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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환(계명대학교 일본학전공 교수, 국경연구소 소장)

[세계의 창]새로운 길, 평양에 갈 수 있을까

해리 해리슨 주한 미국 대사가 지난 16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한국 정부의 남북협력 구상에 대해 제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미국과 먼저 협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이 미국 정부의 의향을 담은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지 외교관의 자율성이 거의 없는 현대 외교의 환경을 고려하면 개인적인 견해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대사가 주재국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외교관의 기본 자세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정부 여당이 그를 향해 비판을 쏟아낸 것도 이 때문이다."외교관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국에 파견되어 거짓말을 하는 정직한 인사이다." 17세기 초 베니스 주재 영국 대사 위튼 경의 메모에서 나온 말이다. 달리 표현하여 외교관은 '명예로운 간첩' 또는 '공식적인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영국의 니콜슨 경은 직업 외교관의 필독서인 '외교론'(Diplomacy)에서 자신의 경험을 담아 외교관의 자질을 이렇게 말했다. 강경한 내용도 상대를 흥분시키거나 실례가 되지 않게 신중한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본국뿐 아니라 주재국에도 충성해야 하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라야 한다고. 그래서 외교 사절의 파견에는 반드시 사전에 상대국의 의향을 확인하는 아그레망(agrement)이 관례화되었다.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해리슨 대사는 니콜슨 경이 말하는 바람직한 외교관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명예로운 간첩이나 공식적인 거짓말쟁이의 역할에 충실하려면 한국 정부와 친밀성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정책 의도를 파악해 본국에 전달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해리슨은 40여 년간 해군에 복무하면서 이라크 전쟁 등 8개의 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외교보다는 군사전략에 익숙해서 북한 문제를 피아를 구분하는 군사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정부는 해리슨 대사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혔듯이, 북미대화만 바라보지 않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도로 북한에 대한 개별 관광 의지를 더욱 분명히 했다. 그러면 정부는 왜 지금 개별 관광을 들고 나왔을까. 김정은 위원장이 작년 신년사에서 조건 없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자고 했을 때에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개별관광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면 남북 및 북미관계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정부의 의도는 두 가지로 읽힌다. 하나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남북관계에서 점수를 따자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외교는 여론이다. 아무리 훌륭한 외교도 여론의 반대에 부딪치면 쓸모가 없다. 정부의 남북협력론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4월 총선에서 나타날 것이다.또 하나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교착상태에 있는 북미관계를 견인하려는 것이다. 북미대화에 올인한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에서 1년 반이나 속고 시간을 잃었다"(김계관 외무성 고문 발언)며, '새로운 길'이라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한국 정부도 북미관계가 풀리면 남북관계도 개선된다는 수도거성(水到渠成)의 자세로 전적으로 미국에 보조를 맞추어 왔다. 결과적으로 지난해 2월의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아무 성과가 없다. 대통령 선거에 정신이 없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관계에서 올해 안에 현상 유지 이상의 성과를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북미관계가 요동칠지도 모르는 유동적 상황이다.성과 없음과 불확실성에 대한 조바심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것은 남북한이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렇다고 김정은이 트럼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며, 한국도 안보의 축인 미국을 벗어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관건은 제재라는 미국의 대북정책의 틀 속에서 남북한이 자주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 그리고 남북한의 관계 개선이 북미대화를 견인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모름지기 외교뿐 아니라 모든 일에는 상대가 있다. 정부의 대북 개별 관광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호응과 미국의 협조, 그리고 국민의 지지라는 삼자가 맞물려야 한다. 어느 하나 쉽지 않은 한국 외교의 '새로운 길'이다. 실패하면 북한 미국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다. 올해, 평양에 갈 수 있을까, 미지의 땅에 한번 가보고 싶은 호기심은 있다.

2020-01-20 11:22:43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선장

[세계의 창] 육지보다 4배 넓은 대구경북 바다

내륙의 중심인 대구에 집중시킨 대구경북인 시야는 육지바라기 긴 해안선을 갖고 있는 대구경북 해양 자원 충분히 이용해야 번영대구경북은 긴 해안선에 면해 있다. 대구경북지역이 갖는 육지 면적보다 바다 면적이 4배가 더 넓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략 생각해보자. 포항의 해변가에서 충청남도 경계선까지는 약 100㎞이다. 우리나라의 영해가 3마일까지였던 때에는 바다 면적이 오히려 육지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82년 유엔 해양법(이하 82년 해양법)이 적용되는 지금은 기선(해안선)에서부터 200해리(약 370㎞) 바다를 가질 수 있다. 바다가 육지보다 약 4배가 더 많다.공해에는 항해의 자유가 있어 왔다. 영해가 넓어지면서 공해는 줄어들어 연안국의 힘이 세어지고 자유 항해는 제약을 받게 됐다. 82년 해양법 체제에서는 영해가 3해리에서 12해리로 늘어났다. 또한 배타적경제수역(EEZ)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졌다. 기선에서 200해리까지 연안국이 어로, 환경 등에 대한 제한적인 관할권을 가진다. 선박이 항해할 자유는 보장되면서도 생물자원의 보호, 환경, 안전적인 측면에서만 연안국에 배타적 관할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유엔 해양법의 적용을 받는다. 82년 해양법 체제하에서 동해안은 그 전에 가지지 못했던 넓은 바다의 주인이 되었다. 과연 이렇게 4배나 넓어진 우리의 바다를 우리가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바다는 오랫동안 어업인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각 군에는 1, 2개의 단위수협과 어촌계가 존재하고 바닷가에서 김이나 미역 등을 채취하여 왔다. 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수산물을 획득했다. 오징어를 건조하거나 꽁치나 청어를 과메기로 건조하여 판매하는 수산물 가공업도 발달했다.이제 우리가 조업할 수 있는 수역이 EEZ로까지 확대되었다. 다른 국가의 어선들은 우리의 허가 없이는 들어와서 조업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작년 러시아의 EEZ 허가권을 14억원에 사서 오징어를 잡아왔다. 이렇게 바다는 재산적 가치를 창출해 낸다.바다를 이용한 상품의 이동, 즉 해운업은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운송 활동이다. 포항의 바다는 미국이나 중국으로 포스코의 철강제품을 수출하는 데 중요한 수로가 된다. 후포와 같은 경우 국내 해운의 항구로서 기능을 해오고 있다. 울릉도로 향하는 여객선이 다닌다. 포항항이나 후포항, 축산항은 어선의 건조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크루즈 산업도 이런 기능 중 하나이다.위 전통적인 수산업과 해운업 이외에 바다를 활용한 해양 산업이 떠오르고 있다. 바닷속의 심층수 개발, 심해 양식의 상용화, 바닷속 자원의 개발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울릉도와 독도의 심해 절경을 관광자원화할 수도 있다. 바다를 이용한 레저 활동의 증가, 연안을 따라 천천히 항해하면서 축산항 등 절경을 즐길 수 있는 연안 크루즈도 가능하다. 과거 3해리까지만 관할권을 행사하던 것과 달리 이제는 20마일 떨어진 바다에 심해 양식장을 만들 수 있다.바다의 개발과 활용은 기본적으로 중앙정부의 사무이다. 그렇지만 군이나 도에서 이와 병행하여 개발할 수 있는 여지도 크다. 최근 들어 지방정부도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변화를 보이는 것은 고무적이다. 경상북도가 바다에 면한 포항에 경북 환동해지역본부를 설치·운영하는 것, 동해안 바다 관련 연구기관으로 환동해산업연구원을 운영하는 것도 바다를 중시하는 탁견이다.대구경북인들은 시야를 내륙의 중심인 대구에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어 왔다. 육지바라기였다. 이제는 시야를 육지에서 바다로 넓혀야 한다. 신라 시대 문무왕이 자신의 무덤을 동해에 만들라고 했다. 그만큼 바다를 중요시했다. 신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수산부인 선부(船府)가 존재했고 번성했다. 해방 이후 동해를 건너 미국으로 인력들이 건너가 선진문물을 익히고 무역대국을 이룸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의 번영이 이루어졌다. 바다를 충분히 이용할 때 우리에게 번영은 찾아왔다. 4배나 넓어진 해양 영토를 충분히 활용하여 해운, 수산, 해양의 중심지로 경북 동해안이 거듭나도록 하자.

