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관련 기사 목록입니다.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자유로운 말
나는 불교에서 계율을 전해주는 의식인 수계를 두 번 받았다. 첫 번째는 어릴 때 어머니 따라 절에 가서 받은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군대 훈련소에서 초코파이에 이끌려 간 것이었다. 군대에서 받을 때 법사는 수계식을 마치면서 "오늘 계율을 받았으니 계율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계율을 지키려는 생각을 가지지 말고, 바르게 살겠다는 마음 하나만 가지라고 했다. 계율을 의무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자유롭지 못하게 되지만,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면 모든 행동이 저절로 계율에 맞게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군량만 축내는 사람 같았던 법사가 부처님처럼 보였었다.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계율을 지키지만 어긴 경우도 있고, 계율을 어겼지만 지킨 경우도 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켰지만 입시 부정, 취업 청탁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노력한 것 이상의 이익을 가지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표면적인 계율을 지켰다고 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것을 가로챈 것이므로 계율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고하는 말로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한 사람은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킨 것이 아니다. 반면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모두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를 즐길 정도의 절제된 음주를 하는 것은 계율을 어긴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계율은 그 말뜻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계율이 나오게 된 이유를 생각하는 데 참뜻이 있다.우리말을 사용하는 것도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문 규정을 잘 지키는 것이 바른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말 하나하나를 불편해 한다. '플래카드'가 맞는지 '플랜카드'가 맞는지, '십상이다'인지 '쉽상이다'인지 헷갈릴 때는 일일이 확인해 보고 맞춤법에 맞게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굳이 '플래카드'라고 할 필요 없이 '현수막'이라고 하면 되고, '권력은 타락하기 십상이다'라고 할 필요 없이 '권력은 타락하기 쉽다'라고 하면 된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다. 맞춤법을 몰라도 아는 사람보다 더 나은 표현을 할 수 있다.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는 어법에는 맞지만 바르지 않은 말들이 참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가족, 동료, 학생들에게 했던 바르지 못한 말을 반성한다. 내년에는 바른말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다짐해 본다.'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는 오늘 자로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2018-12-30 14:57:07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자식, 새끼
우리 속담에 '자식 과년하면 반중매쟁이 된다.'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자식이 스스로 결혼도 못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부모가 해결해 주려고 하다 보니 반중매쟁이가 된다는 것이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요즘 세상 기준으로 보면 '자식 수험생이면 반입시전문가 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식이 알아서 공부하고, 알아서 진학하는 것이 가장 좋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자식은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부모 마음은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돈과 시간을 자식에게 투자할 수밖에 없게 된다.부모가 그렇게 투자를 하지만 자식은 항상 부모 뜻대로 잘 따라오고,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식은 자식 나름대로 인격체로 부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식은 참 가성비가 떨어지는 존재다. 부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힘들게 낳아서 기른 한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인 반면, 부모의 뜻대로 할 수도 없고, 따라오지도 않는 돈 먹는 하마 같은 원수덩어리, 자식은 그런 이중적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자식'이라는 말은 단순히 부모가 낳아 기른 아이를 이를 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놈의 자식 예쁘기도 하지."라고 말할 때처럼 귀여운 경우에도 사용되고, "야, 이 자식아!"라고 말할 때처럼 욕으로도 사용된다. 왜 의미나 느낌이 상반된 말에 같은 말을 쓰는지는 부모가 되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자식과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어감은 좀 더 다른 말에는 '새끼'가 있다. 새끼는 자식이 어릴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금쪽같은 내 새끼'처럼 '자식'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표현할 때 쓴다. 새끼는 더 귀여운 반면, 욕으로 사용할 때는 자식이라는 말보다 욕의 강도가 훨씬 강하다. 