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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 평화도 총구<銃口> 에서 나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사드 배치를 결행한 그 용단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배치 완료까지 426일간의 찬반 논란으로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집권 전부터 사드 배치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이었던 대통령님의 책임이 큽니다. 다시는 이런 '안보 자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그러나 그럴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북핵에 맞설 가장 현실적인 안으로 떠오른 '전술핵' 도입 주장에 청와대가 보이는 거부 반응은 '사드 사태' 재발의 전주곡처럼 들립니다.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안보 상황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습니다. 전략핵이든 전술핵이든 핵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는 것입니다. 핵은 핵으로만 맞설 수 있는 '절대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대통령님의 참모와 여당은 "전술핵을 배치하면 북핵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진다"는 한가한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북핵은 기정사실인데도 말입니다.대통령님은 어떻게 할 겁니까? 또 사드 논란을 촉발한 그 평화주의적 신념에 따라 반대할 겁니까? 대통령님의 평화주의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그 신념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신념만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레온 트로츠키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습니다.잠시 마하트마 간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호주 출신의 정치학자 존 킨은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에서 간디의 비극적 죽음이 독립 인도의 건국에 역설적이지만 다행이었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두 거인(巨人) 네루와 간디의 정치철학 때문입니다. 간디는 독립 인도가 입법'행정'사법권을 모두 갖는 소규모의 자치적 '마을 공화국'이 상호 연결된 형태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간디는 성문헌법, 의회, 정당, 주기적 선거 등 의회 민주주의 제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네루는 의회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헌정 국가를 꿈꿨습니다. 간디가 죽지 않았다면 국가 형태를 두고 네루와의 갈등은 불가피했고 인도의 국가 건설은 표류했을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기자는 간디의 죽음이 인도에 다행인 이유는 또 있다고 봅니다. 간디의 무조건적 비폭력 평화주의가 가져올 파멸적 결과의 가능성입니다. 간디는 2차 대전 중 독일 유태인을 향해 "도살자의 칼에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세계와 독일의 민중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태인은 '도덕적 승리'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기자에겐 '개 풀 뜯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막스 베버가 살아서 간디의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정치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있는 한 언명(言明)이 그 실마리가 될 듯합니다. "(정치인의 행위와 관련해 볼 때)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실로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 정치적 선의가 정치적 결과의 좋음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정치인이 견지해야 할 덕목으로 베버가 제시한 것이 신념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한 성찰 즉 '책임의 윤리'입니다.대통령님도 당신의 신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 불가(不可)의 신념이 무조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북핵의 인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평화는 평화를 강제할 수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것이 없는 평화는 오직 적이 선의를 베풀었을 때만 가능한 '위장 평화'일 뿐입니다.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만 어찌 권력만 총구에서 나오겠습니까. 평화도 총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017-09-12 00:05:04

[세풍] 대구은행 돈 1만500원

100년 전인 1917년 12월, 대구와 경북이 들썩했다. '대구은행 돈 1만500여원 군자금 사건' 때문이었다.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던지 일제 경찰은 뒷날 '제1 경북 중대 사건'이라고 불렀다.(당시 '군자금'은 1만400~1만9천여원까지 다양하나 필자는 1만500원으로 보고 오늘날 한국은행의 기준에 따라 계산한 결과 1억3천115만여원으로 추정됐다) 과연 100년 전, 대구은행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대구은행은 1913년 대구의 민족자금으로 설립됐다. 1912년 창립된 선남은행과 함께 대구에 본점을 둔 지방은행이다. 두 은행을 비롯,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 설립 은행이 허락된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을 일본 식민지 시장경제로 편입시켜 상품을 팔아먹는 시장으로 예속하고 한국 자산가의 친일 세력화, 특히 한국인 돈을 은행에 묶어 독립운동가 지원이나 군자금으로 쓰이는 것을 막는 등 침탈 목적이 컸다.그런데 범인은 21세의 출납계 이종암(李鍾岩) 주임이었다. 그는 1914년 입사, 이듬해 결혼한 신혼의 젊은이였다. 특히 그의 고모부(정재학)가 대구은행장이어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한마디로 말하자면 장래가 촉망되는 행원이었다. 당시 좋은 일자리는 대부분 일본인 차지여서 한국인으로서는 더욱 구하기 힘든 은행원이었다.당시는 작가 이광수가 공개적으로 일제 총독에게 한국 젊은이가 '할 일이 없어' 독립운동과 같은 '전율할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일자리를 마련해줄 것을 촉구할 만큼 일자리가 없었다. 은행 등은 '사무가 고상하고 복잡하여 한국인을 사용하기 어려워 당국에서도 당분간 일본인을 주로 쓰는 자리'라 할 정도였으니 이종암 사건은 충격이었다. 그러잖아도 한 달 전에는 내로라하는 부자인 칠곡의 장승원 전 경북도관찰사가 독립군자금 문제로 암살된 뒤라서 일제는 범인 검거에 더욱 혈안이었다.그러나 종적을 감춘 그는 1918년 중국으로 망명, 은행 돈을 군자금으로 썼다. 그는 '빼돌린 돈'을 특히 1919년 중국에서 결성된 무장투쟁 결사인 의열단(義烈團) 창설에 보탰고 그의 독립 활동은 일제의 은행 설립 허가 속셈을 보기 좋게 찌른 의거(義擧)였다. 창단 단원 13명인 의열단 부단장으로 숱한 투쟁 중 1925년 대구에서 붙잡혀 1927년 징역 13년 형 선고와 감옥살이, 1930년 35세로 순국한 그에게 대구은행 돈은 독립자금의 마중물이었다.그러나 대구은행은 뛰어난 영업 실적과 경영에도 1928년 여러 면에서 못한 부산의 경남은행과 합병되고 다시 1941년 서울의 한성은행에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대구은행이 총독부에 의해 흡수'합병된 운명과 역사에서 사라진 배경이 경제 외적인 탓이라는 학계 연구 결론을 보면 이종암의 '대구은행 돈의 군자금화'가 원인이 아니었을까.이런 대구은행이 1967년 부활했다. 일제 때처럼 대구경북 지역민들의 뜻에 의해서다. 그리고 '대구의 돈은 대구은행으로'라는 향토색 짙은 구호와 김준성이라는 초대 행장의 뛰어난 역할과 지역민들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1997년 외환 위기의 어려움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는 대구경북에서 대구은행의 탄탄한 기반이 말해준다.하지만 최근 대구를 떠들썩하게 한 대구은행 여직원 성추행 사건, 특히 자리를 둘러싼 잡음 같은 일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 절로 한숨이다. 물론 현 대구은행과 100년 전 대구를 들썩인 이종암의 대구은행은 역사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그래서 굳이 100년 전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일조차 마땅하지 않고 억지처럼 여길 수 있다.그럼에도 굳이 100년 전 대구은행의 한 젊은 행원의 의거를 떠올린 것은 지역민들의 돈을 비록 당시는 몰래 빼돌렸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로지 나라를 되찾는 의로운 독립자금으로 쓰고 활동했음에도 뒷날 대구의 은행 종사자들이 잘 모르고 무관심한 사실이 그저 안타까워서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쏟을 여력으로 차라리 그를 기리는 작은 동상이나 기념비라도 세울 생각이었으면 이번 같은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7-09-05 00:05:03

[세풍] 대구은행의 진짜 주인은?

손해가 뻔한데 주식 투자할 바보는 없다. 그런데 1998년 이런 상식이 깨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해 단행된 대구은행의 유상증자였다. 외환위기 직후 대구은행은 존폐 기로에 놓여 있었고 주가도 1천~2천원 수준으로 바닥을 기었다. 자본금 확충이 절실했던 대구은행은 1천2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시장에서 헐값에 살 수 있는 주식을 5천원 가격에 청약하는 내용이었으니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구경북민들이 너도나도 주머니를 열어 증자에 참여한 것이다. '대구은행 주식갖기' 운동이 펼쳐졌고 청약 금액은 1천억원을 넘겼다. 당시 유상증자에 실패했다면 대구은행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대구은행은 대구경북사람들에게 '향토기업' 이상의 의미를 지닌 기업이다. 그런데 요즘 대구은행을 바라보는 지역민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대구은행을 둘러싸고 실망스러운 일들이 잇따라 터져 나와서다. 직원들의 성추행 파문으로 은행장이 사과하는 일이 벌어진 데 이어, 이번에는 속칭 '상품권 깡'을 통한 비자금 조성 논란까지 빚어졌다. 경찰이 공식 수사에 나서지 않았기에 사실 여부를 예단할 수는 없다. 경찰로서도 내부 투서만으로 대구은행에 대한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 등 본격 수사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매머드급 악재 속에서 은행 안팎에서는 온갖 말들이 흘러나오고 조직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 투서와 제보가 사정기관 및 언론으로 지속적으로 새어나오는 것과 관련해 안팎에서는 차기 은행장 자리를 노린 알력설마저 나돌고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같은 루머들이 정권 교체기 친박(親朴) 금융인들에 대한 물갈이가 진행되고 있는 틈을 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도 사퇴는 없다며 박인규 은행장은 정면 돌파 의지를 피력해 놓은 상태이지만 그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할 것만 같다.1992년 은행장과 전무이사 간의 알력 여파로 시중은행 임원 출신 인사가 은행장으로 영입된 것만 제외하면 대구은행은 내부에서 은행장을 배출해 왔다. 은행장이 임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용퇴함으로써 관치금융 외부인사가 날아드는 것을 차단해 온 것이다. 합리적 의사 결정에 의해 은행장 자리가 양위(讓位) 돼온 것으로 외부에 알려졌지만 속사정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대구은행에서는 임원이 되거나, 나아가 은행장이 되려면 강력한 '빽'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은행장 또는 유력 임원에게는 정권 실세 또는 유력 정치인과의 친분설이 자의든 타의든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박 행장이 선임됐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없지 않았다. 하기야 퇴직 후 자회사로 떠난 임원이 대구은행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것은 그가 유일무이해서인 듯하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 은행에서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대구은행이 이처럼 흔들리고 시민 불신을 받는 책임은 당연히 은행장에게 있다. 대구은행의 최고경영자인 박 행장은 조직이 정치인 줄대기와 파벌 만들기, 자기 사람 심기 등으로 병들고 있다는 안팎의 지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차기 은행장 자리를 노린 알력설이 이번 루머의 진원지라면 좌시해서 안 될 일이다. 오죽했으면 은행장 내부 승진 전통을 깨더라도 외부에서 전문 경영인을 은행장으로 영입해 탕평 인사를 하고 조직을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외부에서 나오고 있겠는가.대구은행은 대구경북민들의 손에 의해 1967년 태어났고 지역민들의 열렬한 지원 속에 성장했다. 지배주주가 없다 뿐이지 대구은행에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구은행의 주인은 대구경북사람들이다. 대구은행을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고 착각해 사심 챙기는 이가 득세한다면 대구은행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1998년 외환위기 같은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대구경북민들은 대구은행을 지켜냈다. 하지만, 만일 내부적 요인으로 대구은행이 위기에 처한다면 구해줄 이는 없다.