2020-01-13 15:55:25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세계의 창] 라벤나의 모자이크

이탈리아 북동부의 산 비탈레 성당장엄하고 화려한 모자이크로 유명조각들 모여 전체의 그림 완성하듯내년엔 우리도 조화롭게 어울려야 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 라벤나(Ravenna)는 인구 16만 명이 채 안 되는 자그마한 도시이지만,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태동한 단테(Dante Alighieri·1265~1321)가 생을 마감해 묻힌 묘소가 유명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장소가 여덟 군데나 있다. 산 비탈레(San Vitale) 성당,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the Mausoleum of Galla Placidia),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Sant'Apollinare Nuovo) 성당, 아리우스파 세례소(the Arian Baptistery), 정교 세례소(the Orthodox Baptistery), 테오도리쿠스 영묘(the Mausoleum of Theodoric), 그리고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쎄(Sant'Apollinare in Classe) 성당 등은 유럽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라벤나의 문화유산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산 비탈레 성당이다. 6세기에 완성된 이 건축물은 우선 생김새부터가 눈길을 끈다. 팔각형 몸통 위에 돔(dome·둥그런 지붕)이 얹혀 있어서 이탈리아의 어느 건물과도 비슷한 구석이 없고 그래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삼각형 지붕에 길쭉하고 네모난 모양의 바실리카를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건물 형태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당시 비잔티움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482~565)였는데, 그는 옛 로마제국의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격하였고, 이때 비잔티움의 건축양식이 이탈리아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산 비탈레 성당은 비잔티움 양식을 따라 건물의 외관은 수수하나 내부는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내부로 들어서면 명상적이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데, 높이 솟아 오른 돔과 벽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작은 유리 조각들의 반짝거림, 그리고 영롱한 색채는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강한 인상을 남긴다.모자이크란 다양한 색깔의 돌이나 도자기, 유리, 타일,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든 작은 조각들을 회반죽이나 시멘트, 모르타르 등으로 표면에 눌러 붙여서 만드는 그림이다. 따라서 무수한 조각을 끼워 넣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재료의 특성상 변색이 적고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원 상태가 오래 보존되는 장점이 있다. 최초의 모자이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기원전 6세기경부터 그리스에서는 백색과 흑색의 자갈을 바닥과 도로 포장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로마인들도 모자이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는데, 특히 건물의 바닥 장식으로 많이 이용했다.모자이크는 비잔티움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어, '이콘'(icon)과 더불어 비잔티움 미술의 대표적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기법과 소재 면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다양한 색깔의 불투명 유리 소재를 개발했고, 금박을 넣은 유리 테세라(tessera·모자이크 조각)도 사용해 모자이크에 화려함을 더했다.테세라의 배열은 표면을 평평하게 맞추는 방식을 따르기도 하지만, 각각의 테세라가 빛을 가장 잘 반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끼워 넣어 모자이크 표면에 요철이 생기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빛은 모자이크 표면 위에서 여러 각도로 반사돼 다양하고 섬세한 색채로 더욱 반짝이는 효과를 낸다. 당시 모자이크는 그리스도교 전례를 위한 영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매체였다.모자이크는 조각 하나만을 보아서는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조각들이 모여 전체를 완성하면 작품의 의미가 드러난다. 우리 사회도 모자이크처럼 구성원 각자의 모양도 다르고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도 다르지만, 그것이 분열과 대립의 이유가 아니라, 조화롭게 어울려 거대한 그림을 이루는 긍정적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새롭게 완성될 2020 경자년의 모자이크에 희망을 걸어 본다.

2019-12-30 14:23:36

이성환 계명대 교수

[세계의 창]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바람직한가

부탄 왕국의 국회의원 선거는 예비선거에서 1, 2등을 한 정당이 본선거를 한다. 미국에서는 국민총투표에서는 지고 선거인단에서 다수를 확보해 당선되는 소수파 대통령(Minority President)이 가끔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도 소수파 대통령이다. 부탄의 본선거는 의회에서 다수당 확보를 위한 것이고, 미국이 소수파 대통령을 감수하는 것은 연방제 유지를 위해서이다. 이처럼 각국의 선거제도는 다양하다.현대 민주주의는 대표를 뽑아 그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대의정치이다. 대의정치는 민의가 잘 반영된 의회의 안정적 운영이 관건이다. 그런데 민의 반영과 안정적인 의회 운영은 양립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자유론'으로 유명한 밀(J. S. Mill)은 '대의정치의 고찰'(1867)에서 민의의 반영을 중시한 비례대표제를 주장했다. 반면 배젓(W. Bagehot)은 정치학의 고전인 '영국 헌정론'(1861)에서 의회의 안정세력 확보를 위해서는 다수대표제인 소선구제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다수결로 운영되는 의회에서 과반 세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안정적인 의회 운영이 어렵고, 대의정치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론에 입각한 주장이다. 북유럽 등 의원내각제의 일부 소규모 국가에서는 전자를 중시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있으며, 미국 영국 등 많은 국가에서는 후자에 방점을 둔 소선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은 소선거구제에 비례대표제를 가미해 운영해왔다.최근 비례의 원리를 강화하기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이것이 국회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보다는 각 정파의 유불리가 쟁점이 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제도가 도입되면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회는 의원내각제에서의 연합정권과 같은 형태로 이념이나 이해를 같이하는 세력들의 제휴를 통해 운영될 수밖에 없다.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데에는 비례성 강화와 함께 국회 운영에 대한 환경 변화가 있다. 의회 운영에는 다수파의 형성이 중요하나,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1988년부터 치러진 8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당이 과반을 차지한 경우는 3번밖에 없었다. 그것도 2, 3석으로 아슬아슬하게 과반을 넘겼다. 다양해진 국민들의 요구를 배경으로 한 군소정당의 출현으로 한 정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힘들게 된 것이다.이러한 불안정한 의석 분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의회의 운영을 어렵게 할 것이다. 국회에서 의사결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국회가 동물국회, 식물 국회라 비난받는 것도 이러한 현실적 요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소선구제하에서 군소정당의 의석이 과소 대표되는 불합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러한 불합리를 고치자는 것이 선거제도 개혁의 명분이 되고 있으나, 거기에는 의석 분포의 불안정성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국회를 의원내각제의 연립정권 형태로 운영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국회를 의원내각제 형태로 운영할 경우, 그것이 다수대표제의 성격이 가장 강한 대통령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에 대한 논의 없이 진행되는 연동제 도입은 국회와 행정부의 부조화를 더욱 강화할 우려가 있다.이번 선거제도 변경의 내용은 일본의 선거제도와 많이 닮았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한 선거구에서 2, 3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선거구제는 거대정당 자민당에 유리하고, 선거구가 넓고 같은 정당 후보자가 경쟁하는 탓에 비용이 많이 들어 정치부패의 온상이 되었다는 비판이 비등했다.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1991년에 시작된 선거제 변경은 정권이 3번 바뀌고 1993년 11월에야 확정되었다. 선거제도 변경의 험난함을 보여준다. 소선거구 289석과 비례대표 176석으로 구성되고, 비례대표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이중등록을 통한 석패율을 적용한다. 의회에서의 안정 세력 확보와 정권교체를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연동제는 채택하지 않고 소수당을 위해 비례대표를 대폭 도입한 것이다.일본과 한국의 큰 차이는 연동제 유무에 있다. 이번의 선거제도 개혁이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려는 장기 구상을 내포한 것이 아니라면 연동제 도입은 좀 더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2019-12-23 11:33:50

장동희, 새마을세계화재단 대표이사/법학박사(국제법)/전 주핀란드 대사

[세계의 창] 잃어버린 이름 '동해',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많은 나라가 '일본해' 표기한 바다'동해' 병기 위해 25년 넘게 노력각종 지도 병기 비율 40% 선 추정정부'기관'국민 꾸준한 성원 필요지난 주말 동해연구회가 주최한 '독도동해 워크숍'에 다녀왔다. 대다수 외국 지도가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한 바다에 우리 이름 '동해'(East Sea)를 되찾아 넣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지 25년이 넘게 지났다. 워크숍은 '동해' 이름을 되찾기 위한 그간 우리의 노력을 되짚어 보고, 향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국제사회에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인식한 우리 정부는 1992년 제6차 유엔지명표준화회의(UNCSGN)에서 '일본해' 단독 표기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제기한다. 이에 앞서 정부는 관계 부처 회의를 통하여 '동해'와 '일본해' 병기 추진 방침을 결정한다. 이후 "동해 명칭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고 그에 필요한 학술 연구와 사업들을 조직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94년 외무부(현 외교부) 주도로 동해연구회를 설립한다. 창립 이후 동해연구회는 연구·출판 사업에 더하여 국제 세미나와 워크숍을 개최하고, 유엔지명회의와 국제수로기구(IHO) 등 국제회의에 참석, 정부 대표단에 대한 자문 역할을 수행해 왔다.이번 워크숍에서는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동해'와 '일본해' 병기 방침이 과연 옳은지에 관한 근본적 문제 제기부터, 동해의 영문 표기 방식('East Sea' 혹은 'Donghae') 등 다양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해' 혹은 '한국해' 단독 표기 주장이나, '청해'나 '평화의 바다' 등 제3의 이름을 붙이자는 주장 등도 검토되었다. 그러나 결론은 '동해' 병기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그 첫째 논거는 UNCSGN 및 IHO 결의다. UNCSGN 결의 III/20과 IHO 기술결의 A.4.2는 2개국 이상이 공유하는 지형에 대하여 각국이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 경우, 관계국은 협상을 통하여 단일 이름을 갖도록 노력하되, 합의를 보지 못할 경우에는 각국이 사용하는 이름을 병기토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단일 이름 채택을 위한 협상을 하되, 양국이 합의하기 전에는 '동해/일본해'를 병기하는 것이 UN과 IHO 결의에 부합하는 것이다.둘째로 '동해/일본해' 병기가 아닌 '동해' 단독 표기 주장에 대해서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연유가 어찌 되었던 '일본해'란 이름이 지난 100년 이상 국제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를 모두 '동해'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현실적 타당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어떤 주장을 할 때에는 합리성과 논리적 타당성, 그리고 무엇보다 실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셋째, 제3의 이름을 채택하자는 주장은 IHO나 UNCSGN 결의 취지와 부합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도 '일본해'만 고집하지 않고 협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향후 사태 진전에 따라 검토될 수도 있겠다.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일관성 유지 필요성이다. 정부는 1992년 '동해(East Sea)/일본해(Sea of Japan)' 병기 추진을 결정한 이후 각종 국제회의나 지도제작사, 지리교사 등을 대상으로 동해 병기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여 왔다. 그 결과 1992년 당시 2.8%에 불과하였던 '동해/일본해' 병기 비율이 2009년에는 28%를 넘었다. 이후 정부는 병기 비율을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지금은 40% 정도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해 단독 표기를 주장한다든지, 영문 명칭을 바꾼다든지 혹은 제3의 이름을 주장한다든지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1992년 이래 4반세기가 넘도록 동해 단독 표기도 아닌 병기조차 이루지 못했느냐는 질책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한 세기 이상 지속되어 오던 관행을 바꾸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이름 '동해'를 되찾기 위해서는 전 국민이 인내를 갖고 정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단체의 노력을 꾸준히 성원할 필요가 있다.