그래서 글로 쓸 때는 차마 "이 새끼야!"라고 할 수 없어서 '××'로 대체하기도 한다.올해 우리집 큰딸이 입시를 치르면서 몇 년은 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대학을 갈 때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부담이 직접 공부를 해야 하고, 입시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열아홉 살 아이에게는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압박과 부담이 있었지만 나도 부모 욕심을 조금 줄이고, 아이도 부모 마음을 이해하려 하면서 예전보다 사이가 더 나아진 면도 있다. 자식 농사는 욕심이 들어가면 욕할 때 쓰는 자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2018-12-23 14:50:15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벽(癖)과 덕 1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학창 시절 수학과 물리 외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 수학과 물리 교사들이 보기에는 천재성이 있는 학생이었지만, 다른 교사들이 보기에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는 문제아였다. 이 문제아는 자기가 의문을 가진 물리 문제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빠졌고, 그 결과 규율이 엄격한 김나지움에서 퇴학을 당하고 만다. 독일의 교육 제도 아래서는 대학을 갈 수 없었던 그는 스위스로 가서 취리히 공과대학에 시험을 보지만 수학, 물리 외에는 낙제였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태어났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인류 역사에 남은 위대한 천재 중에는 아인슈타인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하나에 몰두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성향을 나타내는 우리말로 '벽'(癖)이라는 말이 있다. 글자를 풀어보면 병적으로 한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접미사로는 '도벽, 낭비벽'처럼 고치기 어렵게 굳어 버린 버릇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때도 부정적인 의미가 많다. 그런데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는 '백화보'(百花譜) 서문에서 전문적인 기예는 '벽'을 가진 사람이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며, '벽'이 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한다. 박제가가 생각한 '벽'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열정과 전문성, 성취해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오늘날 '벽'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말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오타쿠'가 있다. '오타쿠'는 특정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전문가라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는 '벽'과 비슷하다. 그러나 '오타쿠'에는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없어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강하다. 우리나라 누리꾼들은 '오타쿠'를 '오덕후'(五德侯)로 변형을 하였는데, 오덕후보다 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숫자를 올린 '육덕, 십덕'과 같은 말이 생겨났으며, 줄인 말인 '덕후'는 '영화덕후, 소시(소녀시대)덕후'처럼 접미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더 줄인 말인 '덕'은 '덕질(취미를 위해 돈과 시간을 쏟는 일), 입덕(주로 아이돌 팬으로 입문하는 것)'처럼 다양한 신조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흥미로운 점은 '오덕후'에서 '덕'으로 말이 줄어들수록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는 느낌은 떨어지고, '마니아'나 '광팬'의 의미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만 보아도 창의적인 '오덕후'였고, 물리에 빠져든 '물리덕후'였을지는 몰라도 누군가의 팬으로 '입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2018-12-02 15:05:39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생산적인 댓글
지난주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지만 교육계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뉴스는 숙명여고 쌍둥이에 관한 것이었다. 인터넷 기사에는 엄청난 댓글이 달리는데 추천이 많은 댓글은 '수시 폐지, 정시 100%', '어디 그 학교뿐이랴', '아빠가 전교조'로 요약할 수 있다. 더 간단히 요약하면 '교육계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상당 부분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엄중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댓글들이 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현재의 수시 제도는 수능 중심의 결과 평가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것이었다. 취지는 동의를 하지만 실제로는 대학에서 이 학생은 이래서 떨어졌고, 이 학생은 이래서 합격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다. 