2017-08-29 00:05:03

[세풍] 자유한국당이 살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말 대단한 분이야."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분이야."젊은이들에게 자칫 돌 맞을 말을 내뱉다니 제 정신인가 하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얼핏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분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보 측이나 친문(친문재인) 인사에게서 들은 얘기라고 하면 놀랍지 않은가.이분들이 생각하는 박 전 대통령의 '공적 아닌 공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제1당인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을 끌고 '정치적 무덤'에 함께 들어가 버렸다. 둘째, 보수를 자임하거나 내세우기가 부끄러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당연히 진보 쪽만 힘쓰는 세상이 됐다. 셋째, 문재인 대통령이 최순실 같은 측근을 만들지 않는 한 아무리 실수하고 잘못해도, 박 전 대통령 자신만큼 잘못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이분들의 얘기로는 보수 세력을 그렇게 공격하고 두들겨도 효과가 없더니만, 박 전 대통령 한 사람의 힘으로 보수 세력을 완벽하고도 확실하게 몰락시켰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진정으로 정치를 발전시키고 전진시킨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배배 꼬인 역설적인 표현이기에 유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틀리거나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이 보수 쪽에서는 '우리를 망쳤다'며 욕을 먹고, 진보 쪽에서는 '우리를 살렸다'며 칭송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본인이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 버렸으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박 전 대통령은 서서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겠지만, 남은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과 보수 세력은 어떻게 생존할지 걱정스럽다. 한국당은 탄핵 정국 때 소멸될 듯하더니만, 대선 정국을 거치면서 힘겹게 살아남았다. 수도권과 다른 지역에서는 '폭망'(폭삭 망함) 상태로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꼴이지만, 그래도 대구경북에서는 가장 큰 정치 세력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자유한국당에 줄 서는 인사들이 많은 걸 보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기반을 갖고 있는 것 같다.한국당이 요즘 대구경북에서 이런저런 이벤트나 행사를 자주 벌인다. 전국 최초니 처음이니 하면서 대구를 한껏 치켜세우고 대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쩐지 어색하다. 홍준표 대표의 취향이라고 하나, 한국당이 다른 지역에 가 봤자 외면받을 것이 분명한데, 대구경북에서는 그런대로 행세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솔직히 지역민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고, 불쾌하고 찜찜한 마음이 앞선다. 한국당이 자신을 확 바꾸고 고치고 난 다음에 지역민에게 다가서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당명만 달리한 채 예전 그대로의 모습과 자세로 지역민을 대하는 것은 지역민의 순수성을 이용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국당이 무엇을 하든 간에 지역민이 계속 지지해 줄 것으로 믿는 것은 엄청난 오해다. 전국적으로 외면받는 정치 세력을 대구경북만 여전히 보듬어 줄 것으로 착각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역민은 더는 선량한 '천사'나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한국당이 뼈를 깎는 각오로 전면적인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경북의 지지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한국당은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인데도 태만하고 나태하기 이를 데 없다. 개혁의 시금석인 박 전 대통령 제명 건을 처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얼마 전 혁신위원회가 내년 지방선거에 상향식 공천을 하지 않고 '전략 공천' '낙하산 공천'을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홍준표 대표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말과 같으니 도대체 '혁신'이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것 같다. '혁신'이니 '개혁'이니 하는 말은 한국당과 거리가 먼 것인가. 이런 식이라면 한국당은 조만간 박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2017-08-22 00:05:00

[세풍] 우리 머릿속의 광복

미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인물은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그는 러'일 전쟁을 종결하는 중재안을 내고 포츠머스 조약을 성사시킨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독일과 프랑스의 '모로코 위기' 해결 노력도 있다. 하지만 루스벨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이 중재안의 꺼풀을 들쳐보면 추잡한 미'일 간 외교 교섭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루스벨트는 '약한 나라는 망하고 강한 나라가 살아남는다'고 믿은 인물이다. 또 그는 외교 문제에서 최선의 방법은 "부드러운 말과 큰 막대기"라고 늘 강조했다. 이는 어르고 달래다 안 되면 몽둥이가 약이라는 뜻이다. 당시 미국과 유럽 언론은 이를 '큰 몽둥이 정책'(Big Stick Policy)이라고 비꼬았다.루스벨트는 러시아보다 일본에 더 호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국력과 국체의 우열에 관한 비뚤어진 소신과 개인적 성향은 일본과 밀착해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외교적 수완으로 나타났다. 1905년 7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과 조선'만주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는 밀약을 맺은 것이다. 훗날 큰 논란이 된 태프트-가쓰라(桂) 비밀 각서다. 미국 정'관계 거물로 구성된 아시아 사절단의 극동 순방 때 도쿄에서 일본과 마주 앉은 태프트는 부드러운 말과 미소로 각서 문구를 다듬었을는지도 모른다.필리핀 초대 총독을 지낸 윌리엄 태프트는 당시 육군 장관으로 루스벨트의 최측근이자 친구였다. 그해 9월 루스벨트의 망나니 딸 앨리스와 함께 대한제국을 찾은 태프트는 각서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 고종의 극진한 대접만 받고는 조선을 떠났다. 각서 내용은 1924년까지 극비에 부쳤다. 약소국을 압제와 수탈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미국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던 루스벨트에게 결국 '세계 평화의 수호자'라는 분칠과 함께 노벨상이라는 덤까지 얹어준 것이다. 1908년 루스벨트는 일본인 이민 문제로 불편해진 미'일 관계를 의식해 루트-다카히라(高平) 조약(태평양 지역에서의 미'일 교환공문)을 맺고 조선'만주에서 일본의 우위를 재확인했다.미국 이익을 우선하는 미국 정부의 이런 외교 기조는 '애치슨 라인'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을 선언하고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를 뺐다. 전략적 가치가 없다며 한국에 등을 돌린 순간 6'25라는 비극이 들이닥쳤다.다시 광복절이다. '적폐 청산'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안팎으로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연일 핵과 미사일 카드를 흔들어대는 북한과 사드 협박에 열을 올리는 중국, 종잡기 힘든 트럼프 대통령의 과격한 '말폭탄'이 쉴새 없이 우리 머리 위로 오간다. 잔 펀치와 말 돌리기에 능한 북한과 중국을 향해 미국 정치권도 선제공격과 무역전쟁, 대화를 제각각 주문하며 뒤엉켰다. 국내 주식시장이 며칠째 곤두박질 치고 환율은 치솟았다. 8월 위기설이 나돌고 있으나 우리 정부의 반응은 조용하다. 절묘한 해법을 찾아서가 아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상황을 관리할 능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는 전자파라는 뿌리를 타고 마냥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일제 침략과 압제의 먹구름이 걷혔다는 '광복'(光復)의 날이 이리 어수선한 것은 불안한 국제 정세 탓만은 아닐 것이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국체를 위태롭게 만드는 우리 정치와 국태민안보다 탐욕과 세력 다툼이 더 넘쳐나는 게 근본 이유다. 지금 우리의 눈과 귀가 쏠려야 할 곳은 화염이나 분노 같은 감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냉정함과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이다.급부상한 일본의 해군력은 루스벨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밀약이 나왔고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힘이 없다면 눈이라도 밝아야 한다. 우리가 계속 편견에 사로잡혀 바깥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광복은 영원히 불안한 명제다.