2019-12-16 11:31:21

김기수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세계의 창]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

쉽게 쓰고 마구 버려지는 일회용품몇백 년간 썩지 않고 환경 재앙 야기식음'호흡 통해 사람 몸에 대량 흡수사용 줄이고 대체품 개발 서둘러야최근 미국 CNN방송은 스코틀랜드의 한 섬으로 밀려와 숨진 무게가 20t인 향유고래의 위에서 어망의 일부, 플라스틱 컵 및 빨대 등으로 이루어진 약 100㎏의 쓰레기 덩어리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전했다. 지난 8월에는 북극에서 내리는 눈에도 많은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돼 있다는 연구 결과가 영국 BBC방송에 보도되기도 했다.또한 지난 5일 영국 데일리 메일 등에 따르면 약 58만 마리의 소라게들이 인도양과 태평양 섬 두 곳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해 죽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들 보도는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플라스틱이 사용된 지는 100년이 조금 넘었으나 수천가지의 새로운 플라스틱 제품의 개발과 생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속화해 지금은 플라스틱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게 됐다. 플라스틱은 생명을 구하는 장치들로 의학 분야에 혁신을 가져왔고, 우주여행을 가능하게 했고, 자동차와 비행기를 경량화해 연료와 대기오염의 절감에 기여했고, 헬멧, 인큐베이터, 정수 장비 등을 통해 많은 생명을 구했다.그러나 플라스틱이 제공하는 편리성으로 인해 플라스틱의 어두운 면인, 쉽게 버리는 문화가 생겨났다. 오늘날 일회용 플라스틱이 매년 생산되는 전체 플라스틱의 40%를 차지한다고 한다. 플라스틱 봉투와 음식 포장용기 등과 같이 많은 플라스틱 제품은 사용 기간이 불과 몇 분에서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지만 몇 백 년 동안 썩지 않고 우리 환경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플라스틱 오염은 주로 재활용이 잘 되지 않고 매립지에 버려지거나 자연에 방치되는 개인 및 가정 폐기물로부터 온다고 한다. 이들 폐기물은 바람과 비에 의해 하수구, 소하천, 강을 거쳐 해양으로 흘러간다. 80%의 해양폐기물은 육지로부터 온다고 추정되고, 이는 매년 약 8백만t에 이른다고 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2050년에는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 폐기물이 더 많아진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해양에 도달한 플라스틱 폐기물은 햇빛, 바람 그리고 파도에 의해 작은 입자로 부서진다. 많은 경우 5㎜ 이하 크기의 미세 플라스틱이 돼 해류와 기류를 타고 해양과 육지로 확산된다. 미세 플라스틱은 더욱 작게 부서져서 극세 플라스틱 입자가 되고 이들은 상수도에서도 발견되고 공기 중에도 떠다닌다.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플라스틱으로 인해 조류, 육지 포유류 그리고 물고기와 해양 생물에 이르기까지 매년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사망하고 있다. 또한 우리 식탁에 오르는 물고기, 새우, 홍합을 포함한 100개 이상의 수생 종에서도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되고 있다. 이로 인해 동식물의 개체 수 감소와 이에 따른 식량 감소를 가져올 수 있다.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사람은 식음과 호흡을 통해 다량의 미세 및 극세 플라스틱 입자를 섭취하고 있다. 결국 플라스틱의 편리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비용으로 돌아오고 있다.일단 플라스틱 폐기물이 해양에 도달하면 제거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이들이 강이나 바다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효과적인 해결책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선된 플라스틱 폐기물의 관리 및 재활용과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의 생산과 소비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을 깨닫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선 각 개인은 불편을 감수하고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 나아가 기업들에게는 플라스틱을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사용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들 대체 제품이 조금 비싸더라도 기꺼이 구매하며, 정부에 대해서는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은 규제하고 이를 대체하는 제품의 생산과 소비는 장려하는 제도와 법규를 제정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교육기관과 언론도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고 시민 의식을 전환하는데 동참해야 할 것이다. 개인은 행동하지 않으면서 기업과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려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개인의 의식 전환과 작은 행동이 가장 효과적인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김기수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2019-12-09 11:19:21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세계의 창]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예루살렘 점령 기념으로 건립 성전 파괴로 흩어진 유대인들 전 세계 떠도는 삶 시작됐지만 승자도 패자도 영원하지 않아로마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을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지어진 콜로세움(Colosseum·원형경기장)이라고 답할 듯싶다. 거대한 규모로 보나 이곳에 얽힌 이야기로 보나, 콜로세움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곳도 드물 것이다. 로마 시민을 위한 축제와 서커스, 그리고 검투사 경기와 각종 행사가 벌어졌던 곳이며,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처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자리를 옮기면, 콜로세움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적을 만나게 된다. 바로 티투스 개선문이다.로마 건축의 독특한 형태인 개선문은 매우 중요하고 명예로운 일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성벽이나 성문에 연결되지 않고 따로 독립적으로 세워졌다. 현재 로마에는 3개의 개선문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로마제국 시대에 30개 이상의 개선문이 있었다고 한다.티투스 개선문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 불리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광장에 자리 잡고 있다.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에 있는 이 광장은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부로서 주요 정부 기관이 여기 모여 있었으며, 티투스 개선문은 이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졌다.높이 15.4m, 폭 13.5m, 두께 4.75m로 이후에 지어진 개선문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비아 사크라(Via Sacra, 신성한 길) 벨리아 언덕의 정상에 우뚝 서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로마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지어진 이 개선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티투스 개선문은, 그 이름이 알려주듯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라는 로마 황제의 승리를 기리려 건립한 것이다. 개선문의 내벽에는 여러 주제의 조각을 새겼는데 전리품을 들고 행진하는 병사들,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이륜 전차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개선하는 티투스 황제, 그리고 그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주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모습을 볼 수 있다.그런데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사들이 메고 가는 전리품이 예사롭지 않다.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커다란 촛대는 유대교의 상징인 메노라(menorah)이며, 커다란 탁자는 유대교 성소의 황금 제대다. 그런가 하면 유대교의 은 나팔도 보인다. 티투스 개선문은 유대·로마 전쟁(66~73)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전쟁은 아주 참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70년,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을 살육하였고, 솔로몬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렸다. 서쪽 벽은 간신히 파괴를 모면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즉 나라 없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며 떠도는 삶이 시작되었다.로마제국 승리의 상징이자 유대인 박해의 상징이었던 티투스 개선문. 그러나 역사는 승자도 패자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로마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선한 티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로마를 정비하며 콜로세움까지 완성했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제국의 중요한 두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파괴되었고, 로마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또 역병이 돌아 많은 로마인의 목숨을 앗아갔고, 티투스 자신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치세 2년 만에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반면 유대인은 오랜 방랑 끝에 결국 이스라엘에 되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민족으로 성장했다.18세기 이래 유럽 각국은 티투스 개선문을 모델 삼아 승리의 개선문을 세웠다. 하지만 승리의 문을 지나는 주인공은 언제나 바뀌었다.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는 우리 사회에 티투스 개선문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2019-12-02 11:04:19

이성환 계명대 교수

[세계의 창] "자민당을 쳐부수자"