수능보다 더 살벌한 내신 경쟁을 해야 하며, 때로는 학생의 능력보다 학생부에 기록하는 교사의 작문력이 입시에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불만스러운 제도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이 올바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학교의 교육과정은 수능 중심이 아닌데 입시만 수능 중심이 되면 사교육 광풍과 강남·수성구 쏠림 현상, 학교 수업의 파행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방적인 주장보다는 교육과정 수립 때부터 장기적인 공론화를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서 의심하는 것은 옳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부모와 자식이 같은 학교에 있다는 것만으로 냉소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대신 입시와 관련된 교사의 부정이 있을 경우 파면과 연금 전액 몰수, 교육계에 불신을 초래한 것에 대한 징벌적 성격의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요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개인의 일탈을 소속 단체, 지역과 연관시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편 가르기밖에 안 되는 비생산적인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립학교에서 전교조 소속 교사가 교무부장을 하고 교감으로 내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기자들이 팩트 체크를 해 보면 알겠지만 2010년도에는 쌍둥이 아빠가 전교조 소속이었을지는 몰라도 현재는 다른 교원단체 소속일 가능성이 높다.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말들은 우리 사회에 독이 되는 가짜 뉴스가 된다. 생산적인 댓글은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길로 움직이는 동력이 되지만, 냉소와 혐오로 이루어진 말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2018-11-18 14:46:27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예전의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면 주인공이나 많이 배운 사람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표준어를 사용한다. 반대로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많이 배우지 못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다. 극에서 악당이나 감초 역할을 할 수는 있어도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사투리는 의사소통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을 비롯한 극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은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표준어를 주로 쓰는 것이다. 거기에 표준어를 바른말 고운 말과 동일시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면서 사투리와 표준어 중 어떤 말을 선택해서 사용하는가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학술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표준어는 소쉬르가 이야기한 '랑그'에 가깝다. 랑그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규칙 체계로 개인차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랑그를 공유하고 있다면 의사소통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반면 사람들의 입에서 실제로 나온 말인 '파롤'은 개인마다 음파가 다르고, 그 말이 사용된 시공간적 맥락이 있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는 말이다. '각중에, 을기미, (옷이) 쫑기요, (모를) 머드리라' 이런 말들은 의사소통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으면 그 말을 실제로 사용했던 고향의 할배, 할매, 아재, 아지매들의 모습들이 떠오르고, 말에서 정감이 느껴진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솥뚜껑을 엎어서 소깝을 때면서 굽던 것은 '부추 전'이 아니라 '정구지 적'이라고 기억하는 것도 바로 사투리는 실제 사용된 말이기 때문이다. 사투리는 이처럼 매끈한 표준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감들과 삶의 모습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표준어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는 래퍼가 되기 위해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 주인공 학수가 등장한다. 변산반도가 있는 전북 부안이 고향이지만 사람들에게 서울 출신이라고 하고 다닌다. 그에게 사투리는 외면하고 싶은 고향의 기억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입원을 계기로 고향에 돌아가 불편하고 피하고 싶었던 기억들과 마주하지만 결국은 화해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자기도 모르게 사투리를 쓰는 학수에게 작가가 된 여자 친구 선미는 이야기를 한다. "사투리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건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여." 그것은 마음속에 고향이 있고, 그리운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2018-11-04 15:53:12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국어 문법의 위기