2017-08-15 00:05:05

[세풍] 5년 뒤 홍수가 나든 말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그들이 누군가를 비난할 때 쓴 단어가 '민주주의' '민주주의자'였다. 그들은 왕이 통치하지 않는 '공화주의'를 추구했다. 하지만 이는 대중이 직접 통치자를 뽑는다는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들이 건설하고자 한 것은 공평무사하게 판단할 학식과 능력을 갖춘 '고매한 신사들의 통치'였다.그들이 민주주의를 배격한 이유는 대중이 너무나 무지해서 자기들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다수의 이익과 다중의 혼돈이 소수의 좀 더 높은 차원의 생각을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체제였다. 이런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 제4대 대통령으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의 말이다. "민주주의는…국민의 시야를 좁혀버리며, 따라서 국가적인 거대한 목적을 이해하고 추구할 능력이 없는 지도자와 시민을 생산한다."('민주주의의 삶과 죽음', 존 킨)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엘리트주의자의 망발이겠지만. 대중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무책임의 정치'를 간파한 혜안임은 부정할 수 없다. 대중민주주의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설사 그것이 국가를 파탄 낼 독(毒)이어도 마땅히 따라야 할 '국민의 뜻'으로 둔갑한다. 이런 무책임의 정치는 현 세대를 위해 미래 세대를 희생시키는 '미래 착취'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문재인정부가 쏟아내는 각종 정책은 이를 기반으로 한다.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앞으로 5년 내에 전기요금은 올리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10년, 20년, 30년 뒤가 아니라 '5년'이다. 현재 전력 수급 사정을 보면 그렇게 해도 된다.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발전소 건설에 투자를 늘린 덕분이다. 그래서 5년만 살고 말 거라면 필자 같은 무지렁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문 대통령의 '탈(脫)원전' 구상이 실천되면 발전 설비는 15%나 감소한다. 전기요금은 오를 수밖에 없다.이에 대한 문정부의 반박은 두 가지다. 경제성장 둔화로 전력 수요가 준다는 게 그 첫 번째다. 예측이 다 그러하듯 경제 예측도 맞는 경우보다 틀리는 경우가 더 많다. 철학자 칼 포퍼가 말했던 "미래를 알려면 미래의 지식을 알아야 하는데 설령 그것을 안다 해도 그때 지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지식이 되어버리는" 인간 지식의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예측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정부의 예측은 매우 위험하다.두 번째는 감소하는 전력 설비를 메울 신재생에너지 단가가 2022년 이후부터 하락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재미 있는 것은 2022년은 문정부 임기 마지막 해라는 점이다. 신재생에너지 값이 문정부가 원하는 대로 임기 종료와 함께 알아서 떨어지게 돼 있는 모양이다.공무원 17만4천 명을 더 뽑는 계획도 마찬가지다. 문정부는 그 비용은 앞으로 5년간 21조원이면 된다고 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뒤가 아니라 5년이다. 비용도 어떤 셈법인지 21조원→16조원→8조원으로 계속 낮췄다. 진실은 5년간 21조원(아니면 16조원이든 8조원이든)이 아니라 30년간 231조3천억원이다. 국회예산정책처의 공식 발표다. 이 돈을 대느라 우리 후손은 허리가 휠 것이다.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장기 소액 연체자의 원금 100% 탕감 등도 그렇다. 더없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정책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영세 자영업자의 몰락 가능성, 고용 안정이 아니라 고용 축소, 탕감을 기다리면서 빚을 갚지 않고 버티는 도덕적 해이라는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다. 모두 미래에 큰 짐을 지우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완 대책은 문정부에 없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에 "다음에는 태자(루이 16세)가 잘해주겠지. 나 죽은 다음에 홍수가 나든 말든 알 바 아니지"라고 했다. 문정부의 행태가 딱 그 꼴이다.

2017-08-08 00:05:01

[세풍 世風] 홍익(弘益) 조세

세금 이야기가 뜨겁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국정 운영 5개년 계획 100대 국정 과제를 발표하면서다. 이는 앞으로 5년 동안 추진할 국정의 밑그림인 셈이다. 재원을 두고 세금 문제는 자연스럽다.100대 과제가 잘 이뤄지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정부에 따르면 178조원이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재원 마련을 위한 방안의 하나가 5억원 이상 높은 소득을 올리는 고소득자 4만 명과 과세표준 2천억원 이상 대기업 116개 사를 대상으로 한 세금 거두기이다.문제는 고소득자와 대기업에게 세금을 거두더라도 연간 3조7천800억원, 5년간 18조9천억원에 그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세금 거두기와 추가 재원 마련에 대한 방법을 두고 여야의 입장이 엇갈린다. 우선 이름 붙이기부터 그렇다. 여당은 '명예 과세'존경 과세'사랑 과세'라고 표현했다. 야당은 '세금폭탄'이라고 일축했다. 또 추가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여당은 이런 세금과 불필요한 사회간접자본 감축 등을 거론하고 있다. 반면 야당은 결국에는 전반적인 세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여야의 세금 논쟁은 조선 세종 시절의 세금 논쟁과 닮은꼴이다. 1418년 8월, 임금이 된 세종은 즉위 때부터 새로운 세금 제도 마련에 매달렸다. '백성을 위한 공평 과세'를 위해서였다. 당시 조세는 논밭에 쌀과 콩으로 수입의 10분의 1을 거두었다. 고려 때 물려받은 제도다. 그런데 힘과 권력을 가진 관리 등은 농간을 부렸고 논밭을 숨기거나 줄이고 빠뜨렸다. 조사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짜고 세금을 내지 않거나 줄였다.애꿎은 백성들만 고스란히 부담을 안았다. 소수의 가진 자와 힘 있는 관리, 중간 조사자의 농간을 없애고 토지의 좋고 나쁨과 한 해 농사의 풍작과 흉작 여부를 따져 매겨진 토지의 등급에 정해진 일정량의 세금을 내는 공법(貢法)이란 조세법 마련을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된 배경이다. 1418년 공법에 뜻을 품은 뒤 1427년 과거시험 출제, 1428년 조정의 공식 논의로 이어졌다. 예상대로 관리 등은 벌떼로 반대했다.왕과 반대하는 신하들 간의 수없는 '밀당'이 반복됐다. 1440년 3월 공법 도입을 두고 당시 69만2천477명의 백성 가운데 17만2천806명을 대상으로 5개월간 찬반 여론조사도 이뤄졌다. 결과는 찬성 9만8천657명, 반대 7만4천149명이었으나 공법 도입은 불발됐고 1444년 11월 마침내 도입이 결정됐다. 뜻을 세운 지 26년, 임금 재직 32년 가운데 26년을 보냈다. 결과는 탈루 방지와 공평 과세, 고른 과세로 재정이 넉넉해졌고 세율도 20분의 1로 절반이 됐다. 마침내 1460년 세조 때 경국대전에 실렸고 조선 패망 때까지 이어졌다.이런 세종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여당에서 추진하는 고소득 과세는 많은 국민이 환영하고 있다. 굳이 찬성이 85%라는 여론조사(추미애 민주당 대표 발언)를 앞세우지 않아도 그렇다. 이는 고소득에 걸맞은 공평 과세에 대한 국민적 바람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빈부의 불평등이 심각해지고 있다. 이를 부채질하는 구조적인 문제와 과세 정책의 허점으로 빚어진 결과이다.지금 여야가 할 일은 한가롭게 이름을 둘러싼 따지기가 아니다. 정치 주도권을 위한 정략적인 정쟁을 할 때도 아니다. 공평 과세를 통한 과세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 마련에 고민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이는 널리 국민을 이롭게 하는, 말하자면 '홍익(弘益) 조세'를 위해서라도 그렇다.아울러 여당에서도 세금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일만도 아닌 듯하다. 시간을 갖고 국민적 합의라는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 가뜩이나 현재와 같은 4당 체제하에서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원전정책을 비롯한 여러 정책들이 벌써부터 국민 갈등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비록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인 높은 지지는 이어지고 있지만. 야당을 끌어들이는 설득 작업이 더욱 필요한 까닭이다. 무엇보다 홍익 조세를 위해서라도.