日 자민당 혁신 통해 살린 고이즈미 정치 변화 원하는 국민 열망에 부응불출마로 좀비당 해체 촉구 김세연"새로운 보수 탄생" 한국당도 응답을1993년 철옹성 같던 일본 자민당이 38년 만에 정권을 빼앗겼다. 3년 후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여당으로 복귀했으나, 잃어버린 10년의 경제처럼 자민당은 활력을 찾지 못했다. 시대와 공감하지 못하고 민심과 동떨어진 좌충우돌이 계속되면서 내각 지지율은 1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리멸렬했다.2001년 4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비주류로 독불장군 취급을 받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중의원 의원이 "자민당을 쳐부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민당의 해체를 주장했다. 자신이 총재가 되어 무기력한 자민당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계파 간 역학관계가 강하게 작용하는 자민당에서 그가 총재가 되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총재 선거를 위한 그의 가두연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환호했다. 당원・당우(黨友·당원이 아닌 당의 지지자)의 지지를 받은 그는 승리했고, 총재가 됐다.총재로서 총리가 된 후에도 그의 질주는 끝나지 않았다. 자민당의 오랜 관행이었던 파벌 배분형의 각료 임명 방식을 폐기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를 기준으로 장관을 임명했다. 지지부진하던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금기시되던 이라크 파병을 단행하고,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하고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사적 기득권에 매달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소속 의원들에게는 공천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철저히 응징했으며, 각종 선거에서 승리했다.내각 출범 시 그의 지지율은 85%로 사상 최고치였으며, 지지하지 않는다가 5%였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5%는 그가 자민당 총재이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이유를 들었다.일본 국민들이 그를 지지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민당을 철저히 쇄신해 정치를 바꾸고 일본을 변화시킬 것을 기대한 것이다. 물론 그는 자민당을 부수지도 않았으며, 일본도 바뀌지 않았다. 임기 중에 단행한 연금법 개정으로 국민 부담이 늘고, 파견업법 개정으로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소득격차의 확대로 젊은이들의 희망을 빼앗았으며, 일본 사회를 극우화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 일시적으로나마 자민당 쇄신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담아냈다.김세연 국회의원이 자유한국당 해체론을 선언했다. 한국당은 수명을 다한 좀비 정당으로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당은 쇄신을 시도했으나, 새로운 가치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구태의연한 정쟁, 무조건 반대, 여당의 실정에 의한 반사이익만을 좇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김세연 의원의 의도는 분명하다. 좀비 같은 한국당을 해체하면 새로운 보수 세력이 만들어진다는 논리이다. 많은 국민들과 보수 언론이 공감하고 있으나, 한국당은 시큰둥하다. 식탐만 가득한 좀비로라도 버텨보자는 심산일까.김세연과 고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정당의 해체를 주장한 공통점이 있으나, 차이도 크다. 김세연은 불출마를 통해 한국당의 해체와 보수 재건의 물꼬가 트이기를 바랐고, 고이즈미는 자민당을 부수기 위해 총재가 되려고 했다. 직접 행동론과 간접 추동론쯤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두 사람의 권력 의지 차이일지 모르나 전자가 파괴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이즈미는 직접 해체론을 통해 자민당을 살렸다. 김세연의 주장에 답하듯, 한국당 지도부는 내년 총선에서 50% 물갈이를 제시했다.보다 중요한 것은 당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정해야 거기에 맞는 사람을 충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우연인 듯 필연, 그로 인해 결정적으로 바뀌는 삶을 경험한다. 김세연의 선언이 돌출적 우연이 아니라 한국당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필연으로 받아들여질 때 한국당은 살아날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 새 보수가 탄생하기를 바란다.

2019-11-25 11:19:22

장동희 새마을세계화재단 대표이사

[세계의 창] 독도 후일담

동해'일본해 병기 2012년 UN 회의독도 문제로 갑자기 영토 논쟁 비화확실한 영토주권을 행사하는 독도분쟁없이 영유권 기간 길수록 유리2012년 8월 10일은 필자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필자는 당시 뉴욕 유엔본부에서 개최된 제10차 유엔지명표준화회의(UNCSGN)에 수석대표로 참석 중이었다. 유엔지명표준화회의는 각국의 지명 표준화 정책 및 지명 표기법 등을 논의하기 위하여 5년마다 개최되는 국제회의다. 우리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일본해'로 표기된 '동해' 이름을 최소한 동해와 일본해가 병기되도록 하는 데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 확보였다.그러나 회의 이틀째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 국토지리원이 제작, 배포한 '지명의 국제적 표기 지침서'에 표기된 'Dokdo'에 대하여 일본 대표가 회의 석상에서 공식 항의를 했다. "일본의 고유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 정부 기관이 발행한 책자에 마치 한국 영토인 것처럼 'Dokdo'로 표기한 데 대하여 강한 유감을 표하며, 시정을 요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에 대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삼가줄 것을 요청한다고 강력히 반박했다. 지명을 다루는 회의가 영토 논쟁으로 비화했던 것이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국제회의를 마치고 나면 회의 석상에서 오간 발언을 요약, 정리한 최종보고서(Final Report)를 채택한다. 일본 대표가 독도 영유권 관련 자신의 발언을 최종보고서에 넣어 달라는 것이다. 일본 측은 한국 측의 반박 요지도 같이 넣어도 좋다면서, 독도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fact)로서 당연히 최종보고서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그러나 독도의 분쟁지역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우리 정부 입장을 감안할 때, 독도 분쟁 사실을 입증하는 영유권 논쟁을 최초로 유엔문서에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한일 간 이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바람에 8월 9일 종료키로 되어 있던 회의 일정이 8월 10일까지 하루 더 연장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일본 대표단과의 비공식 회담이 열리기로 돼 있던 8월 10일 아침(뉴욕 현지시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소식이 들려왔다.일본 측 입장은 더욱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고, 양측 간 타협의 여지는 사라졌다. 의장은 한일 양측이 합의를 보지 못하면 표결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컨센서스로 채택하던 관례를 깨게 돼 몹시 유감스럽다는 말과 함께.필자는 표결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입장을 표명하긴 했지만, 내적으로는 엄청난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원수가 독도를 방문한 바로 다음 날, 유엔에서 독도 관련 표결을 해서 패배하였다는 언론 보도가 신문 1면을 뒤덮을 경우는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치열한 협상 끝에 독도 관련 문안은 최종 보고서에서 삭제하고, 대신 빈 괄호만 남겨두기로 합의하였다. 의장은 총회 석상에서 "관계 당사국이 합의된 문안을 가져오면 그 문안으로 빈 괄호를 채워 넣기로 하고 최종보고서를 잠정 채택한다"고 발표했다. 함께 고생했던 모든 대표 단원들과 함께 목청껏 만세를 외쳐 부르고 싶은 순간이었다. 군인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공으로 알려지지만, 외교가 성공해서 전쟁을 방지하면 이 성공한 외교는 아무도 모른다.이 사건을 겪으면서 재확인한 교훈이 있다. 국토지리원의 지명 표기 지침서 발간은 큰 성과지만, 이 지침서를 굳이 회의 석상에서 배포해 일본의 도발을 유도할 필요가 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직후 일본이 그동안 자제해 오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주장까지 하며 격렬히 반응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독도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확실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시간은 우리 편이다. 평온 무사한 상태에서 우리가 영유권을 행사하고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일본 측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하여야 하겠지만, 우리가 일본 측을 자극할 행동을 먼저 할 필요는 없다. 독도 대응의 기본 전략이다.

2019-11-18 10:01:41

김기수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세계의 창] 미국의 총기폭력과 규제

미국 시민 1인당 총기 1.2정 보유한 셈매년 거의 300건 집단 총격 사건 발생수정헌법 2조'NRA 격렬 반대 넘어서엄격한 규제 법안 제정 목소리 쏟아져미국에서는 매년 총기 폭력(gun violence)으로 수만 명씩 죽거나 다치고 있다. 최근에는 학교, 극장, 나이트클럽, 교회, 야외공연장, 슈퍼마켓 등 공공장소에서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집단 총격 사건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총기 폭력을 관찰하는 한 사이트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매년 거의 300건의 집단 총격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보다 대중의 관심을 덜 받는 총기에 의한 자살, 우발적인 사고, 개인적인 살인 등도 끊이지 않고 있다.미국 질병통제예방본부에서 나오는 사망률을 자료를 기초로 만들어진 통계에 의하면 매년 11만3천108명이 총기 관련 사고를 당하고, 3만6천383명이 사망한다고 한다.이와 같이 미국에서 총기 관련 사고가 일상화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총기 보유율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데서 찾을 수 있다.미국 인구는 약 3억 명이고 이들이 보유한 민간 총기는 총 3억9천300만 정으로, 1인당 1.2정을 보유한 셈이다. 세계 인구의 4%인 미국인이 세계 민간 총기의 42%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지속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경찰관의 비무장 흑인들에 대한 총격 사고도 흑인에 대한 경찰의 편향된 조직문화에 크게 기인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총기를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으로 인한 경찰의 과잉 대응이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미국의 높은 총기 보유율 배경에는 수정헌법 2조와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전미총기협회)가 있다.시민이 총기를 보유하고 소지할 권리를 명시한 200년 이상 유지된 수정헌법 2조는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목적으로 탄생했지만, 그 당시 국가가 개인을 온전히 보호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광활한 땅을 개척해야 했던 미국에서는 총기 보유는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권리로 간주됐고, 수정헌법 2조가 이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NRA는 1871년에 설립해 현재 500만 회원을 보유하고 엄청난 예산을 활용해 정치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총기규제 법안 반대를 위한 로비에 집중하고 있다. 정치인과 NRA 사이의 이해 사슬은 총기로 인한 사망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음에도 보다 엄격한 총기 규제를 위한 노력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이뿐만 아니라 NRA는 '총기 보유'를 마치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고, 불의에 항거하는 책임감 있는 시민 등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해 미국의 풀뿌리 총기문화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이 문화는 특히 보수 성향을 가진 유권자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 따라서 정치인들도 이들의 표를 의식하여 총기 규제에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총기의 구입, 판매 및 보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법규를 가지고 있으며, 이마저도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집단 총격 사건에 사용된 대용량 탄창과 이를 장착할 수 있는 군사용 자동 및 반자동 살상무기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뉴질랜드는 지난 3월 이슬람교 사원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반자동 소총으로 51명이 사살된 후 총리 주도로 신속하게 엄격한 총기 규제 법안을 제정하였다. 그녀는 총기 규제와 관련해 솔직히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그러나 총기 보유가 뉴질랜드에서는 특권이지만 미국에서는 권리라는 차이가 있다. 권리는 특권보다 제한하기 훨씬 어렵다.지난 8월 연이어 발생한 텍사스주 엘파소와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의 집단 총격 사건이 발생한 뒤 75% 이상의 미국인이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회 확대 등 보다 엄격한 총기 규제 법안의 제정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이번에도 과거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될지, 아니면 미국의 수정헌법 2조, NRA의 규제 반대 노력 및 뿌리 깊은 총기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소한의 의미 있는 총기 규제 법안이라도 제정될 수 있을지 지켜볼 뿐이다.