현재 중3들이 치를 2022년 대입 수능 개편안을 보면 국어는 현재 문학, 독서, 화법과 작문, 문법에서 출제되던 것을 문학, 독서는 필수로 하고 화법과 작문, 언어와 매체(문법 부분만 출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책을 입안한 교육전문가들은 과목 선택권을 주면 학습 부담이 줄고, 깊게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수보다 등수가 중요한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학습 부담이 줄어들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과목만 공부하는 요령만 늘어난다. 현재 수능에서 탐구 영역 중 경제, 물리Ⅱ, 화학Ⅱ는 선택하는 학생들이 1%밖에 안 된다. 이 과목들은 공부하기가 어렵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선택하기 때문에 상대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공과나 전자과를 간다면서 지구과학을 선택하고, 경제과를 간다면서 생활과 윤리, 사회문화를 선택한다. 이것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학생들에게 그렇게 선택하도록 만든 것이다.현재 수능 국어에서 화법과 작문은 정답률이 80~90% 정도 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따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 원래 화법과 작문은 실습으로 평가해야 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수능 형태의 객관식 문항으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답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운 과목의 특성상 문제의 난도를 올리기도 어렵다. 변별력을 위해 난도를 높이려다 보면 화법과 작문 능력이 아니라 지문 독해 능력으로 변별이 된다. 반면 문법은 정답률이 50% 정도로 국어의 여러 영역 중 정답률이 가장 낮고 잘하는 학생들과 못하는 학생들의 차이가 크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알아 두어야 할 개념들이 많기 때문이다. 문법에 자신이 있는 학생들은 문법을 선택하겠지만, 잘하는 학생들이 몰리면 상대평가인 이상 점수에서 손해를 본다. 처음에는 문법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겠지만 상대적인 점수에서 손해를 보고 그것 때문에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사례들을 보게 되면 선택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수능에서 선택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서도 수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지금 이 칼럼에서 어떤 말이 적절한지에 대해 품사나 단어 분석법, 문장 성분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이야기해도 40, 50대 독자들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 국어 관련 전공을 안 했어도 고등학교 때 힘들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능 개편안이 시행되면 지금의 학생들은 더 많은 시간 국어를 공부하면서도 정작 우리말에 대한 지식은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2018-10-14 14:50:02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한국의 창세 신화
예전에 '신화의 세계' 편에서 몽당빗자루에 얽힌 가정의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인간과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는 창세 신화가 있다는 간단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창세 신화가 있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데, 그 이유가 우리나라의 창세 신화는 주로 서사 무가(巫歌)의 형태로 전해져 오기 때문일 것이다. 서사 무가는 무당들이 자기가 모시는 신들의 내력을 노래의 형태로 부른 것이다. 이야기를 전승할 수 있는 종교 집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나 국어 교과에서도 가르치지 않으니 낯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창세 신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함경도 함흥의 김쌍돌이라는 무녀가 구연한 것을 민속학자 손진태가 채록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하늘과 땅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 미륵이 태어난다. 하늘과 땅 사이에 틈이 생기자 미륵은 하늘을 솥뚜껑처럼 들고 땅의 네 귀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워 하늘과 땅을 만든다.그때는 해도 둘, 달도 둘이었는데, 달 하나로는 북두칠성, 남두칠성을 만들고, 해 하나로는 별들을 만들었다. 미륵이 불이 필요해 쥐에게 불을 만드는 방법을 물었는데, 쥐는 세상의 뒤주를 차지하는 것을 보장받고 불을 만드는 방법을 일러준다.미륵이 금쟁반과 은쟁반을 들고 하늘에 기원을 하니 하늘에서 각각 다섯 마리 벌레가 쟁반에 떨어진다. 금쟁반의 벌레는 남자가 되고, 은쟁반의 벌레는 여자가 되어 인간 세상을 이루게 된다. 미륵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있을 때, 석가가 나타나 자신의 세월이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기를 제안한다. 두 번의 내기에서 모두 진 석가는 마지막으로 자는 동안에 무릎에 모란꽃을 피우는 내기를 하게 된다. 미륵이 자면서 무릎에 꽃을 피우자 석가는 먼저 깨어 그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꽂는 꼼수를 써서 이긴다.미륵은 석가에게 세월을 넘겨주면서 석가의 세월이 되면 집집마다 솟대가 서고 기생, 과부, 백정, 역적 등이 생겨나고 삼천 명의 중이 생겨날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미륵의 예언은 실현되고 미륵은 세상에서 사라진다.이 이야기는 다른 무가에서 '소별왕 대별왕'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흥미로운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태초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미륵도 기원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과 건국 신화처럼 신성한 이야기가 아니라 석가가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우리의 창세 신화는 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선과 악이 공존하는 불완전한 세계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2018-09-30 14:47:17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수능으로 보는 한국 대표 소설가