2017-08-01 00:05:01

[세풍] 홍준표의 대구 정치

정치인에게 지역적 지지 기반은 요긴한 자산이다. 계파까지 거느리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한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한 거물 정치인은 이 둘을 다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 제1야당을 이끌고 있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그런 점에서 이례적인 정치인이다. 4선 국회의원과 경상남도 도지사 재선, 대통령 후보, 두 번의 당 대표 등 화려한 정치 이력을 쌓아왔지만 지금까지는 지역적 지지 기반이 명확하지 않았고 계파에 의존하지도 않았다.그는 검사 시절부터 아웃사이더로 유명했다. "자존심 하나로 사는데 아바타 정치는 안 한다." 그는 정치도 자수성가형으로 했다. 계파를 만들기보다는 빠른 정치적 감각과 촉을 바탕으로 대중 정치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막말조차 정치에 활용했으며 '독고다이 홍' '홍그리버드' 등 그에게 붙여진 '쎈' 어감의 별명은 그 결과물이다.홍 대표는 대구에서 중'고교를 다녔지만 경남 창녕 출신인데다 경남도지사를 연임했기 때문에 PK(부산경남) 정치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TK(대구경북)에 정치적 뿌리를 내리겠다는 제스처를 잇따라 취하고 있다. 지난 2월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내가 TK 성골은 아니더라도 진골쯤은 된다"는 발언을 봐도 그렇고,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 출정식을 서문시장에서 연 것도 그렇다.지난달 28일 경산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는 한술 더 떠서 "마지막 정치 인생을 대구에서 마무리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이날 권영진 대구시장한테는 "시장님 똑똑히 들으라. 내년 대구시장 선거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말했다. 구구한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대구로 주민등록을 옮기고 싶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고 최근에는 대구 달서병 당협위원장을 맡겠다는 말도 했다.홍 대표가 서울 격전지를 피하고 대구에서 손쉽게 당선되기 위해 이 같은 발언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발언의 전후 맥락과 당 내부 사정을 종합해 볼 때 홍 대표의 대구 정치 발언은 자유한국당의 위기감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 자리를 놓고 여당의 총공세가 예상되는데, '보수의 심장'인 대구를 빼앗길 경우 자유한국당의 미래가 괴멸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그는 우려하고 있는 듯하다.보수 야당의 대표가 대구에서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전략인데, 이는 대구경북의 미래에 어떤 대차대조표를 그리게 될까. 직전 대통령 2명을 배출한 이후 거물 정치인 공백 상황을 맞은 대구경북으로서는 "정치적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보수 정당 대표의 선택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다.하지만 '홍준표=대구 정치인'이라는 각인은 득보다 실이 클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박근혜정부의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대구경북에 멍에처럼 드리워져 있는 마당에 자유한국당 대표가 대구 정치인이라는 등식이 도로 덧칠되는 것을 환영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홍 대표의 대구행이 자유한국당을 'TK자민련'으로 고착시킬 위험마저 있다는 점도 영 마뜩잖다.자유한국당에 대한 국민 지지도라도 높다면 달리 고려할 수도 있으련만 지금의 자유한국당을 보면 마치 찌그러진 밥솥 같다. 설익은 밥, 탄 밥 투성이인데 서로 잘 익은 밥 먹겠다고 난리다. 존재감은 보이지 않는다. 각료 인선 청문회와 추가경정예산안 통과 과정에서 여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신3당 공조 정국에서 자유한국당은 사실상 고립되고 말았다.지금의 자유한국당을 보면 상대방(정부 여당)의 자책골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국가대표팀을 연상케 한다. 그런 점에서 총선이 3년 가까이 남은 것은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 지금 자유한국당은 비전과 실천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겠다는 고민을 할 시기이지, 대구경북으로 숨어들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보수 정당의 TK 안주(安住) 시나리오는 흥행 가능성이 희박한 졸작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대구경북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그림이 아니다.

2017-07-25 00:05:01

[세풍] 권 시장의 인사 스타일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은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언 가운데 하나다.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면 늘 인용되는, 유명한 격언이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몸은 빌릴 수 없다'는 명언도 남겼는데, 얼핏 리더로서의 자세와 건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처럼 들리지만, 인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머리를 빌리려면 사람을 잘 써야 하기 때문이다.재미있는 것은 YS만큼 인사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통령도 드물었지만, 그만큼 인사에 실패한 대통령도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정부 출범과 함께 임명한 장관, 서울시장 등이 비리 전력으로 취임 한 달도 되지 않아 우수수 낙마했다. YS는 오랜 야당 생활로 신세를 갚아야 할 인물들이 너무 많았고, '보안'을 중시해 언론의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인사는 아예 탈락시킨 것이 원인이었다. 거기다 차남 김현철 씨의 개입설도 끊이지 않았으니 잘되려야 잘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인사 실패로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으면 당시 유행어가 '인사가 망사(亡事)'였겠는가.한국의 중산층 형성 과정이 부동산, 탈세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음을 감안할 때, 흠집 없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문재인정부가 출범 두 달을 넘기고도 조각을 끝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막상 누군가를 기용하려고 하면 흠집투성이고, 흠집 없는 인물은 매력이나 능력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YS처럼 '쓸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지 모른다.이렇게 YS를 언급한 이유는 인사 문제에 있어 권영진 대구시장과 비슷한 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권 시장은 인사에 관심이 많고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지만, 그다지 성공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는 점에서 YS를 빼닮았다. 주위에 들어보니 권 시장은 인사철이 되면 일주일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신경 쓴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권 시장 자신이 승진 대상자를 놓고 안팎에 전화를 걸어 두루 평판을 물어보고는 고심을 거듭한다는 점이다. 권 시장 자신만의 인물 평가 방법이어서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력만큼 성과가 신통치 않다는 것이 직원들의 대체적인 여론이다.권 시장이 5급 승진 대상자의 인사까지 챙기는 것도 직원들의 입방아에 올라 있다. 전임 시장들은 5급 대상자는 담당 국장에게 맡기고 과'국장만 챙겼는데, 권 시장은 정치인 출신이다 보니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거기다 권 시장 측근들의 인사 개입설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직원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올 1월 인사 때만 해도 '측근이 권 시장보다 힘이 세다'는 말이 나돌았고, 여러 공무원들이 그에게 줄을 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달 초 인사 때에는 측근을 둘러싼 소문이 거의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시청 주변의 소문을 의식해 미리 몸조심을 한 듯하다.공무원 사회에서는 인사철을 전후해 온갖 소문과 뒷말이 무성한 것이 보통이다. 인사권자가 아무리 신경을 쓰더라도,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50%만 만족해도 성공'이라는 말이 생겼다. 권 시장의 인사를 보면 만족보다는 불만족 비율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직원들은 공정하고 적절한 인사가 되지 않고 있다고 여긴다.누군가 필자에게 이런 반론을 내놨다. '과거에도 인사철에는 시끄럽기는 마찬가지 아니었나?' 맞는 얘기다. 뒷말과 소문이 무성하지 않은 때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임 시장들은 공무원 출신이어서 그런지 조용조용하고 비밀리에 인사를 했는데, 권 시장은 내놓고 시끌벅적하게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임 시장들은 말이 나오거나 로비를 하는 직원은 인사에서 아예 배제했는데, 현재는 '설치면 출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이유로 과거보다 인사 후유증과 생채기가 훨씬 크다는 여론이 많다. 권 시장은 재임 3년간 눈에 띄는 확실한 공적이 없다. 그런데도 인사 때마다 이렇게 시끄러우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인사 스타일을 바꾸길 권한다.

2017-07-18 00:05:01

[세풍] 국민 '재생'해야 나라가 산다

2분기 삼성전자 실적이 놀랍다. 매출 60조원에 영업이익이 14조원이다. 하루 2천억원, 매주 1조원을 벌었다. 언론은 찬사 일색이다. 이 추세라면 올해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50조원을 가뿐히 넘길 전망이다. 분기 실적이긴 하나 이 바닥에서 신화 그 자체인 애플도, 24년간 반도체 아성을 지켜온 인텔도 '슈퍼 삼성'에 체면을 구겼다.많은 경제 전문가와 신문은 삼성전자의 상종가를 반도체 호황에서 찾고 있다. 올해부터 세계 반도체 수요가 폭증한 '슈퍼 사이클'에 올라타면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삼성은 반도체'디스플레이에 전력투구했다. 화성 공장에 26조원을 쏟아부었다. 최근 모습을 드러낸 평택 고덕지구의 삼성 반도체 공장은 광활하다. 축구장 400개 크기(289만㎡)의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이다.그런데 이런 뉴스에도 대다수 국민은 공허하다. 초라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한쪽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해도 바로 옆은 쪽박 신세여서다. 곁불이라도 쬐면 몸이 따뜻해지는 게 이치인데도 말이다. '제조업 세계 1위 기업'이 주름잡는 나라에서 돈 구경하기가 더 어렵다. 삼성만 그런가. 지난해 상장기업 순익은 110조원에 육박한다. 기업마다 곳간에 현금이 그득하다. 순환출자제한 대상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은 무려 700조원이다. 게다가 지난해 국세 수입도 242조6천억원으로 사상 최대다. 전년보다 24조7천억원 증가했다. 기업과 정부는 잘 나가는데 경제 3대 주체 중 가계만 유독 냉골이다.삼성이 세계를 석권해도 일반 국민에게는 아무런 낙수효과가 없다. 그동안 19세기 자유주의자를 닮은 우파 정권들은 '트리클 다운'(Trickle Down)을 내세워 분배의 불만을 억눌렀다. 그들은 노동으로 번 돈을 투자하지 않고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소비하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그들 말대로 금욕하고 절제하면 모두가 잘살고 경제가 발전할까? 지난겨울, 온 국민이 촛불을 든 이유는 그 주장이 착각이고 엉터리이기 때문이다.대한민국 국민이 누군가. 근면으로 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럽고 '돈내기' 말만 나와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루 10시간 넘게 일해도 손에는 푼돈이 고작이다. 소수 부유층을 빼면 대다수는 빚더미다. 가계부채는 1년 새 100조원가량 늘어 1천400조원이다. 금리가 들썩이자 '이자폭탄'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판이다. 금리가 1%포인트 올라도 추가 이자가 9조원이니 왜 안 그러하겠나.가계가 이리 쪼그라든 데는 경제 활동의 성과물인 소득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총소득에서 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1997년 69.3%에서 2015년 62.0%로 떨어졌다. 이 와중에 '유리 지갑'이 낸 세금은 지난해 사상 처음 30조원을 넘어섰다. 1년 새 근로소득세가 14.6% 더 걷혔다. 정부는 명목임금 상승과 취업자 수 증가로 근소세가 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명백히 증세의 결과다. 쥐꼬리만한 월급에도 세금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지금 대한민국은 생계비 번다면 열 일 거부하지 않는 사회다. '아파트 로또'인 주택청약통장이 전체 인구 수만큼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취업 준비생 스펙은 찬란하다. 그런데도 최저임금 언저리의 아르바이트 자리와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노후 무대책인 노령인구는 해마다 팝콘처럼 불어나고 있다.문재인정부 발등에 떨어진 불들이다. 6'19 부동산 대책에 이어 세제 개편안과 가계부채 대책이 곧 나온다. 새 정부는 선거를 치르면서 '소득주도성장'으로 패러다임을 바꿔나가겠다고 했다. 가계소득을 늘려 성장 문제를 해결하고 불평등도 해소하겠다고 외쳤다. 이제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미국처럼 상위 1%의 부가 하위 20%가 가진 것의 무려 240배를 넘는 사회로 갈 것인지, 골고루 나눠 가지는 사회로 발전할 것인지 새 정부의 정책과 의지에 달렸다. 독일 속담에 '돈이 나가면 정의가 움츠린다'고 했다. 국민 삶을 재생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