2019-11-11 11:26:14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세계의 창] 솔론의 행복

재물과 권력 가진 정복자 왕보다 아테네 시민이 행복하다는 솔론금수저·흙수저 논란의 우리 사회 금권 신분제도 자리 잡을까 우려그리스는 어떤 나라일까?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이렇다 할 교류도 별로 없다 보니 북한이나 미국, 또는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에 비교해 보면 전해 오는 뉴스가 많지 않다. 최근에는 어려워진 경제 상황이나 불안한 정치 소식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다.하지만 고대의 그리스는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해 사상과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서양 고전 100선에 반드시 포함되는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 현대 민주주의의 기원이 된 아테네 민주정 등을 통해 인류 역사에 매우 굵직한 역할을 담당하여 그 영향력이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다.아테네 민주정의 기초는 솔론(Solon)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정치가로, 감수성이 풍부한 시인이기도 한 까닭에 법률을 시로 표현할 정도였다고 한다.당시의 상황을 보면,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시민들은 원래 균등한 경제적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져 곡물 생산량으로 환산한 소득의 차이가 무려 500대 1에 이르게 되었다.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빈민으로 전락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급기야 신체를 저당 잡히는 일까지 발생했다.솔론은 부의 불균등한 배분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해악과 그 심각성을 깨닫고, 이른바 '솔론의 개혁'으로 불리는 입법을 단행했다. 신체 저당 금지와 부채 말소를 중심으로 한 경제 개혁과 귀족세력 약화와 민중 법정 창설을 골자로 한 법질서 확립이 주된 내용이었다. 안타깝게도 솔론 이후 아테네는 여러 당파로 분열되어, 솔론의 개혁이 열매를 맺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솔론은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가 추구했던 것이 단순히 경제적 부의 균등한 배분이었다면, 그의 이름이 현인(賢人)으로 기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솔론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배경 삼아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라고 물었는데, 물론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기 원했을 것이다.하지만 뜻밖에도 솔론은 아테네의 평범한 시민인 '텔루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텔루스는 크로이소스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며 조국을 지키다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행복의 이유였다.왕은 재차 "그 사람 다음에는 누가 행복한가?"라고 물었다. 솔론은 '클레오비스와 비토'라는 아테네 형제를 소개하며, 그들이 용감하며 서로를 아끼고, 어머니에 대해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에 역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분노한 왕에게 솔론은 지상의 재물과 권력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니 그것으로 행복을 가리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에게 패하여 화형당하게 되자, 뒤늦은 후회와 함께 솔론의 이름을 크게 세 번 외쳤다고 한다.우리 사회는 어떨까?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금권정적 신분제도가 자리 잡아가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한 달 수업료가 200만원을 훌쩍 넘는 영어 유치원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는 일반 시민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솔론과 크로이소스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정직하고 용감하고 자식을 정성껏 키우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평범한 서민들이 행복한 사회이기를 희망한다.

2019-11-04 11:17:38

이성환 계명대 교수 (일본학전공)

[세계의 창] 천황과 한일 관계

이낙연 총리 日 새 천황 즉위식 참석살얼음 양국 관계 돌파구 될지 관심日에 천황은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한국, '뇌관' 건들지 않는 절제 필요오늘은 일본의 새 천황(일왕의 일본 호칭)의 즉위식 날이다. 190개 이상의 국가와 기관을 초청한 일본 최고의 축제일이다. 한국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사절로 참석한다. 즉위식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개선될지에 관심이 크다.한일 관계의 결정적 변곡점은 2012년이다. 일본 내각부가 매년 가을쯤 일본 국민을 상대로 실시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011년까지는 '한일 관계가 양호하다'는 평가가 약 60%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2012년에는 '양호하다'가 18.5%, '양호하지 않다'가 78.8%로 급변하고 우익들의 혐한 활동도 본격화했다.그 후 계속해서 '양호하다' 30% 대 '양호하지 않다' 70% 정도가 유지되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 일로였다. 지난 7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의 조치는 돌발적이 아니라 누적된 불만의 폭발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면 2012년의 무엇이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았을까.그해 8월 이명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 표시로 독도를 방문했다. 며칠 후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천황의 사죄를 요구하는 발언을 했다. 일본 국민들은 격앙했고 "한국을 적국으로 보자" "천황 폐하에 대한 모욕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등 우익 성향 정치인의 발언과 기사가 일본 언론을 장식했다. 일본 국회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의 사죄 요구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독도 방문과 천황의 사죄 요구 중 어느 쪽이 한일 관계에 더 크게 영향을 미쳤을까. 둘 다 민감한 문제이나 후자가 일본 국민의 감성을 더 자극했다는 평가가 많다. 외국에서도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경우가 있으나, 국가원수가 직접 천황을 겨냥한 적은 없다. 한국을 비롯해 외국에서 볼 때 천황은 여느 나라의 왕에 지나지 않으나, 우익 성향의 일본 국민들은 천황에 대한 비난을 일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에게 천황은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인 것이다. 과거 식민지였던 한국으로부터의 비난은 그들에게 더욱 충격이었다.천황을 빼고 일본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번에 즉위하는 나루히토(徳仁)는 126대 천황(25대까지는 신화의 영역)이다. 일본은 그동안 천황가의 대가 끊기지 않은 만세일계(萬世一系)라 한다. 한 번도 왕조 교체가 없었다는 의미에서 안정의 표상으로 해석을 하나, 반대로 변화의 동력이 없는 정체(停滯)로 보는 시각도 있다.그렇다고 천황이 늘 일본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794년부터 시작되는 헤이안(平安) 시대에 들어오면 천황을 대신해 귀족이 실권을 장악했다. 뒤이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 등은 장군 중심의 무가(武家) 지배체제였다. 지배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천황은 있어도 없는 듯 명맥을 이어갔는데, 수수께끼이다.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굳이 그 존재를 없애거나 바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천황이 정치의 중심에 복귀한 것은 메이지유신을 전후해서다. 하급 무사들이 중심이 된 유신세력은 천황을 막부 타도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 연장 선상에서 그들은 메이지 헌법에서 천황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주권과 대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천황은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現人神)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일본 역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지금과 같은 상징 천황제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 천황제는 오히려 예외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 국민들에게는 근대 천황제가 각인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천황의 권력과 권한은 사라졌으나, 그는 여전히 일본 국민의 심저(心底)에 절대적 존재로 남아 있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이 항복 방송을 할 때 일본 국민들은 황궁을 향해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절대적 존재에게 굴욕적인 항복 방송을 하게 한 죄스러움 때문이었다.천황이 한일 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 적은 없으나, 뇌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국이 이를 신성시할 필요는 없으나 국가 간 절제는 필요하다. 양국 관계를 위해서도.이성환 계명대 교수 (일본학전공)

