카엘 천사와 악마가 저울을 앞에 놓고 죽은 자의 선과 악을 들추어내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지옥의 장면을 마주한 사람이면 누구든 스스로를 돌아보고 당장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순례에 나선 중세인들은 팀파눔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생 푸아 수도원. 생 푸아 수도원.

 

생 푸아 수도원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쇠사슬과 철제 그릴이다. 부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교회와 쇠사슬과 철제 그릴. 하지만 교회당 천장에는 쇠사슬이 다발로 걸려 있고, 교회 앞쪽의 성소 공간은 철제 그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생 푸아 수도원을 연구한 베르나르도는 "진실을 말하자면 이 바실리카 교회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보물이 아니라…천장에 달려 있는 거대한 양의 쇠사슬들이다."라고 했다. 수도원의 수호성녀인 생 푸아는 순례자를 보호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기적을 많이 행했다. 산티아고 순례 중에 붙잡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생 푸아 성녀에게 기도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심지어 살인과 근친상간, 수간, 신성모독과 같은 중죄를 범한 사람이 쇠사슬로 몸을 묶고 순례를 하다 성녀의 도움으로 쇠사슬이 끊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쇠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순례자들이 수도원에 감사하면서 쇠사슬을 교회에 바쳤고, 수도원은 그것으로 철제 그릴과 문을 만들어 속박에서의 자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주두(柱頭, Capital)와 팀파눔과 철제 그릴에서부터 남쪽 익랑(翼廊, transept)에 조각된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장면까지 생 푸아 수도원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또한 수도원 축일의 전례에서는 성녀의 기적 이야기 속에 속박과 자유의 이미지를 담기도 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행보(行步)가 진정한 순례가 아니던가? 콩크를 찾은 중세의 순례자들은 자기 속에 켜켜이 쌓인 속박을 하나 둘 벗겨내고, 무한한 자유를 찾았을 것이다.

콩크의 골목을 뒤지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한 마리 당나귀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곁엔 한 쌍의 젊은 부부와 두 자녀가 서 있었다. 그 가족은 프랑스의 오지인 이 산악지대를 한 마리의 당나귀에 의지해 순례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20km씩 일주일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부모와 함께 순례길에 나선 어린 아이들의 맑은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든 어른이든 우리 모두는 단지 순례자일 뿐"이라고. 불현듯 성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래 전 옛날에 너희가 늘 걷던 경건한 길이 어디인지 물어보고 그 길을 가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평안을 얻으리라."(예레미아서 6장 16절)

 

글·사진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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