2017-07-11 00:05:01

[세풍] 헬무트 슈미트였다면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북핵 문제 등 당면 현안에서 '큰 틀'의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정상회담 이후 큰 틀의 합의를 떠받치는 여러 가지 '작은 틀'의 합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북한과의 대화 조건으로 미국은 '올바른 여건'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조건을 특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올바른 여건'의 해석을 놓고 이견이 노출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이런 세부적 사안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못하면 정상회담은 '사진만 찍은' 회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일정도 이를 가늠하는 핵심적 사안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사드는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 양국이 일부러 뺀 것이다. 그만큼 '뜨거운 감자'다. 정상회담이 순탄하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양국 모두 당장은 이 뜨거운 감자를 삼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문제는 앞으로도 이 감자가 쉽사리 식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감자를 뜨겁게 달군 불길을 일으킨 청와대 내 소위 '자주파들'의 신념-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여러 가지를 시험 발사했던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법적 투명성과 절차를 생략하면서까지 설치로 가야 하나?-를 보면 그렇다.문 대통령은 방미 중 미국 의회 지도부와 만나 "사드를 번복할 의사를 가지고 그런(환경영향평가) 절차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버려도 좋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문 대통령 자신부터 사드에 부정적이었던 생각을 바꿔야 함은 물론 지지층까지 설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지지층의 이반(離反)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에는 그렇게 한 인물이 있다.소련은 1975~1976년 서유럽을 겨냥해 핵탄두를 탑재한 신형 중거리 미사일 SS-2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배치했다. 이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1979년 이른바 '이중결의'(Double-track decision)를 채택했다. 우선 미국과 소련의 협상을 통해 4년 이내에 소련 미사일을 제거하되, 성사되지 않으면 서독 등에 미제 퍼싱Ⅱ 핵미사일(108기)과 순항미사일(464기)을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주도한 이가 진보 성향인 사회민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였다.그러자 서독 전역에서는 동독 공산당과 연계된 반핵 단체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사민당도 반대파 일색이었다. 빌리 브란트 당 총재부터 그랬다. 그러나 슈미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제 핵미사일 배치는 반대하면서 그 원인인 SS-20에는 입을 닫은 반대파들의 이중성을 질타하면서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대가로 슈미트는 총리직을 잃었다. 1982년 자민당과의 연정이 붕괴되면서 제출된 내각 불신임안에 사민당 내 '좌파'들이 대거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을 계승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의 주도로 서독 의회는 불과 1년 뒤인 1983년 11월 퍼싱Ⅱ의 서독 배치를 결정했다.이는 소련에 치명적이었다. 서독에 배치된 퍼싱Ⅱ는 발사 7분 만에 모스크바에 떨어진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훗날 "'퍼싱Ⅱ가 발사되면 경계경보를 발령할 시간도 없다'는 군부의 보고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것이 슈미트가 노린 것이었다. 소련은 군축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1987년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에 서명했다. 슈미트의 노림수는 멋지게 들어맞은 것이다. 이는 확실한 억지력만이 안보를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해줬다. 문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구상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이제 사드 논란은 잦아들었다. 문 대통령은 '사드는 걱정말라'는 발언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미 간 불협화음을 촉발시킨 문 대통령의 일련의 국내 발언들은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였다. 미국에 가서 미국의 의구심을 불식시킬 얘기를 왜 국내에서는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2017-07-04 00:05:01

[세풍] 6월을 보내며

올 6월은 어느 해보다 풍성했다. 최소한 호국 보훈에 관해서만은 말이다. 날이 새면 귀가 솔깃할 호국 보훈 이야기들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나라 지도자들로부터 흘러나왔다. 6월 들어 시작된 호국 보훈을 강조한 말 잇기의 시작은 문재인 대통령이 열었다.문 대통령은 6일 현충일을 맞아 국립현충원 추념식에서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유는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것 같다. 특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고 믿은 결과이리라.이어 대통령은 같은 날 중앙보훈병원을 찾아 국가유공자와 상이 군경을 위로하며 "보훈만큼은 국가가 도리를 다해야겠다"며 국가 도리를 강조했다. 그동안 국가의 도리가 미흡했다는 말과도 같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뜻을 드러냈음 직하다. 그리고 대통령은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유공자'보훈 가족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는 한발 더 나갔다.대통령은 "제대로 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라고까지 했다. 또한 "국민의 애국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치켜세웠다. 특히 이날 대통령은 허리를 깊이 숙여 거수경례 유공자에게 답례해 보는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대통령의 보훈에 대한 두드러진 말과 행동은 이낙연 국무총리에게로 이어졌다. 이 총리는 26일 열린 '모범 국가보훈 대상자 정부 포상식'에서 "보훈은 강한 안보를 위해 정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책무"라며 "유공자 여러분이 합당한 보상과 예우를 받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보답해 나가겠다"며 실무 차원의 약속도 했다.문재인정부가 5월 출범하고 공교롭게도 곧바로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을 맞은 탓도 있겠지만, 호국 보훈에 관한 한 역대 정부와는 차별되는 모습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통령과 그를 도와 정부 부처 행정을 총괄하는 국무총리가 손발을 맞추며 호국 보훈에 대한 풍성한 말을 쏟고 의미를 부여하니 호국 보훈 가족들로서는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그러나 현실을 되돌아 보자. 과연 이 같은 숱한 장밋빛 이야기들이 제대로 실현될까. 필자로서는 "글쎄요"다. 무엇보다 먼저 국가가 보살펴야 할 보훈의 대상자가 한둘이 아니어서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5월 현재 18가지 분야의 보훈 대상자는 85만2천529명이다. 이들에게는 보훈급여금을 비롯한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이들의 다양한 분포도 한몫한다. 전체 보훈 대상의 세부 분야는 현재 41개에 이른다. 이처럼 보훈 대상 유공자가 여러 갈래인 탓에 이들 모두에게 대통령과 총리가 약속한 것처럼 정부가 '합당한 보상과 예우를 받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보답'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재정도 걱정이다. 그동안 앞선 정부들이 '국가 도리'를 하지 않았거나 못한 것은 국가재정의 뒷받침이 안돼서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대통령이 지난 15일 청와대 오찬에서 밝힌 "애국'정의'원칙'정직이 보상인 나라를 위해 대통령과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면" 된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고 쓸모없거나 쓸데 없는 국민은 없다.특히 호국 보훈 분야는 더욱 그렇다. 명실상부하게 보상 예우는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면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그리고 우선순위의 맨 앞쪽은 독립유공자이다. 나라 수호의 의무를 지닌 공직도 없고, 최소한의 인권도, 어떤 보호막도 없는 망국민(亡國民)으로서 나라 되찾기에 나서 '3대가 망하고' 가족조차 붕괴되는 일도 감수하며 목숨마저 버렸으니 말이다.현재 생존 독립유공자는 59명, 순국선열'애국지사 유족이 7천45명이다. 우선 이들부터 잘 보살피자. 이는 국가 도리이고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길이다.