2019-10-21 10:28:00

장동희, 경북대 초빙교수/전 주핀란드 대사

[세계의 창] 북핵 플랜 B를 준비할 때다

합의·파기 거듭하며 핵 발전시킨 北美 압박에 포기? 섣부른 기대 금물동맹 우습게 아는 트럼프 믿기 곤란우리도 자체 핵무장 방안 검토 필요지난 5일(현지시간) 열린 스톡홀름 미·북 실무회담이 별 성과없이 끝났다. 북한 측 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는 이날 오후 실무협상 결렬을 선언하며, "미국이 빈손으로 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미국이 스웨덴 측의 2주 내 실무협상 재개 초청을 수락한 데 반해, 김명길은 "미국이 판문점 회동 이후 아무런 셈법을 만들지 못했는데 2주 안에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는 협상장에서 북한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시험중단으로 선제적 비핵화 조치를 취했다며, 미 측의 상응조치가 없으면 실험 재개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한다.앞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금년 말까지 시한을 정해 미국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기도 했다.이쯤 되면 미·북 회담의 목적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무엇이 북한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신감과 고압적 자세를 갖게 했는가?첫째는 북한이 핵 무력 완성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그간 6차례에 걸친 핵실험으로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핵탄두 소형화까지 거의 성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핵탄두도 30개 이상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지난 2일에는 동해상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에 성공, SLBM 실용화에도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됐다. SLBM은 오키나와는 물론 괌, 하와이 그리고 미 본토도 사정권에 둘 수 있다.북한 내 지상 핵무기가 다 파괴된다 해도 SLBM은 북한이 2차 반격을 할 수 있게끔 해 준다. 즉, 상대방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도록 북한에 최소 억제전략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둘째는 안보리 제재의 무력화다. 2017년 말 북한이 6차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로 러시아와 중국까지 제재에 적극 가담하며 북한을 압박했다. 극도의 위기감을 느낀 김정은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대한민국과 전 세계를 향해 올리브 가지를 내밀었다. 이후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과 2차에 걸친 미·북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절차를 밟았다.아울러 지난 6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북 이후 중국 당국은 대규모 식량 원조에 더해 북한 방문 관광객을 대대적으로 늘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다. 이는 결국 외환 고갈 위기에 처한 북한에 안보리 제재를 우회하는 방법으로 숨통을 터준 셈이다.셋째는 미국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다. 김정은은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탄핵까지 거론되는 트럼프 대통령이 성과에 조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김정은이 금년 말까지 시한을 못박고 미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도 미국의 정치 스케줄을 감안한 것으로 추정된다.결국 2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은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와 협상력 강화에 기여한 것으로 판명났다. 지난 20년간 합의와 합의 파기를 번갈아가며 핵 능력을 발전시켜 온 북한이 쉽게 핵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제는 북핵 협상이 실패로 끝날 경우에 대비한 플랜 B를 준비할 때다.핵은 절대무기다. 핵을 가진 북한에 대해서는 핵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방법은 미국의 핵우산 강화나 자체 핵무장뿐이다.그러나 "동맹은 매우 쉽다"(Alliances are very easy)며 동맹을 언제나 파기 가능한 계약 정도로 여기는 트럼프에 마냥 의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북한 핵이 미 본토를 타격할 능력까지 갖췄을 때, 미국이 과연 희생을 감수하며 우리에게 핵우산을 제공해 줄지 의문이다.그렇다면 우리도 자체 핵무장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같은 동맹국에게 우호적 핵 확산을 허용하는 것이 동북아 핵 세력균형을 이루고, 더욱 효과적으로 북핵에 대응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미국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동맹국 스스로 방위능력을 갖출 것을 주문하는 트럼프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기회는 스스로 찾는 자에게 찾아온다. 새마을세계화재단 대표이사(전 주핀란드대사·국제법 법학박사)

2019-10-14 10:35:27

김기수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세계의 창] 4차 산업혁명: 기회와 도전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시스템 변화새로운 시장 열리고 삶의 질 높아져기술 종속·빈부 격차 심화 위험성도모든 분야 통합'포괄적 방안 모색을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일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기존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기술 혁신이 임박한 시점에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변환은 그 규모, 범위 및 복잡성 면에서 인간이 지금까지 경험한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우리는 이 새로운 변환이 어떻게 전개될지 잘 모르나, 분명한 것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모든 분야의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이 새로운 변환을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른다. 4차 산업혁명은 증기와 수력에 의한 생산의 기계화, 전기와 조립 라인에 의한 대량생산, 컴퓨터(디지털)화로 인한 생산의 자동화로 각각 특징되는 이전의 세 산업혁명과는 그 변화의 속도와 범위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매우 다르다.4차 산업혁명은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비선형적으로 변화하며, 모든 국가의 거의 모든 기존의 산업을 파괴(Disrupt)하고, 그 변화의 폭과 깊이는 생산, 경영 및 거버넌스 시스템 전체의 거대한 변환을 예고하고 있다.4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기술은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블록체인, 사물인터넷(IoT), 바이오테크놀로지, 로보틱스, 가상현실(VR) 및 증강현실(AR), 3D 프린팅 등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 많은 기술은 이미 기업과 우리 일상에서 상당히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들 기술은 더욱 발전할 것이며 나아가 서로 융합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래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과 응용 분야가 나타날 것이며 이로 인해 모든 분야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결과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기회와 동시에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우선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산업혁명들과 같이 글로벌 소득수준을 향상시키고 세계 전 인구의 삶의 질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래에는 기술혁신으로 인해 장기적인 효율성 및 생산성의 증대와 함께 공급 측면에서 수송 및 통신비용이 절감되고, 물류와 글로벌 공급사슬이 보다 효과적이 되어 거래비용이 절감됨으로써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이는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그 결과 기업에는 더 많은 기회가 열리고, 소비자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고, 새로운 직업의 출현과 업무 방식의 변화로 직장인은 더 편리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고 더 많은 여유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창의성, 공감 능력, 청지기 정신 등과 같은 인간 본성을 높일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동시에 많은 경제학자들은 급격한 기술혁신으로 노동시장이 파괴되고 자본 수익률과 노동 수익률의 격차가 가속화될 수 있으며 그 결과 빈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한다.예를 들면,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의 발달로 음성 챗봇(Chatbot)이 콜센터 직원을 대신할 것이고, 자율주행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전국 화물트럭 운전기사들의 일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 높아질 수 있다. 또한 통제되지 않은 기술혁신으로 사람이 기술에 종속되고 인간성이 박탈되어 삶의 질이 오히려 떨어질 위험도 있다.이와 같이 불확실한 4차 산업혁명의 미래를 개인, 연구기관, 기업 또는 정부 등 어느 한 주체에 맡길 수는 없다. 전 세계의 모든 주체가 지금부터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인간 중심의 기술혁신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이를 위해서 우선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경제, 사회, 문화 및 환경을 새롭게 형성할지에 대한 포괄적이고 글로벌하게 공유된 관점을 도출해야 할 필요가 있다.이를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이 인간의 공동 목표와 가치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모든 관련 주체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19-10-07 10:23:12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세계의 창] 대왕고래의 희망

1881년 문을 연 런던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규모와 더불어 외벽을 장식한 갈색과 회색 테라코타의 차분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이 인상적인 곳으로, 런던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로 소개되곤 한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더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탁 트인 넓은 공간에 거대한 대왕고래가 마치 헤엄치듯 유유히 떠 있기 때문이다.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이 화석은 길이가 자그마치 25m에 달하며, 지구상 현존하는 동물 중 가장 큰 대왕고래의 모습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준다. 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동식물의 화석과 표본은 생명체의 다양함과 풍부함, 더 나아가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한다.하지만 그것들 대부분이 절멸하였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되면, 갑자기 텅 빈 마당에 혼자 서있게 된 사람처럼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최근 들어 동식물의 개체 수 급감이나 멸종에 관한 뉴스가 늘어나는 추세라 더 그렇다. 대왕고래도 한때는 인간의 마구잡이식 고래 사냥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무분별한 포획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이 체결된 후 가까스로 멸종 위기는 넘긴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져가는 동식물이 희귀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늘상 우리와 함께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 많던 참새들, 다 어디로 갔을까? 포장마차마다 참새구이를 팔던 시절을 분명히 기억하는데, 지금은 그 흔하던 참새를 잘 찾아볼 수 없다. 어머니께서 가끔 옥상에 새 모이를 한 줌 뿌려주시면 참새 떼가 금방 모여들어 짹짹거리곤 했었지만, 이제는 쌀을 뿌려주어도 찾아드는 참새가 별로 없다. 꿀벌이 사라져서 인공수분을 시작한 지도 벌써 오래다. 사라져가는 동물들은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다급한 경고가 아닐까?생물 다양성의 파괴를 불러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요즘 전 세계의 화두가 된 기후변화도 그 주된 원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서유럽 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에서 빙하가 녹아내려 붕괴 위기에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지구 곳곳에서 태풍과 홍수, 그리고 가뭄과 기근의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는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일대는 지난해 극심한 가뭄으로 사람과 동물 모두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고, 유럽은 폭염과 홍수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는가 하면, 브라질과 볼리비아는 아마존의 산불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높다. 지난달 20일,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런던, 베를린, 함부르크, 나이로비, 멜버른, 마닐라, 리우데자네이루 등 전 세계의 수천 개 도시에서 기후변화 반대 시위가 열렸고, 여기에 수백만 명이 참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남극의 과학자들도 동참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화석연료 감축이나 소비와 생산 방식의 재검토라는 문제에 가로막혀 정치권과 기성세대가 머뭇거리는 사이, 젊은이들이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번 시위가 '하나의 이념으로 뭉친 전 세계적 청년 운동'이 된 것은 기후변화와 그 원인인 환경파괴에 대해 젊은이들이 절박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미래가 있어야 한다"는 스웨덴 16세 소녀의 외침은 어떤 꾸지람보다도 호되다.젊은이들의 요구에 솔직하고 책임감 있는 답을 해야 한다. 디스토피아가 아닌 희망의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야 한다. 기후변화와 혹독해지는 자연재해는 현재의 생활방식을 바꾸라는 신호이며 문명의 도전이다. 소비문화에 근거한 개발과 경제발전 논리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환경을 돌보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류의 과제다.자연사박물관의 대왕고래에게 '희망'(Hope)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생각할 때다.