작년 수능 때 수능으로 본 한국 대표 시인들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 같은 방법으로 본 한국의 대표 소설가는 누구일까? 수능만 보면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는 이문구로 '관촌수필'이 3회 출제되었고, 김유정, 박경리, 염상섭, 윤흥길, 채만식, 최인훈이 각 2회 출제가 되었다. 범위를 평가원 모의고사까지 넓혀 보면 염상섭은 '삼대'가 3회, '만세전'이 2회 총 5회 출제가 되었다. 그리고 김유정, 이문구, 이청준, 채만식, 최인훈이 3회로 그 뒤를 잇는다. 염상섭, 이청준, 최인훈이 많이 출제된 이유는 여러 번 출제가 되었어도 꼼꼼히 읽어 보면 새로운 부분이 보일 만큼 상징성이 강한 소재들을 사용하고, 이야기 자체도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고 있으며, 무겁고 약간은 난해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난도 조절뿐만 아니라 작가 개인의 문제로 인한 논란이 없는 점도 출제의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 이문구, 김유정, 채만식의 작품은 내용이 가볍고 유쾌하다. 그래서 시험지가 전체적으로 무겁고 우울한 내용이 많이 있을 때 분위기 전환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문제를 푸는 학생은 그 가볍고 유쾌함을 즐기지 못할 수도 있지만. 2011년 수능부터는 EBS 연계를 하면서 주로 14종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을 위주로 출제되고 있다. 교과서에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실린 작가는 이청준으로 '서편제', '당신들의 천국' 등 10개의 작품이 12번 나온다. 채만식은 6개 작품이 16번 나오는데, 실린 횟수로는 가장 많다. 작품 수로는 박완서가 8개로 두 번째로 많다. 수능에는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신경숙, 오정희, 양귀자와 같은 여성 작가들과 김소진, 김학철, 이태준, 조세희도 각각 4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은 박경리 '토지'와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상 8번)이고, 그다음으로 이광수 '무정', 염상섭 '만세전', 채만식 '태평천하', 현진건 '고향'(이상 7번)이 많이 실려 있다. 교과서에는 문학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 중에서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한 작품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그런데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 중에 교육용으로 부적합한, 비윤리적 내용들이 담긴 작품들은 걸러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 목록은 일반인들의 상식과 조금 더 부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학력고사 세대들에게는 필독 작가였던 김동인이나 나도향의 작품이 의외로 교과서에 많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2018-09-16 15:50:03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좋다'
국어사전에서 '좋다'를 찾아보면 18개의 뜻풀이가 나온다. 18개의 뜻이 있지만 대부분은 '품질이 좋다'에서처럼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등이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하다는 의미에서 확장된 것들이다. '성격이 좋다'에서는 성품이나 인격이 원만함을, '체격이 좋다'에서는 신체적 조건이나 건강 상태가 보통 이상임을, '날씨가 좋다'에서는 만족할 만한 맑은 날씨를 의미한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이어서 만족할 만하다는 공통점은 존재한다. 그런데 '좋다'의 의미는 사전에 있는 18개의 의미로도 잘 잡히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할 때, 사전에서는 '어떤 일이나 대상이 마음에 들 만큼 흡족하다'로 풀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사 '좋아하다'에 가깝다. 그리고 단순히 만족할 만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경우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라고 하면 용돈을 많이 주는 아버지가 될 수 있고, '좋은 학교'라고 하면 자기가 대학을 가는 데 유리한 학교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음흉한 생각도 흡족한 느낌을 준다면 '좋은 생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좋은 아버지', '좋은 학교', '좋은 생각'이라고 할 때는 단순히 만족할 만하다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름의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국 단위 시험 문제를 출제할 때, 출제자들은 교육과정을 충실히 반영하고, 학생들의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는 참신한 문제를 '좋은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세상에 나오면 학생들은 자기가 아는 문제를 좋은 문제라고 하고, 교육청이나 교육부에서는 언론의 바람과 반대로 아무런 오류나 논란이 없는 것을 좋은 문제라고 한다. 이처럼 올바름에 대한 생각이 없는 '좋다'는 아전인수가 되거나 때로는 부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지난주에 우리 학교에서는 야구계의 전설인 이승엽 전 선수를 초청해서 특강을 했었다. 그의 강연을 한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그는 '좋은 선수'였고, 지금은 야구장학재단을 이끌며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이상의 실력보다 더 빛나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해서 실력을 쌓은 올바른 선수였다는 것이고, 지금은 가정 형편으로 인해 아이들이 꿈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올바른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 인터뷰에서 사인의 희소가치를 위해 사인을 안 해준다고 말실수했던 것에 대해서 반성하며 팬 서비스에 소홀하지 않는 것도 그의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18-08-19 14:5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