2017-06-27 00:05:11

[세풍] 무지의 베일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지구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행성이었다. 많은 우주 영혼들이 지구의 삶을 동경했다. 지구에서 태어나려면 번호표 뽑고 대기해야 한다는 루머마저 나돌았다. 영혼들은 탐색이나 하고자 지구 궤도를 빙빙 돌았다.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지구에 관한 정보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 나라가 살 만하고 어느 나라에 태어나면 고생길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태어날 나라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처지의 부모를 만날지도 백지 같았다.상상을 해보자. 만약 당신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지구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장광설처럼 들려도 이 같은 가정은 꽤 유명한 철학적 사유 실험 중 하나다. 미국의 철학자인 존 롤즈(John Rawls)가 저서 '정의론'을 통해 제시한 개념인데, 이름하여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설명하자면 이렇다. 자신이 어떤 환경 아래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무지의 베일)에서 선택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특정 사회가 얼마나 공정한가 하는 원초적 물음이다. 계층, 성별, 인종, 민족, 부모의 지위'경제력 등에 대해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택할 세상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랄까. 선택하기에 이상적인 사회는 공정 사회일 것이다. 이런 사회라면 무지의 베일 뒤에서도 걱정 없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택이 주저되는 사회는 불공정 사회다.무지의 베일에 대입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보자. 우리나라는 과연 공정 사회인가. 태어나기 전에 정보가 주어진다면 한반도를 선택할 영혼은 몇이나 될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나라는 불공정 사회다. 이를 보여주는 지표는 많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19세 이상 남녀 2천5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응답이 83.6%나 됐다.불공정한 시대상을 나타내는 도구는 더 있다. 다름 아니라 유행어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성을 꼬집는 유행어로 '흙수저'만큼 적나라한 것도 없다. 태어날 때부터 쥐고 태어난 것이 금수저도, 은수저도, 동수저도 아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흙수저로는 밥도 못 떠먹는다. 물에 녹기 때문이다. 유행어 '흙수저'에는 아이티 아이들이 배고파 구워먹었다는 '진흙쿠키'를 연상케 하는 상실감이 녹아 있다. '헬 조선' '노오력'도 빼놓을 수 없는데 사회의 집단의식이 반영되지 않고서는 이런 신조어들이 유행할 수 없다.하지만 젊은 세대들에 의해 '꼰대'라고 불리는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이 같은 유행어 자체가 마뜩잖다. 혹자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와 같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며 개탄스러워 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간극은 태평양만큼이나 벌어지고 있다.이미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세상은 더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인구 구조상 격변은 필연적이다. 올해는 인구절벽 현상의 원년이고 내년에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된다. 인구절벽과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는 부동산시장과 금융'산업 등 실물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장은 기성세대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지고, 정치 지형에도 전에 경험치 못한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이런 시대 흐름을 간파한 이들에게 미래는 기회일지 모르나,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가혹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나 정치가 그렇다. 여기에 보수나 진보라는 이분법적 구분 따위는 무의미하다.

2017-06-20 00:05:00

[세풍] '모난 돌'의 화려한 귀환

정권이 바뀌면 고위 관료부터 우르르 교체되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탕평 인사니 지역 안배니 능력 위주 따위를 내세우지만, 결국에는 '자기 사람' '충성파'를 쓰는 것으로 귀결된다. 문재인 정권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일부 눈에 띄는 '인물'을 발탁해 호평을 받고 있다. 그 인물은 박근혜 정권에 찍혀 변방을 맴돌거나 공직에서 쫓겨난 이들이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등은 정권이 바뀌면서 화려하게 복귀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주인공들이다.이들이 잘났거나 남보다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일 처리를 하다가 불이익을 당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잘 알다시피, 윤 지검장은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 과정에서, 노 차관은 정유라와 관련된 승마협회를 감사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여느 공무원이었다면 정권의 입맛에 맞게 대충대충 처리했을 일을 원칙대로 처리하려고 덤벼들었으니 '죽을 짓'을 자청한 셈이다.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출세는커녕 도태되기에 딱 좋은 유형이다. 공무원 조직에서는 이런 유형을 흔히 '꼴통'이라 부르며 경원하고 배척하기 일쑤다. 흔히들 양심이니 신념이니 하고 쉽게 떠들지만, 사회'조직생활에서 이를 구현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다.영화 '내부자들'에 나오는 대사가 기억난다. 우장훈 검사(조승우 분)는 깡패 안상구(이병헌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의를 원한다. 대한민국 검사니까!" 그 말에 깡패는 기가 차다는 듯 실실 웃으며 이렇게 답한다. "존 웨인이다 이거야? 정의? 대한민국에 아직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긴 한가."이 대사를 곱씹을수록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검사는 정의를 입에 담지만, 실제로는 출세만을 바라는 속물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깡패는 코웃음을 치며 한껏 비웃는다. 과장이 있긴 하지만, 원작자인 만화가 윤태호의 현실감각과 예지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2년 전, 이 영화가 나올 때만 해도 검사의 도덕성이 깡패보다 그리 나아 보이지 않았다. 엘리트 계층인 검사를 '사회의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깡패와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겠지만, 지난해 최순실'우병우 수사 과정을 보면 그런 욕을 먹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검찰이 '산 권력'에 대해서는 충성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죽은 권력'에 대해서는 아귀처럼 물어뜯는 행태를 보였으니 누가 검찰을 좋아하겠는가.검찰 행태를 보면서 그 영화에 나오는 부장검사(정만식 분)의 대사가 떠올랐다. 그는 끝까지 사건을 파헤치려는 우장훈 검사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까라면 까고 덮으라면 덮는 게 대한민국 검사야! 이제 그만 물고 놔라."그 당시 검찰, 나아가 공무원 조직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출세하고, 살아남으려면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도 순응하고,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말인데, 대부분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처신한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출세주의자들이 날뛰는 조직에서 괜히 원칙이나 상식 운운하다가 찍히거나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기에 그냥 눈감고 모른척한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말이 왜 있겠는가.어느 곳이든, 원칙과 상식을 고집하는 부류가 한두 명쯤 있기 마련이다. 조직 내에서는 '모난 돌'이거나 '튀어나온 못' 정도로 여겨지는 이들이지만, 이들은 귀하고 소중한 존재다. 이런 '꼴통'들이 정부 부처와 사회 곳곳에 박혀 있어야만, 국가는 무너지지 않고 최소한의 건강성을 유지한다.문재인정부의 인사라고 모두 박수받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잘한 인사라고 평가하고 싶다. 우리 사회가 양심과 원칙에 따라 행동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우하고 보상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더 공정하고 깨끗해질 것이다. 이와 함께 양심에 거스르는 행동은 더는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을 것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2017-06-13 00:05:00

[세풍] 지혜로운 청산

르노와 닛산'미쓰비시 자동차를 총괄하는 카를로스 곤 회장은 '코스트 커터'(Cost Cutter)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1999년 파산 직전의 닛산 재건에 나선 그는 효율적인 비용 관리를 강조한 인물이다. 그는 관계와 평판, 절차 등을 중시하는 일본형 비즈니스 모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닛산 재생계획'으로 불린 과감한 구조개혁과 원가 절감만이 닛산을 살리는 길이라고 봤다.또 다른 별명도 있다. '세븐일레븐'이다.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세븐일레븐에는 다른 뜻도 있다. 그는 임직원과 늘 소통했다. 사장 집무실뿐만 아니라 전화'이메일 등 소통 수단을 언제든 활짝 열어놓았다. 24시간 늘 열려 있는 편의점처럼 편하고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초기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취임 한 달을 앞둔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84%다. 60대 이상, TK만 빼고 골고루 80% 이상 지지를 얻은 셈이다. 국민이든 참모든 야당이든 가리지 않고 적극 소통하려는 문 대통령의 스타일과 노력의 결과다. 야당과 언론에서는 '얄밉도록 국정 운영을 잘한다'느니 '인사가 응큼하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렇다 보니 문 대통령에게 '세븐일레븐' 별명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일부에서는 측근 2선 후퇴나 MB'박근혜정부의 인재 등용 등 문재인식 인사를 탕평과 파격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임명권자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나 그게 상식이고 정상이다. 역대 정권이 국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다 보니 새 정부의 인사가 두드러져 보인 탓이다. '정부는 유한해도 국가는 영원하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서 그가 생각하는 국가 경영의 기초를 읽을 수 있다.아야 소피아 바실리카는 이스탄불의 명소다. 4세기에 처음 세워진 기독교 건축물로 '거룩한 지혜의 대성당'이라는 뜻이다. 숱한 지진과 반란으로 여러 차례 개축과 보수가 이뤄지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때가 537년이다. 거대한 돔 지붕은 지금도 불가사의다. 돔을 떠받치는 107개의 기둥 상당수가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의 기둥이다. 신전을 허물고 그 기둥을 그대로 가져다 세운 것이다.1453년 5월 아야 소피아는 새로운 운명 앞에 섰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때문이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지난 1천 년간 기독교의 상징이었던 아야 소피아를 파괴하지 않았다. 성당 바깥에 4개의 미나레트(첨탑)를 추가하고 모스크로 탈바꿈시켰다.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벽화도 뜯어내지 않고 회칠로 덮고는 이슬람 사원으로 활용했다. 토인비가 말한 '팍스 오토마니카'(오스만의 평화)를 아야 소피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스만은 공정하고 온건하게 제국을 지배했다.지난 한 달간 문재인정부가 보여준 국정 방향과 인사에서 이와 비슷한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사드 보고 누락 조사나 4대강 사업, 방산 비리 감사 지시처럼 성급한 결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절제하고 기다리는 지혜도 강하다. 보수 9년 '정치 빙하기'가 만들어놓은 두꺼운 얼음은 결코 하루아침에 녹지 않기 때문이다.기업의 최고 경영자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국가에 있어 대통령은 단순히 최고 권력자가 아니다. 국가를 경영하고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문재인정부는 국가 경영의 한 방식으로 적폐 청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구습을 걷어내고 사람을 바꾸는 것만이 청산은 아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우리 사회에 더 좋은 구조를 고정시켜야 진정한 청산이다. 잘못된 관행은 기득권을 용인하는 통로가 되고 결국 특권 의식으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소수의 특권과 다수 국민의 불행이 짝을 이루는 현실이다. 새 정부는 지혜로운 청산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 그것이 문재인정부의 과제이자 남길 유산이기 때문이다.