2019-09-30 14:05:33

이성환 게명대 교수

[세계의 창] 하이켄크로이츠는 안 되고 욱일기는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일본은 어떻게 다를까. 독일은 과거를 멀리하고 일본은 과거를 가까이 한다고 한다. 독일은 2차 대전 이전의 나치 체제와의 단절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구축했고,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찾았다. 독일 초대 총리 아데나워는 1951년 의회연설에서 "독일의 이름으로 일어난 전쟁 범죄에 대해 현재와 미래에도 도의적 금전적 보상 의무가 있다"며 과거와의 단절과 반성을 선언했다. 맥아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일본은 이전의 메이지헌법 체제하에서 제국의회의 심의와 천황의 재가를 거쳐 신헌법을 제정, 공포했다.독일은 연합국에 의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더해 스스로 국내법을 만들어 전범을 처벌했다. 일본은 연합국의 도쿄 국제군사재판을 부정하고 연합국의 군사점령이 끝나자 전범을 석방했다. 1952년 일본 국회는 원호법과 연금법을 개정하여 전사자와 마찬가지로 전범과 그 유족에게 연금과 위로금을 지급했다. 일본에는 공식적으로 전범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같은 논리에서 전쟁 중에 그들이 저지른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은 범죄가 아니며 배상의 의무도 없어진다.내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와 욱일기(旭日旗, 떠오르는 아침 해와 같은 기세)가 논란이다. 욱일기는 태양을 상징하는 일장기에 황실의 문양인 국화의 꽃잎을 햇살 무늬(光線)로 형상화한 것이다. 욱일기는 1870년과 1889년에 각각 육군과 해군의 정식 군기로,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편성된 항공부대도 사용하면서 일본군의 상징이 되었다. 육군은 "무용(武勇)으로 국위를 세계에 떨친다"는 의미로, 해군은 "햇살 무늬는 세계에 천황의 위엄을 빛나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에서 만든 전쟁 홍보영화에는 침략 전쟁의 상징으로 하이켄크로이츠(逆卍字)와 함께 반드시 욱일기가 등장했다. 패전과 함께 욱일기도 사라졌으나, 1954년 육상 자위대와 해상 자위대가 발족하면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말한, "옛 제국군의 전통을 잇는다"는 취지로 다시 사용되었다.1945년을 기점으로 한 독일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국가 상징의 연속과 단절일 것이다. 독일은 2차 대전 이전 나치의 당기와 국기에 사용되었던 하이켄크로이츠를 금지하고 나치 시절 애창되던 국가의 1, 2절 가사는 삭제하고 3절만 사용한다. 일본의 경우는 군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제를 비롯해 일장기, 욱일기, 국가(기미가요)를 그대로 사용한다. 왜 욱일기는 사용되고 하이켄크로이츠는 금지되었을까. 왜 독일은 반성하고 일본은 하지 않을까. 독일 할레대학 맨프레드 교수는 주변국과의 관계도 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영국, 프랑스, 폴란드 등 주변국으로부터 나치의 부활을 계속 감시받았고,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유럽통합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각국은 일본을 감시할 여력이 없었다. 중국은 내전에 시달렸고, 한반도는 전쟁 와중에 있었고, 동남아의 신생국들은 내부 정비에 바빴다. 경제적으로 일본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아시아 각국은 일본을 추궁하지 못했고, 이를 이용한 일본은 경제적 지원이라는 형태로 그들과 쉽게 타협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위안부라는 인권문제가 등장하고 아시아 각국이 성장하면서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일본 정부는 욱일기는 풍어, 출산 등에도 사용되었으며, 군국주의 상징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과거 역사를 상기시키는 욱일기는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팸플릿을 만들어 중국 방문객들에게 배포했다. 일본은 한국만이 욱일기를 문제 삼는다고 하나 중국도 공감을 표하고 국제축구연맹(FIFA)도 금지한 경우가 있다. 내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과거와 단절한 일본을 볼 수 있을까.

2019-09-23 11:09:14

장동희 새마을세계화재단 대표이사

[세계의 창] 세네갈 새마을운동과 고레(Goree)섬

지난주 세네갈 출장을 다녀왔다.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서 차로 9시간 거리에 있는 움보르비란 마을에서 거행된 모내기 시범행사 참석을 위해서다. 이날 행사에는 관할 주지사, 시장뿐 아니라, 주세네갈 한국 대사도 먼 거리를 마다 않고 달려와 참석하는 등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한국에서 도입한 이앙기를 이용해 순식간에 한 마지기 논의 모내기를 마치자, 주민들 사이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그간 세네갈에서는 논에 직접 씨를 뿌리는 직파 방식을 통하여 연간 ㏊당 3~4t의 쌀을 생산했다. 새마을세계화재단의 안덕종 세네갈 사무소장(농학박사)은 못자리에서 모를 기른 다음 논으로 옮겨 심는 한국식 농법을 적용할 경우, ㏊당 10t의 쌀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통하여 세네갈에서 농업혁명을 일으키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다. 104㏊(31만 평)의 황무지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농토로 만든 그다. 더욱 놀라운 일은 양 몇 마리를 들에 풀어놓고 그늘에서 낮잠만 즐기던 마을 주민들이 이제는 땡볕에도 논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새마을정신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이번 방문의 또 다른 목적은 세네갈 내 새마을 사업의 효과적 추진을 위한 본부협정 체결이었다. 협정 서명 후 아마두 바 세네갈 외무장관은 경북도와 새마을세계화 재단이 지금까지 세네갈 내에서 시행한 새마을세계화 사업의 성공적 수행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또한, 현재 진행 중인 시범마을 사업도 성공리에 마쳐서 새마을 정신이 세네갈 전역으로 확대되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하였다.이날 서명한 본부협정은 세네갈 주재 우리 재단 사무소에 외교 공관에 준하는 특권면제를 부여하는 협정이다.외교 공관이나 국제기구가 아닌 법인이나 단체에 이러한 특권면제를 부여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이다. 외무장관이 직접 나와서 필자와 나란히 앉아 협정에 서명한 것도 세네갈 정부가 새마을 사업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를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세네갈 주재 재단 사무소 차량 번호판은 'SAEMAUL xxxx' 로 표기 되어 있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새마을 홍보물이다. 세네갈 출장길에 16~19세기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던 고레(Goree)섬을 방문할 기회를 가진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이다. 수도 다카르에서 3㎞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자색, 노란색, 흰색 등의 예쁜 건물이 어우러져 유럽의 여느 시골 마을을 연상시킨다.그러나 300년 동안 2천만 명의 흑인 노예를 송출한 슬픈 역사를 지닌 섬이다. 이 상흔을 기리기 위하여 1978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섬 중앙에는 아직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노예의 집'이 있다. 2.6㎡ 크기의 방에 노예 20여 명씩을 가두어 두었다 한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서로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잤다고 한다. 젊은 여성 노예들의 유일한 희망은 노예 무역상과 성관계를 해서 임신을 하는 것이다. 백인의 아이를 갖게 되면 풀려났기 때문이다.또 다른 막사에는 젊고 건강한 흑인 여성들을 수용, 체격이 건장한 남성들과 관계를 갖게 해서, 튼튼한 아이를 생산하도록 하였다. 사육해서 팔아먹을 새끼 노예인 것이다.바다 쪽으로 난 통로를 지나면 '돌아올 수 없는 문'이 나온다. 이 문을 나서면 배에 실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팔려 나간다. 배에는 노예들을 눕혀서 한 층, 한 층 짐짝 싣듯이 실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보다 못한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가이드로부터 이런 설명을 들으며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내내 생각하게 되었다.우리의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이들이 좀 더 잘살 수 있게 된다면, 같은 인류로서 이전 세대가 범한 못된 짓에 대한 조금의 속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새마을운동에서 승화된 박애주의를 느낀다.

2019-09-16 11:20:08

김기수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세계의 창] '새마을운동'을 대한민국의 브랜드로