2017-06-06 00:05:01

[세풍]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

1938년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협상으로 평화를 지켜낼 것이라는 소망적 사고의 발로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에 들어간 독일을 지켜보기만 한 결과 힘의 균형은 독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미 유럽의 정세는 전쟁 말고는 독일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수 없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유화정책의 파탄은 이런 현실에 대한 의도적 외면의 필연적 결과였다. 1938년 뮌헨회담에서 체임벌린은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할양하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줬다. 체임벌린은 "이것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했지만,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째로 먹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는 2년 뒤 프랑스 침공 때 유용하게 써먹은 체코제 탱크 600대를 비롯해 소총 150만 정, 항공기 750대, 야포 2천 문을 덤으로 얻었다. 유화정책은 평화의 도래는커녕 히틀러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하지만 유화정책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유화정책도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다. 다만 전제가 있다. 적절한 조건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란 바로 '힘'과 '의지'다. 뮌헨회담 결과를 '노상강도'를 당한 것에 비유했던 처칠도 그런 점을 분명히했다. "유화정책 그 자체는 경우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또는 공포 때문에 취하는 유화정책은 소용없는 정책일 뿐더러 치명적이기도 하다. 강한 힘이 뒷받침되는 유화정책은 관대하고 고상하며 세계 평화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1950년 12월 14일 하원 연설)북한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는 이런 간단한 진리를 외면한 결과다. 김대중정부 이후 남한 정부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전제 조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조건이란 핵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지와 그 실행이었다. 역대 정부에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유화정책의 성공 조건으로 처칠이 든 '힘'이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매년 세계 군사력 순위를 발표하는 글로벌파이어파워(GFP)의 지난해 집계에 따르면 남한의 전쟁 수행 능력은 세계 11위로 25위인 북한을 압도한다.문재인정부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려 한다. 문 대통령은 제재와 대화를 병행하겠다고 했지만, 외교'안보 라인에서 나오는 소리는 '대화' 일색이다. 천안함 폭침으로 시행된 5'24 조치의 해제는 물론 개성공단'금강산관광을 재개하고, 민간 차원의 교류도 허용한다고 한다. 국가안보실도 대북 대화론자로 채웠다. 이에 북한은 29일 스커드 미사일 발사로 '화답'했다. '잘 해보자'고 손을 내밀었는데 뺨을 맞은 꼴이다. 문재인정부 출범 후 벌써 세 번째다. 북한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는데 문재인정부는 가망 없는 구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는 돈을 잃었지만, 이번에는 딸 것으로 확신하며 다시 돈을 거는 '도박사의 오류'의 전형이다.문 대통령은 지난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나는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에 더 가치를 부여한다"고 했다. 지금도 그럴까? 그렇다면 참으로 문제다. 개인은 그래도 되지만 대통령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이유를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는 이렇게 갈파했다. "개인 입장에서는 '세계가 망할지라도 정의를 실현하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국가를 책임지는 정치가는 '국가가 망해도 정의를 실현하자'고 말할 권리가 없다…외형상 도덕적인 행위라고 여겨지는 행위가 초래할 정치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정치적인 도덕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국가 간의 정치')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휘하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적은 하찮은 벌레야. 나는 그 벌레들을 뮌헨에서 보았어." 김정은도 남한 정부를 두고 같은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17-05-30 00:05:03

[세풍] 지금처럼만

퇴사 후 1988년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언론사 기자, 특히 외근기자 경우 부서가 바뀔 때마다 두려운 일은 새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출입처 사람의 '입'과 전임자의 '발자취'이다. 전임자에 대한 생생한 목격자이자 증언자인 그들의 입을 통해 전임자의 발자취는 비디오처럼 재생되고 그대로 드러나서다. 그 입과 발자취에 따라 후임자의 활동이 완전히 달라져야 할 때가 많다.전임자가 어떤 발자취를 남겼고 어떤 길을 걸었느냐에 따라 그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큰 차이를 나타냈고 후임자도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한다. 제대로 일을 잘한 선임자 뒤를 밟으면 비교적 순탄하고 고생도 덜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앞사람의 어지러운 발자취가 뒷사람에게 나쁘지만은 않다. 되레 도움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런 고마운 기회가 있으면 행운이다.비유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지난 9일 국민에 의해 대통령으로 사역(使役)하게 된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도 그렇지 않을까. 문 대통령의 경우 앞선 박근혜정부에서 일어난 숱한 '저지레'는 문 대통령에게 더 없이 도움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 대통령은 당선 이후 10일부터 국정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로 14일째다. 지금까지 이뤄진 인사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만 봐도 그렇다. 그리 나쁘지 않은 평이다.이 같은 문 대통령의 사람 찾기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총리 후보 등 여러 인물들이 선택을 받았지만 앞으로 부름을 받을 사람은 더욱 많다. 현재까지 이뤄진 문 대통령의 사람 선택 흐름을 보면, 향후 이어질 정부 각료 후보나 정부와 관련된 수많은 인사들의 발탁과 영입도 종전 정부와는 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모양이다. 국민들이 문 대통령의 인물 선택에 대한 남다른 기대를 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특히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동안 후보로서 토론회 등을 통해 세종대왕에 대한 흠모와 존경의 언사를 감추지 않고 드러낸 탓에 그의 사람 선택은 무엇보다도 큰 관심사다. 세종이 누군가. 역대 왕 가운데 그만큼 훌륭한 업적을 내면서 인재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인재 영입을 위해 노심초사한 군주가 있었던가. 과거 시험에 인재를 얻는 방법과 얻은 뒤 어떻게 키울 것인지 등을 자세히 캐물을 정도였으니.게다가 세종은 말을 실천했다. 신분의 엄연한 차별에도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비천한 출신이지만 18년 영의정을 지낸 문관 황희(黃喜)와 당대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 의사로 네 임금을 섬긴 전순의(全循義) 같은 인물을 곁에 두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토록 했으니 말이다. 황희의 어머니가 노비였고, 장영실은 본인이 노비였다. 전순의 역시 비천한 출신으로 탄핵 상소도 받았다. 그러나 세종은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라며 감쌌다.한때 남의 아내를 간통했다고 해서, 금으로 된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비난받던 황희를 발탁해 타고난 재주를 다하도록 했다. 장영실로 하여금 조선의 과학 세계를 앞당기고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될 측우기 등 각종 이기(利器)를 만들도록 했다. 전순의는 세종과 뒷날 왕들의 후원에 힘입어 음식과 농업, 의료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 남기는데 앞장섰고 그가 남긴 책은 지금도 불멸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문 대통령이 이런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닮고 싶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대통령이 세종처럼 해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 바라면 과욕이다. 무엇보다 세종처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지금 주어진 시간은 5년뿐이다. 후보 시절, 문 대통령 스스로 "5년 임기는 오히려 짧다"고 했다. 소위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대청산과 개혁을 하려면' 짧을 수밖에.지금 우리가 바라는 일은 세종 같은 문 대통령이 아니다. 변함없이 지금 일하는 것처럼만 해도 족하다. 전임자의 발자취를 교과서 삼으면 더할 나위 없다. 그 때문에 뒷사람이 섭섭하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2017-05-23 00:05:00

김해용 논설위원

[세풍] 유승민론(論)

하루 수백㎏의 먹이를 먹는 아프리카코끼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다. 사바나 초원에 수풀이 없는 것은 나무조차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코끼리의 습성 탓도 원인이다. 요즘 대구'경북의 정치적 지형도를 보면 마치 코끼리가 휩쓸고 지나가 자양분이 고갈된 자리 같다. 대통령이라는 코끼리를 다섯 명이나 배출했지만 향후 대한민국 정치권을 쥐락펴락할 만한 싹수 있는 정치인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서다.대구'경북 출신인 이명박'박근혜 두 정치인이 내리 대통령이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대구와 경북에서는 유력 정치인들이 자라날 토양이 척박해졌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9년 동안 대구'경북 정치인들의 경쟁력은 오히려 퇴행했다.그런 점에서 이번 19대 대선은 대구'경북 미래 정치 상황을 예상케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 대해 지역 표심이 압도적으로 쏠릴 것으로 예견된 상황이어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지역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표를 받는지가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유승민 후보 입장에서도 박근혜 배신자 취급을 받아 지역민으로부터 버림받느냐, 의미 있는 지지를 받아 미래를 기약하느냐가 달린 절체절명의 선거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구'경북사람들은 홍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면서도 유 후보에게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지(대구 12.6%'경북 8.75% 득표율)를 보내는 등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대한민국 정치 무대에서 유승민은 흔치 않은 캐릭터다. 안보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경한 보수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만 경제나 복지 분야에서는 정의당 못잖은 좌클릭 성향을 보인다. 해박한 경제 지식에 능숙한 토론 솜씨까지, 유승민은 이번 대선 토론회를 통해 네임 밸류를 확실히 높여놨다.그러나 그에 대한 대구'경북민들의 시선은 타지역보다 오히려 싸늘하다. 혹자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고 누군가는 "서민 코스프레하는 금수저"라고 평가한다. 당사자로서는 그런 지적이 마뜩잖겠다. 동창생들의 평가를 빌리자면 그는 잘 놀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부당하게 맞고 집 나간 친구를 찾겠다며 아버지 사무실 사무장으로부터 3만원을 빌린 뒤 가출을 감행한 전력도 있다. 귀가할 때 부모님께 사죄하는 뜻으로 머리를 빡빡 깎았다는 후일담으로 미뤄볼 때 그는 샌님이라기보다 쾌남에 가까운 듯싶다.일전에 신문사를 찾은 그와 20~30분 정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후보 사퇴하라는 당 안팎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원래 등 뒤에서 쏘는 아군의 총질이 가장 아픈 법이다. 완주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그날 그의 눈빛에서 그 말이 허언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는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을 사람인 듯 보였다.이런저런 평가를 차치하고서라도 본란이 정치인 유승민을 거론하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명예 퇴진 이후 대구'경북이 처한 정치적 공백 상황 때문이다. '친박' 후광 효과에 기대 금배지를 단 정치인,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고 중앙당만 쳐다보는 '해바라기' 국회의원들이 어디 한둘인가. 대선 주자급 정치인이 허다한 부산'경남과 너무 대조적인 대구'경북의 정치 지형도이다.결선보다 예선이 더 어려운 경우가 있다. 국가대표만 되면 올림픽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인 양궁, 쇼트트랙이 그런데, 유승민으로서는 2020년 총선이 딱 그 짝이다. 전국적 인지도를 높여놨지만 다음 총선에서의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대구 동을을 버리고 서울로 지역구를 옮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굳이 유승민이 아니더라도 대구'경북의 정치적 위상을 이끌 유력 정치인은 많을수록 좋다. '선수(選數)가 깡패'라는 말이 있듯이 중진 국회의원들을 많이 키워내도록 대구'경북 유권자들도 전략적 투표를 할 필요가 있고, 그 명단에 유승민을 올려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2017-05-16 00:05:04

[세풍]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오늘 밤, 대한민국의 역사가 새로 쓰여진다. 제19대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봐야 할 터인데,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질 것 같다. 새로운 출발은 희망과 기대를 던져줘야 마땅한 일이건만,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대통령 취임식을 여러 번 지켜봤지만, 착잡한 기분이 든 때는 일찍이 없었다. 새 대통령과 정치적 성향과 이념이 다르더라도, 새로 취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설렘과 호기심을 자아내곤 했다. '모든 것은 시작될 때 언제나 가장 좋다'는 말처럼 그 순간만큼은 국민 모두가 진심이었다. 대부분 대통령이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역시나'로 끝났지만, 첫발을 내디딜 때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훌륭한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4년 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마음이었던 것 같다.이번만큼은 과거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누가 당선되든,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보다는, 그렇지 않은 국민이 훨씬 더 많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과거에도 소수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이번에 낙선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새 대통령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방관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이다. 이들은 5년 내내 대통령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다가 틈만 보이면 행동으로 나설 그룹이다. 이들은 새 정권과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고, 정권이 잘못되기만 바랄 것이다. 정치인들이 보수니 진보니 하며 정권 다툼을 벌이면서 국민을 얼마나 갈가리 찢어놓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번 대통령 선거의 성격부터 살펴보면 새 정부의 앞날이 얼마만큼 험난할지 알 수 있다. '촛불 집회'에 의해 전직 대통령이 쫓겨나고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촛불 혁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촛불이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대선이었다. 촛불 집회 참석자의 정서와 생각이 비슷한 후보가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것이 확실하다. 그것이 합당한 결론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민심의 흐름이자 역사의 순리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촛불 민심의 선택'을 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후보의 첫 번째 공약이 '적폐청산특별조사위원회 설치'라고 한다. '적폐 청산'은 오랜 관행, 부패, 비리 등의 폐단을 찾아내 뜯어고치고 개혁하겠다는 의미다. '적폐 청산'은 이론적으로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것이다. 잘못을 고치고 바로잡겠다고 하니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그렇지만,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때가 있는 법이다.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싸우고 다투는 나라에서 과거의 상처를 더 헤집고 까발리는 것이 좋은 일일까. 검경 수사와 법원 판결 등 사법적인 절차를 통해 해결하면 될 일을 초법적인 기구까지 만들어 조사하고 처벌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이다. 혁명 정부가 적폐 세력을 깡그리 수용소에 집어넣고 외국으로 쫓아내지 않는 이상, 반대 세력만 양산하고 여론 분열을 심화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혹자는 진보 세력의 '한풀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사회정의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지만, '보수 세력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복수 심리와 교만함이 숨어 있다. 흔히 편 가르기와 편향적인 자기 확신은 진보의 부정적인 유산이라고들 한다. 박근혜 정권도 아버지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해 과거에만 매달리다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바라봐야 희망이 있다.정권을 잡았다고 기고만장해선 안 된다. 자신만이 반드시 정의는 아니다. 힘은 가졌을지 모르지만, 반대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문재인 후보가 '국민 통합'과 '적폐 청산' 두 가지를 내걸었지만 '국민 통합'이 먼저다. 국민 통합에 도움된다면 우선적으로 수용하고 그 반대라면 폐기하는 것이 옳다. 오늘의 걱정과 두려움이 기대와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을지 여부는 새 집권층이 '오만'과 '아집'을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렸다.

2017-05-09 00:05:00

[세풍] 한국 정치의 '백지선'

백지선 감독이 이끄는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믿기지 않는 승전보를 보냈다. 2017 국제아이스하키연맹 남자 세계선수권 디비전 1그룹 A대회에서 깜짝 놀랄 성적으로 '꿈의 리그'인 1부 리그에 사상 처음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다. 많은 국민들은 김연아의 밴쿠버올림픽 금메달 소식만큼 후련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귀를 의심했다.한국의 월드챔피언십(1부 리그) 승격은 1928년 국내에 빙구(氷球)가 소개된 지 89년 만의 일이다. 현재 톱 디비전에 이름을 올려놓은 아시아 국가는 우리가 유일하다. 대표팀이 캐나다'러시아'미국 등 15개 아이스하키 강국과 어깨를 겨루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분석하느라 전문가와 언론이 덩달아 바빠졌다.대표팀 선수들의 불굴의 의지를 첫손에 꼽을 수 있다. 빙판에 청춘을 건 귀화 외국인 선수들도 '원팀'이 됐다. 투지는 엔돌핀을 치솟게 한다. 하지만 투지만으로는 병아리가 싸움닭이 될 수는 없다. 등록 선수라고는 233명이 고작인 국내 링크에 2014년 첫발을 내디딘 백 감독에게서 결국 답을 찾아야 한다.그는 '새 역사를 쓰자'는 큰 꿈을 이야기했고 선수와 공유했다. 한국식 전술도 가세했다. 퍽을 다루는 기량과 신체 조건이 월등한 일류 선수들과 어떻게 싸워야 이길 수 있는지 해법을 찾은 것이다. 빠른 스피드와 강인한 체력, 자신감이 바탕이 된 전략의 승리다. 불과 3년 만에 3부 마이너 리그에서 빅 리그로 용솟음한 이유다. 감독과 선수 모두 가슴에 새긴 '와이 낫'(Why not) 정신이 2018년 평창올림픽 본선 진출권까지 제 힘으로 거머쥐게 한 가장 큰 동력이다.일주일 후면 우리 정치도 대표팀을 뽑는다. 대통령이 이끄는 새 국정 대표팀이다. 누가 지휘봉을 잡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아이스하키에 비유하자면 새 대통령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가 경영'이라는 미끄러운 얼음판 위에 서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관계의 판은 아이스 링크보다 더 미끄럽다. 벌써 중국은 사드 보복 카드로 우리를 옥죄고 있고, 북한 김정은은 불장난에 여념이 없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1조원짜리 사드 청구서를 들이밀고 간보기를 하고 있다. 연일 '찔러보기' 수가 현란하다. 트럼프가 팩트에 전혀 개의치 않는 인물임을 감안하면 우리의 대응수가 궁하다 못해 안쓰러울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새 대통령은 취임 선서를 해야 한다.트럼프의 사드 비용 청구는 우리를 우왕좌왕하도록 만든 후 그 빈틈 노리기다. 상황에 맞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조커 카드인 셈이다. 부동산 사업가로 잔뼈가 굵은 트럼프는 상대방에게 동쪽으로 가는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고는 서쪽으로 가는 교란술에 능하다. 말하자면 트럼프는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칭기즈칸식 '이일대로'(以逸待勞)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먼저 싸움을 걸어 상대방을 자극하고 싸우는 척하다가는 뒤로 빠지는 기만술이다.우려되는 것은 우리가 호들갑을 떨며 그 수법에 말려들어 가는 일이다. 만약 사드와 한'미 FTA 재협상 운운에 정치권과 국민이 서로 편이 갈리고 국론이 분열된다면 트럼프 입장에서는 이보다 손쉬운 상대가 없다. 새 대통령은 최고 경영자이기에 앞서 CRO(Chief Risk Officer)라는 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대통령에게서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수 없다. 이 말은 위기나 변화에 둔감한 사람은 위기관리 능력 자체가 없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대선은 표를 다투는 단기전이다. 하지만 승자 앞에는 선거와는 양상이 판이하게 다른 몇 년의 장기전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은 대통령의 합리적인 국가 경영과 민생, 위기관리 능력을 주시한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이념도 정당도 뛰어넘는 지도자에 주목한다. 유권자가 그런 국정 철학과 원칙, 꿈을 가진 후보를 찾는 게 이번 대선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의 백지선은 누구인가?

2017-05-02 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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