지난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은 50명의 석사 졸업생을 배출했다. 영남대는 대한민국의 국제개발협력 실천에 동참하고 나아가 국격 향상 및 인류 공영에 기여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해 2011년 개발도상국의 지속 가능한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주도할 인재 양성 전문 교육기관으로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을 설립했다.박정희새마을대학원은 개원 이래 아프리카, 동남아, 중남미 등의 67개국에서 온 667명의 학생들을 교육해오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대부분 개도국의 공무원 또는 이들 국가들의 개발을 지원하는 비정부기구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다. 박정희새마을대학원에서는 새마을운동을 포함한 한국의 개발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도국에 자조 역량 개발을 촉진할 자기개발 원조 모델을 확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론과 실무 교육 및 정신(태도) 변화를 통한 지도자로서의 실천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대부분의 졸업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정부 및 비정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마을운동을 소개하고 또한 실천하고 있다.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에서는 졸업생들이 직접 새마을운동을 현지 마을에 적용하여 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 등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탄자니아에서는 졸업생이 시장이 되어 본인의 시뿐만 아니라 빅토리아호수 연안에 있는 탄자니아, 우간다, 케냐 등 3개국 113개 지방정부 및 자치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빅토리아호수지역 지자체연합(LVRLAC)과 함께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새마을운동 방식의 농촌 개발에 농업관개축산부에 근무하는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졸업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새마을운동의 효과성에 대한 확신과 전문 지식으로 무장된 두 졸업생의 노력으로 암하라주와 SNNPR주에서 새마을운동을 농촌 개발 모델로 채택해 시행하고 있다.한편 지금까지 선진국을 중심으로 많은 예산이 개도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에 투입됐지만 수혜국 주민들의 주인 의식 부족과 역량 부족 등으로 인해 대부분 지속 가능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민 참여 유도, 자조와 자립 정신 배양, 교육과 역량 강화, 공정한 평가와 성과에 따른 차등 지원 등 새마을운동의 시행 원리와 전략을 적용하면 보다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ODA 사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미국, 유럽, 일본 및 중국의 개도국에 대한 유무상의 원조액에 비해 한국의 원조액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국제사회에서 ODA는 단순히 개도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 개도국과의 외교 및 경제적 협력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개도국에 대한 지원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한국은 개도국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발전 경험을 '새마을운동'으로 브랜드화하여 앞으로 개도국에 대한 모든 ODA와 경제 지원을 일관성 있게 이 브랜드로 시행하면 적은 예산으로 보다 효과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현재 새마을운동중앙회와 경상북도 새마을세계화재단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개도국 지도자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단기 연수,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에서 하고 있는 개도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새마을운동 기반의 지역사회 개발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화된 이론 및 실무 교육, 그리고 모든 ODA 사업에 새마을운동의 시행 원리와 전략을 적용하는 정책이 함께 시행될 필요가 있다. 단기 연수를 통해서 개도국에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개발 동기를 부여하고, 정규 학위 과정에서 체계적이고 심화된 새마을운동과 개발 정책에 대한 교육으로 개발을 주도할 개도국 공무원과 지도자들의 실행 역량을 강화하고, 이들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새마을운동의 시행 원리와 전략을 적용하여 ODA 사업을 수행하도록 일관성 있게 지원 및 관리하면 한국의 ODA 사업은 보다 지속 가능하고 효과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2019-09-09 10:28:05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세계의 창] 벨파스트 평화의 벽

북아일랜드의 도시 벨파스트(Belfast)에는 '평화의 벽'(Peace Walls)이 있다. 벨파스트의 여러 곳에 설치된 이 벽들은 크기가 다양한데, 몇백m에 불과한 짧은 것이 있는가 하면 5㎞에 달하는 매우 긴 것도 있다. '평화의 벽'이라는 이름 대신 종종 '평화선'(Peace Lines)이라 불리기도 하며 모양도 여러 가지여서, 아무도 넘어갈 수 없는 높고 튼튼한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철책을 둘러치거나 또 어떤 곳은 도로표시만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밋밋한 벽도 있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벽화가 많고, 몇 해 전에는 영국의 유명한 그라피티 미술가 뱅크시(Banksy)가 이곳에 그림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근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차츰 늘어나자 택시 관광(Taxi Tour)이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어떤 여행객은 평화의 벽에 자신의 메시지와 서명을 남겨 놓고 가기도 한다.그런데 벽과 평화라는 두 단어는 서로 어울리기나 한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면, 벽이라는 단어에는 분리, 단절, 고립, 방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조화, 연결, 소통, 일치를 속성으로 하는 평화와 연결되는지 의아해진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기묘하게 조합된 이 구조물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벨파스트가 속해 있는 북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함께 영연방을 이루는 영국 영토이다. 아일랜드(에이레)와 같은 섬에 있으면서도 별개의 나라가 된 것은,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령으로 남아 있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생겨났다. 북아일랜드에는 아일랜드와 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영국 정부에 그대로 소속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심각한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특히 벨파스트에서는 1980, 90년대의 유혈 투쟁으로 무고한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고, 억울함과 적개심,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자, 서로를 분리하기 위한 장벽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그들의 상반된 주장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그 뿌리가 중세에까지 닿아 있는 오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구교도와 신교도, 공화파와 왕당파, 독립파와 통합파, 민족주의자와 연합주의자로 그들은 서로를 분리하고 배척했다. 1998년의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이른바 성금요일 평화협정 체결로 벨파스트의 무장투쟁은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영국의 브렉시트 결과가 북아일랜드에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아닐지 우려스럽다.시민들 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벨파스트 곳곳에 세워졌던 벽은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행의 즐거움 대신 역사의 무거운 메시지를 전해준다.시야를 조금 넓혀 보면, 평화의 벽이 북아일랜드에만 세워진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평화를 빙자한 벽 세우기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사는 것일까? 정치적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빈부의 갈등, 남성과 여성의 갈등, 북한과의 갈등, 이웃한 나라들과의 갈등. 매일 쏟아지는 갈등 뉴스의 홍수 속에서 정신이 혼미해진다.나와 너를 가르는 정체성의 기준은 참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이 기준들이 서로를 적대시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것이 평화다. 높은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 위해 마주 앉는 것이 평화다. 대화를 통해 협조하고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보다, 인내와 오랜 기다림으로 대화를 맞이하는 것이 훨씬 인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평화가 찾아들어, 갈등으로 쌓아 올린 높은 벽들이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변모하기를 희망한다.

2019-09-02 10:53:34

이성환 계명대 교수 (일본학전공·국경연구소 소장)

[세계의 창] 아베는 헌법 개정을 할 수 있을까

올해는 메이지유신 151주년이다. 1945년까지의 77년간은 침략전쟁으로 일관했고, 그 후 현재까지 74년간은 평화로웠다. 근대 일본은 전쟁과 평화의 시대가 반반이다.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하는 현행 헌법 9조는 일본을 평화 국가로 만들었다. 그런데 다시 전쟁 국가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헌법 9조를 개정해 군대를 보유하여 일본을 전쟁 가능 국가로 만들려는 아베 총리의 헌법 개정론이 그것이다.아베가 이끄는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정권은 2014년과 2017년 중의원 선거에서 개헌선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했다. 연립정권은 2016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도 3분의 2를 넘겼다. 참의원 선거 직후 아베는 "중의원도, 참의원도 3분의 2를 넘겼다. 이제 헌법 개정이다"고 외쳤다. 그럼에도 아베는 왜 헌법 개정을 못 했을까. 일본의 헌법 개정 절차 때문이다. 국회 발의 후 국민투표를 거치는 것은 한국과 같으나, 국민투표 방식이 다르다. 한국은 개정 조항을 일괄하여 한 번 투표한다. 반대 조항이 있어도 찬성표를 던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일본은 개정 조항별로 찬반을 표한다. 개정 조항이 10개이면 투표용지도 10장이다. 번거로움을 약간 줄이는 방법으로 국회에서 합의하여 관련 조항들을 묶어 항목별로 투표할 수 있다. 자민당은 9조의 자위대 명기, 긴급사태 관련, 교육 무상화 관련, 참의원 선거구 조정 등 4개 항목을 예상하고 있다.문제는 여론조사를 보면 3개 항목에 대해서는 찬성률이 높으나 9조 개정에는 찬반이 팽팽하다. 국민투표에서 헌법 개정의 핵심인 9조 개정은 통과 가능성이 낮다. 아베가 밀어붙이지 못한 이유이다. 9조 개정에 실패하면 다시 헌법 개정을 시도하기까지는 요원한 세월이 필요하다. 수출규제 조치가 취해진 지난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8석이 줄었다. 개헌에 찬성하는 무소속 의원을 합쳐도 참의원에서 개헌 세력은 3분의 2에 못 미친다.(최근 일부 야당의 동조 움직임이 있다). 수출규제로 한국 때리기를 하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아베에게 지난 7월의 참의원 선거는 실패였다.아베는 왜 헌법 개정에 집착할까. 그는 2006년 '아름다운 일본'을 슬로건으로 52세의 최연소 총리가 되었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1년 만에 사임했다. 2012년에는 '강한 일본'을 내걸고 두 번째 총리에 취임했다. 둘을 합치면 '아름다운 강한 일본'이 그의 정치적 목표이다. 지향점은 2차세계대전 이전의 대일본제국이다. 침략전쟁으로 국가 '위신'을 높여가던 강한 일본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이런 그의 정치적 지향을 뒷받침하는 것이 '일본회의'다. 일본회의는 1960년대 반미와 천황제 폐지를 주창하는 좌익 학생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대일본제국헌법 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신도(神道) 계열의 우익 학생운동의 연합체가 그 모태다. 그때의 우익 학생 지도자들이 지금의 일본회의를 지도하고 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 시기 대동아공영권을 기치로 아시아를 침략하던 그때를 일본 최고의 순간이라 한다.그 기저에는 경기침체, 노령화,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사회적 활력이 없어지고, 한국과 중국의 추격으로 존재감이 저하하는 데 대한 불안이 있다.이러한 불안이 침략전쟁 시대의 개인의 궁핍은 망각하고 펄럭이던 일장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2차대전 이전의 국가 상징을 모두 폐기했다. 일본은 천황제, 일장기, 욱일기를 여전히 국가 상징으로 사용한다.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의 포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배경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종료됐다. 한일 간의 군사협력의 상징이 사라졌다. 이를 핑계로 아베는 안보 위기론을 부추기며 헌법 개정에 박차를 가할 것이나, 쉽지 않다. 일본에게도 좋다.

2019-08-26 11: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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